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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 선생(Chieh Su HSU, 1922-2014)을 그리며
이원경 / 기계공학
드디어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1984년 8월 말의 어느 월요일 아침 8시였다. 제도실로도 사용되는 모양인지 강의실의 모든 책상이 교탁보다 훨씬 컸다. 내가 일찍 등교하여 교탁에 바로 붙은 책상을 차지한 건 의도적이었다. 키는 거의 등소평 만하게 보이지만 얼굴은 훨씬 더 잘생긴 분, 그러니까 불과 일 미터 남짓 거리를 둔 저분 하나만 바라고 나는 이곳 버클리로 박사 공부하러 왔다. 몇 주 전, 복도에서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 일이 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다가가 당신한테 지도받으러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한 학기 강의를 수강하면서 피차를 알아보는 게 나을 거라고 어떤 선배가 해준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학기에 ‘선형진동’이라는 과목을 통해 그와 잘 사귀어 두어야 했다. 하지만 일이 야무졌던 계획만큼 매끄럽게 풀리지는 않았다.
개강하고 몇 주가 지났을까, 그가 임의 가진력에 대한 계의 응답이란 주제에 대해 강의하던 중에, 나도 모르게 “강의를 완벽하게 하려면-” 하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가 “난 강의를 완벽하게 하고 싶지 않아!”라고 언성을 높여 대꾸했다. 잠시 정적에 이어 수업이 다시 진행되었다. 양자가 사용한 단어가 perfectly였는지, exactly였는지 아니면 completely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질문자의 영어가 서툰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동안 나름 고민해오던 대목에 맞닥뜨리자 얼떨결에 질문을 꺼내어 상대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바람에 문제의 본질을 꺼내지도 못 한 건 아쉬운 일이었다.
과거의 어떤 돌발 상황을 해명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원인 없는 결과가 없으니 지난 일을 되짚어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학부생을 위한 것이든 대학원생을 위한 것이든 교과서나 교수의 설명이 천편일률적인 데 불만이었던 학생의 체험이 독자에게 잘 전달될지 모르겠다. 물체에 임의 가진력이 가해져서 생긴 효과는 충격량의 총량이니 그 결과로 생긴 운동은 각각의 충격량에 대한 선형해석 응답의 중첩으로 본다는 게 선형계 해석의 고갱이다. 그런데 계는 질량뿐만 아니라 감쇠기와 스프링으로도 구성되어 있으니 충격이 가해지는 동안 이들에 작용하는 힘이 만든 효과는 왜 고려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배우는 사람으로선 생길 법하다. 하지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소수 학생들의 전유물이라고 하는 게 온당할지 모른다. 학생이 명석하다면야 그 원인을 유추를 통해서든 계산을 통해서든 알아낼 테고, 아예 멍청하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을 것이니 말이다. 다만 학생으로선 충격이 가해지는 시간이라는 게 너무 짧아서 그 결과를 눈으로 관찰해서 유추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는데다가, 교수가 교과서에 쓰인 대로 강의할 것 같으면 이 과목은 왜 수강하겠느냐는 반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능숙한 교수면 감쇠기와 스프링의 영향을 무시할 만한 이유를 언급하는 게 마땅했다고 나는 보았다. 이 불만을 해소해준 어떤 교과서가 미국에서 출판된 걸 보고서야 그날 그릇 시작한 질문으로 낭패를 경험한 사람이 위안을 받은 건 세기가 바뀐 뒤의 일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점잖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따라서 나로서는 잘못에 대해 자책도 해야 했지만, 훌륭한 분한테 질문을 함부로 한 매너 없는 학생으로 동료들 사이에 각인될지 모른다는 점이 무척 아프게 느껴졌다. 게다가 찾아가서 지도교수가 되어 달라고 부탁할 날이 다가오는 마당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이만저만 난감하지 않았다. 속은 상했지만 그를 찾아가서 사과하지는 않았다. 구태여 뭘 따져보고 그렇게 했다기보단 시간이 지나는 동안 아픔이 잊히길 바라지 않았나 싶다. 될 대로 돼라 하는 심정도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런 처신은 옳지도, 현명하지도 않았다.
그날 이후에도, 나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강의 중 교수와 석자 남짓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별 거리낌 없이 질문했고 그때마다 진지한 답변을 받아냈다. 학기말쯤 되어 서로가 상대의 표현에 익숙해지자, 다른 학생의 질문에 교수가 엉뚱하게 대답했을 때는 내가 질문자의 취지를 설명해주면 그제야 교수가 제대로 답하기도 했다. 마침내 학기가 끝나고 크리스마스 직전에 그를 찾아뵙고 지도받고 싶다는 뜻을 드러냈다. 그는 몇 가지 물어보고 내가 준비해간 논문을 훑어보더니 지도는 물론이고 한 학기 뒤부터 연구조교로 써주겠다고 확답했다. 지난날의 불상사는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다음 학기 그러니까 1985년 봄 학기에, 나는 선생의 대학원생들이 쓰는 연구실의 책상을 하나 차지했다. 그러자 책을 보관할 수 있는 데다 빈 시간에 도서관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 공부 능률이 향상되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비로소 학교신문에 눈이 갔다. 당시의 주요 뉴스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학생시위 소식이었다. 시위대는 학교기금이 투자된 펀드가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광산에 투자되었다며, 어서 그 기금을 회수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나로선 학생들이 저런 정보를 어디서 알아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기계과와 핵공학과가 같이 쓰는 에치베리 홀이 캠퍼스의 북쪽 맨 가장자리에 있다 보니 시위현장을 직접 목격한 일도 없어서 그런 뉴스에 대한 관심도 차츰 사그라들지 않았나 싶다.
