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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본능 / 김규련
동해안 백암온천에서 구슬령(珠嶺)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고추, 담배로 이름난 영양(英陽) 수비(首比)면이다.
대구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한다. 이 고을 어귀에는 갑작스레 높고 가파른 재가 있다. 이 재에 오르면 바로 고을수(樹)가 있고 민가가 모여 있다. 이 재를 한티재라 한다. 이 한티재를 분수령으로 마을 쪽에 떨어지는 빗물은 왕피천(王避川)을 이뤄 성류굴(聖留窟) 앞을 지나 동해에 이른다. 재 밖으로 빗나간 빗물은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흐른다.
어쩌다 나그네가 이 고을을 찾게되면 그 우람한 태백산맥의 산세며 깊은 계곡, 울창한 숲이며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을 보고 우선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발길을 돌려 그냥 되돌아간다면 그는 무궁한 산정(山情)의 애무를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없으리라.
왕피천으로 흐르는 석간수를 따라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를 한나절쯤 걸어가면, 화전민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마을이라고는 하나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연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알 까닭이 없다. 어쩌면 이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절벽이며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기 때문일까.
이들의 주된 생업은 고추와 담배 농사이다. 철따라 산채며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 들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의 큰 부업이다. 그러나 어쩐지 바보가 아니면 달관한 사람만이 살 수 있는 첩첩산중의 이 수하(水下) 마을.
어느 해 봄, 이 마을에 뜻밖의 황새 한 쌍이 날아 들어왔다. 서식처가 아닌 이 산골에, 꿩이나 산비둘기가 아니면 부엉이나 매 같은 산새들만 보아 온 이 마을 사람들 눈에는 황새가 신기했다. 희고 큰 날개를 여유 있게 훨훨 흔들며 노송 위를 짝을 지어 유유히 날아 다니는 품이 정말 대견스러웠다. 기나긴 늦은 봄 오후, 뻐꾸기 울음소리가 빗물처럼 쏟아질 때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숨을 돌린다. 이럴 때 이들의 화제는 개울가에 먹이를 찾아 서성거리고 있는 황새에 쏠린다. 붉은 주둥이와 긴 목, 새하얀 털로 덮인 날개 밑에 쭉 뻗어 내린 검붉은 두 다리, 황새의 자태는 과연 군자의 모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황새가 길조라고 믿고, 그들은 무엇인가 막연한 기대에 부풀곤 했다.
그러나 변이 생겼다. 낙엽이 질 무렵 어느 날 아침, 이 마을을 지나가던 밀렵꾼이 황새를 보고 총을 쏜 것이다. 놀란 마을 사람들은 아침을 먹다 말고 황새 둥지가 있는 노송 숲으로 뛰어나왔다. 밀렵꾼은 도망가고, 황새 한 마리가 선지피를 흘리며 마른 억새풀 위에 쓰러져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짝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없다. 그 밀렵꾼에게는 황새가 박제 표본감이나 아니면 돈으로 보였을까. 마을 사람들의 분노와 원성은 여간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황새가 죽지는 않았다. 한 쪽 날개가 못 쓰게 될만큼 다쳤던 것이다.
어질고 소박한 마을 사람들은 그 황새를 안고 와서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를 했다. 그리고 날개 상처가 아물고 힘을 되찾을 때까지 그 황새를 물방앗간 옆 뜰 소나무 밑에 갖다 두고 보호하기로 했다. 이들은 그날로 둥우리를 만들고 모이 그릇도 마련했다. 그러나 황새는 쓰러져 움직이질 못했다.
그날 밤, 구장집 사랑에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밤이 이슥하도록 황새를 살려 볼 궁리를 했다. 그리고 밀렵꾼을 저주하다가 드디어 인간의 잔악한 일면을 저마다 나름대로 뉘우쳐 보기도 했다.
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지창에 갈잎이 날려와 부딪힌다. 그런데 귀에 설은 애달픈 새의 울음소리.
끼룩끼룩 끼 끼룩 끼루루.
가슴을 깎는 처절한 이 울음 소리를 듣고 모두들 말없이 뜨락으로 나왔다. 가을 밤 하늘에 찬란한 별들. 그 별빛에 흰 깃을 번쩍이며 황새 한 마리가 물레방아 주위를 이리저리 애타게 날고 있는 것이 아닌가. 총소리에 놀라 도망갔던 황새가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황새는 이제 인간이 두려워서 쓰러져 누워 있는 자기 짝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진 마을 사람들은 자리를 피해 주려고 묵묵히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황새는 연신 목에 피가 맺히도록 울어 댄다. 끼룩끼룩 끼 끼룩 끼루루. 그날 밤늦도록 화전민 후예들의 지붕 밑에 호롱불이 꺼지지 않았다.
이튿날 날이 밝자, 이들은 그 부상 당한 황새를 그들의 둥지가 있던 노송 밑에 갖다 뒀다. 가련한 황새가 사람의 눈을 피하여 서로 어울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러던 며칠 뒤, 무서리가 몹시 내린 어느 날 아침, 기이하고 처참한 변이 또 생겼다. 이들이 그렇게도 알뜰히 보살펴 온 그 한 쌍의 황새가 서로 목을 감고 싸늘하게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소문을 듣고 달려 나온 마을 사람들은 이 슬픈 광경을 보자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리고 저마다 무엇을 느꼈음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한참 말이 없었다. 황새도 영물일까. 산골의 날씨는 무섭게 추워지려는데 짝을 버리고 혼자 남쪽으로 갈 수 없었던 황새의 정. 조류(鳥類)에 따라서는 암수의 애정이 별스런 놈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그들의 본능이라 했다. 그러나 어쩐지 그들의 하찮은 본능이 오늘따라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감나무에 달린 잎새들 / 김규련
무심한 나무도 조석으로 대하면 정이 묻어오는 것일까. 나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정문에 바짝 붙어 감나무 한 그루가 거목으로 서 있다. 그러니까 나는 싫든 좋든 출퇴근할 때마다 나뭇가지 밑으로 스치며 드나들 수밖에 없다. 그것도 사계절이 두 번이나 바뀔 동안, 그러고 보니 묘하게도 애착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할까. 어쩌다 마음이 황량할 때면 감나무 밑에 와 서성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도 괜히 감나무 밑에 와 머뭇거리고 섰다. 무성한 잎 사이로 여기저기 하늘 몇 자락이 쏟아지고 있다. 연신 뚝뚝 떨어지고 있는 하얀 감꽃 언저리엔 아득히 지나간 세월의 그림자가 아롱거린다. 웬일일까. 감꽃 목걸이를 드리운 소녀가 문득 뇌리를 스친다. 옛날 어렵게 살던 무렵 여름이면 으레 어머니는 풋감을 따다 잿물에 담궈두었다가 떫은 맛이 가시고 나면 그것을 손에 쥐어 주시곤 했다. 어머니의 그 따뜻한 정이 오늘따라 왜 그리워지는 것일까. 괜히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아 얼른 먼데 산을 바라본다.
갖가지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정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말고 다시 돌아와 감나무 밑에 서 있다. 거북의 등같이 균열이 간 감나무 둥치에 기대서서 잎새를 우러러본다. 푸른 녹즙이 주루루 흘러내릴 것만 같다. 감나무의 녹음이 곧 여름 빛깔의 상징이라고 할까. 감나무는 철에 따라 그 빛깔이 극명하게 바뀐다. 그러면서도 그 빛깔이 바로 그 계절의 표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늘 감명을 주는 것은 철따라 변하는 감나무의 영상이 아니라 거기에 달린 저마다의 의미이리라. 굵은 새싹이 툭툭 터져 나오는 감나무의 봄은 생명의 환희였다. 검푸르게 짙은 감나무의 녹음은 창조의 의지였고, 붉은 감을 주렁주렁 달고 선 감나무의 가을은 성취의 기쁨이었다. 잎도 열매도 훨훨 털어버리고 앙상한 가지를 찬바람에 드러낸 채 묵묵히 서 있는 감나무의 나목은 선정禪定의 자세였다고 할까.
노송 같은 운치도 없고 고매古梅같은 향기도 없으며, 느티 같은 멋도 없는가 하면 벽오동 같은 서기瑞氣도 없는, 감나무를 내가 좋아하는 까닭은 바로 그 의미 탓인지도 모른다. 재주가 모자라면 덕德으로 채우고 덕이 모자라면 성실로 채울 것을 암시하는 듯한 감나무의 슬기가 어쩌면 더 마음에 와닿았다고 할까.
감나무 둥치에 체온 같은 것을 느껴본다. 수액이 고동치며 돌고 있는 모양이다. 땅속 깊은 곳에서 뿌리들이 쉬지 않고 빨아올리는 수분, 땅과 하늘과 수중에서 살아가는 온갖 유정물有情物은 언젠가 목숨이 다하여 죽게 되면 흙과 물과 바람으로 돌아간다 했던가. 잡초로 살다 간 이름 없는 사람의 땀과 전장戰場에서 죽어간 병사의 핏물과 정한에 사무쳐 남모르게 흘린 어느 여인의 눈물도 어쩌면 저 수액 속에 스며들어 함께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인情人의 손목을 잡아보듯 따뜻한 나의 손으로 감나무 가지를 살며시 쥐어 본다. 한줄기 바람이 감나무 잎새를 흔들고 지나간다. 어디서 온 바람일까. 우랄산맥을 넘고 고비사막을 지나서 서해 바다의 고깃배를 흔들어 놓고 달려온 바람인가. 바람 속에는 남몰래 숨어서 속삭이는 어느 젊은 남녀의 사랑의 밀어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외치는 군중의 함성이며, 환락의 밤거리에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며, 온갖 목소리가 감춰져 있으리라.
발길을 옮겨 정원을 산책해 본다. 무심코 서 있는 소나무, 느티나무, 모과나무, 은행나무, 백일홍, 목련, 향나무들이 동시에 일어서서 환호를 지르며 나를 맞는다. 정원에 존재하는 나무들과 잔디풀, 억새와 잡초, 산새와 다람쥐, 개미와 벌레, 그리고 나. 이것들이 모두 하나의 큰 생명 안에서 잠시 나타나 제 몫의 삶을 살다 돌아가는 저마다 작은 생명임을 말해 오고 있다.
개자겁芥子劫의 세월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생명들이 수없이 돌며 명멸하는 동안 자주 서로의 육신이 섞이고 엇갈렸는지 짐작이 간다. 지천으로 무성한 미루나무 잎에서도 하잖은 나비의 날갯짓에서도 아득한 옛날의 나의 육신의 흔적이 엿보인다. 문득 연기緣起의 법칙과 조화의 논리가 온 누리에 가득 차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하나의 큰 생명의 본질은 매여 있지 않고 풀려 있다.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다. 멈춰 있는 듯 움직이고 있다. 굳어 있지 않고 항상 부드럽다. 부족하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다. 연신 받아들이고 연신 드러내고 있다. 급하지도 않고 더디지도 않다. 아름답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
부질없는 상념을 털어버리고 저만치 정원에 놓인 바위에 가서 앉아 본다. 싱그러운 감나무 잎새들은 상금도 나의 시선을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어찌 된 일일까. 부끄러운 인간의 몸짓들이 번득번득 잎새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
수결을 외치면서 타인의 항구를 기웃거리고 있다. 삶의 주제는 사랑이어야 한다면서 명성과 인기에 집착하고 있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것 같으면서도 자기의 야망만 이뤄 가고 있다. 학처럼, 난처럼 살고 싶다면서 권세와 재물을 갈구하고 있다. 배운 사람일수록 가진 사람일수록 지체 높은 사람일수록 위선의 갑옷이 더욱 두텁고 견고한 것은 아닐까.
문득 '파스칼'의 명언이 생각난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은 천사처럼 행동하려고 하면서 짐승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진작 부끄러운 몸짓의 사람은 내 자신이었던 것을. 위선의 갑옷을 하나하나 벗어 봐야겠다. 더러는 살점이며 피가 묻어 나오리라. 뭣인가에 얽매이고 갇힌 내 자신을 풀어 주고 열어 줘야겠다. 내 심혼 깊숙이 자리한 또 하나의 내 몫의 삶을 알아보고 본시 내 자리로 돌아가야겠다.
인간이 때로 기도한다는 것, 염불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또 하나의 자신에 대한 독백이요 다짐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모두가 자기 몫의 삶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어야 하리라. 감나무는 어느덧 내 앞에 거룩한 말씀으로 서 있다.
노송 세 그루 / 김규련
오늘도 학산을 돌고 있다. 밤새 뿌리던 비는 멎고 햇살이 눈부시다. 요 얼마 동안 길섶을 지날 때마다 텅 빈 숲에서 소곤소곤 분주한 움직임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더니 산은 어느덧 연초록 비단으로 속살을 가리게 됐다.
한 삼 년 거의 매일 똑같은 산길을 거닐다 보니 무심코 오르내려도 가슴에 설렘이 온다. 산도 사람과 같아서 옷소매 스치면 정이 묻어나는 것일까.
이제 학산의 풀과 나무며 텃새들과 미물까지도 나에겐 예사롭지 않다. 내가 침묵으로 곁을 지나가도 내 마음을 읽은 듯 몸짓으로, 소리로, 아니면 빛깔이나 향기로 화답해 온다.
흙과 돌멩이를 밟으며 떡갈나무 숲속을 지나다 말고 문득 발이 멎었다. 겨우내 눈보라를 맞으며 고사목처럼 서 있던 나무들이 싱싱한 새싹을 툭툭 터트리고 있지 않은가. 청명이 지나고 나면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산새들은 나무숲을 가르며 지저귈 것이고 신록은 더욱 찬란한 것이다.
때가 되면 봄은 오기 마련이다. 헌데도 나는 언제부터인가 봄이 되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나머지 눈시울이 젖도록 그 은혜로움에 감사드리곤 한다. 늙바탕이 깊어 갈수록 아름다운 것이 어디 봄뿐이겠는가. 사철이 그 나름대로 다 아름답다. 인간사 모두가 아름답고 귀하고 정겹지 아니한 것이 있으랴.
학산에는 한 세기 넘게 살아온 듯한 노송이 세 그루 서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며 사람의 희비 영욕을 한 발치 뒤로 비켜서서 백 년을 하루같이 한자리만 묵묵히 지켜 온 노송들, 나는 그들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경건해짐을 느낀다.
때로는 기를 받아보려고 두 팔로 한참 동안 껴안기도 하고 묵언으로 깊은 대화를 나눠 보기도 한다.
나는 마침내 그들에게 나만 알 수 있는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다. 첫째 노송은 나의 내면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의 나무요, 둘째는 슬기 한 소식 얻어 갈 수 있는 지혜의 나무요, 셋째는 뭣인가를 다짐해 보는 서원의 나무이다.
거울의 나무 앞에 서서 내 마음의 뜨락을 들여다본다. 수목이 우거지고 냇물이 흐른다. 구름이 떠가고 새들이 날아다닌다. 평화로운 산골 마을 풍경이다. 더 살펴보면 후미진 곳에 쓰레기 더미가 감춰져 있지 않은가. 언제쯤 이 쓰레기마저 걷어치울 수 있을까.
오늘은 웬일인지 지난날이 번득 눈앞을 지나간다. 젊은 시절 한때, 부질없는 욕망을 이루지 못해 비틀거리고 좌절하고 분노했던 내 모습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내 분수에 넘는 허황된 꿈이 산산이 깨뜨려진 것이,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새는 하늘을 날아다녀도 발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나무는 천년을 살아도 흙을 더럽히지 아니한다. 나는 이름 없는 한 포기 들플로 남아 많은 민초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큰 흔적 없이 한세상 살게 된 것을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지혜의 나무를 만나면 슬기 한 자락 얻어 가려고 노송에 등을 대고 선다. 흩어져 제멋대로 흔들리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본다. 그 마음을 노송 속으로 조용히 침잠시킨다 노송에도 생명력이 흐르고 있다. 그 생명력의 흐름을 타고 노송 뿌리에서 땅속으로, 솔잎에서 하늘로 빠져나와 천지에 가득히 흐르는 큰 생명력과 합류한다.
자연의 큰 생명력은 흙 속에도 바람 속에도 흐르고 물과 구름 속에도 가득 차 순환하고 있다. 온 누리 도처에 생명력이 돌지 않는 곳이 없다. 그 경이로운 힘이 만물을 생성케도 하고 소멸시키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자연의 큰 생명력이 곧 조물주요, 신이요, 여래일지도 모른다.
그 생명력에 실려서 일초 일목 두두 물물 삼라만상을 꿰뚫고 두루 다녀 본다. 문득 느껴 오는 것이 있다. 돌멩이 하나 굴러떨어지는 것도, 한 떨기 제비꽃이 피어나는 것도, 한 마리 나비가 나는 것도 모두 까닭이 있고 이치가 있다. 바위는 부딪쳐야 소리가 나고 생명은 씨알이 깃들 때 태동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종교는 기적의 결과를 바라서가 아니고 거룩한 원인을 쌓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자연의 큰 생명력 속에는 온갖 목숨들이 주렁주렁 무량으로 달려 있다. 이 목숨들이 몸을 바꿔 가며 나고 죽고 거듭하는 데도 어떤 법칙이 있으리라. 태어남은 죽음의 시작이요, 죽음은 태어남의 시작이다. 살아 있다고 야단스럽게 기뻐할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크게 슬퍼할 것도 아니지 않는가.
서원의 나무에 이르면 뭣인가 원을 세워야 한다. 바람직하고 순수한 원이 점점 강렬해지고 커지면 구질구질한 욕심들은 차츰 마음 밖으로 밀려나게 된단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뚜렷한 원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진실로 이웃을 위해 섬기고 나누고 베풀고 헌신해 본 일이 없는 내가 무슨 원을 세운단 말인가. 나와 이웃이 둘 아닌 하나의 몸이란 동체의식이 몸에 배어들 때까지 마음을 닦고 또 닦아내야 돋아난다. 어쩌면 나에겐 거의 불가능한 공부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무원의 원을 세워 둘 수밖에 없다.
석양이 비끼고 있다. 산에 나들이 왔던 사람들이 서둘러 하산하고 있다. 나는 평소와 같이 산 정상에 올라와 사방을 내려다본다. 드넓은 광야를 꽉 채운 수많은 건물들이 쉼 없이 호흡하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비롯하여 저마다 안락이며 환희며 행복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고통 없는 안락, 슬픔 없는 환희, 불행 없는 행복이 어디 있으랴.
쿵쿵 지팡이를 짚으며 산을 내려오고 있다. 불가에서는 도를 깨치고 덕이 높은 사람을 선지식이라 한다던가. 어느덧 노송 세 그루가 내 가슴에 옮겨 와 선지식으로 우뚝 서 있다.
개구리 소리 / 김규련
지창(紙窓)에 와 부딪치는 요란한 개구리 소리에 끌려 들에 나와 서성거려 본다. 저녁 나절 몹시 불던 바람은 잠이 들고 밤은 이미 이슥하다.
모를 내기에는 아직 이르다. 물이 가득 잡힌 빈 논에는 또 하나의 밤 하늘이 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개구리 소리는 연신 하늘과 땅 사이에 고요를 뒤흔들고 있다. 와글거리는 개구리 소리에 물이랑이 일 적마다 달과 별은 비에 젖은 가로등처럼 흐려지곤 한다. 칩칩한 산이며 수목들이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다. 그들도 이 밤에 개구리 소리에 묵묵히 귀를 모우고 서 있는 것일까.
개골 개골 개골 가르르 가르르 걀걀걀걀.
산골의 개구리는 진달래가 피었다가 지고 제비꽃이 논둑에 점점이 깔릴 무렵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녹음 속에서 매미 소리가 울려퍼지면 개구리들은 이제 지친 듯 조용히 입을 다문다. 배가 올때는 더러 울기도 하지만 개구리의 한 해는 이미 저물어 간 것이다.
개구리 소리에는 가락도 없고 장단도 없다. 그저 시끄러운 울음소리의 단조로운 반복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허허로운 빈 마음으로 가만히 들어 보면 묘하게도 짜증이 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이 설레어 온다. 개구리 소리는 춥고도 긴 겨울을 땅밑에서 견디고 나서 다시 살아난 개구리들의 환희와 목소리이기 때문일까.
개구리 소리는 즐거운 소음이다. 만약 개구리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없다면 꽃이 피고 숲이 우거지고 개울물이 흐르며 산새들이 더러는 지저귄다 해도 이 산중은 얼마나 살벌하고 적막할 것인가. 어쩌면 정적이 지나쳐서 죽음의 공포 같은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산중 생활에서 고독을 달래보려고 요즘 밤마다 들에 나와 논둑을 오르내린다. 농가의 들창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무논 위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면 괜히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고향집 툇마루에서 어미니의 무릎에 앉아 듣던 개구리 소리를, 등에 찬바람을 느끼는 나이에 이 산골에서 다시 들어보는 서글픈 감격, 불효한 청개구리 삼형제 얘기를 들려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며, 감꽃 목걸이를 해 걸고 철없이 뛰놀던 옛 친구들의 목소리가 금시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산골에 와서 살면 맑고 은은한 자연의 목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메밀꽃이 피는 가을의 석양 들길에 발바닥이 가렵도록 들려오는 못풀 벌레 소리, 늦가을 깊은 밤에 외양간의 소가 먹이를 되새길 때 목에 달린 요령이 흔들려서 땡그렁 땡그렁 들려오는 그윽한 요령 소리, 오뉴월 긴긴 날 진종일 앞 뒤산에서 울어대는 뻐꾸기의 피울음 소리, 뜨락에 거목으로 서 있는 벽오동 잎에 여름 소나기가 후드득 듣고 지나가는 소리 --- 이러한 소리에는 항시 절묘한 여운이 감돌아 무한한 자연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개구리 소리는 그윽하지도 않고 은은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구리떼들이 깊은 밤에 산천이 떠나가도록 개골개골 울어대는 듣고 섰으면 어느덧 가슴이 뭉클해지고 마채내는 숙연해진다 개구리 소리에는 울고웃는 생생한 여항의 목소리가 있다고 할까. 아니며 정한에 사무쳐 흐느끼다 간 많은 서민의 목소리가 깔려 있다고 할까. 개구리 소리는 남의 불행과 고통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한까지도 더불어 슬퍼하고 아파하는 공감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나는 젊은 시절에 한때 몹시 가슴을 앓으며 수없이 각혈했다. 그리고 오랫동안의 안정과 약물요법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무슨 인연으로 얻은 크나큰 마음의 상처는 약물 복용으로는 도저히 가시게 할 수 없었다. 그럴 때 세월과, 신앙과, 음악은 구원의 신이었다. 나는 그 당시 베토벤이니 브람스의 심혼(心魂)에 열광했으며 드뷔시의 사라사테의 분위기에 감동했다. 음악이 주는 환희의 파도와 감격의 눈물은 마음의 상흔을 서서히 씻어 주었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의 울타리 밖에서 즐기는 환상과의 대화일지도 모른다. 음악의 소리에는 자기 망각의 묘한 선율이 있다. 그 선율은 모래 위에 깔린 많은 발자국을 지워주는 잔잔한 물결과 같다.
