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의 스위스 종교개혁은 10여 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성과는 스위스 전역에 미쳤고, 훗날 영국 청교도혁명에 영향을 줄만큼 파급력이 컸다. 성상파괴 및 성화 금지와 미사폐지, 개혁교회적인 새로운 예식(설교, 세례, 성찬, 혼례), 목사의 간소한 예복 착용 등과 같은 예배 개혁을 통해서 스위스 도시들이 로마 가톨릭의 영향권에서 확실하게 벗어나게 하였다. 루터는 선제후(영주)의 지원 아래 개혁을 추진하였으므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츠빙글리는 민주적인 취리히 의회를 통해서 하였으므로 전면적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인간 내면의 신앙을 부각시킨 루터와는 달리,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윤리적인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공동체 개혁을 지향하였다."
츠빙글리의 개혁 과정을 따라가 보는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큰 유익이 있다. 여기에 츠빙글리의 개혁에 대해서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 있어서 공유하고자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도서로 기획된 책으로 우리나라 학자가 집필하여 간결하면서도 내용이 알차다. 중요한 부분을 타붙하여 올린다.
조용석, 『츠빙글리, 개혁을 위해 말씀의 검을 들다』(서울: 익투스, 2014), pp.42~49.
본격적인 신학 논쟁
일명 '소시지 종교개혁(Sausage Reformation)'이라고 회자되는 1522년 사순절에 일어난 자유논쟁을 계기로 취리히 교회는 조금씩 로마 가톨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논쟁의 여파로 1523년 1월 29일 취리히 법원에서 제1차 취리히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취리히 대의회가 주선한 토론회로서 츠빙글리가 도발적으로 제시한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는 모임이었다. 이 모임을 시작할 때에는 츠빙글리를 로마 가톨릭의 이단자로 규정하고 싶은 의도가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여기서 루터의 95개조 면죄부 반박문과 비교되는 67개조 논제를 제시하며 앞으로 이루어질 취리히 종교개혁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 논제의 핵심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로서, 츠빙글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한 구원을 주장하며 로마 가톨릭의 교리가 아니라 오직 성경말씀만을 주목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인간 내면의 신앙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루터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의 사회윤리적인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공동체 개혁을 지향한 취리히 종교개혁운동의 핵심을 보여주었다. 이 토론회에서 다행히 츠빙글리는 이단자로 지목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은 수많은 취리히 시민들의 동의를 확보하게 되었다. 제1차 논쟁이 종결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면 츠빙글리는 취리히 의회 의원들을 자신의 동역자이자 그가 추구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대표자로 생각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1523년 10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 동안 제2차 취리히 논쟁이 시작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모토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한 성상파괴와 미사폐지운동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또한 교회개혁에 취리히 의회가 개입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에 관한 문제도 논의되었다.
이 논쟁에서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분위기였지만, 성상 및 성화 거부는 전체적인 동의를 얻지 못했다. 성상 및 성화의 교육적 기능이 강조된 것이다. 미사폐지운동은 공감을 얻었는데, 의회의 개입문제와 관련해서는 츠빙글리와 재세례파가 대립했다. 의회의 역할을 긍정했던 츠빙글리로 인하여 재세례파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논쟁 이후 츠빙글리와 그의 지지자들은 취리히 의회 내부에서 중요한 정치그룹으로 등장하게 된다.
제2차 취리히 논쟁이 있은 후에 독일어로 첫 세례예식이 시행되었다. 희생제사로서의 미사와 성화는 폐지되었다. 츠빙글리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닌 숭배의 대상들은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525년 부활절에 의회는 츠빙글리가 제안한 개혁교회만의 성찬식 도입을 허락했다. 그해 츠빙글리는 설교, 세례, 성찬과 혼례에 대한 새로운 예식문을 제출했다. 이를 통하여 설교단은 더 이상 가톨릭적인 미사의 장소가 아니라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따라서 미사에 사용되는 기구와 부속물들은 폐기되었다. 중세교회의 찬송가 대신 목사, 남자, 여자들의 시편교독을 도입했으나 강요하지는 않았다. 세례는 무수한 상징적 행위들에서 해방되었으며, 성찬은 1년에 네 번 시행되었다. 성찬을 베풀기 위한 간소한 식탁이 차려졌으며, 화려하지 않은 간소한 예복을 입은 목사가 설교를 선포하고 동시에 성찬예배를 집례했다.