그 학기 선생이 맡은 과목 ‘비선형 진동’은 나로선 필수 과목이었다. 학기 초에는 겨울이었으니 월, 수 아침 8시 수업을 위해서 깜깜할 때 집을 나서며, 왜 선생은 아침 수업을 고집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 싶다. 이제 앞자리는 경쟁자도 없어서 지정석이나 다름이 없었다. 학기 말쯤인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선생이 강의 자료를 챙길 무렵에 나는 교탁에 복사물 한 장을 내밀며 “이 서평을 기억하십니까?” 하고 여쭈었다.
내가 C. S. Hsu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나이피(Nayfeh)와 묵(Mook)이 쓴 ‘비선형 진동’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이 책은 교과서라기보단 저자네 연구의 총합에 가까운 데다가 책의 뒤에는 방대한 참고문헌을 달아두어 나 같은 초보 연구자에게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곧 저자 별로 마련된 참고문헌 목록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논문을 발표한 선생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미국 유학에 뜻을 두었던 나로선 자연스레 그를 잠재적인 지도 교수로 꼽게 되었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자 그가 당시에 미국기계학회 응용역학 잡지의 편집인(technical editor)을 맡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결국 나이피와 묵의 책에 대한 서평도 이 잡지에서 읽었다. 코넬 대학 이론 및 응용역학과의 홈즈(P. J. Holmes)는 서평에서 ‘책에서 저자들은 비선형 진동이란 분야를 연구하기 위해 매우 제한적인 방법인 다중척도법(method of multiple scales)만 사용했는데, 이 방법으론 엄청나게 발전하는 이 분야의 문제 즉, 카오스(Chaos)나 이상한 끌개(Strange attractor) 등을 두루 다룰 수가 없으니 앞으로 책을 쓸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쓰면 안 된다. 게다가 이 책은 1300여 편의 참고문헌을 담아 완전한 체 했다(pretend to be complete)’라고 썼다. 잡지에 실리는 서평의 논조는 흔히 저자에게 호의적이기 마련인데, 홈즈의 논조는 지나치다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나로선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홈즈의 말이 사실에 가깝다면 그도 잠재적인 지도교수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결국 해당 페이지를 복사해서 유학 올 때 챙겨 왔다. 나는 나이피와 묵의 책을 따라 공부를 시작해서 논문을 두 편 썼고, 그 덕분에 선생의 눈에도 쉽게 들었고, 또 이 책은 해당 과목의 교과서이기도 했으니, 서평이 실린 잡지의 편집인이었던 분으로부터 한 마디 듣기로는 지금이 적기라고 보았던 것이다.
복사물을 잠시 들여다보고는 선생이 “기억하지”라고 하더니, “서평을 홈즈한테 부탁한 사람이 나니까”라고 대답했다. 내가 “이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그는 “홈즈가 옳았어. 하지만 그가 공정하지 못 했어”라고 대답했다. 그때쯤,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다가 교탁에서 사제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모습을 본 학생들이 두 사람을 원처럼 둘러쌌다. 이 원의 밖에선 선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학기 말이니 혹시 시험에 나올 만한 힌트라도 주고받는지 궁금했을지 모른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라고 내가 묻자, 그는 “저자로서는 책을 쓰면서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대답했다.
그 즈음 홈즈는 한 해 전에 구켄하이머(J. Guckenheimer)와 함께 쓴 비선형진동 책이 잘 팔리는 바람에 엄청 유명해졌다. 이건 공학도를 위한 것이라기보단 수학자를 위한 책에 가까웠는데 그 서문에서는 나이피와 묵의 책이 좋은 책으로 소개되었다. 홈즈가 서평을 쓰던 시기에 그는 이 책을 구상하거나 집필 중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평을 쓰면서 곧 자기의 입장이 달라질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잠시 앞을 내다보지 못 했으니 젊음이 원인이라고 해야 할까. 저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서평으로 말미암아 편집인으로서 선생이 난처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서평이 당시 미국의 비선형진동 연구 동향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던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건 분명하다.
유학 와서 처음으로 맞은 여름방학에 나는 연구조교로서 일을 시작했다. 선생의 기존 논문을 읽고 검증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그러니 일이라기보단 공부에 가까웠다. 유학 오기 전 그렇게 어렵게 여겨졌던 논문이 차츰 읽히는 경험을 하면서 안도했던 시절이다. ‘논문도 읽을 수 없는 마당에 저기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고 고민하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격세지감을 느꼈을 것이다. 당시 선생은 비선형 동역학계의 문제를 수치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셀 매핑법(method of cell mapping)을 고안해서 성과를 내던 중이었다. 이걸 간단하게나마 소개하는 게 낫겠다. 일단 동역학계 즉 운동방정식이 주어지면 운동 즉 계의 상태는 오로지 초기조건에만 달려있다. 계의 상태란 상태공간에서의 한 점을 뜻하는데, 이것은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말해준다. 이 점에서 시작한 운동이 다음 얼마의 시간 후에는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인데, 물론 해석을 통해서건 수치적으로건 계산이 가능하다. 문제는 이렇게 계산을 반복해나가는 게 비효율적이란 점이다. 상태공간에서 서로 가까이 있던 점들은 얼마의 시간 후에도 서로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특성을 고려하여, 어떤 매우 작은 공간내(셀이라고 이름 붙여진)의 점들이 다음 단계에도 새로운 셀에 함께 도달한다는 가정에 근거를 둔 방법이다. 이 가정의 타당성은 셀의 크기를 얼마나 작게 잡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동역학계를 점에서 새로운 점까지의 매핑으로 보지 않고 셀에서 셀까지의 매핑으로 근사하겠다는 말이다. 선생은 이 새로운 개념의 고안자로서 단순 셀 매핑법(simple cell mapping)을 거쳐 확률론을 동원한 일반화 셀 매핑법(generalized cell mapping)까지 확장하고는 실제 문제에 성공적으로 적용하던 중이었다. 나는 이 과정을 따라잡는 데 거의 한 해가 걸렸다.