개구리 소리는 들떠 있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준다. 무엇인가를 생각게하고 자꾸만 깊은 곳으로 그 생각을 유도해간다. 음악의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허공속으로 증발시킨다면 개구리 소리는 자기의 참모습을 찾아 스스로 마음의 골짜기를 헤메게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최고의 이상경을 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이라 함은 번뇌의 불길을 불어서 끈다는 취소(取消 nirvana)의 뜻이 아닌가. 개구리 소리를 밤이 이슥하도록 혼자 듣고 있으면 드디어 열반의 경지에서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을 느끼는 순간을 맛보게 된다.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이러한 순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동양의 진수를 안다고 할 수 없으리라.
인류의 역사는 시간의 선 위에 굴러가는 소리와 모습의 함수관계라고 할까. 세상이 달라지면 소리도 변하고, 소리가 달라지면 세상도 변해갔다. 이제 이 지상에서 자연의 소리는 차츰 문명의 소리에 밀려나고 있다. 개구리 소리는 더욱 그렇다. 문명의 소리와 자연의 소리가 조화를 잃을 때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문명의 소리가 동(動)이라면 자연의 소리는 정(靜)이다. 그리고 개구리 소리는 선(禪)일지도 모른다. 개골 개골 개골 개골 가르르 걀걀 걀걀. 개구리 떼들이 연신 을고 있다. 나는 먼 훗날의 애환을 모르는 한 개 바위가 되어 해마다 제비꽃 필 무렵이 되면 개구리 소리에 부닺히며 무거운 침묵에 잠기고 싶다.
조롱박 타는 여인 / 김규련
늦가을 엷은 햇볕이 툇마루에 깔리고 있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여인이 등에 햇볕을 받으며 조롱박을 타고 있다. 두 발로 조롱박을 고정시켜 놓고 실톱으로 박을 타는 솜씨가 꽤 익숙해 보인다. 그 연인의 옆켠에는 싱싱하고 탐스러운 조롱박이며 금시 두 쪽으로 타놓은 것들로 작은 추수가 뒹굴고 있다. 그녀는 도시에 나가 살고 있는 아들 딸들이며 친구들이 표주박을 받아들고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면서 연신 톱질을 하고 있다.
조롱박을 다 타고 나면 씨앗이 들어있는 하얀 속을 드러내고 솥에 넣어 조롱박을 찔 모양이다. 쪄낸 조롱박은 잘 손질해서 햇볕에 말려야 한다. 뜨락 둘레의 돌담이며 닭장 지붕 위에는 아직도 풋풋한 조롱박이 달려 있다. 무서리가 두어 번 더 내린 뒤에 따들일 모양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빼어나게 잘생긴 놈 한두 개는 그냥 뒀다가 첫눈이 내릴 무렵 조심스레 따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년 봄 씨받이를 위해서 표주박을 만들지 않고 껍질을 잘 벗겨서 씨앗이 박혀 있는 둥그런 속을 그냥 그대로 처마 밑에 달아 두리라.
옛부터 큰 과실은 먹지 않고 새 생명의 씨앗으로 남겨두는 석과불식 碩果不食의 거룩한 슬기가 여기서도 엿보인다고 할까. 밤이 이슥하도록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여인은 즐거운 표정으로 솥에서 쪄낸 표주박에 마무리 손질을 하고 있다. 봄에 씨앗을 심고 가꾸어서 가을에 따들여 타고 찌고 손질해서 만들어 낸 표주박은 드디어 정성의 결실이리라. 아내의 손질을 곁에서 조용히 돕고 있던 남편이 넌지시 말을 건네 본다.
“임자,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구료.”
“당신 먼저 주무세요. 아이들이 표주박을 얼마나 좋아한다고요.”
몇 마디 대화가 오가다가 남편의 시선이 아내의 손에 와 멎었다. 거칠고 굵은 손마디, 찌들고 저승꽃이 핀 손들, 그 흔한 보석 하나 달지 못한 손, 그러나 저 손이 오랜 병고와 절망과 가난 속에서 이 가정을 지켜온 구원의 언덕이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남편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아내의 바쁜 일손을 괜히 꽈악 쥐어본다. 그리고 말이 없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이내 훤히 읽어보고 흐뭇한 표정으로 살며시 손을 빼낸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뇌리에 광망光芒처럼 스치는 지난날의 발자취.
젊은 날 암담했던 삶의 광야, 험준했던 고난의 산맥, 서러웠던 눈물의 강기슭, 상처를 입으며 흙탕물을 덮어쓰며 그래도 넘고 건너온 지천명知天命의 고갯마루, 때로는 분에 넘치는 축복 같은 것이 전혀 없지도 않았으리라. 그런데도 뼈에 사무치는 아픔의 흔적만이 왜 이 밤 따라 주옥처럼 빛나는 것일까.
산은 높아 귀한 것이 아니고 수목이 무성해서 귀하고, 들은 넓어 소중한 것이 아니고 곡식이 자라 소중하듯, 인간의 삶도 생명이 있어 빛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의 자국이 있어 빛나는 것일까. 두 사람은 서로가 미덥고 대견스러운 모양이다. 그리고 괜히 무엇인가에 감사라도 드리고 싶었는지 뜨락에 나와 서성거려 본다.
늦가을 밤하늘에 찬란한 별들. 마음의 뜨락에도 별빛이 쏟아진다. 상념의 의상을 훨훨 벗어 던지고 금시 지구의 맨 끝에 표표로이 서 있는 착각을 느껴본다. 시방 두 사람은 별을 우러러보며 말이 없다. 지복至福의 이 일순이 깨뜨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리라. 두메산골 허물어져가는 지붕 밑에서 부엉이 우는 깊은 밤에 이들이 표주박을 손질하다 말고 고요한 기쁨 같은 것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제 안주安住의 성城을 얻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안빈낙도 安貧樂道의 어떤 깨달음 때문일까.
찬바람이 몸에 스며온다. 두 사람의 발길은 정성의 결심이 뒹굴고 있는 불빛을 찾아 서서히 옮겨지고 있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이들의 가슴 사이에는 무한한 사랑의 대화가 오가고 있다.
평생을 인고와 순종과 헌신으로 일관해 오면서 괴이고 괴인 아내의 그 흥건한 눈물을 씻어주는 남편의 깊은 정.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집념과 성실과 노력으로 일어서면서 고달프게 흘려온 남편의 그 더운 땀을 식혀주는 아내의 마음의 손길. 어쩌면 이것이 애환을 같이해 온 부부의 참된 대화가 아닐까. 여기에 부질없이 언어가 있어 무엇하랴!
조롱박 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마무리 손질을 계속해 본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가슴속에는 끝내 가시지 않고 향불처럼 타오르는 한 가닥 상념이 남아 있다. 어쩌면 그것은 거룩한 비원悲願일지도 모른다. 비록 하찮은 잡초같이 살아갈지라도 기약없는 이승의 남은 여로旅路에 욕됨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까.
쌀그락쌀그락, 조롱박 속을 긁어내는 소리가 깊은 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다. 울고 웃으며 가야 할 삶의 길목을 짚어보고 더듬으며 연신 조롱박 손질을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어쩌면 묘하게도 닮아 보인다.
남녀가 부부의 인연으로 서로 만나서 오랜 세월을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살아가다 보면 모든 것이 닮아가는 것일까. 식성과 취미가 가까워지고 생각이며 성격이 비슷해지다가 드디어는 모습도 닮아가는 것이리라. 같은 모습의 반려자. 이것이 초로初老의 부부상일지도 모른다.
늦가을 밤은 이미 깊었다. 먼 데서 산짐승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두 사람은 잠을 잊은 채 서로의 깊은 애정을 담아둘 사랑의 표주박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의 알로카시아/김규련
거실 한 켠에 관엽식물 한 그루가 서 있다. 풍성한 잎새와 치열한 기세와 진한 녹색은 살아 있는 하나의 풍경이다. 부챗살이 깔려 있는 선명한 잎맥은 화사한 꽃 못지않게 관상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하트형의 특이한 모양에다 토란잎 같은 큰 잎새 그리고 아름다운 기상은 탈속의 기품을 지녔다고 하리라.
강렬한 생명력으로 집 안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는 알로카시아. 너는 언제나 천지의 마음을 고스란히 잉태하고 있다. 너를 보면 마음속에 숨어 있던 봄이 찾아와 아련한 세월의 향수를 즐기게 된다.
가랑잎이 물에 떠 흐르듯 나는 이제 팔순 후반의 강기슭을 스치고 있다. 그간 수많은 희비의 여울목을 헤쳐 나기도 하고 부침浮沈의 강변을 겪기도 했다. 한데도 청춘의 감성은 아직도 살아 있어 어쩌다 갈망과 사랑과 그리움으로 심란할 때도 있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정감情感으로 나도 모르게 눈물 그렁거리기도 한다. 이럴 때 의연한 너의 자태를 바라보면 허전하고 황량하고 외로운 마음이 안개 걷히듯 사라진다. 너의 청순한 모습, 밝고 맑은 숨결, 그윽한 숨소리는 집 안 공기를 말끔히 정화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부질없는 망념妄念까지도 깨끗이 씻어 주기도 한다.
식물에는 성장하고 번식하는 생혼生魂이 있고 동물에는 보고 듣고 느끼는 각혼覺魂이 있으며 인간에게는 소중한 영혼靈魂이 있다고 했던가. 땅에는 생혼의 식물이 있어 모든 생명체가 목숨을 이어간다. 생혼이 무성하지 않으면 지상은 죽음의 황무지가 되고 만다. 동물의 각혼이 인간의 지혜보다 더 슬기로울 때도 있다. 천재지변을 미리 알고 안전지대로 옮겨 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은 실존의 차원을 넘어 있는 정신세계이다. 알로카시아가 오늘따라 문득 이런 진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나의 알로카시아여!
오늘은 진종일 거실에서 너와 더불어 놀다가 드디어 나도 한 그루 알로카시아가 되었다. 너를 속 깊이 만나 말을 걸어 보려고 한다.
너와의 만남도 인연 때문이라고 할까. 몇 해 전 내가 무슨 문학상을 탔을 때 행운목 화분 하나가 축하 선물로 들어왔다. 이듬해 겨울 하룻밤 실수로 얼어죽게 했다. 너무 아깝고 죄스러웠다. 줄기만 남은 화분을 거실로 옮겨 놓고 살려 보려고 정성을 다했다. 하나 부질없는 일. 행운목은 소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아기 손톱 같은 떡잎 하나가 싹 트기 시작했다. 신비롭게도 그것이 초등학교 하급생의 키만큼 자라나서 오늘의 알로카시아가 되었다.
너에게는 생기生氣, 활기活氣, 윤기潤氣, 화기和氣, 정기精氣의 기운이 늘 넘치고 있다. 너를 볼 때마다 이 기운이 파동을 일으켜 내 몸속으로 파고 든다. 노쇠한 심신에 원기를 불어넣어 줘서 늘 고맙다고 하리라. 네가 보듬고 있는 침묵의 언어를 해독하고 싶구나. 너의 언어를 인간의 문자로 완벽하게 옮길 수 없는 것이 늘 한스럽다. 오독誤讀의 만용蠻勇을 무릅쓰고 시도해 본다.
너는 어떤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그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는 무상無相의 지혜가 있는 것 같다. 너는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무념無念의 슬기가 배어 있는 것 같다. 너는 세상의 선악, 귀천, 미추를 공空으로 돌리고 지난 일을 생각하지 않는 무주無住의 사상을 품고 있는 것 같다.
크게 깨친 한 선지식善知識이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하산한다. 근엄한 얼굴이 알로카시아 잎새 사이에 어른거린다. 이번에는 노장老壯같은 도인道人이 등장한다. 알로카시아 잎새 숲 속에 좌정해서 조용조용 말씀하신다.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펼치지 않는다.
기지機智로 천하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지 않는다.
총명聰明으로 실없는 것 구하려다 덕德에 누累를 끼치지 않는다.
재미가 쏠쏠하고 흥미가 진진하다. 어디서 선객仙客이 나타나서 선지식과 도인과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권력과 명예, 사치와 부를 곁에 두지 않는 사람은 청렴하다.
그것을 가까이 두고도 이에 물들지 않는 사람은 청렴하다.
권모술수를 모르는 사람은 고상하지만 알고도 쓰지 않는 사람은 더욱 고상하다.
터무니없는 환각이다.
알로카시아에 매료되어 잠시 넋을 잃었던 것 같다. 환각도 지나치면 노망老妄이 된다. 노망은 치매의 초기 증상이 아니던가. 겁이 덜컥 난다.
흩어진 정신을 하나로 모아서 알로카시아를 다시 차분히 응시한다. 알로카시아는 팔팔하게 살아 있는 한 그루 식물일 뿐이다.
자괴(自愧)의 독백 / 김규련
뜻밖의 전화가 왔다
내가 제1회 흑구(黑鷗)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한다. 뜬금없는 소식이라 당황했다. 기쁘기도 하고 영광스럽기도 했다. 허나 다음 순간 오히려 부끄러웠다.
한흑구 선생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뜻 깊은 상이지만 수상 소식에 평상심을 잃고 잠시나마 흔들려서 극구 사양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사람은 연령에 따라 삶의 지표가 있다고 하리라. 40대는 불혹, 50대는 지천명, 60대는 이순, 70대는 종심이다. 한데 80대와 90대 그리고 100대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나는 나름대로 80대는 무애(無碍) 90대는무치(無恥), 100대는 접신(接神)이라 여기고 있다.
나는 무애의 유역까지 흘러왔음에도 수상 소식에 걸려서 마음의 고요를 깨뜨린 것이 부끄럽다. 무엇보다 한 찰나지만 머릿속을 스쳐 가는 한 생각 '상금은 얼마나 될까. 친구들과 술 한잔 나눌 돈은 될까' 이것이 크게 부끄러웠다고 하리라.
수필은 관조의 문학인가 하면 사색의 문학이고, 성찰의 문학인가 하면 고발의 문학이고, 비평의 문학인가 하면 독백의 문학이고, 기행 문학인가 하면 토로의 문학이고, 감동의 문학인가 하면 예찬의 문학이기도 하다.
나는 어느 방향에서도 남달리 뛰어난 작품도 창작하지 못하고 상을 받는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두보(杜甫)는 글짓기 요령을 가르쳐 달라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권의 책을 읽으면 붓에 귀신이 들린 듯 글이 술술 잘 씌어질 것이다.
나는 이런 열정도 없고 공부도 없으면서 파한(破閑)의 여기(餘技)로 써 모은 수필로 큰 상을 타게 되어 부끄럽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책상 앞에 앉아 오랜 시간 공부를 해서 복사뼈가 세 번 구멍이 났다(?骨三穿)고 했다 .
추사(秋史) 김정희는 벼루를 갈고 갈아서 열 개나 구멍을 내고 붓은 쓰고 또 써서 천 자루나 뭉덩거렸다(磨穿十硯 禿盡千毫)고 했다.
수필 창작은 학문 연찬과 서도 연마와는 달라도 그들의 정신은 본받아야 하리라. 한데도 나는 그들의 흉내도 내지 못하고 구름처럼 떠오르는 편편상(片片想)을 주워 모아 가볍게 글을 지어 상을 타게 되니 부끄럽다.
수필은 작가의 내면 풍경을 고스란히 들춰서 비춰 주는 거울이다. 수필집을 보면 그 작가의 살아온 흔적, 품고 있는 꿈, 사고의 깊이, 감성의 순도, 지성의 날카로움, 교양의 수준, 영격 지수(靈格指數)의 높이 등,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나 타고난 문재(文才)에 다독, 다작, 다상량을 하면 어느 정도 수준의 수필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언제 읽어도 읽을 때마다 깊은 산사의 종소리 같은 울림이 번져 나온다. 행간에는 사상의 강물이 흘러내려 엄동의 매화 같은 암향이 묻어난다. 다 읽고 나면 잔잔한 감동이 닫힌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여운으로 길이 남는다. 이런 작품은 고결한 인품이며 탁월한 식견이며 깨끗한 영혼을 지닌 사람만이 창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덕망도 학식도 청순한 영혼도 없는 촌로인데 어쩌다 큰 상을 차지하게 되어 부끄럽다.
옛 선지식(善知識)들은 말하기를 사람의 생명은 귀천이 따로 없고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인품은 영격 지수에 따라 축인(畜人)이 있고 범인이며 재인(才人)이 있으며 학인, 덕인, 인인(仁人)도 있다. 또 더 올라가면 달인이 있고 도인도 있으며 가장 높은 위치에 진인(眞人)이 있다고 했다.
영격 지수를 높이자면 고전 읽기와 심오한 사유, 명상과 수행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내공도 쌓지 않고 상을 타게 되어 부끄럽다.
젊은 시절 나는 남보다 앞서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누리려고 뛰고 설치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자 마음의 창가에 세 개의 등불이 밝혀졌다. 지분(知分) 지족(知足) 지지(知止)가 그것이다. 내가 과분한 상을 받게 되어 삼지(三知)의 슬기를 거스르는 것 같아 부끄럽다.
대구시 남산동 한 귀퉁이에 외국인 신부 묘지가 있다. 묘지 입구에 거대한 돌기둥 두 개가 서 있다. 그 기둥에 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베(HODIE MIHI CRAS TIBE)라는 라틴어 명언이 음각되어 있다. 영어로는 "Today for me, Tomorrow for you"라고 번역되는 모양이다.
"오늘은 내 날이요, 내일은 네 날이다."
만고의 진리가 함축된 이 명언 속에는 오늘은 내가 상을 받지만 내일은 네가 상을 타게 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 순환의 원리가 이어갈수록 나의 부끄러움도 연기처럼 사라지길 바란다.
임종국의 『친일 문학론 』에는 일제 치하에서 명색이 문학가라 부를 만한 사람 중에서 친일 문학에 관계하지 않은 문인은 한용운과 변영로 그리고 한흑구 등 몇 사람에 불과하다고 했다.
애국과 지조와 은둔의 문사 한흑구 선생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흑구문학상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강마을 / 김규련
오늘 아침 출근길에 문조 한 마리가 죽어서 길섶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무서리가 내린 강변에 어린 물새 한 마리가 죽어 쓰러진 것을 보고 치마폭에 싸다가 양지에 묻어 주던 소녀가 생각난다. 이듬해 봄에는 그 무덤을 찾아가 풀꽃을 뿌려 주던 그 천사의 동심이 오늘 황량한 내 가슴에 강물로 출렁인다.
강마을 아이들은 강변의 물소리를 익히며 자란다. 강물 소리에도 계절이 깃들여 봄이 오고 가을이 간다.
강물에도 생명이 있다. 추운 겨울 얼음이 겹으로 강 위에 깔려도 강심 어딘가에는 숨구명이 있다. 이 생명의 구멍으로 강물은 맑은 하늘의 정기를 호흡하며 겨우내 쉬지 않고 흐른다. 겨울의 강물 소리는 마음으로 듣는다. 차가운 강바람이 소창素窓을 칠 때 떨리는 문풍지에서 문득 오열처럼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듣는다.
우수가 지난 어느 날 새벽, 찡하고 나루터 빙판에 금 가는 소리가 나면 비로소 강마을의 한 해는 시작되는 것이다. 강이 풀리면 금조개 빛깔의 겨울 강물이 청자빛으로 변해 가고, 잠에서 깨난 물고기들은 꼬리를 쳐 본다. 강마을의 봄은 강물의 빛깔과 물소리에서 오는 것일까. 막 껍질을 깨고 난 병아리의 삐약거리는 소리가 강변에서 번져 나오면 산과 들은 곧장 강물빛깔을 닮아 간다. 강마을 아이들은 감동과 사랑으로 이 신비로운 질서에 동하면서 기다림과 설레임으로 봄을 맞는다.
봄이 오면 이른 아침의 강나루는 아이들의 공동 소세장이다. 저마다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김이 무럭거리는 강물을 휘저으며 묵은때를 씻는다. 부리가 길고 몸매가 날씬한 물새가 저만치 수면을 스치고 허공을 찌르듯 솟아오른다. 가지색 날갯깃에 아침 햇볕이 부딪쳐 찬란할 때 동심은 봄이 온 기쁨에 넘쳐 물새로 비상한다. 기나 긴 봄날을 함께 놀아 줄 동무가 찾아 온 것이다. 감격과 환희를 가득 싣고.
강마을 아이들의 놀이는 곧 강물에의 애무다. 조약돌을 주워 강심에 팔매질을 해 본다. 풀잎배, 나뭇잎배, 때로는 나무껍질로 만든 배를 물 위에 띄워 보낸다. 어쩌면 미지의 세계로 한없이 가고픈 동심을 띄워 보내는 것이리라. 때로는 낚시를 드리워 고기를 건져 올리고, 강조개를 캐내기도 한다. 그러나 캐내고 건져 올리는 것이 어찌 강조개며 고기뿐이랴.
아이들은 강마을에 있어야 할 자연의 일부라 할까. 강물과 모랫벌, 물새와 고기떼, 산과 들, 나룻배와 하늘 그리고 아이들, 그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 자연의 조화다. 이 자연의 조화에 깊은 애정을 느낄 때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고향의식이 싹튼다. 훗날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 삶의 길목을 고달프게 걷다가, 어느 날 밤 가슴속에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듣고 문득 향수에 젖으리라.
