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에 대해 열심히 배우다가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하여 황희가 지우도사에게 질문을 하였다.
황희: 선생님, 저는 이번에 집을 나와서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겪었습니다. 몇몇 사람에 관해서는 파란만장한 사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선생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선생님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지우도사: 그래, 허허.... 별로 들을 만한 게 없을 텐데...... 그러나 알고 싶다면 구태여 감출 필요가 없지. 나는 고려 31대 공민왕 초기에 상서 벼슬에 올랐던 송광보라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죽계 선생(竹溪先生)이라고 불렀다. 나는 어려서부터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다음은 지우도사, 즉 죽계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간추려 설명한 것이다.
어느 날 열 살 난 죽계가 서당에서 ≼백이전(伯夷傳)≽을 읽고 있었다. 백이와 숙제에 관하여 공자의 논평은 이렇다. “백이, 숙제는 늘 결백했으므로 남의 원망을 들은 적이 드물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인과 덕을 다하여 그 목적을 달성했으니 후회할 일이 있으리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처사(은나라의 난을 평정하자, 천하가 종주국으로 받들게 됨)가 옳지 못하다며 주나라의 녹봉을 거절하고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케먹으며 연명하다가 굶어죽었다. 그들은 숨지기 전에 이러한 노래를 남겼다.
오늘도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캤노라
폭력을 폭력으로 보답하고도, 도무지 수치를 모르는 구나
신농(神農) 요(堯) 하(夏)의 시대는 벌써 사라졌구나
우리는 어디로 갈거나, 이제 돌아가야 하는가, 마침내 운명이 다했도다.
결국 백이, 숙제는 이런 노래를 남기고 충절을 기리며 죽어갔다.
이러한 내용의 ≼백이전≽을 읽고 난 죽계는 책을 덮고 일어서면서 분연히 말하였다.
“맹자께서 말씀하시를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요(堯) 임금이나 순(舜) 임금이 될 자질이 있다고 하셨다. 난들 왜 그렇게 되지 못하랴......... 나도 백이, 숙제의 처지를 당하면 그들처럼 행동하리라!”그의 나이 불과 열 살 때 이런 결심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총명한 데다 귀신을 보고 쫓아내는 역귀사신(役鬼使神)의 능력이 있었다. 죽계는 열심히 학문에 힘쓰는 한편 선도에 관한 비서를 구해 읽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이 열여덟 되던 해 큰 뜻을 품고 단신으로 집을 나섰다. 여기 저기를 떠돌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그만 거기서 길을 잃고 말았다. 한참을 헤매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동굴 속에서 수도하는 어느 신인을 만나 그에게서 한동안 도술을 배우고 익혀 세상에서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진서(眞書)를 전수받았다.
죽계는 밤낮으로 그 진서를 읽고 도술을 터득하기에 힘쓴 결과로 신선도명(神仙道明)이 열리게 되었다. 또한 각종 부적을 사용하여 악귀를 퇴치하는 방법도 익혔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단군 조선 때 환웅이 천부인(天符印) 세계를 갖고 천상에서 하강했다는 설화도 일종의 부적의 한 형태라고 볼 수가 있다. 죽계는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자 그 신인 곁을 떠나 나그네 길에 올랐다. 그는 곳곳을 다니면서도 오로지 도술 공부에 전념하였다. 어느 날 그는 전라도 남원 땅에 이르러 어느 부잣집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다. 달이 유난히 밝아서 정원에 나가 서성거리다가 맞은편 담장 밑, 고목나무에서 요사스러운 기운이 뻗쳐나고 있음을 보았다. 죽계는 다음날 아침 주인을 뵙고자 청한 후, “주인장을 뵙고자 한 것은 곧 집안에 액운이 닥칠 것 같아 사전에 막으시라고 하려는 것입니다.”
주인장: 액운이라뇨? 나는 지금까지 재물도 늘고 걱정 없이 지내는 데......?“라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죽계: 집안에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않으나 요사스럽고 악한 기운(至妖至惡)의 살기가 가득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곧 필유대화(必有大禍)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선비로서 천하를 주유하던 중에 신인을 만나서 도술을 익힌 사람이오. 이 집에 변괴가 일어날 것을 말면서도 모른 체 할 수가 없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넉넉함을 믿고 내일에 없어질 것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선의 안락(安樂)만을 취하여 내일의 위급함을 잊어서는 아니 되오. 지금의 낙이 변하여 내일의 위급함을 잊어서는 아니 되오. 지금의 낙이 변하여 내일의 근심으로 바뀌고, 복이 변하여 화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인장: 네네, 듣고 보니 과연 그렇습니다. 잠시나마 의심했으니 가히 허물치 마시고 재앙을 예방할 방법을 부디 일러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당장에 숮 50가마만 구하여 저 장독간 뒤쪽에다가 쌓으시오. 그리고 사람들 수십 명을 시켜 숮불을 지피고 일제히 부채질을 하게 하시오.