면담은 대체로 한 주에 한 번 내가 원하는 아무 때나 방문하는 형식이었다. 이런 형식은, 강의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언제나 연구실에 있는 분을 지도교수로 삼은 학생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걸 알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면담시간의 대부분은 지난 한 주 동안에 얻은 결과나 의문점에 대해 논의하는 형식이지만 드물게 사적인 질문도 하게 되었다. 하루는 “선생님께선 왜 전공을 바꾸셨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중국 북경 태생이며 소주에서 성장했다는 선생은 성이 서(俆, Hsu)씨인데 충칭공대(重慶工大)를 나온 후 ‘국비유학생에 선발되는 행운’을 차지했다. 자신에게 행운을 안겨준 국민당 정부와 장개석보다 먼저 대륙을 벗어난 선생은 1951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탄성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IBM에서 타자기의 소음을 줄이는 문제를 연구했다. 그는 1955년 오하이오 주의 톨레도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비선형 정규모드에 관한 논문을 썼다. 이게 당시 그 분야의 전문가인 로젠버그(Rosenberg) 교수의 눈에 드는 바람에 결국 1958년 버클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런 이력을 전해들은 나는 진작부터 선생이 왜 연구 분야를 동역학으로 바꾸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고체 분야엔 천재가 너무 많아”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대답에는 많은 의미가 담겼다고 보았다. 그게 선생의 진솔함을 반영했을 수도 있고 겸손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후자에 무게를 두었던 것 같다. 연구를 해나가면서 학자가 연구 분야나 주제를 바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당시의 나는 그 궁금함을 참지 못 할 만큼 젊지 않았나 싶다.
A: “써먹지도 못 할 비선형진동은 뭣하러 연구하는가?”
B: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왜 진동 교과서에 비선형진동에 관한 챕터를 두 개나 써넣었는가?”
A: “그렇게 구색을 갖춰야 책이 잘 팔리니까 그랬지.”
버지니아 공과대학의 공업역학과에서 함께 역학을 가르치는 (A)유태인 마이로비치(Meirivitch) 교수와 (B)요르단 사람 나이피(Nayfeh) 교수가 나눴다는 짧은 대화를 들려준 분도 쑤 선생이었다. 그날도 면담이 끝난 후, 비선형 진동의 실용성에 대한 가벼운 언급 끝에 나이피 교수로부터 직접 들었다며 얘기를 전하던 선생의 얼굴에는 미소가 담겼다. 그 미소는 가시 돋친 이 설전을 즐긴다는 여유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이 분야를 평생의 연구 분야로 정한지 얼마되지 않은 나로선 자못 심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마이로비치 교수의 도발적인 질문 때문이 아니라 나이피 교수는 답변이 그렇게 궁했던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그날인지 다른 날인지, “선생님은 왜 실용적인 연구를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내가 여쭙자, 그는 “사실은 나도 실용적인 연구를 해봤어”라며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1970년대, 셸(Shell) 사로부터 지원받아 해양시추봉의 진동을 매개변수 가진력(Parametric excitation) 문제로 해석했는데 연구가 성공적이지 못 해서 내용을 잡지에만 싣고 말았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1991년 여름 노르웨이에서 개최된 미국기계학회의 해양 및 극 공학 학술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다. 발표장에서 받은 논문집을 훑어 보다보니 제법 많은 논문에서 예전에 선생이 성공하지 못 했다던 연구의 결과물인 해당 논문이 인용된 걸 알게 되었다. 이유가 궁금하여 어느 참가자에게 물었다가 ‘그 분야에서 참고할 만한 거의 유일한 논문이니 당연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 사실을 선생이 아시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몇 차례 찾아뵙는 동안 확인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제자가 무심하여 다 놓치고 말았으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연구자 본인이 실패했다고 인정한 연구결과가 세월이 한참 지나서 어떤 현장에서는 활발히 사용되는 현실은 연구의 실용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에치베리 홀은 멋없는 콘크리트 6층 건물이다. 이게 샌프란시스코만을 향하다 보니 꼭대기 층에 있던 선생 방의 창문을 통해 금문교를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등지고 앉은 스승을 상대할 부담 때문인지 아름다운 풍경이 제자의 눈에 들어오는 날은 드물었다. 대학원생들의 연구실은 교수 연구실과 ㅁ 자 복도로 구분되다 보니 창문이 없었는데, 내가 몸담은 연구실은 선생 방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게다가 방들이 서로 천장이 통하는 데다, 복도 안쪽 벽에 주된 스위치가 있어서 때로 밖에서 누가 이걸 꺼버리면(자기가 마지막으로 퇴근하는 줄 알고) 암흑이 되는지라, 큰 소리로 아직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어야 했다. 그러면 “쏘리”라는 대답과 함께 다시 불이 켜지곤 했다.