어름의 강마을은 조물주의 장난이 허락된 방종의 도시라 할까. 목이 타는 한 발로 모랫벌을 사막으로 만드는가 하면, 큰 홍수가 나서 한 마을을 자취도 없이 쓸어 가기도 한다. 그러나 하동(河童)들은 그런대로 마냥 즐겁다. 열사의 강변에서 가뭄을 잊고 마음껏 물에서 노는 것은 즐겁다. 동화 속의 왕국을 모래성으로 쌓아 올려, 공상의 날개를 펼쳐 보는 것은 더욱 즐겁다. 홍수가 나면 산마루에 올라, 함성과 군마와 쇠북소리를 내며 밀어닥치는 바다 같ㅇ든 흙탕물의 장관에 넋을 잃는다. 날씨가 고르면 강마을은 밤낮이 없는 이방인의 거리로 변한다. 낯설은 풍습이 강마을 아이들의 눈을 난시로 만들어 놓는다. 철이 바뀌면 이방인들은 훌쩍 떠나가 버려도 그들이 버려둔 풍습의 유산은 동심의 한 모서리에 갈등 같은 묘한 멍을 오래 남겨둔다.
강마을에는 추수가 없다. 농토가 귀한 이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고기를 잡거나 목기며 죽세품이며 돗자리를 만들어 추수 없는 서러움을 달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풍요한 추수가 있다. 강물은 많은 사연과 산 그림자를 싣고 끝없이 흐른다. 갈대가 하늘거리는 강변에 모여 앉아 강물의 여로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느덧 저마다의 가슴속에도 강물이 출렁댄다. 강 건너 아득히 먼 산 너머로 해가 저가는 것을 바라보거나, 구름 사이로 깜박깜박 보이는 기러기떼를 지켜보는 것, 또는 집에 돌아갈 것을 잊고 바람소리 나는 대나무 숲을 마음껏 배회해 보는 것, 이런 것들이 모두 강마을 아이들에게 지순의 꿈을 길러 주는 것이리라.
나는 어린 시절을 강마을에서 자랐다. 남해대교에서 섬진강을 따라 70리, 뱃길로 한나절을 가면 H포구가 있다. 이 포구 어느 산기슭에 울먹이며 물새 한 마리를 묻어 주던 소녀도 이제 불혹의 유역을 흐르고 있을 것이다. 낙엽으로 지는 세월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애환의 기슭이며 영욕의 여울목을 그녀는 지나갔을까. 사랑도 미움도 서러움과 희열도 어쩔 수 없이 흘러간다는 강물의 슬기를 사무치게 느꼈으리라. 강물의 흐름이 곧 여래(如來)의 마음인 것을.
들풀(雜草) / 김규련
뽑아내고 또 뽑아내도 들풀은 자꾸만 돋아났다. 들풀의 끈질기고 모진 생명력은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잔디밭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선 들풀 따위는 여지없이 뽑아 없애야 했다.
나는 한때 새로 창설되는 연수기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 때 신축 건물 앞뒤 넓은 공간에 잔디밭을 만들면서 들풀 때문에 홍역을 치뤘다. 가을에 잔디를 사다 정성들여 심어뒀더니 이듬해 봄에 들풀이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어물어물하는 동안에 잔디밭은 들풀로 뒤덮였다. 불량배의 무리 같은 들풀이 두 팔을 휘젓고 횡포를 부리니까, 잔디는 땅에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지 않은가. 부녀자들을 십여 명 놉을 해서 들풀 사냥에 나섰다. 열을 지어 앉아 한 열흘쯤 들풀 소탕을 하고 나니 비로소 잔디는 생기를 얻어 파릇파릇해졌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하랴. 얼마 동안 방심한 사이 잔디밭은 또 들풀밭으로 변질하고 있지 않은가. 도리 없이 부녀자들을 또 고용해서 들풀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이렇게 들풀과의 전쟁을 여러 차례 치루는 사이 봄이 가고 가을이 지나 한 해가 저물어갔다. 무섭게 침노하던 쇠풀이며 억새며 질경이, 엉겅퀴, 클로버… 등 들풀들은 거의 퇴치되었지만 잔디도 힘차게 번식하지 못해 붉은 흙이 그냥 드러나 있었다.
이렇게 들플과의 싸움은 두 해 동안이나 이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들풀의 세력은 꺾여갔다. 삼 년째 되는 해 봄, 드디어 잔디밭은 제대로 완성됐다.
같은 모양, 같은 빛깔, 같은 질의 잔디가 수천, 수만 포기 모여 서로 어깨를 부비며 번식해 가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시간이 꽤 흘렀다. 근년에 와서 나는 파적과 건강을 위해 산과 들을 빈번하게 나들이 한다. 그 때마다 버릇처럼 숲과 나무를 바라볼 뿐 들풀에는 각별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번은 저만치 들풀 속에 주홍빛 패랭이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문득 발이 멎었다.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저 아름다움이 어디서 왔을까 놀라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들풀에도 애정의 눈이 띄게 됐다고 할까. 마침내 나는 산야를 나들이 할 때마다 들풀이며 들꽃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겨났다. 들풀은 씨 뿌리지 않고 애써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는 천덕꾸러기의풀이라고들 한다. 허나 곰곰이 살피고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는 것 같다.
들풀도 씨알 하나하나가 여느 식물의 그것같이 흙 속에서 자신을 썩혀야 한다. 생명을 태동시키고 뿌리를 내리며 싹을 틔우기까지는 똑같은 신고를 겪어야 한다. 들풀은 결코 지천한 풀이 아니다. 저마다 특성을 가진 귀한 약초들이 아닌가. 독초도 쓰임에 따라 약초가 된다고 한다. 사람이 그것을 잘 모를 뿐이다.
들풀도 꽃이 핀다. 들꽃은 난초나 백합이나 국화처럼 향기롭고 세련되고 화려하지 못하다. 그래서 사람의 눈길을 오래도록 붙들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들꽃 잎을 따서 강물에 띄우며 놀던 친구들을 그리는 마음으로 감상해 보라. 소박한 듯 곱고 단순한 듯 우아하고 조잡한 듯 순수한 들꽃의 자태에 푹 빠져들 것이다.
들풀이 화단이나 논밭에 자라면 해초害草라 하여 여지없이 뽑혀 버림을 당한다.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다. 허나 들풀 없는 땅을 상상해 보라. 비록 수목이 울창하고 과수목이 빽빽이 서 있고, 전답에 오곡이 무성하게 자란다 하더라도 땅의 속살이 여기저기 드러나서 막 입은 여인처럼 얼마나 천박하고 황량할 것인가.
들풀이 없는 땅은 곧 사막이요 구름이 떠흐르지 않는 하늘과 같으리라. 때때로 구름이 일지 않는 하늘은 이미 하늘이 아니다.
들풀은 땅의 지킴이다. 폭우가 쏟아져도 들풀이 있어 흙이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들풀은 마침내 거름이 되어 땅을 기름지게 한다. 들풀이 우거지면 온갖 새들이 그 속에 둥지를 틀고, 뱀이며 미물들이 쉼터를 마련한다. 공기가 맑고 깨끗해지는데도 어찌 들풀의 역할이 없다고 할 것인가.
어쩌다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고, 폭풍이 불고 장대비가 쏟아질 때가 있다. 이럴 때 들풀은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 의지하고 함께 흔들리며 참고 견딘다. 그것도 잠시, 악천후는 이내 소멸해 버린다. 마치 폭정의 왕조가 무너지듯이. 들풀은 여전히 살아 남아 싱싱하게 목숨을 이어간다.
흔히 들녘이나 늪이나 산등성에서 들풀의 바다를 만날 때가 있다. 이 때 자신도 한 포기 들풀이 되어 그들과 같이 숨쉬며 바람결에 나부껴 보라.
거기엔 거짓과 속임수로 얼룩진 인간의 사구死句가 아닌 활구活句가 숨어 있음을 보게 되리라. 활구는 곧 시요 설법이요 진리 그 자체가 아닌가.
서로 종種이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꽃도 다른 잡다한 들풀들이 한데 모여 화목하게 어울리는 것을 보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표상 같기도 하고, 육화경六和敬의 모습 같기도 하다.
불현듯 들풀의 아름다움과 은혜로움과 지혜로움이 내 가슴에 큰 울림으로 번져온다.
난향(蘭香)의 향연 / 김규련
난초가 몸을 풀었다.
산고를 견디며 대공을 밀어올리기 나흘, 마침내 순백의 영롱한 꽃을 피웠다.
철골소심. 너는 가늘고 긴 잎새를 쭉쭉 뻗어내어 그 맵시가 청초하고 날렵하다. 튼실하고 짙은 광택이 빛나서 철골 같은 굳센 느낌을 준다. 꽃 색은 백설 같은데 그 향기 깊고 그윽해서 소심이란 이름을 얻었나 보다.
모든 식물은 흙에 뿌리를 내린다. 허나 너는 모래, 그것도 깨끗한 모래 톱에 뿔리를 서려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하지 않고 우로(雨露)를 받아 산다. 그것이 너의 본래 생리며 기품이다.
철골소심의 향기는 십리에 퍼진다고 옛 선비들은 너를 두고 향문십리(香聞十里)라 했던가.
너의 꽃떨기는 순수하고 깨끗한 우주의 정기에서 태어났다. 나는 기쁨으로 너를 맡기 위해 몸과 마음을 삼가 기다렸다. 너의 처소인 베란다며 나의 거실이며 침실도 정갈하게 손질해 뒀다.
부엌에서 잡냄새가 나지 않도록 마음을 쓴다. 내가 신앙하는 절대자에게 조석으로 바치는 인조향도 너의 은은하고 신비한 향기로 바꿨다. 아침저녁 수시로 확확 풍기는 너의 향기는 내 서실에 가득 스며들어 문심(文心)과 문정(文情)으로 흘러내린다.
너의 두 대공에 달린 꽃망울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피었다가 마침내 날개 돋친 흰 나비가 되어 은하로 날아오른다. 잔해는 바닥에 남겨두고 무두가 하늘로 승천하는 보름동안 나는 난향의 향연을 즐기려 한다.
창밖에는 유월의 산과 들이 짙은 녹음으로 창해를 방불케 하고 있다. 망초꽃, 제비꽃, 참나리꽃 등, 여름 꽃들이 손짓해도 문 밖 출입을 삼가고 진종일 너와 마주 앉아있다. 사무치게 그리던 정인을 만난 듯, 바라만 봐도 내 영혼이 맑아지는 이 법열을 어찌하랴
사위가 어둠에 묻혔다. 새벽이 다가오도록 잠이 오질 않는다. 막설차를 달여 한 모금 입안에 깔아본다. 오늘밤은 나를 괴롭히는 불면증이 되려 축복이라 할까.
은근한 난향, 창에 부딪혀 쏟아지는 달빛, 천연한 대금소리, 적멸이 흐르는 고요, 부질없이 쌓였던 생의 허무며 무상이며 한이 녹고 삭고 씻겨 내린다. 텅 빈 가슴으로 느껴보는 이 충만감. 철골소심, 너의 공덕이 크다고 하리라.
너와 내가 한 몸이 되어 동거할 동안 내 마음은 이따금 밖으로 뛰쳐나와 꿈과 환상의 세계를 유량해 봤다. 구름 따라 흘러가는 풍류객이 되어 산천경계 유람하며 음유시인이 되어봄도 즐거웠다.
오늘은 우객(羽客)이 되어 명산대천을 탐방해 보려 한다. 우객은 옥황상제를 신봉하며 언젠가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귀천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 꿈이 아니던가. 신라의 천재, 우 불 선을 통달한 고운(孤雲) 최치원이 생각난다.
그는 신분의 벽에 박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상을 등지고 신선의 길을 택했다. 경남 하동 화개동에 마지막 시 한 수 남기고 지리산으로 자취를 감췄다.
전설 같은 우객은 흉내도 낼 수 없어 생각을 지워버리고 선객(禪客)의 길을 나서본다. 무문관(武門關) 수행에 참여해 보려고 백담사 무금선원(無今禪院)을 기웃거린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찰나로 시간의 흐름이 멈춘 곳, 무금의 뜻이 깊어 마음이 끌린다. 좁은 독방에 몸을 가두고 외부와 단절한 채 화두 하나 들고 목숨 건 수행을 해야 한다. 하루 한 끼 공양과 묵언정진-,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어 발길을 돌린다. 어쩌면 속인은 속인답게 사는 범부의 삶이 행복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남은 철골소심의 꽃 한 점이 뚝 떨어진다. 극락에 산다는 묘음조(妙音鳥)의 노래 같은 낙성(落聲)을 내면서.
(김규련수필집)
말(言語) / 김규련
말은 도구다.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생활도구는 말이다. 사람은 말로써 의사 소통을 한다. 사물과 상황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말로써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비로소 문명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렀다. 문자도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말은 문자보다 먼저이고 쉽고 편리하고 강하고 빠르다. 다만 문자보다 시공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말은 힘이다.
적절할 때 적절한 말 한 마디가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암흑 속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광명을 준다. 망설이는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 비탄에 젖어 울고 있는 사람에게 환희를 준다.
불교에는 육바라밀이라는 수행 덕목이 있다. 그 첫째가 보시다. 재물을 나눠주는 것은 재보시요, 가르침을 나눠주는 것은 법보시다. 그런데 재물도 아니고 가르침도 아닌 말로써 다른 사람에게 용기나 희망이나 아니면 위로나 지혜나 기쁨을 줄 때 그것을 언사시라고 하지 않는가. 천냥 빚도 말만 잘 하면 갚을 수 있다는 속담은 말의 위력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말에는 부정적인 힘도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타인의 가슴에 큰 상처를 줄 수가 있다. 말 한 마디 실수가 평생의 우정을 깨뜨릴 수도 있고, 실없는 농담 한 마디가 행복한 가정을 파괴할 수도 있다. 간단한 말 한 마디로 남의 급소나 약점을 찔러 죽게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이 생겨나지 않았는가.
말은 인격이다.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 똑같은 두두, 물물, 사사, 건건, 초초, 화화를 보고도 느끼고 생각한 바를 표현하는 말에서 고매한 인격과 평범한 생활인 그리고 천박한 잡배의 모습이 나타난다.
말은 세상의 거울이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무심코 주고받는 말에 그 시대의 인심이 비쳐 보인다. 세상이 험악하면 말도 따라 험악해지고, 세상이 태평성대가 되면 말도 부드럽고 순하고 바르게 된다.
우리 시대의 말은 어떤 모습일까. 극단의 이기주의와 흑백논리에 멍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삐뚤고 꼬인 사례를 들어본다.
내가 인사하면 예의라 하고 남이 하면 아부라 한다. 내가 어울리면 화합이고 남이 하면 패거리라 한다. 내가 화투치면 오락이고 남이 하면 도박이다. 내가 받으면 떡값이고 남이 받으면 뇌물이다. 내가 바람 피우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사자후고 남이 하면 개 짖는 소리다. 내가 터뜨리면 진실이고 남이 하면 음해이다. 내가 하면 협조고 남이 하면 편들기다. 내가 하면 해명이고 남이 하면 물타기다. 내가 하면 용기고 남이 하면 막가파다. 내가 하면 긴급조치고 남이 하면 깜짝쇼다. 내가 하면 검증이고 남이 하면 흠집내기다. 내가 머뭇거리면 여유이고 남이 하면 우유부단이다. 내가 하면 기백이고 남이 하면 와일드다. 내가 하면 현명하고 남이 하면 교활이다. 내가 하면 구국의 결단이고 남이 하면 밀실의 야합이다. 내가 하면 우국충정이고 남이 하면 탐욕이다…….
이런 고약한 말버릇이 어디에서 왔을까. 이쯤 되면 정(正)과 사(邪), 선(善)과 악(惡), 진(眞)과 위(僞)가 따로 없다. 다른 사람은 언제나 그릇되고 나는 언제나 바르고 옳고 참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부터 삼사일언(三思一言)의 지혜로 말을 아끼고 바르게 쓰는 버릇을 길러야겠다. 생활인의 지혜로서 으뜸이 되는 것은 사성언(四聖言)이라 하지 않았던가.
보지 않았으면 보지 않았다고 말하라. 듣지 않았으면 듣지 않았다고 말하라.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말하라. 깨닫지 못했으면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라.
우리가 공부해야 할 것은 어찌 사성언뿐이겠는가. 참말하는 진어(眞語), 바르게 말하는 정어(正語), 실다운 말을 하는 실어(實語), 속이지 않는 불광어(不言狂語) 거짓말 안하는 불망어(不妄語) 등을 일상화해서 우리의 언어부터 순화시켜야 되지 않을까.
때로는 이심전심으로 전달되는 무언의 언어가 더 정곡을 찌른다. 석가가 영상회상에서 법좌에 올라 법문을 하기 앞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들어 보이자, 아무도 그 뜻을 몰랐다. 오직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했다. 그로써 석가는 가섭에게 교외별전으로 불교의 진수를 전해 줬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염화미소(拈花微笑)가 아니던가.
묻는 말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아니 하면서 무언의 응답으로 진리를 설파할 수도 있다.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는 도부(道副), 총지(摠持), 도육(道育), 혜가(慧可)라는 뛰어난 네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어느 날 달마는 머지 않아 열반할 것을 깨닫고 교권을 미리 물려주려고 네 제자에게 그 동안 깨친 바가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저마다 도가 어떻고 마음이 어떻고 공이 어떻고 장황하게 말을 했다. 그러나 혜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승 앞에 나아가 큰 절을 올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묵묵히 앉았다. 그런 그에게 달마는 가사를 전수하고 그를 선종의 제2조(第二祖)로 삼았다. 이를 두고 지언무언(至言無言)이라 할까, 아니면 무언이무한언(無言而無限言)이라 할까.
말은 사람만의 전유물일까. 어쩌면 모든 짐승, 모든 미물까지도 저들 나름대로 말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불가에는 찰설(刹說), 중생설(衆生說), 삼세일체설(三世一切設)이란 말이 있다. 산하대지, 일월성신이 말하고 중생이 말하고, 과거, 현재, 미래 일체 존재가 다 말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말을 바르게 하는 생활질서도 세워야 하지만 바르게 듣는 지혜가 더 있어야 하겠다. 심이(心耳)가 있어 자연의 목소리에 숨어 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은 천지의 기를 뚫고 나오는 것일까
햇볕과 바람, 물과 땅에 온기가 돈다. 누리 가득한 초목의 새싹에서 열여섯 살 소녀의 입술 같은 봄이 얼굴을 뻘쭘히 내민다.
산수유 꽃, 생강나무 꽃, 수달래… 온갖 꽃들이 향기를 흩뿌려 남아 있는 냉기를 밀어낸다. 산새며 들짐승이며 사람들, 모든 생령들이 생기를 얻어 저마다의 몸짓에 힘이 넘친다. 마침내 초록 빛깔이 밀물마냥 번져와 온 산야를 물들였다.
나는 신록이 향연을 펼칠 때와 갈잎이 귀토의식을 마감할 무렵이면 광기를 참다못해 팔공산에 오른다. 산허리를 감도는 순환도를 따라 파계사 방향으로 걷고 있다.
오늘은 일요일. 상춘객과 승용차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웅장한 신록의 바다와 풋풋한 내음, 뛰어난 산세의 위용과 신묘한 산정기, 사람마다 눈빛이 빛나고 미소 짓는 밝은 표정들이다.
풍진 세상에 살면서 시달리고 들볶이고 부대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불안, 근심, 좌절, 분노, 얼룩진 마음을 모두 벗어놓고 산에 온 까닭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때 묻지 않은 자신들의 영혼을 봤기 때문일까.
등산복 차림의 젊은이 한 무리는 떠들썩 노래를 흥얼거리며 능선을 향해 오르고 있다. 가족끼리 온 사람들은 햇볕에 앉아 도시락으로 마음에 점을 찍고 있다. 늙은이들은 숲속 광장에서 팔을 흔들며 거닐다 심호흡을 즐기고 있다. 이방인 몇 사람은 찬란한 한국의 봄에 경탄하듯 두리번거리고 있지 않는가.
나는 후미진 계곡, 바위에 올라 숨결을 고르고 있다. 비로소 나무 잎새들이 흔들리는 소리며 미세한 벌레 소리며 물소리가 들려온다. 산새들의 지저귐은 연신 빗물처럼 쏟아져 내리고 윤기 반들거리는 신록에선 녹즙이 뚝뚝 듣는 것만 같다.
힘이 없으면서 하지 아니함이 없는 대우주의 섭리를 감지해 보려고 마음을 연다. 말함이 없이 아니하는 말이 없는 만물의 무언설법을 들어보려고 심이心耳를 찾아본다. 문이 없으면서 깨달음의 문이 처처에 있음을 모르는 나의 우둔을 개탄한다.
봄은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희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봄에도 그늘이 있고 그림자가 있으리라. 봄이면 그리움 때문에 슬프고 아프고 서러운 사람들도 있다.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영상이 동공에 어린다. 어느 해 봄, 깊은 밤에 퇴계선생이 매향에 취해 잠 못 들고 집 뒤란을 거닐다 저만치 맏며느리 방에 불이 밝혀져 있음을 본다. 가까이 다가가자 소곤소곤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 야심한 밤에 홀로 있는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문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본다.
짚단을 뭉치고 천을 입혀 만든 남편의 형상을 앉혀두고 술상을 차려놨다.
"무정한 사람, 무심한 사람. 꽃 같은 나를 혼자 남겨 두고 그대 먼저 먼 길 떠나다니.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어떡하라고. 이 야속한 사람아, 매정한 사람아…" 흐느끼면서 술을 따르고 있지 않는가.
퇴계선생은 울컥 목이 메었다. 윤리가 뭣이기에, 도덕이 뭣이기에, 젊디젊은 청상을 밧줄로 묶고 옥에 가둬 평생 수절의 고통을 안겨준단 말인가.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는다. 다음날 사돈을 모셔 와서 거부하는 것을 억지로 뿌리치며 며느리를 친가로 보내준다. 그리고 개가의 길을 열어줬다. 자유롭게 열려 있는 요즘 세상에도 이런 비극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절집을 돌아보고 내려온다. 금강경을 요약하고 압축해서 한 글자로 표현하면 '비非'자가 된다고 설파한 어느 선지식 모습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마을 옆을 지나오다 큰 똘배나무를 본다. 떨어져 있던 꽃잎들이 바람에 쓸린다. 다음 순간 불현듯 눈앞에 환상이 나타난다.
