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니의 상처
벤치는 고니의 말에 따뜻한 위로를 느끼며 고니에게 물었다.
" 나는 보았어. 봄의 훈풍이 매화를 벙글게 할 무렵 너의 친구들이 떠나는 날이었지. 너는 친구들이 날아간 방향 쪽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더구나. "
벤치의 말에 고니는 상념에 잠긴 듯 했다.
"그래, 그때 네가 보고 있었구나. 나는 무척 괴로웠지. 친구들이 떠나고 나 혼자 남겨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 한 번도 나의 친구나 가족과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거든."
"그 점이 나와는 다르네. 그날 너는 너의 무리들이 날아가는 쪽을 바라보며 몹시 울었었지. 호수는 온통 너의 울음으로 멍든 것 같았고."
벤치는 고니를 보며 그날을 떠올리듯 말을 멈추더니 다시 이어 나갔다.
"나는 오래 바라보았지. 너의 울음이 잦아들면서 울음이 안으로 들어가 한동안 깊은 실의에 빠져있던 모습을."
"정말 그때는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무섭고 막막했어. 익숙했던 낮과 밤조차 마치 세상의 마지막같이 보였고, 바람에 버석이는 갈대숲이며 연꽃의 마른 줄기가 기괴하게 느껴졌으니까.“
고니의 생생한 표현에 고니도 그때의 심정이 떠올랐다.
"그때부터일 거야. 너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다고 느낀 게."
"그랬구나. 그날 이후 나의 삶은 지금 생각해보면 새로운 나로 태어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못살 것 같아도 삶은 이어져. 물론 우리는 무리를 지어 같이 살아가는 존재야. 그렇지만 전체 속에 나가 아니라 내가 전체를 이루어 간다는 의식이 생겨난 거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서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게 되었어. 그때의 두려움의 시간을 겪으면서 내 눈에도 너의 모습이 차차 들어왔던 거 같애"
고니는 슬픈 미소를 띠었다.
"궁금한 게 있어. 너는 왜 친구들과 같이 떠나지 못했니.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거야?"
벤치가 전부터 가져왔던 궁금증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는 날지 못해. 날개를 다쳤기 때문에....."
고니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가을이었어. 남쪽을 향한 장시간의 비행 끝에 저 멀리 연호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어. 마침내 지친 몸을 내려놓을 수 있겠다고 안도하며 나와 친구들은 호수를 향해 하강하고 있었지. 혹시 호수 주변에 위험한 것들은 없는지 호수 주위를 회선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빨리 내려가려는 어린 나의 조급한 마음이 방심을 불러왔어. 무리에서 떨어져 신나게 하강하는데 무언가 어깨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던 거야. 지상의 강한 돌풍에 내 날개가 홱 꺽여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힘이었어. 나중에 몇몇 친구들은 무언가가 날아와 강하게 나를 치고 지나간 것 같다고 했지만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어. 나는 균형을 잃고 낙엽이 날리듯 호수면에 떨어진 거야. 처음엔 몰랐지만 정신을 수습한 뒤에야 차츰 심한 통증이 나의 날개를 물어뜯기 시작했어. 그 이후 나의 삶은 180도 바뀌어 버렸고.“
마치 눈앞에서 다시 그 일을 겪는 듯 연호고니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오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왜 못 봤을까? 아마도 늘상 느린 물체의 움직임만을 지켜보던 나의 시야에 감지되지 못했거나, 아니면 명상을 핑계로 오수를 즐기는 나의 게으름 탓이겠지.”
“나는 날 수 없었던 거야. 나는 죽지 않기 위해 버텼어. 아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언제 다른 것들에 희생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덕분에 나는 살 수 있었지만, 창공을 날 수 없는 날개는 슬픈 날개일 뿐이었어."
어두운 고니의 표정에서 그날의 상처는 아직 지워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너는 남겨졌던 거구나."
"회복은 더디게 더디게 진행되었지. 결국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지만 날개는 날 수 있을 만큼 낫지 못했어. 나는 북쪽의 고향으로 날아가지 못했지. 친구들이 떠난 날의 장면은 너도 잘 아는 것 같고. 그 날은 슬픔을 참지 못하겠더라. “
“그랬지, 그날의 장면은 잊혀지지가 않네. 너는 미친 듯이 울고 나서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마른 갈대숲에 들어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지. 그래 지금은 어떠니?”
“이제 많이 회복되었어. 날개를 퍼덕이며 날개에 힘이 생기도록 연습을 자주 했지. 물에서 박차고 날아오를 때 제일 힘이 많이 드는데 아직 날려고 시도하기에는 두려워. 나는 겨울을 기다리고 있어. 그래도 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고 있어. 희망이 생겼어. 나에게 연호 호수는 아픔의 공간이고 치유의 공간이야. "
고니는 자신의 노력이 사실임을 보여주듯 활개를 쳐 보았다. 아직 힘이 부족한 듯 보였다. 벤치는 고니의 상처를 이해하게 되었다. 혼자 남겨진다는 것과 홀로 떨어져 있다는 것은 비슷한 감정 같았다.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이 서로를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고니와 벤치는 매일 만나 그날에 있었던 각자의 일들을 들려주었다. 고니가 들은 이야기 중에 무서운 이야기도 있었다. 벤치가 있는 근처에서 백로가 깃털이 뽑히고 몸통이 뜯긴 채 처참하게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드문 일이었다. 들고양이나 맹금류에 의해 일어난 일 같았다. 벤치는 조용한 호수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서 놀랍다며 고니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여름날에 폭우가 내렸을 때 고니는 호수에 물이 불어 한 잠도 못 잤다고 피곤에 쩔은 눈으로 벤치에게 안부를 묻기도 했다. 호수는 늘 그대로 인 것 같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벤치와 고니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지만, 호수의 변화를 만들어 가고 호수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존재가 되어 매일 만났다.