1986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퇴근 시간 가까운 무렵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더니 선생이 들어왔다. 그는 사모님께서 준비한 것이라며 작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봉지 안에는 갓난아이의 옷과 장난감이 들어 있었다. 반갑게도 국산이었다. 학생과 사적인 관계를 꺼렸던 선생으로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곧 퇴근해서 집에 들어서며, 선물이 하나 들어왔는데 누가 준건지 맞춰보라고 했더니,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안 된 둘째를 안고 있던 장모께서 “자네 지도교수지 누구겠나”라고 했다. 내가 “와! 우리 장모님 총명하시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했더니 “이런 날도 늦게까지 일 시켜서 미안한 모양이지”라고 했다. 사실은 그날도 저녁을 먹고 다시 학교로 가야 했다. 당시 나는 스승의 일을 돕느라 바쁘기는 했지만 누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었으니 장모의 말씀에는 해명이 필요하다.
연초에 선생은 독일출판사 슈프링어 페르라그(Springer-Verlag)와 출판계약을 맺었다. 따라서 원고가 일 년 안에 마무리되어야 했다. 초고를 완성하는 건 선생의 일이지만 그걸 읽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일을 대학원생보다 잘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김면철 선배를 비롯한 연구실의 동료와 함께 하는 일이어서 나로선 별로 부담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승이 일을 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흥미롭고 배울 점이 많았다. 다만 일이 더뎌져서 연말이 되자 계약 시한을 놓칠까 봐 피차 어느 정도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원고를 두 번째 읽는 일이 끝날 때까지 선생이 서문을 보여주지 않았다. 서문 쓰는 일이 마지막까지 미뤄지기 십상이란 걸 이해는 했지만, 속으로 ‘서문을 보여주지 않으시려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 나는 더이상 참지 못 하고 그에게 서문이 완성되었는지 물었다. 결국 나는 서문을 받아냈다. 다음 면담에서 그에게 의견을 말해도 되겠는지 물었다.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허락을 받은 나는 세 가지를 언급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선생은 서문에서 셀 매핑법의 발전 순서상 단순 셀 매핑법 다음에 일반화 셀 매핑법이 등장한 데다가 후자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후자가 더 고등하고 나은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용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후자는 확률론까지 동원해야 할 만큼 익히기가 어려우므로 고등할지는 모르겠지만 더 낫다고 볼 이유는 없다는 점이다. 가령 전자는 누구나 쉽고 간단히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반면 후자는 나의 경우 스승과 선배의 도움을 받고도 그 방법을 익히는 데 근 일 년이 걸렸으니, 아무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방법을 사용하는 데는 계산시간이나 저장 공간 등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 즉 어느 방법이 좋으냐는 문제와 사용자의 능력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비록 자기가 개발한 방법이더라도 어느 방법이 더 좋은지를 이용자가 판단하게 남겨두어야지, 두 방법에 대한 기호를 책머리에 밝혀서 독자에게 선입관을 갖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 하다는 뜻을 나는 드러냈다. 곧 선생의 변명이 이어졌고 난 무언으로써 뜻이 확고함을 전했다. 하지만 저자가 판단할 문제이니 이야기를 길게 할 것은 없었다. 이윽고 선생이 생각을 더 해보겠다고 했다. 다음 면담에서, 그는 “생각한 결과 네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고 입을 뗐다. 가슴속에선 뿌듯함이 차올랐지만 그걸 표정에 담을 수는 없었다.
제자가 스승의 업적을 빛나게 하는 일을 희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제관계는 일정기간 공동운명체에 가깝다. 그 기간이란 게 관계에 따라 유동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연구실의 막내여서 스승의 책을 풍성하게 하는 데 기여한 게 없으니 원고를 수정하는 데라도 도움이 되면 그것 역시 보람이요 영광일 터였다. 장모로서는 출산한 딸을 도우러 낯선 곳에 오니 사위는 얼굴 보기도 어려워서, 백화점이라도 가려면 여섯 살 난 손자한테 안내 겸 통역을 받아 시내버스를 타야 하니 답답해서 그런 불평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책은 1987년 봄에 'Cell-to-Cell Mapping-A Method of Global Analysis for Nonlinear Systems'라는 제목으로 Applied Mathematical Sciences 시리즈의 제64권으로 나왔다. 나를 비롯한 연구실 동료들은 선생이 사인한 책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여름이 들어설 무렵 LA의 김 선배 집에서 출판기념모임이 있었다. 나는 차를 몰고 내려갔다. 선생으로선 이 책이 평생의 연구를 아우르는 결과물인 셈이니 이번 모임이 뜻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일의 과정을 지켜본 제자로선 참석해서 축하하는 게 마땅해 보였다. 게다가 나로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선배들도 만나게 될 기회를 놓치기가 아까웠다. 참석자는 주인 내외와 선생 내외, 대만 출신 선배 내외, 남가주 대학의 이스라엘인 플래쉬너(Flashner)와 인도인 라메쉬(Ramesh) 그리고 나까지 모두 아홉 명이었다. 대만 선배는 구순이 넘은 자기 부친이 써준 거라며 작은 정사각형 액자를 스승께 선물했다. 액자에는 ‘力學典範(역학전범)’ 넉자가 씌어 있었다. 그 글에는 ‘이번에 당신이 쓴 책은 역학 분야의 교과서로 남을 것’이란 뜻이 담겼을 것이다. 아니면 ‘당신은 이제 역학의 살아있는 교과서다’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액자를 받으며 선생께서 매우 흡족해 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곧 그 선배가 선생 내외분의 청으로 부른 '내 마음 샌프란시스코에 남아(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는 축하 행사의 백미였다. 평생의 연구업적을 총괄하는 책을 쓴 노학자가 제자와 그 가족으로부터 받는 조촐한 축하인사야말로 진정으로 값진 선물 아니겠는가.