옷자락 붙들고 울며 놓지 않는 정인을 차마 뿌리칠 수 없어 머뭇머뭇 멈칫거리며 먼 하늘을 바라보는 한 풍류객이 있다. 그는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요 여인은 부안扶安의 명기 매창梅窓이 아니던가. 기약 없이 떠난 임은 임진왜란이 거의 끝나가는 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님 그리워 눈물짓던 그녀는 사무치게 애틋한 시를 남긴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의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황홀한 이 봄에 떠나 있는 님을 연모하는 마음, 타국에서 일하는 약혼남을 기다리는 마음, 이국에 억류된 남편이 풀려나기를 기도하는 마음, 이런 안타깝고 애절하고 절박한 마음을 헤아려 본다.
하산하다가 무심코 뒤돌아본다. 푸른 산은 여여한데 웬일일까 뜻밖에 로마의 교외 짙은 숲이 떠오른다. 그 숲에서 한 쌍의 남녀가 사랑을 속삭인다.
"우리는 별에서 내려와 여기서 만났군요."
"그대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키스로 잠 깨운 데지레 왕자님입니다."
남자는 독일의 젊은 철학자 니체요 여자는 독일계 러시아 장군의 딸 루 살로메이다. 그녀는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 심리학, 신학을 공부하는 지성과 미모를 갖춘 당시 유렵의 신여성이 아닌가. 뜨거웠던 사랑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들은 헤어진다. 사람의 감정은 대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에 의한 것이고 그 효력은 1년 6개월 지속된다고 했던가.
루 살로메는 그 후 여러 명망가의 가슴을 전전하다 장미 시인 릴케를 만난다. 니체는 상처를 크게 입고 평생을 독신으로 산다.
우리나라 고위 공직자 한 분이 사련邪戀으로 인생을 망가뜨리는 아픔이 겹쳐 보인다고 할까.
봄날은 거침없이 가고 있다. 청춘도, 꿈도 사랑도 가고, 절망과 비애도 간다. 흘러가는 것이 어찌 이것들뿐이랴.
봄의 그림자도 가고 말 것이다.
고백 / 김규련
그대는 나와 목숨을 함께 할 단 한 분의 친구입니다.
내가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그대는 내 곁에 있어줬습니다. 내가 폐를 앓으며 생피를 토해낼 때도 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내가 꽃 비 흩날리는 환희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나를 반기며 따라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팔순의 유역까지 흘러왔습니다. 그간에 그대는 세상 풍파에 흔들리고 부대끼고 씻겨져서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여물고 안팎이 환히 트여졌으리라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에 금이 간 것 같습니다. 때때로 그대의 마음과 말과 몸짓이 서로 어긋나서 따로따로 놀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늙어감에 따라 그대는 더욱 노회하고 교묘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진실과 거짓이 엇비슷해졌습니다.
그대는 요즘 글에서 한 소식 얻은 도인처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연 따라 무심히 이승에 왔으니, 자연 따라 살다가 자연 따라 무심히 가버리면 됐지, 슬플 것도 없고 기쁠 것도 없다. 걸핏하면 병원에 가고 수시로 건강 식품 찾아먹으면서 말입니다. 삶과 소멸, 사랑과 미움, 부귀와 빈천… 이런 것들에 걸리지 않고 바람같이 구름같이 흘러가리라. 이 것이 그대의 참모습입니까, 아니면 희망일 뿐입니까.
그대는 오늘 산책길에서 하늘에 나부끼는 그대 삶의 명세표를 봤습니다. 남루하고 부끄럽고 슬펐던 지난날의 발자취가 불도장 흔적으로 아프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대는 하동 섬진강변, 쇠락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데다가 비범한 재주도 없고 책가방 끈도 짧아서 어릴 적 꿈이래야 고향 초등학교 훈장이 돼서 들풀처럼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는 나이 들자 일자리를 얻으려고 시험을 쳐서 고등학교 교원 자격을 따냈습니다. 바람에 풀 씨 날려가듯 그대는 고향을 떠나 대구 땅에 와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십여 년 간 중등학교 훈장 노릇도 즐겁게 잘 해냈습니다.
그대는 불혹의 유역을 지나갈 무렵 가슴 밑바닥에서 욕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장학사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법보다 권위가 더 힘쓰던 유신 시절에는 장학사가 교사의 꽃이었습니다. 그대는 마침내 애씀과 요행으로 연구사와 교감을 거쳐 그 꽃으로 변신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대는 꽃이 된 그날부터 공차, 공술, 공밥을 즐기는 버릇이 생겨났습니다. 그 버릇은 강렬한 최음제와도 같았습니다. 대구 시내 중등학교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건네주는 촌지봉투를 서슴없이 받아 들었습니다. 그러고도 청백리의 탈을 쓰고 얼마나 깨끗한 척했습니까. 그대는 악취 풍기는 독초 꽃이었습니다.
그대가 학교장으로 돌아와서는 누가 봐도 감복하도록 연극 또한 얼마나 잘했습니까. 혁신의 깃발을 흔들며 학교를 명문 대학 입학 선수 만드는 공장으로 바꿔놨습니다. 학생과 교사들을 드글드글 볶아서 세뇌시켰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는 외침이 절로 튀어나오게 됐습니다. 그렇게 한 속 깊은 뜻은 그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대는 두 고을 교육장을 지내면서 기껏 한 일이라곤 혈세 축내는 일뿐이었습니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책이나 뒤적이고 잡문이나 긁적거렸습니다. 그러다 싫증나면 관내 여기저기 풍광이나 즐기며 돌아다녔습니다. 그것도 출장이라고 여비도 타내지 않았습니까. 명절이 되면 세찬이란 이름의 뇌물도 받아 챙기며 시류라고 자위했습니다. 그대는 가긍한 위선자였습니다.
이제 그대는 태생의 살갗처럼 굳어버린 가식의 꺼풀을 피가 묻어나도록 벗겨내야 할 것입니다. 그대는 젊은이들에게 여색을 탐하지 말라고 떠들어댔습니다. 그대의 젊은 날은 어떠했습니까. 한 마리 나비가 돼서 이 꽃 저 꽃 기웃거리다가 꽃잎에 묻혀 쾌락의 밤을 새운 일이 없습니까.
그대는 최근에 와서 흔히 다 비웠노라고 중얼거리지만 그대의 마음 한 자락에는 아직도 그리움의 정이 남아있습니다. 어쩌다 교양 있고 자태 고운 여인이 나들이 가자고 손을 내밀면 주저주저 따라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대가 교원 연수 기관의 책임자가 되자 갑자기 겨레의 스승으로 둔갑했습니다. 오가다 보고 듣고 배운, 모래알갱이 하나도 못 되는 앎을 부풀리고 튕겨서 교원들의 귀를 어지럽혔습니다. 도내 교원들을 번갈아 불러들여 횡설수설하다 보니 말재주는 늘어나고 그대 이름에 거품이 생겨났습니다.
그 거품 덕으로 한국교원대학에 여러 해 동안 출강하게 됐습니다. 그대는 팔도에서 모여든 선량한 교육자의 머릿속을 허튼소리로 꽤나 많이 오염시켰습니다. 되잖은 책도 숱하게 팔아먹고, 그대는 영락없는 속물이었습니다.
그대는 비단 같은 언어로 수필 쓰는 까닭을 늘어놓고 있지만, 실은 그대의 헛된 이름 띄우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제대로 된 수필 한 편인들 남길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교육자 상을 사양하지도 않고 받아냈습니다. 상금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경북 교육자 상은 상금이 몇 푼 되지 않아 회식비로 다 써버렸습니다. 중앙의 H신문사 교육자 상금은 남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산골 학교에 피아노를 사줬습니다. S·TV의 교육자 대상은 상금이 큰돈이었습니다. 평소 보시보다 더 큰 공덕은 없다고 설파하던 그대는 그 상금을 그대 아들 딸들에게 나눠줬습니다.
그대의 이름이 거품을 타고 교육부에 흘러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교육부에서 얘기 좀 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그대는 부른다고 겁 없이 허겁지겁 달려갔습니다. 중앙청 강당에 교육부 수장을 위시해서 전 직원이 모였습니다. 그대는 우국지사의 가면을 덮어쓰고 온갖 잡설을 뇌까렸습니다. 고위직 공무원은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 삼무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핏대를 올렸습니다. 자신은 한 가지도 실천하지 못하면서, 이런 엉터리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늙어서 용도폐기된 그대는 용케도 교육위원으로 뽑혔습니다. 그대 교육위원은 멀쩡한 몸에 따라붙은 물혹이요 장승이요 각설이 꾼에 불과했습니다.
날라리 불며 재주를 팔고 다니는 남사당처럼 그대는 근년까지도 각처를 떠돌며 말재주를 방매해왔습니다.
그대는 누구십니까. 당신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의 실체는 나였습니다. 나는 잠시 잠깐 다녀가는 이승의 꿈길에 너무 매달려왔나 봅니다. 이젠 죄다 고백합니다. 진솔하고 정직한 고백은 그릇된 삶의 지우개요 탈출이요 구원이 될지도 모릅니다.
석양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저 광야로 들풀 사랑의 초심을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행복한 유배 / 김규련
쨍그렁 쨍그렁! 외양간의 소 요령 소리에 잠이 깨었다. 먼 데서 새벽 정적을 깨고 닭들이 홰를 치며 운다. 지창을 열고 뜨락에 나가 괜히 우물가를 서성거려 본다. 돌담 사이에서는 지칠 줄 모르는 미물들이 물레를 잣듯 찔찔 거리며 긴 밤을 지새우고 있다. 밤새 떨어져 나가 앉은 성좌는 아직도 못다 한 구원의 밀어를 아쉽게 속삭이고 있다.
여기는 추풍령에서 동남으로 40리, 백화산 들목에 자리한 한적한 산골이다. 며칠 전 일자리가 바뀌어 대구에서 이 생소한 고을로 찾아들었다. 농가에서 첫 밤을 새우고 맞는 이 새벽에, 나는 왜 부질없이 어지러운 상념으로 별을 보고 섰을까.
방으로 돌아와 책상머리에 조용히 눈을 감고 앉는다. 또 하나의 삶의 건널목을 넘어서면서, 새 삶의 여로를 가만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착잡한 심회로 가슴이 답답하다. 한 열흘 정들었던 마을에서 줄을 거두어, 태평소를 불며 훌쩍 떠나는 곡마단의 표표로운 심정이 때로는 부럽다고나 할까.
수목은 오십여 년을 살아오면, 폭풍을 견디는 깊은 뿌리가 내리고, 너그러운 그늘이며 여유를 풍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어찌하여 지천명을 살아온 지금에도, 하찮은 영욕의 갈림길을 옮겨 설 때마다 애환에 얽혀 이토록 심란해하는 것일까. 육신은 비록 시속의 인연을 따라 영고성쇠의 계곡을 배회할지라도, 마음은 항시 유란(幽蘭)이고 싶고, 흐르는 강물이고 싶다.
여물죽 냄새가 문틈으로 살며시 스며든다. 오랫동안 잊어 왔던 향수의 냄새다. 문득 일어나 아침 안개가 깔린 들로 산책을 나선다. 영글어 가는 벼이삭 위를 제비 떼들이 직선을 그으며 분주히 날아다니고 있다. 산골의 제비는 추석이 지나면 벌써 강남 갈 채비에 바쁘다. 안개가 걷히자, 청명한 시야에는 우람한 산들이 첩첩히 둘러앉기 시작한다. 단풍이 깃들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늘은 벌써 태고의 심해를 닮아 깊고 고요롭고 짚푸르다.
맑은 물소리에 취해서 개울가에 발이 멎는다.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로 흙을 밟아 보고 모래 위로 발을 옮긴다. 십여 년 밟아 온 아스팔트 위에선 느낄 수 없었던 자애로운 모정 같은 것이 수액처럼 전신을 번져 온다. 산의 고향이 하늘이라면 인간의 고향은 역시 흙인가 보다.
투명한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인간의 수족을 감가 보기에는 죄스러울 만큼 맑고 깨끗하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넣어 조약돌 한 알을 캐어 냈다. 카랑한 이 촉감, 답답한 가슴이 금방 텅 비고, 마음은 어느덧 가없는 하늘을 맴돈다. 가을의 나신을 만져 보는 지순의 희열 때문일까.
조약돌에 얽힌 젊은 시절의 슬픈 사랑의 사연이 느닷없이 머리에 떠올라, 실없는 미소를 지어 본다. 사랑도 미움도 세월이 가면 어쩔 수 없이 오늘 아침 풀숲에 맺혔던 이슬인 것을.
저만큼 싸락눈이 소복하게 깔린 하얀 밭이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만발한 메밀꽃이 아닌가. 주렁주렁 달린 고추와 하얀 메밀꽃. 누런 조 이삭과 다갈색의 수수 이삭, 산골의 가을은 빛깔에서 오고, 소리에서 깃들고, 향기며 촉감에서 느껴지는 것일까.
시방 내 이웃은 안으로 짙어 온 스스로의 밀도에 겨워 터지려는 석류알의 풍속이 익어 가고 있다. 나는 지금 한 마리 고추잠자리가 되어 점점 뚜렷해지는 섭리의 자국 위를 한 가닥 운치로 날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억새들풀과 어울려 피고 지는 한 떨기 들국화로 서 있는 것일까. 주제할 수 없는 이 환희와 감격, 호화스런 불만의 영토에서 가을의 산골로 추방된 행복한 유배를 감사 드리고 싶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겠지. 산골의 겨울은 몹시 춥고도 길고 침울하다고 한다. 겨울이 오면 방에 질화로를 들여놓고 긴 밤을 혼자 앉아, 밤마다 문풍지에 흔들리며 잉태되어 가는 봄의 정기에 심취해 보리라.
그리고 간밤에 눈이 몹시 내린 어느 날 이름 아침, 외로운 산책길에서 눈 위에 파르르 떨고 있는 작은 산새의 발자국을 보고 가슴을 앓다가 사별한 누님의 정을 느껴 볼지도 모른다.
참새 떼들이 요란스럽게 머리 위를 스친다. 문득 대구에 두고 온 친구들 생각이 난다. 나는 이 친구들을 복된 나의 귀양지로 한 번쯤 초대하고 싶다. 상주에서 속리산을 가는 길섶 20리에 걸친 참오동 가로수를 보면서 오면 좋겠다. 지중해 연안의 마로니에 가로수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봉황이 깃든다는 청아한 참오동에 비하랴. 돌아갈 때는 추풍령 굽이굽이마다 타오를 단풍과 우정을 음미하면서 가는 것이다.
나는 석천의 물과 소백산에서 따 들인 머루며 다래, 그리고 으름으로 대접하리라.
소슬바람이 분다.
한들거리는 수숫대에 옷소매를 스치며, 여물죽 냄새가 물씬거리는 찬란한 나의 유배지의 하숙으로 돌아가야지.
禪詩 한 수 / 김규련
내 영혼의 뜨락에 바위 하나가 서 있다. 그 바위에 음각된 선시 한 수가 수시로 흔들리는데 내 마음을 제자리에 세워두곤 한다.
팔순 중반을 넘어선 등 굽은 노객老客은 예부터 생활 덕목이 무애無碍여야 편안하다고 했다. 무엇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 내놓으며 희로애락 즐기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한데도 말로는 물 같이 바람 같이 산다고 하면서도 속마음은 내가 나를 속일 때가 많다. 이럴 때 그 선시 한자 한자가 금방울이 되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나를 깨우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 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 要我以無垢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聊無愛 以無憎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 以終我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 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 要我以無垢(더러울구)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聊無怒而 無惜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 而終我
여말의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청산은 나를 보고>이다. 이 선시를 처음 접한 것은 젊은 시절 질병의 늪에 빠져 내일이 기약 없는 때였다. 폐결핵으로 생피를 토하며 깊은 산사에서 요양생활을 할 즈음 한 객승이 찾아들었다. 며칠 동안 요사寮舍 귀퉁이 한 방에 안거하면서 그 선시를 알게 됐다.
그때 나는 비록 몹쓸 병에 걸려 생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었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건강을 되찾아 다시 교단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늘 붙들고 있었다. 교단생활이 적성에 맞고 생활도 보장되며 항상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이미 중견 교사였던 나는 나름대로 교직관이 서 있었다고 할까. 그런 나에게 그 선시는 ‘패자의 독백’으로 느껴졌다.
나의 맹안盲眼과 천박한 인품 탓으로 그 선시에서 처절한 진실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영혼의 절규도 듣지 못했다. 품격 높은 선미禪味도 감지할 줄 몰랐다. 그저 글귀의 껍데기에 집착해서 건성으로 읽었을 뿐이었다. 감춰둔 속뜻을 깊게 파헤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인생의 중년은 도전과 성취 영욕과 애환이 출렁이는 격랑의 시기가 아니던가. 어쩌다 그 선시가 분주한 틈새에 떠오르면 ‘은자隱者의 넋두리’로 여기고 얼른 지워버렸다.
이제 나는 황혼이 붉게 타오르는 광야를 걷고 있다. 나 자신이 구름나그네임을 발견했을 때 그 선시는 ‘법등의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낱말들이 하나 같이 황금덩어리로 배열되어 있지 않은가. 온갖 도덕, 온갖 계명, 온갖 종교가 모두 녹아 있다. 범종의 영음보다 더 은은하게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탈속의 경지는 한사寒士를 부끄럽게 하고 우객羽客 울린다고 하리라. 행간에 깔려 있는 수많은 묵언은 너무 드높고 존엄해서 차라리 평범하다고나 할까.
선시에 스며있는 상념의 뿌리를 만나보려고 관조며 명상이며 사유를 거듭해 본다. 마침내 그 선시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을 무無’ 한자가 나타난다. 피멍울이 맺도록 파헤치고 탐색을 계속해 본다. 이번에는 ‘무無’ 대신에 ‘빌 空’ 한자가 등장한다. 재미가 솔솔 하다. 드디어 ‘공空도 없어지고 ’마음 心‘ 한자만 최후로 남는다.
산승들은 ‘석녀石女가 물을 긷다.’ ‘철우鐵牛타고 몰현금沒鉉琴 퉁기다.’ ‘토끼풀과 거북털’ 등 온갖 화두를 들고 무문관無門關수행을 하기도 한다. 그분들의 깊은 사색과 치열한 참구를 속인이 어찌 흉내인들 낼 수 있으랴.
<토굴의 노래>라도 진언眞言으로 여기고 읊고 읊어본다. 심오한 뜻이 불빛을 발산하며 나의 내면을 비춰준다.
내 몸 속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탐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 같다. 하늘과 땅, 이 세상 만물이 나와 무관한 존재는 하나도 없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운 지구에서 삶을 누리는 행복에도 감사드린다.
오직 내 마음 하나 먹기에 따라 내 발길 머무는 곳곳이 낙원이요, 순간순간이 보람인 것을.
*지금 산사에는 동안거(冬安居)가 진행 중입니다.
미완의 꿈 / 김규련
나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다.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어도 이 꿈만은 버릴 수 없다. 이 꿈이 나의 신앙이요. 기도요. 생명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살아오다 황혼 붉게 타오르는 광야의 끝자락에 이르면 불안과 초조와 공포로 흔들리기 마련이다. 허나 평범한 속인도 간절한 꿈 하나 이루고자 열정을 불태우다 보면 동요함이 없이 한길로 나갈 수 있으리라.
늘그막까지 미완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그 꿈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내려놓는 방하착(放下着) 공부를 해야 할 터이다. 목숨 이어갈 최소한의 조건만 되면 나머지는 죄다 버릴 것이다. 사랑도 미움도 놓아 버릴 것이다 성냄도 탐욕도 벗어 버릴 것이다. 달고, 쥐고, 품고 있는 명예며 권위며 자존심마저도 내려놓을 것이다.
어찌 그것뿐이랴. 마침내 생멸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극락과 천당에 오를 염원도 지워 버릴 것이다. 지옥에 떨어질 두려움도 털어 버릴 것이다. 언제나 팍팍하고 절절한 이승을 살면서 그때그때 부딪히는 상황에 따라 집착하는 바 없이 그 마음 내놓으며 희로애락 즐길 터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것은 예로부터 수많은 선철들이 사색해 온 화두가 아니던가. 허나 아직 완벽한 회답은 없다. 범부에겐 허울 좋고 고상하고 사치스런 언어의 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 같은 촌로야 그저 알뜰한 소망의 등불 하나 가슴에 달고 그냥 사는 대로 살아낼 뿐이다.
자연따라 무심히 이승에 왔으니 자연따라 살다가 자연따라 무심히 가면 될 터, 간다고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으리라. 이렇게 살면 때 묻고 상처 입고 부서진 영성(靈性)이 동심으로 복원될지도 모른다.
마침내 영혼의 창이 열리고 온몸의 기공이 뚫려서 우주의 맑고 깨끗한 진가가 몸속에 스며들고 탁기(濁氣)가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유유히 떠 흐르는 구름처럼 가벼워지지 않을까.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들과 소통의 길이 조금씩 열릴 터이다. 버려지고 잊히고 외로운 단독자(單獨者)가 유형, 무형의 무수한 벗과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정겨운 영토가 보일 것이다.
나는 여태껏 40여 년 동안 수필은 쓴다 합시고 온갖 잡문을 긁적거려 왔다. 어쩌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도 있지만 아직 내 마음에 흡족한 수필은 한 편도 남기지 못했다. 나의 간곡한 꿈은 내 심혼에 딱 들어와 닿는 수필 두어 편 창작해 봤으면 하는 것이다.
“언어로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쉬지 않겠다.” 던 두보(杜甫)의 치열한 작가 정신을 되뇌며 글을 짓고 싶다.
나도 문인화 같은 수필을 쓸 수 없을까. 문인화는 그림인가 하면 시이고, 시인가 하면 서이다. 문인화에는 순백의 여백이 있고 서릿발 같은 고절도 숨어 있다. 또한 동매(冬梅)의 암향이 묻어나기도 한다.
내 수필의 서두는 낯설고 절박하고 참신한 언어로 독자의 눈길을 꽉 붙들 수 있어야 하겠다. 문체의 은은한 향기에 취해 독자의 마음이 글 속에 빨려 들어와야 하리라. 읽어 갈수록 은유며 해학이며, 역설과 기지에 매료되어 흥미진진함을 느끼도록 해야겠다.