주인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여 담장 안팎으로 숮불이 한창 벌겋게 달아오를 때였다. 죽계가 부적 한 장을 꺼내 담장에 붙이고 호통을 쳤다.
“이 못된 요물아, 당장 나오지 못할까!”
그 말이 끝난 후 조금 있으니 장독간 옆의 담장 밑에서 서까래만한 구렁이가 “쉬익, 쉬익”소리를 내며 음산한 기운을 풍기면서 구멍에서 기어나왔다. 구렁이는 번개 같은 동작으로 집주인 쪽으로 대가리를 듣고 덤벼들었다. 바로 그때 죽계가 다시 부적 하나를 불에 던지자, 구렁이는 숮불을 타넘다가 그대로 버둥거리며 죽어 자빠졌다. 어마어마하게 큰 구렁이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이고....이럴수가.....어떻게 이런 일이....?”그때 죽계가 나서며 주인장에게 말했다. 독기는 주인장의 전생의 업장으로 인해 흉한 기운(兇氣)과 악한 기운(惡氣)이 구렁이로 화생하여 해독을 끼치고자 도사렸던 것입니다. 다행히 약간의 덕을 쌓았기에 나 같은 사람을 만나 횡액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반드시 덕을 쌓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죽계는 한사코 붙잡는 주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다시 간편한 차림으로 망망대해를 떠나가듯 홀로 나그네 길에 올랐다. 그는 곳곳을 떠돌다가 경상도 문경 땅 어느 산골에 이르렀다. 그 산골에는 곳곳에 빈집이 남아 있고 비록 골짜기지만 꽤 넓은 터전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수십 호는 넉넉히 생활할 정도의 논밭이 묵어나고 황폐해 있었다. 그곳을 쭉 지나 산기슭에 닿으니 다 쓰러져가는 초가 한 채가 보였다. 석양 무렵이었는데 등이 굽은 노인 하나가 마당가에서 뒷짐을 지고 혼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죽계가 입을 열었다.
죽계: 할아버지,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저는 산수 유랑을 나온 사람입니다. “이 마을은 어째서 집이 비었고 논밭이 버려진 상태입니까?”노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우선 이쪽 마루에 올라와 앉으시오. 젊은이는 범상치 않은 인물로 보이기에 내가 말씀드리겠소. 이곳은 10여 년 전에는 제법 지낼 만한 부락이었소. 그런데 저 건너편 골짜기에 폐사가 된 절이 하나 있지요. 그곳에 10여 년 전부터 도깨비와 귀신들이 소동을 부려 한 집, 두 집 떠나게 되었소. 나는 의지할 곳도 없는 곳이라서 어디 간들 별 수 없기에 이렇게 그럭저럭 지내면서 죽을 날만 기다린다오.”
죽계: 어르신, 사(邪)가 정(正)을 범하면 끝까지 이기지 못하는 법입니다. 어서 저를 그곳으로 안내해 주시든지 길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노인(할아버지): 젊은 양반, 공연히 변을 당하여 아까운 목숨을 잃을까 두렵소. 어서 여기를 벗어나는 것이 현명할 길이오
죽계: 어르신께서는 너무 염려 마십시오. 인명은 제천입니다. 개인의 힘으로 잡귀를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옵고, 오로지 신명의 가호를 받아 잡귀를 물리칠 것입니다. 아무런 염려 마시고 폐사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십시오.
노인(할아버지): 이 산길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나가면 절이 나옵니다만.......