곧 자유롭게 대화하는 시간이 되자 사모님께서 다가와 ‘작년 딸의 결혼식에 와서 축하해주어 고마웠는데, 선물로 준 목각인형의 의미가 궁금하여 남편한테 물어봐 달라고 부탁한 지 한 해가 다 되도록 답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 결혼식에 초대받은 우리 부부는 교회의 예식뿐만 아니라 바닷가의 근사한 식당에 마련된 피로연에도 참석했다. 사모님이 말한 목각인형이란 우리가 그 피로연에 가져간 선물을 말한다. 유학 올 때, 직장 동료들이 ‘지도교수한테 잘 보여서 빨리 학위 마치고 오란 뜻’이라며 많은 민예품을 주었다. 학생과 사사로운 관계를 맺는 일을 꺼리는 선생의 성품을 아는지라, 이것들 대부분은 아들의 유치원 교사들 차지가 되었고, 노인 부부를 깎아놓은 목각만 남았다가 스승의 딸 결혼 선물이 된 것이다. 백년해로하란 뜻이라고 하자 사모님은 밝게 웃으시며 자기도 그런 의미가 담기지 않았겠는가 짐작은 했지만 선물한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었다며 딸에게 뜻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사모님의 부탁에도 제자에게 질문하기를 불편하게 여긴 분, 쑤 선생은 바로 그런 분이었다.
딸의 결혼식 얘기가 나왔으니 피로연의 한 장면을 소개하고 넘어가는 게 낫겠다. 선생은 그 피로연에서 세 명의 제자(당시 김 선배와 나 말고도 중국인 썬(Sun)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내외를 밴드가 연주하는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게 했는데 그 자리엔 어떤 구순 노인과 그 아들도 함께 했다. 노인은 선생의 충칭공대 시절 스승이라고 했다.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제가 인연을 맺었던 충칭은 상해에서 쫓겨난 우리 임시정부가 장정 끝에 머문 곳임을 떠올렸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은 남의 나라의 번듯한 대학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이었을까? 나라를 되찾으면 저런 대학부터 세워야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다 보니 밴드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음악이 춤곡으로 바뀌자 맨 먼저, 우리 옆 테이블의 라이트만과 골드스미스, 존슨 교수가 모두 부인을 동반하고 나와서 춤추기 시작했다.
비엔나 태생인 조지 라이트만(George Leitmann, 1925-) 교수는 1940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전쟁 중 전투 공병으로 참전했으며, 전후 뉘른베르크재판에서 심문을 담당했다고 한다. 내 종합시험에서 그는 초대한 연사를 소개하러 곧 세미나장으로 가봐야 한다면서 첫 질문자를 자청했다. 그렇게 시작한 질문이 한 시간 반이나 수험생을 난처하게 할 줄이야. 그와 나 사이에 일반화좌표의 개념에 대한 의견이 갈리는 불상사가 생기고 만 것이다. 일반화좌표란 물체의 운동을 확정해주는 한, 문제를 푸는 사람이 임의롭게 정의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에 대하여, 그러면 일반화좌표가 무슨 소용이냐고 되묻는 바람에 촉발된 사고였다. 게다가 나는 ‘책의 저자에 따라 정의가 다르다’라는 말까지 하게 되었다. 교내에서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분이라고 알려진 데다, 신사 중의 신사이자 나토의 무슨 위원이라던 그는 나의 답변 때문에 자극을 받았던지 계속 질문을 이어 나갔다. 나도 덩달아 분위기에 끌려 반발심이 생기는 바람에 점점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내가 그의 질문에 만족스레 답하지 못한 단계에 이르렀다. 어느새 예상한 시험시간의 절반이 지난 걸 확인한 그는 떠나기 전에 의견을 밝히겠다며 나보고 방에서 나가달라고 했다. 나는 밖에 나와서도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다. 10분이면 끝날 줄 알았던 그의 질문이 이렇게 시간을 끌었으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데다, 짐작하건대 시험 결과가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곧 그가 나오더니 잠시 물도 마시고 냉정을 되찾아서 시험에 잘 대비하라고 했다. 나는 돌아선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병 주고 약 주시는가’, 하는 마음이 생겼다.
어쨌든 시험은 계속되었는데 십오 분쯤 지났을까, 라이트만 교수가 되돌아왔다. 웬일인지 그때부터 그는 동료들의 질문을 잘라내기도 하는 등 나를 일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그 시험에서 나에게 낭패감을 안겨주기도, 동아줄을 내려주기도 했다. 최적제어의 전문가인 그는 나중에 내 학위논문 심사위원까지 맡아주었다.