때로는 구상의 씨줄과 추상의 날줄이 교직되면서 신비한 모자이크 무늬가 떠오르면 좋겠다. 또한 독자가 읽다가 밑줄 그으며 암기 하고 싶은 명언 두어 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 그뿐이랴, 여기저기 보석처럼 빛나는 어휘 서너 개쯤 깊은 뜻 함축하고 석류 알처럼 박혀 있어야 하리라.
독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잔잔한 감동으로 그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야 하리라. 여항의 숨은 인정에 눈을 뜨고 작은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순간이 있다면 금상첨화라 하겠다. 문장의 행간에는 무지개가 뜨고 예지의 별빛이 빛나야 하리라. 뿐만 아니라 문사의 지조도 엿보이고 사상과 철학의 강물도 흘러가야 하지 않을까.
수필 한 편을 다 읽어 갈 무렵에는 그 수필의 주제가 수묵화의 취운(吹雲)처럼 번져 나오리라. 수필의 결미는 용 그림의 눈동자에 점을 찍는 점안 의식이라 할까. 그러면 용이 살아나 꿈틀거리며 비천하듯 지금껏 빚어낸 문장이 살아서 빛을 발하는 글귀로 끝맺음 될 것이다.
독자가 내 수필 한 편 읽고 작품을 손에 쥔 채 한동안 먼 하늘 보며 뭣인가 생각에 잠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필 한 편에 아무리 묘사가 뛰어나고 문장이 훌륭하며 밤 호수에 달뜨듯이 주제가 잘 드러나도 그 속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녹고 삭아 흘러들지 않으면 그 작품은 언제나 미완이요, 미달이요, 미급이라 여길 것이다.
나의 이 꿈이 이뤄질 때까지 결코 펜을 놓지 않으리라.
침묵의 언어 / 김규련
돌을 벗 삼아 곁에 두고 묵묵히 앉아 있다. 망중한(忙中閑)이라 할까. 때로 이러한 한적한 시간이 가물거리는 인간의 심혼에 생명의 불길을 당겨 줄지도 모른다. 마침 권솔은 모두 외출하고 빈집에 혼자 있다. 창 밖에는 신록의 물결이 연신 너울거리고 있다.
한동안 버려뒀던 수석이란 이름의 돌들이 저마다 몸짓을 하며 가슴으로 다가온다. 돌에도 정이 오가는 것일까. 하나하나 먼지를 닦고 손질을 해본다. 모두가 한결같이 돋보인다.
10여 점 되는 돌들이 그렇게도 모두가 개성이 뚜렷할까. 질감이 다른가 하면 그 형태며 색감이 다르고, 선과 굴곡이 서로 상이한가 하면 균형이며 조화며 규모가 또한 다르다. 어찌 그뿐이랴. 오랜 수마(水磨)와 풍화작용에서 얻은 돌갗의 세련미며 모양새의 추상미는 더더구나 다르다.
수석인들은 돌을 보고 산수경석, 폭포석, 평원석, 물형석, 무늬석, 호수석, 괴석 등 온갖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 하나 나는 아직 돌밭에서 수석을 캐어 내고 이름을 붙여 부를 만큼 전문적인 식견은 없다. 그저 오가다 문득 마음에 들고 연이 닿아 한 점씩 모아왔을 뿐이다. 폭포석 두 점과 경석 한 점에는 정이 더욱 간절하다. 지난날 잠시 영양(英陽)땅에 머물렀을 때 왕피천(王避川) 상류에서 손수 캐내었기 때문이다.
돌들을 조용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감춰 온 비밀 같은 것이 있다. 어떤 것은 불덩이를 식혀 온 기나긴 풍상의 세월이 보이고, 어떤 것은 물밑에서 이뤄 온 꾸준한 퇴적의 흔적이 숨어 있다. 또 어떤 것은 땅속에서 압력과 열에 시달리며 변성해 온 아득한 자취가 남아 있다.
어느덧 한나절이 지났다. 나는 이미 돌을 따라 심산유곡을 소요하고 있는 것일까. 숱한 바위 언덕과 벼랑을 지나고 무수한 골짜기도 통과했다. 험준한 산봉우리를 넘어 지금은 물보라에 옷깃을 적시며 폭포 곁에 서 있다. 그늘진 곳에서 괴석들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떤 놈은 멧돼지 같고, 어떤 놈은 공룡 같고, 또 어떤 놈은 주작 같다. 괴물들의 갑작스런 울부짖음에 깜짝 놀라 환상에서 깨어난다.
돌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표정 속에 숨어 있는 많은 의미를 찾아 읽어 본다. 돌에는 무수한 시간의 응결이 있는가 하면 침묵의 미덕이 있다. 부동의 자세가 박혀 있는가 하면 관조의 슬기가 엿보이기도 한다. 돌은 비록 속진 속에 굴러도 탈속의 멋이 있고, 세상사 온갖 잡음에 부딪혀도 흔들림이 없이 그저 태고의 정적이 감돌뿐이다. 돌은 간청해 오는 사람의 인품에 따라 걸맞은 설법을 베풀어 주는지도 모른다.
다시 돌을 하나 응시해 본다. 돌의 시원과 종말을 상상해 본다. 돌들이 숨을 쉬며 생동하고 있는 것 같다. 돌은 지구와 태양계와 은하계며, 온 우주가 내어 뿜는 숨결을 호흡하며, 하나의 큰 생명 속에 살아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돌에 스치는 영겁의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헤아리다 말고 문득 인간사를 생각하면 인간의 영고성쇠와 희비애락은 하찮은 연극같이 느껴지곤 한다.
돌들이 차츰 역광을 받으면서 묘하게도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기 시작한다. 왜 그럴까. 인간 만사가 꿈같고 허깨비 같아서일까. 아니면 거품 같고 그림자 같아서일까.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권세며, 명예며, 재물이며, 지위, 이 모든 가치가 돌 앞에서는 하잘것없는 아침이슬이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돌들이 껄껄 웃어댄다. 인간들의 슬픈 희극이 퍽 재미있는 모양이다. 많은 재물을 쌓아 두고도 음덕 한번 베풀지 못한 채 떠나는 사람, 높은 자리에서 교만하게 굴다가 물러앉았을 때 비로소 벼슬의 허망함을 느끼는 사람, 학문의 연찬보다 신문, 잡지에 이름을 팔기가 더 바쁜 학자라는 사람, 이 안타까운 인간의 몸짓이 우습다는 뜻일까.
무소유를 갈파해서 소유를 성취해 가는 승려, 앓고 있는 이웃을 위해 거리로 뛰쳐나와 자신의 명성 관리에 더 분주한 성직자, 무의(毋意)와 무필(毋必), 무고(毋固)와 무아(毋我)라는 정치 상식에도 익숙지 못한 것 같은 정치인의 작태. 이 또한 돌을 웃기는 모양이다.
돌 언저리에 나의 여러 모습이 언뜻언뜻 명멸하고 있다. 허물어져 가는 나의 육신. 얼룩진 영욕의 흔적과 애환의 자국. 버리지 못한 욕망의 짐. 끊을 수 없는 애착의 사슬. 좌우명이라는 등불을 주렁주렁 달고서도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슬픈 나의 자화상. 조금 전 돌들을 껄껄 웃게 한 부끄러운 인간의 모습들이 바로 나의 변신이었던 것을. 심한 자괴를 느끼며 부질없이 떠올렸던 상념들을 지워 나간다.
돌에서는 연신 침묵의 언어가 번져 나오고 있다. 그것들이 어느덧 어두운 나의 영혼의 밤하늘에 별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어디서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분수에 넘치는 말과 글을 삼가라는 뜻 같기도 하고 바보가 되는 공부를 해보라는 말 같기도 하다. 염원과 갈구와 기다림으로 남몰래 가슴을 죄면서도 입으로는 태연히 대우즉대현(大愚則大賢)이니 대우통천(大愚通天)이니 하는 문자를 나는 얼마나 많이 즐겨 써 왔던가.
창 밖에는 땅거미가 깔리고 있다. 오늘따라 왜 자꾸만 흘러 온 삶의 유역이 뒤돌아 보이는 것일까. 기다리고 쟁취하고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이었던가. 사랑도 명예도, 귀하다는 모든 것을 자연스레 놓아 보내는 연습도 때로 해봐야 되지 않을까. 독서와 사색으로 머리 속을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을 하나하나 드러내는 공부도 해야 할 것 같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들려온다. 홀연히 명상에서 깨어난다. 한갓 돌멩이들이 여전히 내 곁에 뒹굴고 있다. 내일 아침에는 보다 밝은 표정으로 동료들 앞에 서리라.
스쳐가는 봄 / 김규련
아파트 현관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겨우내 속살을 드러내고 떨고 있었다. 그 동안 냉기를 씻어내는 비가 몇 차례나 쏟아져 내렸던가. 어느새 좁쌀 같은 겨울눈(冬芽)이 탁틔어서 노란 꽃으로 주렁주렁 달려있다. 이 산수유나무가 해마다 가장 먼저 나에게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려 준다고 할까.
나는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어슬렁거리며 뜨락을 둘러본다. 기온 변덕 때문일까. 여기저기 자목련이며 진달래며 개나리… 등 이른 봄꽃들이 동시에 피어나 저마다 예쁜 자태를 겨루고 있다.
뒤란으로 나가 정원을 거닐어 본다. 은행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 낙엽수들이 푸른 잎새를 힘차게 밖으로 내밀고 있지 않는가. 양지바른 땅에는 둑새풀, 고추풀, 냉이, 쑥… 등 잡초들이 초록빛을 깔고 있다. 텃새들은 연방 나무 사이를 분주하게 날아다니며 옥구슬을 뿌리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걸쳐 둔 거미줄에 애벌레 두 마리가 잡혀 있다. 거미는 보이지 않는다. 살려고 꿈틀거리는 것을 못 본 척 지나친다. 벌 나비는 활동하기에 아직 이른 것일까.
어린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뜰에 나와 놀고 있다. 까치와 비둘기도 노닐고 있다. 아이들이 다가오자 까치는 껑충껑충 뛰다가 훌쩍 날아간다. 비둘기는 뒤뚱뒤뚱 걷다가 후다닥 나무에 날아오른다.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엔 새 희망이 담겨 있는 듯 보인다.
간밤에 비를 내렸던 하늘이 오늘은 맑고 푸르다. 따뜻한 햇볕과 산뜻한 공기, 꽃과 향기와 푸른 잎새들의 향연. 아름답고 찬란하고 황홀한 봄을 팔순의 어귀에서 또 맞게 된 감격. 문득 천지의 사방에 대고 머리 숙여 절을 하고 싶다.
나는 근년에 와서 봄이면 자연의 기운을 어떻게 좀 받아들여 감기를 떨쳐내고 건강할 수 있을까 궁리해보곤 한다. 햇볕의 온기, 봄비의 생기, 흙의 덕기, 잡초의 활기, 잎새의 온기, 꽃의 향기, 바람의 화기… 등을 온몸으로 향유하고 싶어 욕심을 부린다.
하나 부질없는 범부의 백일몽이었다고 할까. 마음의 호숫가를 서성이다가 호심에 일렁이는 나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벗어던졌다 싶으면 또 새롭게 걸치게 된 온갖 장식의 누더기. 장식의 근원에는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심이 숨어 있었다. 실오라기 한 가닥의 위선도 없을 때 자연의 기는 스스로 스며드는 것을.
눍어가면서 생존의 본능에 합당한 최소한의 욕심을 남겨 두고 죄다 버려야 함을 이 봄에 다시 되뇌어본다. 노역의 횡포가 자신의 파멸은 물론, 선량한 이웃까지 비극의 나락으로 몰아넣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저만치 이웃해 서 있는 학산이 오늘따라 나에게 손짓을 한다. 발걸음을 옮겨 산으로 향한다. 소나무 숲에선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며 노랫소리가 산새들의 지저귐과 섞여서 이리저리 떠다닌다. 너도밤나무들은 연푸른 잎새를 반짝이며 햇빛을 받고 섰다. 봄 산은 노래 부르고 여름 산은 춤추고 가을 산은 그림 그리고 겨울 산은 명상에 잠긴다고 할까.
나뭇가지에서 날다람쥐 한 마리가 나를 보고 놀란 듯 눈알을 굴리다가 멀리 도망쳐 버린다. 작은 짐승이 덩치 큰 동물을 만나면 피해 가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겠지만, 사람은 더욱 무서운 모양이다.
어쩌면 자연 속에서 가장 영악하고 잔인한 괴물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천사의 손길이 있는가 하면 악마의 이빨도 있다.
자연에는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다. 자연은 이 생명체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해 두고 있지 않는가. 함이 없으면서 하지 아니함이 없이 생명체의 종(種)에 천적을 만들어 세력의 균형을 잡아준다. 모든 존재를 꾸준히 변화시켜서 태어남과 소멸을 주관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창조주나 조물주나 초월자는 바로 자연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종교에 따라 경외하고 순종하며 신앙하는 신을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범천왕, 옥황상제, 하늘…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연의 동의어요 대명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온다.
어쩌면 천당과 극락도 자연 속에 있고 연옥과 지옥도 자연 속에 있으리라. 마침내 각자의 마음속에 있지 않을까. 자연 속에 있는 만물은, 그것이 소똥이든 말 눈곱이든 티끌이든 모두가 소중하고 의미 있고 그 자체로 진리이리라.
오늘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온갖 핑계로 자연을 더럽히며 부수며 죽이고 있다. 인간의 문명 열차는 마침내 종말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고서도 풍요롭고 안락하고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하리라. 깊은 오뇌와 고민으로 하늘과 땅이 함몰하는 죽음의 부메랑을 피해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한 줄기 산바람이 나무숲을 흔들고 지나간다. 아기의 살 냄새 같은 향기가 코 끝에 와 닿는다. 흐뭇한 충만감이 가슴에 차오른다고 할까. 뭇 생명의 어머니요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인 자연의 사랑에 감동해서일까. 눈시울이 젖어온다.
이 순간에도 자연은 봄의 풍광을 줄줄이 거느리고 떠나가고 있다. 변심한 연인이 나를 남겨 두고 가듯이,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시는 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것이다.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고 낡아가면서.
나의 성지(聖地) / 김규련
아파트는 낡았어도 뒤뜰 숲이 좋다. 온갖 거목들이 울창해서 봄 여름 두 철 소요를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다. 분별과 속도와 화려한 몸짓에서 두어 발 물러서 있는 나에겐 이 작은 숲이 구원의 성지인지도 모른다.
한 때는 해외 나들이도 빈번했었다. 팔공산, 금오산, 비슬산 등, 산행도 심량(心量)을 넓히고 호연지기를 길러낸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다녔다. 이젠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행운유수의 공간이 좁혀졌다고 할까.
나의 성지는 무수한 생명체의 낙원이다. 깊은 숲 그늘에 앉아 있으면 이름 모를 잡초들이 손을 흔들며 나를 반긴다. 텃새들이 지저귀고 들고양이가 겁 없이 느릿느릿 지나간다. 개미, 달팽이, 나비며 꿀벌, 그리고 곤충들은 저마다 살기에 여념이 없다, 눈에 띄지 않는 미생물들은 말해 무엇하리.
나는 자연스레 그들과 한 몸이 되어 흙을 밟고 흙냄새를 맡으며 흙과 풀을 만져본다. 그 순간 살아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넘실대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벅찬 감동으로 가슴이 설렌다.
무성한 나무 잎새로 걸러지고 또 걸러진 엷은 햇볕, 살랑살랑 이는 바람, 잎새들이 내뿜는 정기(精氣), 흙에서 번져나는 지기(地氣), 자연의 맑은 영기(靈氣)로 귀한 목숨들이 활기를 얻어 약동하고 있다. 숲을 보고 천지의 마음을 읽으며 그 묘리묘법(妙理妙法)에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성지는 무애(無碍)의 시공이다.
느티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앉아본다. 어느덧 마음은 밖으로 뛰쳐나와 팔공산 깊은 골자기 양진암(養眞庵) 뜨락에 와 있다.
오직 한 마음 모아 주변의 사물과 내가 일체가 되어 본다. 문득 내 심혼이 밝아지는 것일까.
초목의 마음을 듣고 콸콸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새긴다. 바위의 침묵을 이해하고 꽃의 음성을 음미하며 들짐승의 소리를 알아듣고자 한다.
마침내 내 마음은 아무런 걸림이 없이 홍모(鴻毛)처럼 가벼워졌다. 범부의 가슴 속에 있기 마련인 탐심(貪心)과 도심(道心), 사심(邪心)과 보리심, 업생(業生)과 원생(願生)을 뛰어넘어 마음은 한 줄기 바람으로 흘러간다.
산은 스스로 무심히 푸르고(山自無心碧)
구름 또한 무심히 희도다(雲自無心白)
그 가운데 한 사람 있으니(其中一上人)
그 또한 무심한 길손이더라(亦是無心客)
서산대사의 선시(禪詩) 한 구절이 조용히 귀에 와 앉는다.
나의 성지는 명상과 사유(思惟)의 도량이다.
내 자리로 돌아온 나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숲 속을 서성거려 본다. 무애를 즐긴다며 마음 놓아버리고 살면 사람은 달리는 고깃덩어리요 밥통이요 옷걸이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주육(走肉)이요 밥통이요 의가(衣架)일지도 모른다.
바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긴다. 자연은 말씀하는 바 없이 말씀하는 무설설(無說說)을 하고 현자는 듣는 바 없이 듣는 무문문(無聞聞)을 한다고 했던가.
무문관(無門關) 수행으로 반야지(般若智)를 터득한 현자만이 대자연의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듣고 그 비의(秘意)를 깨닫게 된다. 나 같은 범부야 장목비이(長目飛耳)로 분별지(分別智)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니 이 맹안(盲眼)을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뒤늦게 명상과 사유의 흉내라도 내 볼 수 밖에 없다. 서서히 깊은 숨을 쉬면서 내 몸속 구석구석을 살핀다. 내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본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부모님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던가. 저것이 내 속에 들어있고 내가 저것 속에 들어있다. 다음 순간 암초에 부딪쳤다. 나의 자성(自性)을 만날 길이 없다.
명상이 참 나를 찾는 나 안으로의 여행이라면 사유는 우주 만물의 실상을 밝히기 위한 마음 기울이기라 하리라.
사유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해서 통찰하는 직관력이 있어야 한다.
육안(肉眼)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쩔쩔매는 주제에 이 무슨 망발인가. 요란한 매미소리가 쏟아져 내리며 숲 속을 뒤흔든다.
부질없는 욕심 버리고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화두삼아 간직하고 그 깊은 뜻이나 헤아려 봐야겠다.
우주 자연의 실상은,
“생(生)도 아니고 멸(滅)도 아니며, 단(斷)도 아니고 상(常)도 아니며, 일(一)도 아니고 이(異)도 아니며, 거(去)도 아니고 내(來)도 아니다”
나의 성지에도 석양볕이 비끼고 있다. 풀벌레 소리도 잠잠해졌다. 언제쯤 이 노객도 속진 걷어내고 어둠 밝히는 반딧불 하나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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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생 : 자신의 행위에 따라 사는 중생의 삶
원생 : 깨치기 위해 원을 세우고 사는 삶
반야지 : 실상을 꿰뚫어 보는 최상의 지혜
분별지 : 식견에서 나오는 판단력
선지식 : 불도를 깨치고 덕이 높은 고승
무정설법 : 인간의 언어는 유정설법이고 그 외 모든 존재의 침묵이 무정설법이다.
끝없이 도는 길 / 김규련
무심코 피고 지는 나뭇잎새도 생과 사의 순환이 있다.
낙엽수 잎사귀의 한 뉘는 고작 사계뿐이다. 해서 그 삶은 절박하고 치열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나뭇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겨울눈(冬芽)의 월동은 인고의 표상일지도 모른다. 우수가 지나면 그들은 굼틀굼틀 깨어난다. 봄의 해 잎새는 금방 지고 마는 꽃보다 더 찬란하다.
우거진 나뭇잎새는 여름의 산과 들을 초록빛 물결로 뒤덮는다. 연방 쏟아내는 생기며 드리운 그늘은 온 생명체에 활기를 베풀어 준다. 억새풀이 흰머리를 풀어 바람결에 흔들리고 무서리가 내리면 잎새들은 고별 의식 채비에 바쁘다.
나는 해마다 두 번 미친다. 신록 필 때와 낙엽 질 때이다. 이 난치병이 발작하면 비록 늙고 병약한 몸이지만 집을 빠져나와 팔공산을 찾아 나선다.
오늘은 갈잎이 산화하기 좋은 날씨다. 이미 의식(儀式)은 무르익고 있다. 진홍빛, 황금빛, 갈색 빛이 혼융한 그늘의 의전은 온 산에서 화려하게 치러지고 있지 않은가. 장엄한 듯, 천연하고 비장한 듯, 질탕하고 숙연한 듯, 경쾌한 그들의 한마당 놀이.
나도 한 그루의 단풍나무가 되어 그들 곁에 깊이 다가가 본다. 찡하는 울림이 온몸에 와 부딪힌다. 내 심금 열두 현이 광란하듯 소리내어 공명하기 시작한다.
내 마음이 허공일 때 비로소 잎새들의 미세한 소리도 들리고 몸짓도 보인다고 할까. 문득 명창 김소희의 정한 깊이 사무친 남도 창이 붉게 물든 계곡으로 번져 나간다. 앵삼에 빨강 띠 두르고 화관에 칠색 한삼을 손묵에 낀 궁중 무희들이 원무(圓舞)를 펼친다. 한삼 끝에 이는 바람이 괜히 서럽다.
다음 순간 사라사데의 찌고이네르바이젠 바이올린 높은 음이 사람의 가슴을 찌르듯 울려 퍼진다. 어깨 끈이 반쯤 흘러내린 관능적인 미녀, 집시 아가씨가 열정에 넘치는 플라맹고 춤을 춘다.
한 줄기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갈잎에 달려 있던 늦가을이 미련없이 떨어져 우수수 흩어진다. 환상도 이파리 따라 떨어지고.
나는 하산 길에 발걸음을 뗀다. 구르몽의 시 ⌜낙엽⌟을 읊으며. ⌜시몬, 나뭇잎새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새봄에는 또 다른 잎새들과 조금은 달라진 나와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나고 죽는 것이 어찌 잎새뿐이랴. 이름 없는 미물도 짐승도 사람도 끝없는 생멸의 길을 돌고 도는 것이리라 다만 사람은 파란과 곡절과 사연이 많고 유정해서 애틋하고 한 맺히고 절절함이 굽이굽이 펼쳐질 따름이다.
