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6:1~14 신생으로 사는 삶
稱義(칭의)는 곧 新生(신생) 또는 信生(신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칭의로 인하여 성도는 깨진 그릇인 내 힘이 아니라, 타력 곧 하나님의 선물 이 죄인을 사랑하사 대신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썩을 나무가 금으로 싸매임을 받는 것 또는 몸이 더러운 사람이 깨끗한 예복 두루마기를 입고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깨진 그릇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사람이 중생하기 전에 할 수만 있으면 악하려 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죄인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 구약의 모형을 볼 때, 죄인은 제물 곧 소나 양이나 염소 비둘기 또는 곡물을 들고 와서 제사장에게 드리는데, 죄인이 제물에 안수할 때, 제물에게 죄인의 죄가 전가되고, 제물은 죄를 짊어지고 죽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가죽은 취하여 옷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약의 모형을 예수님과 대조해볼 때, 이는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인의 죄가 예수님에게 옮겨지고, 예수님의 의로움이 죄인에게 가죽처럼 덧입혀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얼마나 경이로운 대차대조표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목하시고 세상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우리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이것이 ‘칭의’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전폭적인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또한 이것을 믿는 사람은 회개합니다. 그러나 그의 회개가 그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
구원을 경험하게 되면, 일단 그는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전에는 본성대로 살았는데, 칭의를 경험하고 나서는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고 인도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칭의에서 진정한 회개가 됩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하나님은 사람이 죄에 있을 때 은혜를 주셔서 죄로부터 나오게 하십니다. 그러나 계속 죄에 머물러 있을 때는 주께서 슬퍼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감하게 당당하게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합니다. ‘칭의’를 받고 새롭게 태어났으므로 죄 중에 더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몸이 더러워진 대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는 신생 곧 이신칭의를 받고 새롭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죄 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에서 이 구절은 ‘예수 안에서’를 ‘옷’입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세례는 물세례 혹은 성령 세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은혜를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율법은 경계합니다. 그럴 때 죄의 권세가 명확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큰 유익을 주지는 못합니다. 도리어 나는 죄인이로구나 답이 없구나 절망하게 됩니다. 그것으로는 죄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인물들 중에 특히 다윗은 괴로울 때 주의 얼굴 성령을 구하였습니다. 다윗은 ‘인자’를 보았습니다. 썩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 사건을 듣고,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을 하고 ‘십자가’ 곧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알았습니다. ‘예수 십자가’만이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 십자가’를 두고 자신이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며, 의롭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 안에서 ‘다 이루었다.’ 완료되었음과 동시에 진행령입니다. 예수님 왈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는데, 자기 십자가란 자기의 연약한 부분, 또는 괴로운 부분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십자가에 못 박고 마10:38처럼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내게 있어서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로마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심층적으로 보여줍니다. 죽음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반응하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의’인데 세부적으로 묻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신생으로 살아야 함은, 내가 은혜를 입어 칭의를 입어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주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부활할 것임을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의 어떤 의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성령 안에서 신생 곧 새 생명으로 살 때 가능합니다.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았으면,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내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사랑을 알고 예수님을 받았다면, 그와 같이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칭의 사건은 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와 죽음에 대한 승리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으로, 이는 더 이상 우리가 죄와 사망의 종 노릇 하지 못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도는 죄도 죽음도 한시적으로만 영향력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죄와 긴장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는데, 여기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볼 때, 믿음은 훈련입니다. 생각의 훈련입니다. 삶의 훈련입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 말씀에는 칭의를 받았을지라도, 거듭났을지라도, 우리 안에 이미 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죄의 몸은 나비가 되기 전에 번데기 안에 있듯이 그러므로 헌신이 필요한데,
1) 죄가 왕 노릇 못하게 해야 합니다.
2)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3) 불의의 병기가 되지 말고, 의의 병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만이 가능합니다.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성도는 엄청난 특권 아래에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칼빈 왈 - 믿음과 거룩한 생활이 분리 될 수 없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믿음에서 회개로 넘어가게 됩니다.' 구약의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모형을 볼 때, 정한 짐승은 새김질과 쪽발, 지느러미와 비늘, 뛰는 다리의 습성이 있는 짐승을 말하는데, 회개하는 습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용서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율법을 폐하지만 동시에 율법을 더 온전하게 세웁니다. 복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은 껍데기 거푸집 같은 것이었지만 복음이 온 후에는 율법은 알맹이가 가득찬 울타리 같이 됩니다. 율법은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복음이 들어온 후로는 더 온전하게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칼빈 왈 ‘이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은 반드시 과거 생활의 과오를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서며 회개를 실천하는 데 전력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믿음보다 회개가 선행한다고 하며, 회개가 믿음을 따르거나, 나무의 열매같이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부정합니다....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요한이 전도할 때에 먼저 백성에게 회개하라고 역설하고 다음에 천국이 가깝다는 것을 첨부하였으며 사도들도 이런 순서를 따랐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전도할 때 그들은 은혜자체와 구원의 약속에서 회개에 대한 이유를 추론하지 않았는가요? 중략. 중독에서 나온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은혜를 입기 전에는 회개가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중독에서 도피하려고 중국으로 도망을 갔는데, 거기서 1년 정도 있으니까 정말 그런 생각이 사라지긴 하였는데, 그러나 귀국할 때 쯤, 다시 중독에 빠져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거듭나서 중독에서 벗어난 후, 또 이것을 활용해보면 어떨까 손을 데었는데, 도무지 절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회개하였는데, 옛날과 비교하였을 때,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절대 그렇게 못해요. 그러므로 칭의에서만이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진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호의를 가지셨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칭의로 하나님께 호의를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칭의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복종을 기뻐하신다고 믿지 않으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관대히 용서해주시는 이 자비심이야말로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호의를 알리는 표지입니다. - 칼빈
그러므로 은혜를 사모하여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 칭의를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