베르너 골드스미스(Werner Goldsmith, 1924-2003) 교수는 아우슈비츠에서 부모를 여의고 청소년기에 단신으로 대서양을 건넜다고 한다. 그는 아까 말한 시험시간에 책을 들고 들어와서, 동료들로부터 ‘오늘 시험은 오픈 북 테스튼가?’라고 놀림까지 받았다. 자기 질문 차례가 되자 아니나 다를까 그는 시험문제랍시고 책을 들여다보면서 질문했다. 나는 첫 학기에 그의 중급동역학을 수강했는데, 그가 잘 가르친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그 과목이 나한텐 매우 중요한 과목이어서 부실하게 여겨졌던 강의를 보완하기 위해 교과서 외의 책을 한 권 더 읽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가 숙제를 엄청 내주는 바람에 학습량이 다른 과목의 몇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과목에서 뭔가를 배워내야 하는 학생으로서는 잘 가르치는 교수의 과목은 공부를 대충하더라도, 잘 못 가르친다고 여겨지는 교수의 과목은 독실하게 독학하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후자의 경우, 학생은 실력이 뜻밖으로 향상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잘 가르치는 교수와 잘 못 가르치는 교수의 영향이 모호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좋은 교육이 뭔지 알아내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나는 골드스미스 교수의 경우를 통해 배웠다.
어느 날은 안정성(stability)을 강의할 차례였다. 나는 그가 해당 부분 수업을 어떻게 끌고 나갈지 무척 궁금해 하던 참이었다. 그가 라이트만 교수에게, “어이, 조지, 안정성이 뭔가?”라고 물었더니, “안정성의 정의가 서른 가지가 넘는데 그 중 어느 걸 원하나(요)?”라고 되묻더라고 했다. 라이트만 교수는 골드스미스 교수의 두 번째 박사 제자라고 알려졌다. 모르는 걸 알아내기 위해 옛 제자에게 물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 일은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우치는 데 나로선 시간이 많이 걸렸다. 충돌역학의 전문가인 골드스미스 교수는 1991년 발생한 로드니 킹 사건과 관련한 심리에서 두 번 증언했다고 알려졌다. 나로선 그가 검찰 측 증인이었는지 피고 측 증인이었는지 알아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전문분야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바탕으로, 온 나라를 들쑤신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증인으로 나선 그는 사표가 되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다른 하객들이 춤추러 나오자 선생의 세 동료내외는 썰물처럼 빠져주었다. 쉰 명 넘는 같은 과 동료 중에 왜 세 분만 피로연에 초대받았으며, 이들이 왜 각본에 있는 듯이 처신했는지 등 그들 사이의 유대관계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게 없었다. 하여튼 그날 우리는 스승의 스승한테서 청년 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느라 그 자리가 지루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자신의 옛 스승과 제자가 한 자리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배려한 것도 쑤 선생의 한 모습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1988년 봄이었다. 버스 정거장에서 어떤 대만 학생과 마주쳤다. 모우트(Mote) 교수의 제자인 그는 저희와 우리 연구실에 경사가 생겼다고 했다. 내가 뭐냐고 묻자 두 분이 최근에 공학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Engineering)의 회원으로 뽑혔다고 했다. 모우트 교수는 내 과학원 지도교수인 조형석 교수의 박사과정 지도 교수였던 분이다. 조 교수는 내가 이곳에 지원할 때 추천서를 써주었다. 나로선 공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는 게 대단한 건지 몰랐지만 다음 면담 때 선생께 축하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선생께서 수줍어하셨다. 내 생각으론 선생의 책이 그 경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졸업식에도 참석했다. 우리 유학생 동기들은 유학 초기에 ‘삼년 뒤쯤 이 지역에 큰 지진이 온다며 모두 얼른 학위를 끝내고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얘기를 농반진반으로 나눈 일이 있다. 이른바 ‘공기단축(工期短縮)’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무리 서둔대도 ‘공기’를 그렇게 ‘단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웃고 넘겼다. 다행히 그 예보가 틀리는 바람에 난 유학기간에 심각한 지진을 경험하지 못 했다. 그러다 귀국 후 1년 남짓 뒤인 1989년 10월 이 지역에 큰 지진이 발생해서 고속도로가 무너지는 등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께 안부전화한 일도 있다. 캔들스틱 팍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던 월드 시리즈가 중단되는 바람에 ‘월드시리즈 지진’이라고도 불린다는 그 사건으로 짐작해보면, 1984년 가을에 우리가 들은 예측은 시기만 2년 차이가 날 뿐 제법 근사한 예측이었던 셈이다.
이쯤에서 학위논문에 대해 잠시 언급하는 게 낫겠다. 선생의 연구조교가 되어 내가 인식한 자신의 처지는 셀 매핑법을 2자유도계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곧 선생은 내게 직각으로 굽은 데다 끝에 집중질량이 달린 외팔보 모델을 제안했다. 긴 시간에 걸쳐 고민을 하던 나는 문제가 포함하는 항이 너무 많다며, 선체운동을 거쳐 결국 탄성진자계(Spring-pendulum system)로 바꾸는 게 낫겠다고 제안해서 선생의 허락을 받아냈다. 문제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가급적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설명 가능한 문제를 다루는 게 낫다는 데 사제가 합의한 것이다. 어느 날은 면담 중에 선생이 화를 버럭 냈다. 나로선 힘들게 결과를 얻어가는 중이었는데 그게 확정되지 못하고 계속 바뀌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내막을 따져보면 기왕의 결과에서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는 중이었으니 보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이유가 없었다. 연구자는 안다. 그런 상황은 그렇게 최악이 아니란 것을 말이다. 연구자로서 겪는 진짜 위기는 사방이 안개로 막힌 것처럼 도무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다. 어쨌든 몇 주후 면담에서 다시 바뀐 결과를 내가 내밀었을 때, 선생은 비로소 ‘이제 네 연구가 본궤도에 들어선 것 같다’며 반가워했다. 똑 같이 바뀐 결과를 보였는데, 한 번은 화를 내고 다음엔 반가워한 선생을 학생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양자의 직관력 차이로 생긴 일이라고 보는 게 대체로 옳을 것이다. 또 어느 날은 내가 뭘 말하려다 망설이자, 선생이 “넌 생각이 너무 많아. 머뭇거리지 말고 그냥 말해!”라고 다그쳤다. 그날 내가 뭘 말하려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근 3년 반 가까이 사제관계를 유지하다보면 별일이 다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선생이 한 말에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란 걸 그때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1987년 10월 전후, 그러니까 ‘블랙먼데이’라고 알려진, 미국 증시역사상 가장 큰 폭락을 경험했다는 시기에 나는 나대로 연구의 막바지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가진 거라곤 주식은커녕 빚뿐이었던 유학생에게 주가폭락 소식은 강 건너 불에 불과했다. 논문 때문에 내 속이 타는 게 더 급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모두 꿈같은 시절의 이야기다. 면담 중 선생은 대체로 묻고 내가 답하는 방식이었지만, 당연히 그가 결정적인 힌트를 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경우 학생은 좋은 지도교수로부터 지도받는 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만약 그런 게 없었으면 내 논문은 더 볼품이 없었을 것이다.