생로병사는 인간의 숙명이라 했던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환란도 슬픔도 아픔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터이다. 그것을 ‘운명애’ 라고 하던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존귀하고 그리운 존재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가 하면 가장 무섭고 잔인하고 탐욕스런 존재도 사람이리라.
탐욕의 으뜸은 무병장수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요, 생명의 본질일 것이다. 나는 젊은 날, 폐를 앓으며 많은 선혈을 토해 냈다. 직장에서 물러나 2년여 동안 갖은 약을 다 쓰며 힘든 투병 생활을 했었다. 병마와 외로움과 가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일념은 안 죽고 살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모질고 질긴 생존의 욕구는 가히 눈물겹다고 하리라.
성경에 나오는 므드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고 969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돌아갈 때 속마음은 더 살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삼천갑자 동방석은 18만 년을 살고도 더 살려다 저승사자의 계략에 걸려 저승으로 끌려갔다.
도교의 불사신, 서왕모(西王母)의 반도(蟠桃) 복숭아는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한다. 천 년 동안 꽃 피고 천 년 동안 열매를 맺어 익은 그 복숭아를 얻으려고 곤륜산 선인들은 지금도 기도 중이라 했던가.
미래학자들은 말한다. 머지않아 생명과학은 항노쇠 치료법을 개발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 되면 인간의 평균 수명이 140년이 된다며 신나 한다. 그러나 그것이 축복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 생사의 순환이 균형과 조화를 잃고 어긋나게 돌아가면 인간사회에 크나큰 혼돈이 올지도 모른다.
웰빙도 좋고, 장수도 기껍지만 천수대로 살다가 고통 없이 편안하게 품위있게 가는 웰다잉은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젊은이가 풍진 세상에 뛰어들어 나름대로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은 장하고 아름답다. 가다가 폭설이며, 암벽이며 풍랑을 만나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땀과 눈물을 흘리며 말림의 역경을 견디고 다시 일어서서 도전한다. 성취의 기쁨으로 삶의 보람도 느껴 본다. 인생의 참맛이 여기 있음에랴. 늙은이가 지혜로워진다. 인생은 끝없이 거듭되는 생사의 길목에 내던져진 나그네임을 깨닫게 된다. 금성은 긴 여로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순간의 과정에 불과하다. 부귀, 권세, 명예, 쾌락이 한 순간의 꿈인 것을 문득 알게 되리라. 무상과 허무를 체득했다고 할까.
사람은 삶의 눈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눈 자리가 현실과 초월의 시공에서 연륜과 처지 따라 슬기롭게 자리 잡혀야 한다. 젊은이의 눈 자리가 현실을 떠나 초월 공간에서 놀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늙은이의 그것이 달관을 거부하고 현실 공간에 밀착해 있으면 그는 바보이리라.
늦가을 해거름은 이내가 깔리기 전에 어둠이 먼저 밀려온다. 하늘엔 상현달이 걸려 있고,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우주에는 낙동강 모래알처럼 많은 별들이 떠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한 개의 별이 아닌가. 오늘 밤에도 낡은 별은 사라지고 새 별이 태어날 것이다.
나는 천기의 한 소식도 못 깨치고 이렇게 부질없이 별 한 모서리를 지나가고 있는 것인가.
산골소식/김규련
P형, 나는 지금 일월산 중턱에 와 머뭇거리고 섰습니다. 이제 막 신록으로 찬란한 수림 (樹林)의 바다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가물거리는 먼산 끝 까지 펼쳐진 신록의 파도는 정말 장관입니다. 산바람이 일 적마다 윤기가 주루룩 기름방울로 흘러내릴 것 같습니다. 이름 모를 산새며, 꿩이며, 뻐꾸기소리는 연신 하늘 가득히 쏟아지고 있습니다.
건너편 숲 속에서 약초며 산나물을 캐는 아낙들의 구성진 콧노래 소리가 바람을 타고 간간이 나뭇잎새에 와 부딪칩니다.
대구에서 동북 내륙쪽으로 4백 리, 해발 1천 2백 미터의 이 일월산 기슭에 신록이 우거지면 나는 견딜 수 없는 감동으로 산야를 배회해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직장 따라 이 산골에 왔다가 얻은 나의 즐거운 난치병일지도 모릅니다.
P형, 산골은 감옥이 아니면 낙원이라 했더이다. 3년 전 이곳으로 왔을 때, 사람들은 이 영양땅을 가리켜 산수가 빼어나게 맑고 아름다운 고장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도시생활에의 취향과 인간관계의 얽힘 때문인지 자연 경관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산골살이는 황량하고 적막할 뿐이었습니다. 첩첩이 높은 산은 어쩌면 감옥의 성벽 같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즐거운 난치병을 앓아 오는 동안, 산골살이에도 나름대로 정이며 흥이며 멋이 있고 때로는 낭만과 철학도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그려.
산골에는 계절따라 바뀌는 섭리의 자국이 뚜렷합니다. 기름이 흐르는 신록, 석천(石泉)의 물고기맛, 불타오르는 단풍, 송림의 눈꽃…. 이러한 자연의 변화에 애정으로 심취하다 보면 어느덧 마음의 뜨락에 또 하나의 자연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나 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숲에 가면 한 그루 나무일 수 있고, 강변에 가면 한 개 조약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P형, 나는 시방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용화동(龍化洞) 앞을 흐르는 개울에 다다랐습니다. 두어 발짝 앞에는 사방으로 바위에 둘러싸인 작은 폭포가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물이 괴었다 흐르는 이 폭포를 선녀탕(仙女湯)이라 부르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육신을 잠그기에는 죄스러울 만큼 맑고 깨끗한 물. 두 손으로 물을 떠 마셔 봅니다. 신선한 이 물맛. 어쩌면 산정(山情)을 마시는 것이외다.
맨발로 카랑한 개울물을 거닐어 봅니다. 물은 쉴새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P형, 여래의 마음처럼 끝없이 흘러가는 여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이옵니까.
이윽고 맨발로 밭두렁으로 올라와 흙을 밟아 봅니다. 모정만큼 따스한 대지의 촉감. 잃어버린 동심과의 해후 같은 것을 느낍니다.
P형,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슬픔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오니까. '언어는 있으되 대화는 없고, 지식은 많으나 지혜는 적으며, 경악은 있으되 감동은 없으며, 증오할 줄을 알아도 감사할 줄은 모르는.' 이렇게 병들어 가는 심혼은 이곳에 와서 자연의 목소리를 빈 마음으로 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지난 여름의 낭만이 생각납니다. 부산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일파(一波) 화백이 이곳에 들러, 우리는 왕피천(王避川) 상류로 천렵을 나갔더랬습니다. 왕피천은 태백산맥의 깊은 계곡을 따라 돌고 돌다가, 울진 성류굴 앞을 지나 동해로 흐르는 강이옵니다.
우리는 반백의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강물을 쏘다니다가 물장구도 치고 멱도 감고, 드디어 천렵으로 얻은 물고기를 회쳐서 불쇠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우정과 낭만이 가득 담긴 술잔을 들이키며 소년 시절의 노래도 마음껏 불러 봤습니다. 그런데 즐거운 옛노래를 부르는 일파 화백의 두 볼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질 않겠습니까.
우람한 산세, 울창한 숲, 맑은 공기와 깨끗한 강물, 산새소리며 강물소리, 거기다 옛친구 만나 술잔을 기울이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만 흐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순수하고 인간적인 독백입니까.
'소는 물을 마셔 우유를 만들어 내고 뱀은 같은 물을 마셔도 독을 만들어 낸다(牛飮水生乳 蛇飮水生毒)'는 옛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그려.
P형, 여름이 가면 산골 사람들의 일손은 한결 바빠집니다. 거둬 들일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월동준비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산골의 겨울은 길고도 춥습니다. 불타오르는 단풍을 조용히 완상할 틈도 없이 초겨울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휘날리는 낙엽을 보고 저마다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산골에는 일년 사철 계절따라 바뀌는 자연의 빛깔이 있습니다. 봄의 빛깔이 파스텔화라면 여름은 유화, 가을은 수채화, 겨울은 묵화일지도 모릅니다.
자연의 목소리를 듣는 데도 철따라 다를 것입니다. 빗물처럼 창에와 부딪혀 쏟아지는 뻐꾸기소리는 눈으로 듣고, 사방을 요란하게 뒤흔드는 매미소리는 귀로 듣고, 가을의 뭇 풀벌레소리는 피부로 듣고, 겨울의 문풍지소리는 마음으로 들어야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P형, 자연의 빛깔이며 목소리에는 무한한 의미의 언어가 있다고 하더이다. 이 언어의 깊은 뜻을 불가에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로 나타내는 유정설법(有情說法)에는 흔히 거짓과 과장이 있을 수 있어도 무정설법에는 오직 진실이 있을 뿐이라 하더이다.
산골살이의 참재미는 이 무정설법을 듣는 데 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에게는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슬기로운 귀가 없습니다. 이젠 지혜로운 마음의 귀를 갖기 위해서라도 좀더 바보가 되는 공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P형, 저녁놀이 노송가지 끝에 나부끼고 있습니다. 깊은 산중에도 흥망이 있음인지, 사원은 흔적도 없는데 낡은 석탑 한 기(基)만 산기슭에 버려져 있습니다. 무심한 산골 아이들이 돌탑 둘레에서 놀다가 이제 집으로 돌아갈 모양입니다.
나도 땅거미가 깔리기 전에 돌아가렵니다. 금년 겨울에도 이웃집 외양간의 소 요령소리에 여러 밤을 지새우게 될 것입니다.
P형, 또 소식 전하리다. 안녕.
추억의 하동 포구 / 김규련
눈앞에 떨어지는 낙조를 밟으며 산책을 즐기고 있다. 문득 하동 포구의 저녁노을이 안막에 깔려든다.
하동포구는 내 귀가 빠지고 탯줄이 묻힌 고장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걸핏하면 짙은 향수에 잠기곤 한다. 포구 마을의 이이들은 섬진강의 물소리를 익히며 자란다. 강물 소리에도 계절이 깃들어 봄이 오고 가을이 간다.
겨울의 강물 소리는 마음으로 듣는다. 차가운 강바람이 지창을 칠 때 떨리는 문풍지에서 오열처럼 흐르는 강물소리를 느낀다.
우수가 지난 어느 날 새벽, 찡 하고 나루터 빙판에 금가는 소리가 나면 비로소 포구의 한 해는 문을 연다. 지리산 뗏목 배가 떠 흐르고 돛단배도 오간다. 고깃배가 들락거리는가 하면 화물 실은 철선들이 뱃고동 소리를 길게 뽑아내며 닻을 내린다.
천자문을 배우러 서당에 다녀오면 우리는 강변에 나가 둑에 핀 꽃을 따며 소꿉질을 한다. 피라미를 낚아채고 하늘로 치솟는 물새의 묘기를 보고 감탄하기도 한다. 해거름 노을에 붉게 물들어 젖은 몸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여름에는 모래 벌에 나와 성을 쌓기도 하고 멱도 감고 진종일 물고기 떼와 함께 물에서 논다. 가을의 섬진강 물은 유리알처럼 맑고 깨끗하다. 늦가을 석양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고 우리도 어서 어른 되어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강물과 모래톱, 물새와 고기 떼, 산과 들, 배와 아이들, 기러기와 하늘…. 그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하동포구의 소중한 가족들이었다. 이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왔다 가고 또 왔다 갔다.
어느 해 늦가을 무서리가 내린 강변에 물새 한 마리가 죽어 쓰러진 것을 보고 치마폭에 싸다가 양지에 묻어주던 숙분이가 생각난다. 그 무덤에 들국화 꽃잎을 뿌려주던 그 천사의 동심이 지금도 내 가슴 황량할 때면 강물로 출렁거린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자기 엄마와 함께 하동포구를 떠나야 했다. 우리 집에서 여러 해 같이 살다 가는 그 모녀를 한길까지 나와서 어머니와 나는 서럽게 작별했다. 나는 가슴 속의 성 한 채가 무너지듯 허망하고 쓸쓸했다. 하늘에는 지리산 갈가마귀 떼가 우짖고 어지럽게 날고 있었다.
이듬해 봄, 내 나이 여덟 살 때 한의사이신 아버지께서 남의 병은 고치시면서 당신의 병은 다스리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상여가 섬진강을 거슬러 산으로 갔다. 상복 입은 형과 나는 뒤 따르며 곡을 했다. 상두꾼들이 요령을 흔들며 불러대는 향도가는 난생 처음 참혹한 슬픔을 깨닫게 했다. 그 날로 내 가슴 오지에 설움 타는 강물 한 줄기 흐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다니면서 우리들의 돌아다니는 공간이 넓어져 갔다. 하동읍의 안산인 갈마산 섬호정에 처음으로 올라갔을 때 느꼈던 감동과 기쁨은 지금도 가슴 설레게 한다 높은 데서 사방을 둘러보는 순간 진경산수처럼 잠들어 있던 산천초목과 시가지의 집들이 번쩍 깨어나서 큰 소리를 내며 살아 움직였다.
하동포구 팔십리에 물새가 울고
하동포구 팔십리에 달이 뜹니다….
아득한 구름 사이를 돌고 돌아 흘러내리는 섬진강 육백 리의 물길이 유정했다. 포구 어귀에 펼쳐진 백사청송은 하동의 명승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팔자에 역마살이 끼었는지 낯선 대구 경북 여러 고을을 떠돌며 살고 있다. 첩첩한 산과 그름에 막혀 고향땅을 볼 수는 없어도 마음은 언제나 고향 하늘에 닿아 있다.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를 읽으며 화개장터와 쌍계사를 회상해 봤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탐독하며 하동 사투리를 만날 때마다 고향 친구들을 상봉한 듯 기뻤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의 주인공인 하준구를 내 삶의 한 장면으로 착각도 해봤다.
하동에는 최치원의 지리산 <입산시>가 남아 있는가 하면 이인로의 명시 <섬진강 낙조>도 전해져 오고 있다. 정공채의 하동 사랑의 시도 있고 이명희의 하동 노래도 있다. 하춘화의 <하동포구 아가씨> 노래도 유행을 타고 있다. 어찌 그뿐이랴. 판소리 동편제의 명창 유성준과 이선유의 고향도 하동이라 했던가.
섬진강의 생기며 영기에 하동의 빼어난 풍광에서 번져나는 정기가 이 곳에 시방 문예의 꽃밭을 풍성하게 일구고 있다. 섬진강의 참게장과 제첩국은 하동의 진미요 문학공원은 하동의 향기요 화개천 십리의 벚꽃 길은 하동 산수의 표상이라 하리라.
귀로에는 땅거미가 깔리더니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고 있다. 고향 그리움의 정도 묻어 내리고.
관음죽(觀音竹) / 김규련
너는 난초도 아니면서 난초보다 더 청아하다. 대나무도 아니면서 대보다 더 절개가 서릿발 같다. 영물도 아니면서 관음(觀音)이란 이름을 얻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면 너는 나의 가슴을 열고 들어와 내 감성의 영지에 네 고향 풍경을 그린다.
순식간에 장엄한 아열대의 밀림이 펼쳐진다. 온갖 짐승들의 몸짓 소리며 색깔 선명한 새들의 지저귐이 소나기 지나가는 소리며… 문명의 소음 한 가닥 끼어들지 않은 대자연의 소리가 적막을 뚫고 귓바퀴에 와 닿는다.
나뭇잎으로 앞만 가린 원주민들이 덩굴식물을 헤치며 뛰어다닌다. 나도 그들과 같은 발가벗은 몸으로 그들과 어울린다. 나뭇가지를 비벼서 불도 피우고 돌촉 창으로 수렵도 하고 밤새워 약무(躍舞)도 즐긴다.
짙푸른 잎새들의 강렬한 호흡에서 번져나는 천연의 향기가 찌들고 때 묻어 온 내 심혼을 행궈 준다고 할까. 빽빽한 수림 속에 가득히 스며있는 신묘한 생기와 야생의 소박한 미(美)와 치열한 생명력이 나를 동심으로 환생시켜 주는지도 모른다.
무녀가 무무(巫舞)로 씻김굿 한 마당 끝내고 숨 들이는 순간 느끼는 해탈감 같은 것이라 할까. 잔잔한 환희가 밀려온다.
이제 불편함도 부족함도 불안함도 없다고 하리라. 세상과 멀리했어도 근심하지 않는다. 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다. 즐거운 일 있으면 즐길 뿐 방자하게 흐르지 않고, 애달픈 일 있으면 안타까워할 뿐 슬픔에 빠져들지 않을 터이다.
어느 해 봄 해질 무렵, 너는 가냘픈 여린 몸으로 도시의 길거리에 나와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그날로 내 집에 와서 나와 동거하게 됐던가. 20여 년, 무심한 세월 금세 흘러서 어느덧 너는 운문사(雲門寺) 뜨락의 반송(盤松) 같은 모습으로 자랐다.
사람의 한 뉘에도 사계절이 있다던가. 나는 이제 상심의 계절을 맞아 육신은 비록 황량할지라도 정신은 도리어 풍요롭고 싶구나. 너는 나의 이 염원을 읽어 봤는지 문득 내 시야에 들어와 섰다.
너와 나의 깊은 만남이 무슨 의미로 승화될 수 있을까. 세상의 많은 시인, 묵객과 화백, 가인(歌人)들이 나무와 꽃을 만나서 시며 묵화며 그림이며 노래를 남기지 않았는가.
소나무, 잣나무는 추사 김정희를 만나 불멸의 명화 「세한도」를 탄생시켰다. 소나무 둘, 잣나무 둘, 네 그루 나무가 성기지 않고 소나무 한 그루의 중동이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세한도」는 국보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리라. 추운 겨울 되어야 소나무, 잣나무의 기백이 비로소 드러난다는 세한지송백(歲寒知松柏)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하리라.
시인 임포(林逋)는 매화를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매처학자(梅妻鶴子)의 전설을 남겼다. 그는 매화가 좋아서 벼슬 버리고 서호의 고산에서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매화를 아내로, 서호의 학을 자식으로 삼고 살았다던가. 신선처럼 고고하게 은거하며 사는 그의 풍모가 동공에 비친다. 그의 명시 「산원소매(山園小梅)」는 만고의 절창이라 하겠다. “…다행히 가볍게 시를 읊는 시인과 매화가 서로 어우러졌으니 가무의 금잔으로 흥을 돋울 필요가 없겠구나….”
석파 이하웅과 난초의 조우는 묵화로 꽃피어서 「필묵란도」라는 유형문화제로 남지 않았는가. 기세를 뿜으며 완곡하게 퍼져 오르는 난초 잎에 생동감이 넘쳐서 난향이 묻어날 듯하다. 그야말로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춘다는 필가묵무(筆歌墨舞)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리라.
도연명은 관직에서 물러나며 유명한 「귀거래사」를 남겼다. 그는 고향 전원으로 돌아와 고된 농사를 지으며 시 쓰고 음주도 즐겼다. 그의 「음주」 20수 가운데 제 5수에는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 그윽이 남산을 바라보니…”란 시구가 있다. 국화를 예찬해 온 그의 심지 한 자락이 드러나 보인다.
대나무는 충절의 영환과 상응하면 신화를 낳는다고 하리라.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아 피살된다. 그의 붉은 피 흐른 곳에 청정한 대나무가 솟아올라 ‘임 향한 일편단심’이 가시지 않았음을 알렸다고 하지 않는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장미를 사랑하고 장미를 노래했으며 장미 가시에 찔려 백혈병을 얻어 죽었다고 하더이다. 그의 묘비명에는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라고 스스로 써서 남긴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산기슭 오솔길에 화려하게 산화한 낙엽들이 모여서 해마다 레미 드 구르몽의 시 「낙엽」을 낭송하며 귀토(歸土)의식을 치르고 있지 않는가. “시몬, 나뭇잎새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발자국 소리가…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라…”
수련은 모네를, 해바라기는 고흐를 만나 명화가 됐다. 지금도 세계 미술사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지 않는가.
동백꽃, 라일락, 코스모스, 봉선화 등은 가인을 만나 애틋하고 정겨운 사랑의 모래가 되어 애창되고 있다.
소리를 보는 대나무여, 너에게는 영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너는 소리 내는 음과 침묵 속에 묻혀 있는 무음의 소리도 동시에 불 수 있으니 말이다. 너는 집안에 경사가 있을 것을 소리로 미리 보고 꽃을 피운다고 하지 않는가. 가정에 큰 재앙이 다가올 기색이 보이면 너는 스스로 고사해서 그 소식을 알린다고 했던가.
너의 신비한 영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너는 깊은 밤 홀로 깨어 흐르는 별빛을 타고 하늘과 소통하는지도 모른다.
천지간의 교신으로 별자리마다 내밀하게 간직한 천기를 조금씩 얻어내는 것은 아닌지.
관음죽아, 너는 시절인연이 어긋나서 나 같은 무명의 촌로를 상봉하게 됐구나. 우매한 내가 무슨 재주로 너를 예술로 선양할 수 있으랴. 그저 부질없는 낙서 두어 줄 남길 뿐이다.
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은 천지의 기를 뚫고 나오는 것일까.
햇볕과 바람, 물과 땅에 온기가 돈다. 누리 가득한 초목의 새싹에서 열여섯 살 소녀의 입술 같은 봄이 얼굴을 뻘쭘히 내민다.
산수유 꽃, 생강나무 꽃, 수달래… 온갖 꽃들이 향기를 흩뿌려 남아 있는 냉기를 밀어낸다. 산새며 들짐승이며 사람들, 모든 생령들이 생기를 얻어 저마다의 몸짓에 힘이 넘친다. 마침내 초록 빛깔이 밀물마냥 번져와 온 산야를 물들였다.
나는 신록이 향연을 펼칠 때와 갈잎이 귀토의식을 마감할 무렵이면 광기를 참다못해 팔공산에 오른다. 산허리를 감도는 순환도를 따라 파계사 방향으로 걷고 있다.
오늘은 일요일. 상춘객과 승용차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웅장한 신록의 바다와 풋풋한 내음, 뛰어난 산세의 위용과 신묘한 산정기, 사람마다 눈빛이 빛나고 미소 짓는 밝은 표정들이다.