5. 재회
연호고니가 고니의 무리에게 빠르게 다가갔을 때 고니들은 환성을 질렀다. 그들이 지난 봄 연호를 떠나며 다시 돌아오리라 연호고니에게 약속했지만 미래의 일을 어찌 알랴.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의 날개를 무겁게 했다. 친구와 함께 있지 못한다는 심정과 떠나야 하는 본능이 상충했을 때 괴로운 마음을 달랜 것은 다시 돌아올 거라는 약속과 다짐뿐이었다. 그들이 호수에 내려앉을 때까지도 연호고니가 살아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V자 편대를 그리며 이곳을 향해 날아오면서 그들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것은 연호고니의 안부였고 생존이었다. 이제 불안한 마음이 말끔히 해소 되었다. 연호고니는 살아서 그들에게 힘차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 친구의 목소리였다.
"살아있었구나!"
"다시 와주었구나. 고마워!"
그들은 부리와 목을 맞대고 비비며 탄성을 질렀다. 벤치는 멀리서 그들의 재회를 지켜보며 기뻤다. 벤치가 시샘마저 느낄 만큼 그날 호수에는 고니들의 기쁨의 소리들로 가득했다. 고니는 친구들과 꼭 붙어 다니며 연꽃 씨앗과 갈대 뿌리를 캐먹었다. 그가 지난 계절 동안 아픔을 간직했던 호수 이곳저곳이 반대로 즐거움의 장소로 변했다. 연호고니가 물닭이며 청둥오리 틈에서 있을 때 보지 못했던 생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연호고니는 고니 무리에게 지난 여름의 연꽃과 갈대의 성장과 호수의 변화를 들려주었다. 친구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었다. 연호고니는 친구들과 비행연습을 했다. 처음 비행을 시작할 때 처럼 두려웠다. 간간이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고니는 틈틈이 벤치에게 찾아와 그간의 일들을 들려주었다. 비행연습은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고니는 친구들에게 공중벤치의 존재를 말해주었지만 그들은 관심이 적은 듯 했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6. 떠남
고니가 떠나기로 한 날 아침, 눈부신 봄눈이 내렸다. 전날 밤 고니가 찾아왔었다.
"벤치야, 나는 내일 떠나."
"그래,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축하해.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럼! 나는 떠나지만 마음은 다 떠나는 게 아니야. 나는 네 덕분에 지난 계절이 외롭지 않았어. 너에게서 인내를 배웠고 너에게서 기다림을 배웠고 너에게서 받아들임을 배웠어. "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얘긴 걸.. 네가 상처로부터 회복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나의 인생에 큰 공부였어. 너에게 좋은 날이 와서 기뻐. 다신 다치지 마. 그리고 이곳을 잊지 마”
“ 어떻게 잊겠니. 머릴 묻고 갈대의 줄기며 뿌리를 뜯어 먹던 호수의 밑바닥이며, 성가시지만 함께 해서 좋았던 청둥오리와 물닭들, 연꽃이 필 때 전해오는 맑은 향기며, 여름의 더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던 커다란 연잎들하며, 무엇보다도 너를 알게 해준 고마운 이 호수를.”
밤의 찬 공기 속에서 고니떼의 수런거림이 갈대숲을 건너왔다. 내일 북쪽으로 가는 것에 대해 모두들 가벼운 흥분 상태인 것 같았다. 벤치와 헤어져 떠남을 준비하러 연호고니는 수런거림 속으로 들어갔다.
봄눈의 표표함과 고니들의 웅성거림으로 호수의 아침은 부산스러웠다. 마침내 고니들이 수면 위를 달리듯이 날아올랐다. 다른 고니들과 함께 연호고니는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호수의 모습을 기억에 담아두려는 듯이 돌고나서는 방향을 북쪽으로 잡았다. 마지막 눈길은 벤치에게 보냈다.
"안녕, 잘 있어 내 친구."
"안녕, 잘 가."
슬픈 봄눈이 벤치의 등을 토닥거렸다. 벤치는 멀리 고니떼가 점점이 작아지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지켜보았다. 벤치에게 그리고 고니에게 어떤 우연과 어떤 고난이 닥칠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들의 이별을 어루만져주었다. 호수 주변에는 떠난 고니의 여운이 감돌고 있었다. 벤치는 혼자가 되었다. 허전함이 뒤따라 왔지만 전처럼 오래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설사 어떤 운명이 다시 만나지 못하게 할지라도 외로움이 그를 괴롭히지는 못할 것 같았다.
고니가 떠나고 얼마 후, 초생달이 실바람을 데리고 온 밤, 눈처럼 흰 옷을 입은 사람이 공중벤치에게로 와서 앉았다. 그의 눈은 깊었다. 그는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의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시선을 주기도 했고, 벤치의 발밑을 말없이 내려보기도 했다. 깊은 애정을 담은 손길로 벤치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의 모습은 소나무 숲을 지나던 시인의 얼굴 같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연호고니의 자태 같기도 했다. 봄눈 같기도 했고 안개 같기도 했다. 벤치는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한참을 지나 생각해보면 그것이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날로 부터 벤치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아니 그의 내면에서 진행 중이던 변화가 그날 밤의 사건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랬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갈대숲처럼 흔들리던 마음이 멈추었다. 호수의 수면처럼 평온했다. 모든 것이 명료하게 보였다. 그에게 감사의 마음이 일어났다. 이른 아침의 호수를 깨우는 고니의 노래가 들리는 듯 했다. 그의 내면에 기쁨의 물결이 솟아나고 일렁거리며 빛났다. 물결은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언덕너머로 일렁이며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