논문 심사위원 중 한 분인 수학과의 토시오 가또 교수(Tosio KATO, 1917-1999)에게 논문을 드렸더니 “이 문제가 아직 안 풀렸어?”라고 했다. 학생한테는 ‘앞으로 천년 넘게 풀릴 문제’가 교수한테는 간단한 문제로 보였다는 말인데, 누가 옳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날 가또 교수는 나에게 ‘쑤 선생한테 갖다 드리라’며 뭔가를 주었다. 살펴보니 어느 잡지에 실린 자신의 전기 별쇄본이었다. 거기에는 일본이 패전한 직후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을 때 그도 영양실조로 오래 고생하다가, 동경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도 실직 상태에 놓였는데 주일 미국대사관의 직원에게 발탁되는 바람에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적혀 있었다. 세월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그 자리에서 “별쇄본 여분이 있으면 저도 하나 주십시오”라고 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 나더러 “자네가 중국인인 줄 알았다”라던 그는 종합시험 세 시간 반의 거의 대부분 동안 의자를 돌려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당시 나로서야 질문에 답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니 그때 교수는 참 지루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함을 견디는 것은 어느 분야의 직장인도 갖춰야 할 능력이라는 점에서 천재도 예외일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1995년 런던의 어느 서점에서 저자의 소탈한 인품만큼 두꺼운 ‘Perturbation Theory for Linear Operators’란 책을 발견하자 나는 반가운 마음에 구입하며 ‘이 책을 읽을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한 일도 있다. 가또 교수한테 들은 말을 떠올릴 때마다 쑤 선생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절로 우러나곤 한다. 왜냐하면 선생이 관대하지 않았더라면 기계공학도가 그런 고전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걸 지켜볼 리는 만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교내에서 마주한 선생의 사적인 모습 몇 가지를 소개할 차례다. 선생에게는 선호하는 주차공간이 있었는데 토요일이면 늘 그곳에 주차했다. 그곳은 에치베리 홀의 마당에 해당하는 교수 주차구역의 맨 오른 쪽 자리였는데 토요일엔 일찍 출근하는 교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선호하는 곳에 주차한 것이다. 일요일이면 대학원생도 그 구역에 주차가 가능했지만 당연히 난 그 자리를 피했다. 대체로 일요일엔 선생이 출근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왠지 그림자를 밟는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면담하러 방문했더니 선생이 소설책으로 보이는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 스승도 한가하실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신기해했다. 또 어느 날은 그러니까 출판기념 모임 직후로 기억되는 즈음에 방에 들어섰더니 라디오를 듣고 계셨다. 라디오에서는 이란-콘트라 사건의 주역인 올리버 노스 중령의 청문회를 중계 방송하는 중이었다. 나는 속으로 선생은 저 인사의 말을 다 믿으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학과 사무실 근처를 지나오는데, 선생이 탤봇(Talbot) 교수에게 “왜 남의 우편물을 가져가는가?” 하고 물었다. 복도의 벽에는 오가는 우편물을 보관하는 함이 문이 없는 채 사용되도록 배열되어 있었다. 각각의 함에는 교수들 각자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러니 혼동하여 남의 함에서 우편물을 꺼내는 일도 가능은 했을 것이다. “질문이 틀렸어! 이건 내 꺼야(Wrong question! It's mine)”란 답을 들은 선생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뒤로 하고 나는 얼른 그 지역을 벗어났다. 참 간결하지만 강력한 표현도 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스승도 실수하실 때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속으로 웃고 말았다.
마침내 선생께 하직할 날이 왔다. 1988년 초여름의 일이다. 그때 선생은 훔볼트 재단의 지원을 받아 독일에서 연구년을 보내기 위해 며칠 후 출국할 예정이었고 나는 한 달쯤 뒤 귀국할 처지였다. 전날 그는 내 학위논문을 가져가고 싶은데 무게를 줄여야 한다며 양면 복사본을 요청했다. 아예 안 가져가면 무게를 더 줄일 수 있을 텐데 이걸 뭣하러 가져가시지, 하는 생각을 하며 복사본을 드렸더니, 선생이 장차 뭘 연구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보나 판, 셸 등 구조 동역학을 연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선생의 셀 매핑법을 이어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지키지 못할 다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가 내 연구계획에 행운을 빌어주었음은 물론이다. 귀국 후, 다섯 명의 박사를 지도하는 동안 한 명은 보를, 네 명은 원판을 연구했으니 스승과의 약속은 대체로 지켜진 셈이다. 셸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처음 학위논문 주제로 선생이 구조 동역학 문제를 제안한 점을 상기해보면, 선생의 관대함으로 말미암아 구조 동역학으로의 진입이 조금 늦춰진 셈이다.