풍진 세상에 살면서 시달리고 들볶이고 부대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불안, 근심, 좌절, 분노, 얼룩진 마음을 모두 벗어놓고 산에 온 까닭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때 묻지 않은 자신들의 영혼을 봤기 때문일까.
등산복 차림의 젊은이 한 무리는 떠들썩 노래를 흥얼거리며 능선을 향해 오르고 있다. 가족끼리 온 사람들은 햇볕에 앉아 도시락으로 마음에 점을 찍고 있다. 늙은이들은 숲속 광장에서 팔을 흔들며 거닐다 심호흡을 즐기고 있다. 이방인 몇 사람은 찬란한 한국의 봄에 경탄하듯 두리번거리고 있지 않는가.
나는 후미진 계곡, 바위에 올라 숨결을 고르고 있다. 비로소 나무 잎새들이 흔들리는 소리며 미세한 벌레 소리며 물소리가 들려온다. 산새들의 지저귐은 연신 빗물처럼 쏟아져 내리고 윤기 반들거리는 신록에선 녹즙이 뚝뚝 듣는 것만 같다.
힘이 없으면서 하지 아니함이 없는 대우주의 섭리를 감지해 보려고 마음을 연다. 말함이 없이 아니하는 말이 없는 만물의 무언설법을 들어보려고 심이心耳를 찾아본다. 문이 없으면서 깨달음의 문이 처처에 있음을 모르는 나의 우둔을 개탄한다.
봄은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희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봄에도 그늘이 있고 그림자가 있으리라. 봄이면 그리움 때문에 슬프고 아프고 서러운 사람들도 있다.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영상이 동공에 어린다. 어느 해 봄, 깊은 밤에 퇴계선생이 매향에 취해 잠 못 들고 집 뒤란을 거닐다 저만치 맏며느리 방에 불이 밝혀져 있음을 본다. 가까이 다가가자 소곤소곤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 야심한 밤에 홀로 있는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문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본다.
짚단을 뭉치고 천을 입혀 만든 남편의 형상을 앉혀두고 술상을 차려놨다.
"무정한 사람, 무심한 사람. 꽃 같은 나를 혼자 남겨 두고 그대 먼저 먼 길 떠나다니.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어떡하라고. 이 야속한 사람아, 매정한 사람아…" 흐느끼면서 술을 따르고 있지 않는가.
퇴계선생은 울컥 목이 메었다. 윤리가 뭣이기에, 도덕이 뭣이기에, 젊디젊은 청상을 밧줄로 묶고 옥에 가둬 평생 수절의 고통을 안겨준단 말인가.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는다. 다음날 사돈을 모셔 와서 거부하는 것을 억지로 뿌리치며 며느리를 친가로 보내준다. 그리고 개가의 길을 열어줬다. 자유롭게 열려 있는 요즘 세상에도 이런 비극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절집을 돌아보고 내려온다. 금강경을 요약하고 압축해서 한 글자로 표현하면 '비非'자가 된다고 설파한 어느 선지식 모습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마을 옆을 지나오다 큰 똘배나무를 본다. 떨어져 있던 꽃잎들이 바람에 쓸린다. 다음 순간 불현듯 눈앞에 환상이 나타난다.
옷자락 붙들고 울며 놓지 않는 정인을 차마 뿌리칠 수 없어 머뭇머뭇 멈칫거리며 먼 하늘을 바라보는 한 풍류객이 있다. 그는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요 여인은 부안扶安의 명기 매창梅窓이 아니던가. 기약 없이 떠난 임은 임진왜란이 거의 끝나가는 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님 그리워 눈물짓던 그녀는 사무치게 애틋한 시를 남긴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의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황홀한 이 봄에 떠나 있는 님을 연모하는 마음, 타국에서 일하는 약혼남을 기다리는 마음, 이국에 억류된 남편이 풀려나기를 기도하는 마음, 이런 안타깝고 애절하고 절박한 마음을 헤아려 본다.
하산하다가 무심코 뒤돌아본다. 푸른 산은 여여한데 웬일일까 뜻밖에 로마의 교외 짙은 숲이 떠오른다. 그 숲에서 한 쌍의 남녀가 사랑을 속삭인다.
"우리는 별에서 내려와 여기서 만났군요."
"그대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키스로 잠 깨운 데지레 왕자님입니다."
남자는 독일의 젊은 철학자 니체요 여자는 독일계 러시아 장군의 딸 루 살로메이다. 그녀는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 심리학, 신학을 공부하는 지성과 미모를 갖춘 당시 유렵의 신여성이 아닌가. 뜨거웠던 사랑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들은 헤어진다. 사람의 감정은 대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에 의한 것이고 그 효력은 1년 6개월 지속된다고 했던가.
루 살로메는 그 후 여러 명망가의 가슴을 전전하다 장미 시인 릴케를 만난다. 니체는 상처를 크게 입고 평생을 독신으로 산다.
우리나라 고위 공직자 한 분이 사련邪戀으로 인생을 망가뜨리는 아픔이 겹쳐 보인다고 할까.
봄날은 거침없이 가고 있다. 청춘도, 꿈도 사랑도 가고, 절망과 비애도 간다. 흘러가는 것이 어찌 이것들뿐이랴.
봄의 그림자도 가고 말 것이다.
돌이 나를 보고 웃는다 / 김규련
돌에도 정이 오가는 것일까.
한동안 버려뒀던 수석이란 이름의 돌들이 저마다 몸짓을 하며 가슴으로 다가온다. 하나하나 먼지를 털고 닦고 손질을 해 본다. 모두 한결같이 돋보인다. 십여 점 되는 돌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모두가 개성이 뚜렷할까.
수석인들은 나의 돌을 보고 이것은 산수경석 저것은 폭포석 또 저것은 물형석, 무늬석, 호수석, 괴석 등 온갖 이름을 붙이곤 한다.
허나 나는 아직 돌밭에서 수석을 캐내고 이름을 붙여 부를 만한 전문적인 식견은 없다. 그저 오가다 문득 마음에 들고 연이 닿아 한 점씩 모아왔을 뿐이다.
돌들을 벗삼아 곁에 두고 묵묵히 앉아 있다. 어느덧 한나절이 지났다.
나는 이미 돌들을 따라 심산유곡을 소요하고 있지 않은가. 숱한 바위 언덕과 벼랑을 넘고 무수한 골짜기도 지나왔다. 험준한 산봉우리를 넘어 지금은 물보라에 옷깃을 적시며 폭포 곁에 서 있다.
그늘진 곳에서 수석들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떤 놈은 멧돼지 같고 어떤 놈은 공룡 같고 또 어떤 놈은 주작 같다. 괴물들의 갑작스런 울부짖음에 깜짝 놀라 환상에서 깨어난다.
돌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표정 속에 숨어 있는 많은 의미를 찾아 읽어본다. 돌은 비록 속진 속에 굴러도 탈속의 멋이 있고 세상사 온갖 잡음에 부딪쳐도 흔들림이 없다. 항간에 변혁이 생겨 떠들썩해도 태고의 정적을 깨뜨리지 않는다. 돌은 간청해 오는 사람의 심정에 따라 걸맞은 설법을 무언으로 베풀어 주는지도 모른다.
돌들이 차츰 역광을 받으면서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기 시작한다. 왜 그럴까. 인간 만사가 꿈같고 허깨비 같아서일까. 아니면 거품 같고 그림자 같아서일까. 사람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권세며 명예, 재물이며 지위, 이 모든 가치가 돌 앞에서는 하잘것없는 한갓 아침이슬이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돌들이 껄껄 웃어댄다. 인간들의 슬픈 희극이 퍽 재미있는 모양이다. 애씀과 땀 흘림으로 삶의 탑을 쌓아올리는 사람은 말이 없다. 헌데 위선의 탈, 성인의 탈, 천사의 탈을 수시로 바꿔 쓰고 외줄타기 잘 하는 사람은 대성했다며 으스대고 다닌다.
마음과 행동과 말이 따로 노는 잔재주꾼들은 스스로 겨레의 스승이나 된 것처럼 큰 소리 쳐댄다.
무소유의 청복을 설파하면서도 자신은 은근히 재물을 챙기는 성직자가 득도한 사람이라고 존경받기도 한다. 이 거짓된 인간의 몸짓이 우습다는 것일까.
돌들 언저리에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명멸하고 있다. 조금 전 돌들을 껄껄 웃게 한 부끄러운 인간의 형태들이 어쩌면 나의 변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심한 자괴를 느끼며 부질없이 떠올렸던 환영을 얼른 지워나간다.
내 감성의 영토 속에 들어온 돌들이 조용히 말을 건네 온다. 뭣을 봤다고, 들었다고, 알았다고 말을 함부로 쏟아내지 말라고 한다. 나는 그 동안 말이 많았다. 이젠 가슴의 뜨락에 묵언의 팻말을 세워둬야 한다고 꾸짖는다.
내 몸은 늘 낮은 데로 임하는 척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항상 자존심이라는 아만이 머물고 있었다. 자존심도 벗어놓고 하심(下心)공부를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타이른다.
돌들이 한참 머뭇거리다 또 입을 연다. 왜 구름처럼 흘러가지 못하느냐고 따진다. 젊어서는 허황된 야심에 걸렸고, 중년에는 보잘것없는 자리 욕심에 걸렸었다. 지금은 되지도 않는 글짓기 욕심에 걸려서 끙끙거리고 있지 않느냐고 한다. 맞는 말이다. 늘그막에는 훌훌 다 털어버리고 무애의 흉내라고 내 보라고 권해온다.
아직도 욕심 많은 이 촌로가 침묵과 하심과 무애를 어찌 입엔들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것이 더 크고 무서운 욕심일지도 모른다.
창 밖에는 땅거미가 깔리고 있다. 오늘따라 왜 자꾸만 흘러온 삶의 유역이 뒤돌아 보이는 것일까. 뭣인가를 기다리고 차지하고 붙잡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었던가. 곧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전화벨이 요란하게 들려온다. 홀연히 명상에서 깨어난다. 수석들은 한갓 돌멩이로 여전히 내 곁에 졸고 있다. 내일은 팔공산 나뭇잎새에 가을빛이 깃드는 소리나 들으러 가 봐야겠다.
月浦里 가는 길에 / 김규련
월포리로 가는 해변은 수채화요, 환상이요, 잠언이다.
포항에서 바닷가를 따라 뚫린 신작로를 차편으로 30여 분쯤 북상하면 월포리 바다에 이른다. 이 해안선의 경치가 좋아서 틈만 나면 정인을 만나러 가듯 찾아 나선다. 자연도 사람과 같아서 정을 주면 정으로 화답해 온다. 정만 오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명화를 보여 주기도 하고 명시를 들려주기도 하는가 하면 무설의 교훈으로 지혜를 주기도 한다.
나는 어쩌다 역마살을 끼고 태어났는지 한평생 직장 따라 이 고을 저 고을 옮겨 가면서 살고 있다. 그러는 사이 몸에 배인 버릇이 생겨났다. 한 고을에 가면 그곳 인심에 정을 붙이기 전에 그곳의 자연에 먼저 정을 쏟고 정을 붙인다. 그런 정이 더욱 순수하고 떠나올 때 번거롭지 않았으며 떠난 뒤에도 미완의 사랑처럼 때때로 아쉽고 짙은 향수를 느끼게 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만 해도 여러 곳을 떠돌았다. 그 버릇은 여전해서 오늘은 또 월포리 바닷가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상주에서는 반야사 계곡에, 영양에서는 일월산에, 고령에서는 주산산성(主山山城)의 대가야 유적지에, 군위에서는 청화산(淸華山) 법주사 주변에, 포항에서는 내연산 계곡과 구만동(九萬洞) 앞바다에, 구미에서는 금오산에 얼마나 빈번한 지순의 정을 주었던가. 이따금 이들이 환한 웃음으로 훌쩍 다녀가라며 나에게 손짓을 해오기도 한다.
오늘은 모처럼 일요일. 늙은 아내를 곁에 앉히고 내가 운전을 해서 차를 몰고 나왔다. 운전솜씨가 불안해서일까, 아내는 손에서 염주를 떼어놓지 못하고 있다. 가다가 경치가 빼어난 곳에 차를 세워 두고 밖으로 나와 송림 사이를 서성거리며 동녘 바다를 바라본다.
가슴이 탁 트인다. 인세의 거리에서 잠시 빠져나온 해방감 때문일까, 구름처럼 떠다니던 일상의 온갖 상념들이 어느덧 사라져 간다. 소나무 곁에 와서 나 또한 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 바다를 바라본다. 아내도 내 곁에 다가와서 멀리 수평선을 응시하고 섰다. 아무 말없이 묵묵히 서 있어도 지나온 애환의 세월들이 서로의 가슴 속에 되살아나 아프게 스치고 지나간다. 아내의 흰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시다. 지금 이 모습으로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온 누리에 감사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할까.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여여하군요. 와. 물 위에 솟아 있는 저 바위들 좀 봐요. 절벽 위에 저 해송은…."
아내의 감성이 오색 물감으로 풀어져서 모든 사물을 연신 그림으로 미화시키고 있다. 나도 마침내 환상의 포로가 되어 간다.
해안선을 따라 수면 위에 울퉁불퉁 솟아 있는 바위들이 금방 수석전시회를 열고 있다. 어떤 놈은 산수경석 같고 또 어떤 놈은 괴석 같고 또 어떤 놈은 빼어난 폭포석으로 돋보인다. 절벽의 해송은 소나무 분재를 확대해서 옮겨 놓은 것 같다.
다시 차를 몰고 북으로 간다. 찬란한 신록의 향기와 싱싱한 기가 온몸에 스며든다. 저만치 산기슭에 묵은 묘들이 흩어져 있다. 푸른 숲과 황폐한 묘역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예사롭게 지나쳐 보이던 것이 왜 이제는 내 시선을 자주 붙드는 것일까. 묘 주변에는 무언의 잠언들도 함께 흩어져 누워 있다.
무병장수는 가당찮은 욕심이요, 지병장수(持病長壽)가 더 슬기롭다고 한다. 지병을 살살 달래가며 함께 살면 장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명재천은 핑계요, 인명재심(人命在心)이니 조신(操身)을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때때로 좌망(坐忘)과 무애(無碍)의 경지도 생각해 보라고 한다.
어느덧 월포리 바닷가에 이르러 모랫벌을 거닐고 있다. 오늘은 바다가 때묻지 않은 소녀의 심성같이 맑고 잔잔하다. 망망대해를 한참 바라보고 서 있으면 가슴에도 물결이 인다. 젊은 날에는 그 물결 속에서 야망이 솟구쳐 올랐다. 이제는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풀어서 녹여 주고 승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고 할까.
사람이 이순의 유역을 흐르면 천지만물 속에 숨어 있는 순리를 읽고 따라야 한다고 했다. 종심(從心)의 강기슭을 흐를 때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을 옮겨도 항시 상도에 머무는 경지에 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동현의 말씀이고 나 같은 범부야 어찌 흉내인들 낼 수 있으랴.
노욕이 발동하면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다고 하던가. 늙어 가면서 탐욕이 더해 명리며 권세며 재물의 사슬을 목에 걸고 뛰어다니는 노구(老軀)를 볼 때가 있다. 종심의 연륜에 이른 사람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부귀영화를 마지막으로 다 누려 보겠다고 미쳐 날뛰는 노광(老狂)을 볼 때도 있다. 이순의 유역을 다 흘러가려는 나도 저토록 노추(老醜)를 보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끔찍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저만치 들녘에는 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문득 소망 같은 것이 머리에 떠오른다. 철따라 싹을 틔워 꽃도 피우고 향기도 풍기다가 가을이면 소리없이 시들어 가는 들풀처럼 조용하고 깨끗이 늙어 가고 싶다. 이것은 또 아내의 열렬한 소망이 아니던가.
젊은 날에는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하라. 그러면 나날이 새롭고 또 새로워진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는 옛 중국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좌우명을 좋아했었다. 이제는 그 반대로 하루하루 진실로 가슴 속의 온갖 욕심을 덜어내리라. 그러면 나날이 덜어지고 또 덜어진다.(苟日損 日日損 又日損)는 좌우명을 달고 뼈아픈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해가 저물려 한다. 보경사에 들러 오랜만에 스님들과 함께 저녁공양이나 들고 돌아가야지.
오락(五落)과 오득(五得) / 김규련(金圭鍊)
아침에 시계를 보면서 서두를 필요가 없게 됐다. 남들이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나는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산에 오른다. 때로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특강이란 이름으로 말 장난을 하고 있을 때도 있다.
말하자면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에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배 고프면 먹고 목 마르면 물 마시는 것도 마음대로다. 옛 선사들은 무장무애(無障無碍)의 높은 경지에서 행주좌와(行住坐臥)며 기래끽반(飢來喫飯)을 자유로이 즐겼다. 나의 경우는 일정한 일거리가 없기 때문에 생활의 패턴이 깨뜨러져서 불규칙한 생활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오늘은 아침 등교 시간에 도심을 빠져 나와 운제산(雲悌山) 기슭을 서성거리고 있다. 운제산은 보경사(寶鏡寺)가 있는 내연산(內延山)과 함께 포항 시민들이 아끼고 사랑하고 자랑하는 산이다.
운제산에는 신라 고찰 오어사(吾魚寺)가 있고 근세에 창건한 자장암(慈藏庵)과 원효암(元曉庵)이 있다. 사찰이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산세 자체에 현묘함이 있어 늘 선미(禪味)가 감돌고 있다. 게다가 깨끗하고 넉넉한 호수는 언제나 산 한 자락을 흔들고 있고 울창한 수림은 산을 짙게 뒤덮고 있다.
그래서일까. 차에서 내려 호수를 따라 걷다가 오어사 입구에 들어서니 벌써 몸과 마음에 깊고 아늑하고 설레임 같은 묘한 기별이 온다.
잠시 멈춰 서서 호수와 건너편 신록의 숲을 바라본다. 오늘따라 호수는 비취를 곱게 갈아 뿌린 듯 진초록 빛깔이다. 신록은 눈부시다. 어쩌면 저토록 싱싱하고 발랄하고 찬란할 수 있을까. 잎새들은 윤기로 번들거리다 말고 기름 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진세(塵世)의 애환(哀歡)에 울고 웃으며 정신 없이 뛰고 있는 사이 천지의 질서는 이렇게 풍요한 신록의 향연을 베풀고 있지 않는가. 마침내 나도 한 잎의 나무 잎새가 되어 바람결에 흔들려 본다.
나무 잎새에도 생명이 있고 질서가 있고 의미며 언어도 있다. 그것들에 도취되어 함께 숨쉬며 침잠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동안 발은 계속 움직여서 오어사를 거치고 호수를 건너 원효암으로 가는 계곡에 와 있다.
숲 속에서 갑자기 무언의 함성이 들려온다. 이것을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하던가. 문득 귓가를 스치는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시 한 수.
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짙푸른 숲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즐기고 있다. 오르는 사람, 내려오는 사람, 멈춰 서 있는 사람, 돗자리를 깔고 노는 사람, 모두가 환하게 밝은 표정들이다. 산 정기와 삼림욕(森林浴)으로 마음의 먼지와 때를 털고 씻어버렸기 때문일까.
나는 후미진 곳에 앉아 그 동안 쌓아둔 온갖 상념들을 이리저리 정리해 본다. 먼저 나의 자화상이 떠오른다. 떼지어 다니던 무리에서 버림을 당하고 갈 곳을 몰라 산등성에 멍청히 혼자 서 있는 한 마리 늙은 사슴 같다고 할까. 아니면 매일처럼 해오던 연기를 마지막으로 모두 끝내고 이제 막 무대 밖으로 떠나온 퇴역 배우 같다고 할까.
때가 되면 집단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은 내 날이요, 내일은 네 날이다.(hodie mihi crass tibi)’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막상 자기가 당하다 보니 미리 마음의 대비를 해왔음에도 때때로 허망함을 느낀다.
문득 노선배의 농담이 생각난다. 정년 퇴임을 하면 오락거사(五落居士)가 된다고 했다. 소중한 것 다섯 개가 떨어져 나가니 그런 별호가 붙은 모양이다. 첫째는 평생 종사해 온 직업이 떨어져 나간다. 둘째는 곁에서 잔일을 도와 주던 인편(人便)이 떨어져 나간다. 셋째는 불규칙한 생활로 돌아가니 건강이 떨어져 나간다. 넷째는 직장에서 느껴오던 보람이 떨어져 나간다. 다섯째는 돈이 떨어져 나간다.
한 줄기 바람이 산림을 흔들고 지나간다. 부질없은 망념(妄念)을 훌쩍 털어버리고 숲 속을 이리저리 소요해 본다. 요란한 뻐꾸기 소리는 연신 풀잎 위에 빗물처럼 쏟아져 부서지고 있다.
나는 여기 이 순간의 환희를 온몸으로 느껴 보려고 마음을 텅 비우고 바위 위에 앉아 본다. 불가에서는 ‘일일삼천심(一日三千心)’이라 했던가. 자꾸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구름처럼 피어 오른다. 중생의 마음이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수의(壽衣)를 입고 땅 속에 묻혀 있다는 생각으로 바위 위에 누워 본다. 하늘이 새롭다. 나무 잎새, 풀잎, 벌레, 돌, 흙 모든 사물이 동기(同氣)의 정으로 탈육해 가는 나의 시신에 다가온다. 심신이 편안하기 그지없다. 이 순간 시·공도 떠나고 유·무도 떠났다. 선·악도 떠나고 미(迷)·오(悟)도 떠났다. 온갖 사물이 그냥 그대로 부처요, 진실이요, 우주의 실상이 아닌가.
오가다 주워들어온 원효의 화엄 사상의 한 편린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무법이무불법(無法而無不法)이요, 비문이무불문(非門而無不門)’이라 했던가. 그렇다. 온갖 현상이 우주의 실상이 아니면서 실상 아닌 현상도 없다. 현상이 곧 실상이다. 실상은 절대적 자유의 세계이다. 이 실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특별히 마련돼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온통 문 아닌 곳이 없지 않는가.
호수에서 물오리 떼들이 정적을 깨뜨리고 물 위로 솟아오른다. 공연한 사변의 늪에서 빠져 나와 잡초를 헤치며 거닐어 본다. 또 괘한 상념이 불쑥 떠오른다.
