가. 개요
1) ‘에고 에이미’는 마음 너머에 있는 지성소 안의 일로서 언어를 초월한 근본이다.
2) 파라볼레는 그리스도의 실상을 드러내는 ‘에고 에이미’로서 무아(無我, 근본)다.
3)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빛(그리스도)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4) 욕망의 대상 하나님은 선악 나무에 사는 뱀으로서 새 언약에 없는 다른 예수다.
나. 본론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에고 에이미 토 알파 카이 토 오메가, 아르케 카이 텔로스 레게이 흐퀴리오스 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 호 판토크라톨)
한글 번역은 잘못되었다. 이 구절은 ‘에고 에이미’에 대하여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내용 전체가 에고 에이미에 관한 내용이다. 언어의 세계가 아니므로 바른 번역을 통해서 이 잘못된 번역은 버려야 한다.
1) ‘에고 에이미’는 마음 너머에 있는 지성소 안의 일로서 언어를 초월한 근본이다.
‘나는 나다 그 알파며 그 오메가다, 나는 근본(근원)이며, 궁극이다. 가라사대 그 주이며, 그 하나님이며, (근본으로부터) 현재 오고(되새김) 있고(현재 분사) 그리고 현재 계속 오고(되새김) 있으며(미완성), 그리고 지금도 계속 오고(되새김) 있는(현재 분사), 그 전능자(주권자)다.’
이 문장은 마음 너머에 있는 지성소 안에서의 일로서 언어를 초월해 있다. 시제가 없어서 내면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되지 못하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내용이다. 내가 하나님이 되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이론은 아무 소용이 없는 실제다. 알 수 없으면 여전히 수수께끼며, 감추어진 것(파로이미아)이다. 내면으로 파라볼레(빛)가 임하여 하나 되는 것이고 그때 이 파로이미아가 열리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에 등장하는 비사와 비유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사건이다.
2) 파라볼레는 그리스도의 실상을 드러내는 ‘에고 에이미’로서 무아(無我, 근본)다.
예수께서 오셔서 ‘비유(파라볼레)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였다(마 13:34, 막 4:34).’ 하는 것은 예수 자신이 생명의 빛으로서 파라볼레를 나타낸다.
파라볼레는 예수그리스도 자신의 그 실상을 드러낸다. 불교에서는 ‘에고 에이미’를 무아로 표현하고 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은 마음의 세계에서는 없다. 그러므로 이는 언어의 세계가 아니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나는 나다, 그 알파이며 그 오메가다. 나는 근본(근원)이며, 궁극이다. 가라사대 나는 그 주이며 그 하나님이며(근본으로부터) 현재 오고 계심을 되새기고(미완료) 그리고 지금도 (근본으로부터) 계속 오고 계심을 되새기며, 나는 전능자(주권자)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실상이다. 현재 분사이며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되새기게 하신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한 몸인 그리스도 예수가 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미 완료 상태가 된다. 이루어질 때까지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서 구약 말씀에 예와 엘로힘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다. 이 내용은 언어의 세계가 아니며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내용도 아니다. 휘장이 찢어져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되지 아니하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내용이다.
3)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빛(그리스도)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존재라고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있다.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마음 안에 있는 죄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나는 없고 그리스도(무아)만 하는 말을 해야 맞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로 오역한 부분이다. (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에루코메노스)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근본으로부터) 그가 지금 오고 계심을 되새기고, 그리고 (근본으로부터) 현재 계속 오고 계심을 되새기며, 그리고 지금도 (근본으로부터) 오고 계심을 되새겨야 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시제가 있는 공간 세상에 예수께서 오시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가 아니라 마음(휘장)이 찢어지기 이전부터 일어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시제 또한 없다. 시공간을 온전히 초월한 내용이다. 이것을 찾아내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역사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상인 그 예수를 계속하여 믿으면 지옥(심판)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에 대한 의미를 언어로 표현한다면 현재 나의 내면으로 한순간도 빠짐없이 계속하여 그리스도 예수가 오시면서 너와 나는 하나 된 하나님이라 하신다. 이론이 아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된다.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내용이므로 마음을 초월해야만 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서 오시는가? 근본인 ‘엔 아르케’로부터 오신다. 그가 지금 오고 계시고 (현재 분사) 그리고 (근본으로부터) 현재 계속 오고 있으며(미 완료), 그리고 (근본으로부터) 지금도 오고 계신다(현재 분사).
이것이 ‘에고 에이미(나는 나다)’이며 대상이 아니다. 근본(엔 아르케)이며, 근본과 하나이며, 근본으로부터 잠시도 쉼 없이 계속해서 나타나신다. 미 완료 상태로 완료될 때까지 계속된다. 깨닫게 될 때까지 나(예수 차원)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대상이 아니다.
4) 욕망의 대상 하나님은 선악 나무에 사는 뱀으로서 새 언약에 없는 다른 예수다.
욕망을 통해 보는 대상 하나님은 선악 나무에 사는 뱀이다. 새 언약에서 다른 예수를 말씀한다. 종교인들은 다른 예수인 이 뱀(하나님)을 통해 천국에 가고자 한다. 그리고 육신이 원하는 소원도 이루고자 한다. 이 뱀이 언제부턴가 겉 사람 안에 들어와 왕으로 섬김을 받고자 유혹한다. 이를 끝내기 위해서는 뱀이 사는 마음의 집을 허물어야 버려야 마음 안에 사는 그 뱀의 실상을 자세히 알고 끝내게 된다.
뱀은 나타난 몸과 마음을 자신과 일치시키는 일을 한다. 참으로 교활하다. 이 내용이 창세기 2장부터 계시록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