그 후, 1992년과 1994년, 2001년 등 모두 세 차례 찾아뵈었다. 맨 처음엔 학교의 연구실로 갔더니 지난해에 은퇴했지만 습관처럼 출근한다고 했다. 두 번째엔 딸이 결혼할 때 피로연을 열었던 식당에서 뵈었다. 마지막엔 아내와 같이 팔로알토의 댁으로 찾아뵈었다. 그동안 선생은 딸 가족이 있는 이곳으로 이사했다. 사모님은 휠체어에 앉아 계셨는데 우리를 알아보긴 했지만 말씀은 못 하는 처지였다. 우리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기다렸던 딸 캐시가 곧 떠나고 넷만 남았다. 아내가 선생을 위해 준비한 나무로 된 마사지 기구를 드렸더니 반가와 하시며 어떻게 사용하느냐고 물었다. 아내가 사용법을 알려드리자 그는 신기해했다. 이윽고 우리가 떠날 때, 선생은 사모님의 휠체어를 밀고 문밖까지 나와서 우리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후방 거울로 보니 두 분의 머리 위에서는 백열등이 빛났으며 스승 내외분이 손을 흔드는 모습도 점점 작아져 갔다. 그땐 물론 이분들을 마지막으로 뵙는다는 걸 알지 못 했다. 그 후로 산불인가 지진 소식이 있어 전화로 한 번 안부를 여쭌 일이 있다.
2016년 5월 중순, 우리 내외는 작은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러 LA에 갔다. 아들은 우리가 유학시절 살던 지역을 가보고 싶어 할 줄로 알고 캘리포니아 북쪽으로 여행계획을 마련했다. 일정에 따라 몬트레이에서 이틀을 보내고 팔로알토로 출발하기 전 우리는 가게에서 스승 내외분께 바칠 꽃을 골랐다. 마침 스승의 날이 막 지난 때였다. 가게 주인은 카네이션을 권했다. 스승은 재작년, 사모님은 작년에 작고하셨다. 딸에게 연락하여 오후에 공원묘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캐시는 우리한테 꽃을 건네받더니 능숙하게 줄기를 적당히 잘라내고 두 분의 유골이 보관된 자그만 서랍 앞에 꽂아두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절을 두 번 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선생 같은 거인도 때가 이르면 가루가 되어 저런 서랍에 보관되니 평범한 존재야 뭘 더 바라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딸이 건네준 유인물(장례식에서 사용된)에는 선생의 사진과 함께 이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2011년 미국기계학회로부터 덴 하토그 상(Den Hartog Award)을 받았다는 내용도 있었다. 길러낸 박사가 25명이라는 내용도 보였다. 선생이 내 뒤로 박사과정 학생을 받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내가 만나보지 못한 선배의 수를 셈해보았다. 모두 열여섯이었다. 그날 저녁 스승의 딸과 사위는 우리 가족을 식사에 초대했다. 아내는 고등학교에서 미적분을 가르친다는 그렉을 보더니 콧수염이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멋있다고 칭찬하여 상대를 기쁘게 했다. 나는 이 사람이 옛날 그 날씬하던 청년이 맞나 싶어서 긴가민가했는데, 아무래도 아내의 눈썰미는 당해낼 수 없었다.
선생내외의 유가족과 헤어진 후 우리는 버클리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아 생각해보니 한 인물의 특별함이 저 작은 종이에 다 기록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이 베풀어준 것 중에 제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걸 말로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난 강의조교를 단 한 학기 맡았는데, ‘연구비가 바닥났으니 다음 학기를 대비해 강의조교 자리를 찾아보라’는 선생의 당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운전하는 아들이 그때는 태어나기 몇 달 전이어서 이래저래 매우 힘든 시기였다. 결국 우여곡절을 거쳐 강의조교 자리를 찾아냈고 낯선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이 크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런 교훈을 얻기 위해선 돈을 주고라도 겪어봤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음 학기에 선생은 다시 연구비 상황이 좋아졌다며 연구조교를 회복시켜주었는데, 아무래도 제자가 낯선 경험을 통해 뭔가를 배워보라고 일부러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선생을 너무 편드는 것 아니냐고 조롱할 사람도 있겠으나 그 시절을 돌아보면 자꾸만 생각이 그쪽으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한 인물의 성향을 아는 사람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남에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 저녁 이러저런 생각 끝에 정신을 차려보니, 오른쪽으로는 하나같이, 굴곡진 현대사의 증인이었던 스승들이 평생 절차탁마를 실천한 곳이 지척이었으며, 왼쪽으로는 저 멀리 만 건너 금문교의 불빛이 오랜만에 돌아온 사람을 반겨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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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한달 동안 '글 숙제' 때문에 마음 부담이 크셨을텐데.....귀중한 글 감사드립니다. 마치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처럼, 느낌을 치밀하게 끌어내어 주셔서, 끌려들어가는 장면들입니다. 자연과학이라 제게는 좀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우리 주제의 또다른 스타일을 더해주셔서 더욱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