츠빙글리는 또한 이자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다. 이자문제에 관하여 그는 현금 대여에 대해 5퍼센트를 넘지 않는 이자율을 지지했다. 그리고 그는 중세부터 내려온 잘못된 헌금 체제를 비판했다. 교회를 비판하는 츠빙글리의 설교를 들은 스위스인들은 자신들을 경제적으로 수탈하는 각종 교회 제도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츠빙글리는 십일조의 본래 목적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지원과 설교자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간주하고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점진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했다.
1525년을 기점으로 탁발수도단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형태로 존속하지 않게 된다. 츠빙글리는 초기부터 탁발수도사들을 혹평하고 이들의 빈곤을 위선이라고 불렀다. 그는 탁발수도단들을 해체하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줄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은 수도원들을 병원과 복지기관으로 바꾸고 수도원 재산을 복지기금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프로그램 속에서 드러난다.
스위스 연방을 향하여 눈을 돌리다
취리히 종교개혁운동에 대항하여 스위스의 가톨릭 주(州, 칸톤)들은 츠빙글리에 대한 비판을 개시한다. 그들은 츠빙글리를 루터의 추종자라고 규정했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은 1519년 루터와 라이프니츠 논쟁을 주도했던 요한네스 엑크(Johannes Eck, 1486~1543)였다. 1526년 엑크는 스위스 연방에 츠빙글리와의 회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가 회담 장소로 제안한 바덴은 가톨릭 주에 속해 있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츠빙글리는 바덴 방문을 취소했다. 대신 츠빙글리와 입장을 공유하던 바젤의 개혁자 외콜람파드(Johannes Oekolampad, 1482-1531)가 이 논쟁에 참석하여 엑크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에서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이 루터를 파문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단자라는 판결을 받게 된다.
로마 가톨릭 측에서 바덴 논쟁(Badener Disputation)을 제안한 이유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이 스위스 연방 전체로 더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츠빙글리가 이단자로 낙인찍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교개혁사상은 스위스 연방 전체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취리히 북쪽에 있는 샤프하우젠과 서쪽에 있는 베른(Bern)은 취리히의 종교개혁 모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와 관련하여 1528년에 벌어진 베른 논쟁은 매우 중요하다. 베른 논쟁을 기점으로 스위스 연방은 그때까지의 모호한 태도를 버리고 츠빙글리를 지지하는 칸톤과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칸톤으로 분열된다. 1528년 1월 6일부터 16일까지 베른에서 로마 가톨릭의 대표단과 츠빙글리를 선두로 한 개혁교회 대표단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결과는 츠빙글리의 승리였다. 그는 1528년 1월 27일 미사와 성상의 폐지를 명령했다. 이를 계기로 츠빙글리는 베른개혁교회의 창설자라고 불리게 된다.
츠빙글리가 베른의 종교개혁을 도와준 것처럼, 베른 또한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돕기 위하여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에게 스위스의 위대한 영웅 츠빙글리 방식대로 예배를 드릴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이는 스위스 개혁교회의 주류였던 츠빙글리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의 표시였다고 볼 수 있다.
첫댓글 칸톤 = 캉통canton
요약 프랑스, 스위스, 기타 유럽 여러 나라들의 행정단위.
프랑스에서는 큰 도시의 구(區)나 군(arrondissement)을 세분한 것으로 순수한 지방자치 단위라기보다는 영역 구분이며, 선거와 세금 징수 및 치안을 목적으로 편의상 분류한 행정단위에 불과하다.
1789년 12월 22일에 공포된 법률에 따라 만들어졌으나 1799년 12월 24일에 제정된 집정정부의 헌법에 의하여 자치체의 성격은 없어졌다. 스위스에서는 스위스 연방을 구성하는 23개 주를 일컫는다. 운터발덴·바젤·아펜첼 같은 3개 주는 완전한 주의 기능을 갖는 반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때로 스위스에는 26개 주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각 주와 반주는 자체 헌법·입법부·행정부·사법부를 갖는다.
옵발덴·니트발덴·글라루스·아펜첼이너로덴·아펜첼아우서로덴 같은 주들은 성년이 된 모든 남성 시민들이 매년 입법과 조세, 그리고 행정위원회와 주 대법원 판사 선출에 참여하도록 하는 고대의 민주의회 제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나머지 주에서 입법기관은 보통선거와 비례대표제에 의하여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의회들은 연방정부가 다루지 않는 모든 문제들을 처리한다.
여기에서는 주의 조세가 결정되며 주 헌법이 일반선거를 요구하지 않는 한 연방 의회에 진출하는 주 대표뿐만 아니라 재판관들을 지명한다. 모든 주에 국민투표와 국민발안 제도가 있는데 이의 적용 방법은 각기 다르다.