죽계: 노인에게 인사를 드린 후 폐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죽계가 그곳에 닿았을 때는 이미 어두워졌으나 달이 떠올라 천지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죽계가 법당 안으로 들어서니, 음산한 기운이 가득 차고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폐사는 벽이 무너지고 서까래도 썩어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보통 사람 같았으면 벌써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죽계는 전혀 동요함이 없이 진기(眞氣)를 모으고 돌부처처럼 법당에 단정히 않아서 낭랑한 목소리로 ‘옥추경(玉樞經)’을 二更(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 사이)까지 외우고 있었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음산한 기운이 비린내처럼 역겹게 왈칵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계는 낮에 그려둔 부적을 꺼내 불상 앞에 붙이고 계속 ‘옥추경’만을 외웠다. 등뒤에서 귀신들이 소란스럽게 몰려들다가 비명을 질렀다. “이크 귀신을 쫓아 낸다는 죽계가 왔구나, 옥추경을 읽으니 우린 이제 죽겠다.”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죽계: 네 이놈들, 이찌 극선(極善)의 신명계의 정도를 어찌 당하겠느냐! 요사스럽게 인심을 동요시키고 해악을 끼쳤으니 신명계에 고하여 너희들을 연옥에 떨어지게 하리라.
귀신들: 아이구, 잘못했습니다. 전에 이 절의 주지가 불공을 드리러 온 처자를 겁탈하고 목졸라 죽였습니다. 그리고 절의 탑 앞에 암매장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원귀가 되어 함께 원수 갚는 일을 도와달라기에 그만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른을 만나 우리의 잘못을 알았으니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죽계: 다시 이곳에 나타나 요사한 짓을 한다면 내 그때는 용서치 않으리라! 당장 물러가렷다! 죽계가 호통을 치자 귀신들은 모두 달아났다. 이튿날 탑 앞을 파보니 과연 17세 전후로 보이는 처녀의 시체가 나왔다. 마치 산사람 같았다. 죽계는 가까운 곳의 관아에 들러 그 사실을 알리자, 곧 부모가 나타났고 폐사의 주지를 하던 자를 수소문한 끝에 잡아들여 자백을 받고 그를 처단하였다. 죽계는 원통하게 죽은 처녀의 새 무덤 앞에서 제문을 지어 올린 이후부터는 귀신으로 인한 환란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와 이전처럼 번성하게 되었다.
그후 죽계는 서울로 올라와 과거를 보게 되었는데, 과거 전날밤 꿈에서 자신이 베어들인 벼의 그 나락을 말(斗)로 되는 꿈이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죽계는 틀림없이 과거에 급제할 것임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 파자(破子)인 벼 화(禾)에 말 두(斗)를 합성시키면 과(科)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 급제한다는 길조로 꿈풀이를 했던 것이다. 과연 과거에 급제하고 얼마 후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그 후 전에 자신에게 도술을 가르쳐준 이인을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이인: “그대는 마침 잘 왔도다. 우리 선도계에서 앞으로 그대를 속세의 인물들과 교통하는 매체로 삼고자 한다. 장차 벼슬을 하다가 망국의 징조가 보이거든 곧 버슬에서 물러나 입산하라. 그때에 내가 그대에게 천우(天牛)를 부리는 법술을 가르칠 것이니라. 만약 약용할 경우에는 하늘의 징벌을 면치 못하리다. 그러니 반드시 옳은 일에 사용하라.”
죽계: “전생님, 비록 저는 가르침을 입었사오니 선생님의 존호조차 모르니 일러주소서.”
이인: “나를 우리 선도계에서 천우도사라고 한다네. 나는 멀잖아 선화(仙化)할 것일세. 고려는 그 동안 궁중의 강기가 지나치게 문란했지. 왕이 모후를 증하기에 이르니 어찌 천지신명이 노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곧 구악생신(舊惡生新)의 새시대가 도래하리니, 그때 가장 큰 일꾼이 될 인물이 태어날 것을 나는 이미 예고하였네. 앞으로 그대에게 지우도사라는 도호(道號)를 내려주겠으니 큰 일꾼, 나라의 대들보를 찾아 다듬어 앞길을 지침하는 역할을 해주시계.”
죽계: 그게 누구인지요?
이인: 후일 다시 입산했을 때 내가 천우 부리는 법술과 아울러 알려주도록 하겠네. 그때에 지우도사는 그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시게.
죽계: 스승님의 가르침, 기필코 이행하겠습니다.
그후 죽계는 벼슬이 예부상서(禮部尙書)까지 올라 포은 정몽주 등과 교류하였다. 그러던 중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한탄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천우도사를 찾아가 천우를 사용하는 법술을 배웠다. 그후 ‘황희’가 새나라의 큰일을 할 것임을 알고 앞길을 지침하고 가르치게 되었다. 이것이 지우도사가 황희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줄거리였다.
다음에 (11)에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