출처: Daum 백과
@장코뱅 스위스는 물론이고 프랑스와 다른 유럽 나라들도 쓰는 행정구역이군요. 알겠습니다.
츠빙글리의 개혁, 소시지 사건
https://cafe.daum.net/1107/bzn6/2
다시 잘 읽어 보았습니다.
취리히 논쟁의 사회자, 호프마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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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마이스터Sebastian Hofmeister
출생 1476, 스위스 샤프하우젠
사망 1533. 6. 26
국적 스위스
요약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별칭은 Oeconomus.
종교개혁 초기단계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샤프하우젠에 있는 로마 가톨릭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가입하고, 파리에서 여러 해 동안 공부한 뒤 '성서박사'라는 칭호를 얻었다(1519). 1520년 강사로 취리히에 파견되었고, 그해말에는 콘스탄츠에 파견되었다.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아 루체른에서 공식적으로 종교개혁 교리를 설교한 뒤(1522) 그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샤프하우젠으로 돌아와 그 도시의 주요종교개혁자가 되었지만 다시 추방당했고(1525), 결국 취리히에 정착했다. 제1차 취리히 논쟁(1523.1. 29), 제2차 취리히 논쟁(1523.10. 26~28, 이 논쟁 초기에 사회를 맡음), 베른 논쟁(1528.1) 등 종교개혁 초기 단계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취리히에서 열린 재세례파(성인세례를 주장한 급진적인 종교개혁파) 회의에 참석했고, 베른에서 재세례파 지도자 한스 피스터마이어가 재세례파 신앙을 철회하는 것을 감독했다(1531.4.19). 장크트갈렌과 바젤에서도 설교했고, M. 루터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자서전을 포함한 여러 권의 부수적인 책을 썼다.
출처: Daum 백과
@장코뱅 재세례파를 교화하고자 노력한 훌륭한 인물이군요. 함께 알아 갑니다.
바덴Baden
요약: 독일 남서부에 걸쳐 있는 역사적 지역. 오늘날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서부에 해당하며 라인 강 유역의 동쪽 절반과 인접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대 켈트인이 재배하던 지역이었는데 8세기에 프랑크인들이 기독교를 전파했다. 1112년 이 변방 지역에 대한 작위인 바덴 변경백이 처음 수여되었으며, 이들의 영지는 16세기에 들어 남쪽과 북쪽으로 양분되었다. 이 지역은 이후 1919년 헌법에 의해 독일제국의 한 주로 편입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신설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일부가 되었다.
이하 아래 링크 참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8b2574a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 것이군요. 유럽 종교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1353년에는 1291년 결성된 스위스 연방에 가담했고 그후 얼마 안 있어 연방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528년 이곳에서 가톨릭교도들과 종교개혁가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베른은 개신교를 받아들였고 이어서 개신교의 본거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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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Bern 베르네, Berne, Berna, Bärn
요약: 스위스의 행정구역. 아레 강의 좁은 만곡부를 따라 자리잡고 있다. 1353년에 스위스 연방에 가담했으며, 곧 연방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528년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개신교의 본거지가 되었다. 베른은 1848년에 스위스 연방의 행정수도가 되었다. 강 오른쪽의 신시가지와 몇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구시가지에는 중세시대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곰 판매장이 유명하며, 1513년부터 시의 비용으로 몇 마리의 곰을 항시 전시하고 있다. 스위스 국립도서관과 스위스 국영은행 본점도 있으며 역사·자연사·미술·병기·산악 박물관들이 있다. 또한 국제우편, 전신, 철도, 저작권 연합회 등의 본부가 있다.
... 1218년 체링겐 왕조가 단절된 후 제국의 자유시가 되었다. 주위의 영토를 획득하면서 점차 세력을 넓히다가 독립국이 되었으며, 1353년에는 1291년 결성된 스위스 연방에 가담했고 그후 얼마 안 있어 연방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528년 이곳에서 가톨릭교도들과 종교개혁가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베른은 개신교를 받아들였고 이어서 개신교의 본거지가 되었다.
나머지 내용은 아래 링크 참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9b1998a
@장코뱅 베른 시에 대한 소개 잘 보았습니다. 북한 김정은 남매가 여기서 학교를 다녔다고 하죠. 개신교인들의 도시로서 참 매력적인 곳이네요.
@코람데오 그렇군요. 공감합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좋은 포스팅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츠빙글리에 대힌 자료가 많지 않은데 이렇게 알찬 글을 올려 주셔서 좋은 지식을 얻습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