어쩌면 나는 오득거사(五得居士)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첫째는 직장에서 물러났으니 큰 자유를 얻은 셈이다. 둘째는 내가 내 마음대로 소모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셋째는 책임을 벗고 긴장에서 풀려났으니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됐다. 넷째는 자연으로 돌아와 앉으니 이 세상에 친구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새 벗을 많이 얻은 셈이다. 다섯째는 안분을 얻었다고 할까.
산 그림자가 계곡에 짙게 깔리고 있다. 산 바람은 연신 나무 잎새를 흔들고 있다. 곧 산사의 저녁 종 소리가 울려 퍼지리라
광영 있는 삶 - 김규련
삶을 한 개 가랑잎이라 할까.
가랑잎이 강물 위에 떠가듯 삶의 강기슭을 흘러가다 보면 사람은 저마다 나름대로 희비의 여울목을 지나오기도 하고 부침(浮沈)의 강변을 스쳐가기도 한다. 이 덧없는 여로에서 어쩌다 무심히 흘리고 지나온 자그마한 사연이나 감동 같은 것이, 잠 안 오는 밤 문득 가슴이 설레도록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주옥같은 느낌을 그냥 버리기가 아쉬워 글로 옮겨 종이 위에 담아두곤 한다.
오늘은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황송문 님이 정년퇴임을 한다는 소식이다. 들고 있던 편지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산수유 꽃몽우리들이 노랗게 입술을 내밀고 있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떠오르고, 문득 황송문 님의 모습이 눈앞을 스친다. 그 님과 인연의 끈이 이어진 지도 벌써 사 반세기가 지났다.
1981년, 범우사에서 내 수필 작품을 범우에세이선 101호로 출판할 때 책머리에 황송문 님이 쓰신 작품평이 실렸었다. 제목은 김규련론, 부제로 「선(禪)과 정한(情恨)의 모자이크」를 달았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유명 시인의 평론을 고 박연구 님의 주선으로 받게 돼 큰 영광이었다. 더구나 그 평론이 너무도 면밀하고 정확하고 정곡을 찌르는 데다 그 문장 또한 아름다워서 독자들은 원문보다 평론 읽는 재미가 더 즐거웠다고 했다.
지금도 그 수필평을 읽어보면 황송문 님의 혜안과 통찰력과 예지력에 감탄하게 된다. 나를 한 번도 대면한 적도 없이 수필작품만 읽고도 나의 내면세계를 훤하게 꿰뚫어 보는 데는 더할 말이 없었다. 내 문장의 특징도 나의 삶의 자세도 취향도 찍어내고 심지어 나의 인생관이며 사물관이며 가치관도 한 점 어긋남이 없이 지적했다고 하겠다.
책이 나온 다음 해 「거룩한 본능」이란 작품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서 큰 보람을 느끼게 된 것도 황송문 님의 작품평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3년 뒤 한국수필가협회 주최의 수필문학 세미나가 경주 불국사 근처의 코오롱 호텔에서 개최되었다. 그 날 나는 「수필문학의 동양사상적 배경」이란 주제로 특강을 했었다. 강의를 마치고 더위를 식히려 숲속 벤치를 찾아갔다.
그 곳에서 황송문 님을 처음으로 만나 뵙게 됐다. "제가 황송문입니다."하고 손을 내미는데 그 손이 언젠가 절집에서 본 문수보살의 손처럼 손가락이 섬세했다. 나는 악수를 하면서 직감적으로 느꼈었다. 문재가 뛰어나신 분이구나 하고.
냉커피를 마시며 수필문학이며 종교며 인생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한참 나눴다. 그 님의 첫 인상에서 느낀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눈에서는 총기(聰氣)가 얼굴에서는 화기(和氣)가 언어에서는 재기(才氣)가 행동에서는 덕기(德氣)가 인품에서는 향기(香氣)가 풍겨났었다. 동천세노항장곡(桐千歲老恒藏曲)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평생 춥고 가난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조선조 선조 때의 선비 양사언(楊士彦)의 고결하고 올곧은 기개(氣槪)가 오늘의 황송문 님에게도 살아있음을 볼 수 있었다.
한국 문단에는 문선(文仙)이 있는가 하면 문사(文士)도 있고, 문치(文稚)가 있는가 하면 문충(文蟲)이 있다. 또한 문적(文賊)이 있는가 하면 문간(文奸)이 있고 문노(文奴)가 있는가 하면 문기(文妓)도 있다.
문선은 문학작품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인품 또한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예우를 받는 사백이라 하겠다. 문사는 예술혼이라 할까 문학정신이라 할까 올곧은 전문의식을 갖고 보석 같은 문학작품을 창작해 내는 글쟁이들이다.
문치는 잡문 나부랭이나 뻔질나게 써서 신문 잡지에 발표하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문단의 대가인양 행사하는 과대망상증 환자들이다. 문충은 글자 그대로 글을 파먹는 좀벌레 같은 장사꾼 문인이라 할까. 남의 작품 흉내도 잘 내고 저질 작품을 대량 생산한다. 책이 나오면 입에 거품 물고 뛰어다니며 친구와 이웃을 괴롭히며 강매하는 무리들이다.
문적은 자기의 정치적인 야망이나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문학을 도구로 이용하는 사이비 문인들이다. 문간은 글재주를 밑천으로 정권에 빌붙어 이권이나 챙기고 돈과 권력을 위해서는 노루를 사슴이라 쓸 수 있는 혹세무민의 무리들이다.
문노는 출세한 사람이나 힘있는 사람, 또는 돈 많은 사람의 자서전이나 문집 같은 것을 써주거나 손봐주고 돈푼이나 받아먹고 사는 글 재주꾼이다. 문기는 글 기생이다. 술잔이나 얻어먹고 이 사람 저 사람 비위나 맞추며 미사여구로 아부하는 글밖에 못쓰는 못남이 글이다.
황송문 님은 문학박사로서 외도 한번 없이 오로지 대학에서 강의만 해오셨고 많은 저서를 남기셨다. 또한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으로서 야단스럽게 떠드는 바 없이 조용하게 한국문단에 기여한 공이 크다.
문학강좌를 개설해서 시작법이며 수필창작론을 후진들에게 강술해서 문인양성에도 큰 업적을 쌓았다. 시인으로서는 주옥같은 불멸의 작품을 창작해서 독자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문우들을 비롯해서 후배들과 제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황송문 님을 문선이라 할까, 문사라 할까 독자들이 판단하리라.
사람들은 고희를 지나고 나면 그가 살아온 궤적과 삶의 자세에 따라 인생의 길은 달라진다고 하리라. 노선(老仙)의 삶이 있는가 하면 노학(老鶴)의 삶도 있다. 노동(老童)의 삶이 있기도 하고 노옹(老翁)의 삶도 있다. 그런가 하면 노광(老狂)의 삶도 있고 노고(老孤)의 삶도 있다. 노궁(老窮)의 삶이 있는가 하면 노추(老醜)의 삶도 있다.
황송문 님은 대학에서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의 자세로 학문연찬과 인재양성에 헌신해 왔다. 퇴임 후에도 부단한 노력으로 작품창작에 매진할 것이며 문학강좌를 통해서 문인배출에도 큰 공헌이 있을 것이다. 급기야는 도광양덕(韜光養德)과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생활철학으로 아무런 걸림이 없이 물처럼 바람처럼 유유히 살아갈 것이다.
내 삶의 가랑잎이 팔순의 어귀까지 흘러오고 있다. 오늘은 종일 황송문 님과 닿아있는 인연의 끈을 헤아리며 석양을 맞는다.
비록 운수(雲樹)에 가리어 풍모는 뵙지 못하고 성음도 듣지 못할지라도 심혼의 대화는 늘 창공으로 오가며 끊이지 않으리라. 항시 건승하시고 가정에 청복이 깃드시기 빕니다.
- 정년기념문집 『師道와 詩道』에 실린 글 -
보름달이 유죄, 소쩍새는 공범-金奎鍊-
유신 말기의 정치 상황은 험악하고 살벌했다.
그무렵, 나는 경북의 오지, 영양군으로 일자리가 옮겨졌다. 워낙 산중 고을이라 유배지로 쫓겨가는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허나 이내 그곳 산수와 인심에 따뜻이 보듬겨져서 세상 바뀌는 줄도 잘 모르고 삼 년 세월을 훌쩍 흘려보냈다.
영양은 산이 깊고 물이 맑았다. 수림이 울창해서 공기가 신선하고 하늘은 더없이 높고 깨끗했다.
해가 지면 밤하늘의 야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그 많은 별들은 저마다 보석처럼 반짝이며 천상의 향연을 베풀곤 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그 향연에 초대되어 자신의 실체를 비로소 깨닫고 부질없는 집착에서 벗어나본다.
봄, 여름, 가을 밤마다 애타게 우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린다. 마침내 맺히고 서린 한과 서러움을 깨끗이 풀어내어 가슴을 텅 비게 만든다.
커다란 보름달이 영위에 걸리면 지상의 모든 존재들은 황금빛 비단 옷을 갈아입고 고요의 바닷속으로 빨려들어 선정의 열락을 즐기게 된다.
영양은 삼불차(三不借)의 고을이다. 사람을 빌리지않고 글을 빌리지 않으며 재물도 빌리지 않는다고 한다.
한 마을에서 박사가 십 여 명이나 배출될 정도로 인재가 많은 고장이다. 글이 흔해서 관내의 비명(碑銘), 제문(祭文), 정기(亭記)..등 문장은 이곳 문사들이 쉽게 해결해 버린다. 재물을 빌리지 아니 함은 지족을 알기 때문이리라.
주민들의 삶은 크게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궁색하지도 않다. 고추,담배, 고랭지 채소, 일월산 산나물...등 농가 소득은 제범 짭짤했다. 엽연초 수납 때가 되면 영양읍은 흥청망청이다 도시의 유녀들이 이곳 주점으로 잠시 몰려든다.
인심은 온후라고 순박했다. 하지만 비루하고 그릇된 짓거리는 그냥 봐 넘기지 않는다. 사슴같이 온순하다가도 갑자기 호랑이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악의 없는 실수는 넉넉한 아량으로 덮어주고 감싸주기도 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무 잎새가 무성한 초여름 밤, 그날 따라 보름달은 순금으로 된 징처럼 커다랗게 중천에 달려 있었다. 소쩍새는 연신 쏟아지는 금빛 가루를 사방으로 흩이며 애타는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어찌된 일일까. 그날 밤은 소쩍새 우는 소리가 가슴을 쓸어내리기는커녕 도리어 슬픔, 고독, 좌절, 소외, 분노...이런 것들로 창자를 뜯어내듯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잠이 올 리가 없다. 이 밤을 어떻게 지새울까, 뜨락에 나와 서성거리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본다.
이때, 따르릉 전화벨이 울려왔다. 영양여고 최 교장 목소리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으니 술 한 잔 같이 하자는 제의가 아닌가. 무척 반가웠다. 그도 나와 같이 가족을 대구에 두고 혼자 와 있는 처지였다.
밤은 이미 으슥한데 둘이는 장터 귀퉁이 한 주막에서 마주 앉았다. 때때로 들른 적이 있어 주모는 얼른 알아차리고 술상을 내왔다. 우리는 별말없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위 속에 술을 들어부었다.
안동 소주 십 여 잔을 들이켜고 나니 몸이 쫘악 풀리는 해구(解軀)현상이 왔다. 이제 주모까지 끼여들어 주거니받거니 한다. 점차로 말이 헤퍼져서 해구(解口)가 되고, 문학, 철학, 종교가 어떻고 멋대로 떠들어댔다. 연신 술을 마신다. 이젠 맥주다. 웬일일까. 늙은 주모가 금세 미인으로 둔갑해서 교태를 부리고 있지 않는가. 술이 지나치면 해색(解色)이 되어 미추가 분별이 안 된다더니 그런 것이었을까. 맥주 여닐곱 병을 비우고보니 마음이 바다보다 더 넓고 편안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해증(解憎)이라 했던가.
이제 둘이는 혀가 꼬부라져서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다 맥주 두어 병을 또 몸 속에 쏟아 넣었다. 둘이는 그야말로 해격(解格)이 와서 서로의 신분도 체면도 인격도 다 벗어던지고 오십대 중반의 무지막지한 남자로 전락해 버렸다.
마침내 두 사람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아직도 소쩍새는 소쩍소쩍 피를 토하고 온 동네는 죽음의 적막 속에 묻혀 있었다.
부마사태(釜馬事態)가 터지고 시국은 칼날처럼 긴장해 있을 때가 아니었던가. 허나 대취한 취객이 그런 것 알 리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옥고로 신음하던 죄수가 어느 날 돌연히 세상이 바뀌어 풀려난 듯 천하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읍내 중앙통을 둘이서 손잡고 휩쓸며 전진했다. 큰 소리고 노래도 부르면서.
뒤에 안 일이지만 우리가 주막에서 독주를 퍼마시고 있을 때 벌써 관내 유지들 사이에 소식이 돌고 있었다. 그들은 전화통을 들고 서로 걱정을 했다.
"통금 고동이 분 지가 두 시각이 지났는데.....,"
"경계가 심한 거리로 나오면 즉각 파출소로 연행될 텐데....,"
"소위 교육자란 사람들이 비상 시국을 망각하고 만취해서 통금도 위반하고... 어쩌고 저저고 떠들어대면 좋을 리가 없는데...," 하고.
마침내 그들의 의논이 하나로 모아졌다. 오늘 밤 교육장과 교장은 책임이 없다. 죄가 있다면 유별나게 밝은 보름달이 유죄다. 밤새껏 슬피 우는 소쩍새도 공범이다.
지역 원로 두 분이 치안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잠을 깨웠다. 그간의 사정을 알리고 무사 귀가하도록 보살펴 달라고 간청했다.
경찰서장의 응답은 경쾌했다.
"보름달이 유죄고 소쩍새는 공동 정범이라... 맞습니다. 순찰 경관에게 잘 모시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심심해서 장온고(張蘊古)의 <대보잠大寶箴>과 정정숙程正叔의 <사잠四箴>을 읽다 말고 문득, 영양 시절 나의 추태를 떠올렸다. 큰 실수도 선의로 보면 삼월 달의 잔설이 되고, 작은 실수도 악의로 파헤치면 삶을 어긋나게 만드는 사단이 된다고 했던가.
세상세는 독버섯도 있지만 아름다운 인정의 꽃은 더욱 많았다고 하리라.
귀로의 사색 중에서 / 김규련
산골에 와서 살면 맑고 은은한
자연의 목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메밀꽃이 피는 가을의 석양 들길에서 발바닥이 가렵도록 들려오는
뭇 풀벌레 소리,
늦가을 깊은 밤에 외양간의 소가 먹이를 되새길 때
목에 단 요령이 흔들려서 땡그렁 땡그렁 들려오는 그윽한 요령소리,
눈보라 치는 겨울새벽, 문득 잠에서 깻을 때 머리맡에서 갸냘프게 떨리는 문풍지 소리
오뉴월 긴긴 날 진종일 앞뒤산에서 울어대는 뻐꾸기의 피울음소리
뜨락에 거목으로 서있는 벽오동 잎에
여름 소나기가 후드득 흔들고 지나가는 소리....
이러한 소리에도 항시 절묘한
여운이 감돌아 무한한 자연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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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으로 지는 세월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애환의 기슭이며 영욕의
여울목을 그녀는 지났을까,
사랑도, 미움도 서러움도 기쁨도 어쩔수 없이
흘러간다는 강물의 슬기를 사무치게 느켰으리라.
강물의 흐름이 곧 如來 의 마음인 것 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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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의 고개를 넘고 최근에 이르기까지는 왜 그런지 모든게
나의 심상에 서서히 변화가 왔다.
그것은 모든것에 대한 감사라 할까
하늘엔 해가뜨고 달이뜨고 별이 반짝여서 고맙다
편안한 잠을 즐길 수 있는 밤이 날마다 찾아와서 고맙다.
봄이 오면 봄이 와서 고맙고 눈이 내리면 눈이 와서 고맙다
바람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지면 그래 그래서 고맙다
지상에 뒹구는 모든 존재가 다 고맙다
황혼의 여로/김규련
사바에 태어나
바람 따라 이리저리 뒹굴다 보니
어언 팔십 여 년,
한순간의 꿈결처럼 세월은 흘렀다.
문득 지나온 시공을 뒤돌아 본다.
절벽을 넘고 협곡을 지나며
난 바다를 건너도 봤다.
봄꽃 흐드러지게 핀 들녘을
지저귀는 뭇새 소리 들으며 지나올 때도 있었다.
수시로 크게 요동치는
인세(人世)의 산하를 표랑해 온 나그네의 심회는
늘 수수하고 깊고 장구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절망과 비애와 눈물도 보람이며 감격이며
기쁨 못지않게
우리 삶의 낙이요 향기요 멋이었다고 하리라.
이제 황혼 짙게 깔린 여생을 고민할 때가 됐다.
큰 탈 없이
곱고 맑고 향취 묻어나는 삶을 누리고 싶다.
최후의 비원(悲願) 하늘에 고해 볼까.
먼저 나 자신의 내면을
구석구석 살펴봐야 하리라.
입으로는 경전이며 성경 말씀을 읊조리면서
노회한 위선의 탈을
덮어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이젠 흥망이 유수한 세상사에서
멀찍이 물러나 초연해야할 터이다.
어차피 세상은
세우고 부수는 입파(立破)와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는 여탈(與奪)과
열고 합하는 개합(開合)을
거듭하며 발전하는 것이 아니던가.
깊고 눈 푸른 안목으로
우주 자연을 응시해 봐야겠다.
우주 자연은
우리의 숙주(宿主)이다.
숙주의 품 안에는
삼라만상과 천만 종의 생명체가 살고 있다.
그들은 자기 몫을 다 하다가
곧 소멸해서 하나로 돌아간다.
하나에는 너도 나도 없고
귀천도 선악도 미추도 없다.
그 하나가 다시 만물로 태어나지 않는가.
모두가 숙주의 한 가족들이다.
나는 인연연기로 잠시 결합된 존재이다.
나의 실상은
비존재요 공(空)이 아닐까.
무아(無我)인 내게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거늘
무엇이 내 것 될 수 있으랴.
일용하는 사물은
잠시 잠깐 빌려 쓸 따름이다.
참나는
내 영혼 속에 숨어있는 자성(自性) 뿐이다.
숙주의 섭리에 애정으로 심취하다보면
나도 자연이 되리라.
늙으면서 자연 따라 변하면
능변(能變)으로 심신이 편안해진다.
거역하면
봉변(逢變)을 맞아 크게 상한다고 했던가.
다음으로 노인사고(老人四苦)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이다.
고독고(孤獨苦)는
인식의 눈을 바르게 뜰 때
초극의 길이 보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상에 던져진
어쩔 수 없는 외로운 길손이다.
사람만이 꼭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리라.
고독을 즐기면서
사람 아닌 친구도 찾아야 하겠다.
항시 나와 함께 있는 책이며
수석이며 분재며 화초도 친구가 아니던가.
산책길에서 노상 만나는
초목도 바위도 텃새들도 정을 주면
영감(靈感)으로 화답해 오는 친구이리라.
떠가는 구름, 스쳐가는 바람, 흘러가는 강물도
무언의 설법으로
나를 깨우쳐 주는 친구가 될 것이다.
병고(病苦)는 늙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연현상이다.
해서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아야할 터이다.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오히려 병을 양약으로 삼고 살아야 하겠다.
작은 병은 즉각 다스리고
큰 병이 찾아오면 조용히 받아들일 것이다.
철없는 아이 달래듯
병을 달래가며 사는 데까지
함께 살아갈 것이다.(팔순이 넘었으니까)
빈고(貧苦)는
예부터 나라도 구제 못 한다고 했다.
노계(老計)는
본인 스스로가 세워야만 한다.
나는 다행히 연금의 혜택으로
늙은 아내와 둘이 사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만하면 족하다는
만족감이 늘 부족해서
허덕이는 졸부보다 더 넉넉함을 느끼게 한다.
무위고(無爲苦)는
현대 감각으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까.
건장한 노인이 할 일 없어 괴롭다는 것은
나태의 극치이다.
무언가를 해서
스스로 보람을 찾아야 하리라.
나는 수필을 정인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가꿔나갈 것이다.
언젠가는
화향천리 문향만리(花香千里 文香萬里)의
진수를 흠향하고 싶다.
수필가는 영혼의 화가이다.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언어로 그려내는
화백이 아닌가.
스스로의 정신세계가
그윽하고 깊고 아름답고 향기로우면
그대로 작품에 투영된다.
따라서 늘
독서와 사색, 명상과 성찰이 있어야 하리라.
수필가는
마침내 구도자의 자세로
깨달음을 얻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벌써 이내가 깔려온다.
요란한 귀뚜리 소리가 적막을 흔들고 있다.
행복한 하루를 보내며
숙주 앞에 두 손을 모은다.
불현듯 떠오르는 선시(禪詩) 한 수.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달이 밝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겨울엔 하얀 눈
한 생각 바꾸면
지금 여기 내 마음이 극락인 것을
황혼의 길은
인품의 완성이요 깊어감이요
신의 경지에 다가가는 거룩한 행보이리라.
수필의 구성/ 김규련
수필의 구성은 틀이 없는 듯 있어야 하고 있는 듯 없어야 한다.
이 모순의 실체를 체득해야 비로소 수필을 창작할 수 있다.
수필의 틀은 한시漢詩 작법의 기起 승承 전轉 결結을 본받아 응용할 수도 있다.
제일의 기구에서 시상을 제기하여,
제이의 승구에서는 기구에서 제기된 내용을 받아 전개시키고,
제삼의 전구에서 시의詩意를 한번 돌려 전환하고,
제사의 결구에서 전시의全詩意를 종합하여 전편을 거두어서 결말을 맺는다.
때로는 논리학의 연역법이라든가 귀납법을 문학적으로 풀어서 활용할 수도 있다.
또 때로는 주제를 중심으로 발상 차원의 심화과정을 따라 수필을 창작할 수도 있다.
일본의 한 시인은 발상 차원의 심화과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2.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를 본다.
4.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5. 나무 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실상을 본다.
7. 나무를 흔들고 있는 그 자체(본질)를 본다.
8.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1에서 4까지는 육신의 눈으로 보고(객관+주관),
5에서 8까지는 마음의 눈으로 본다. 주관이다.
수필 창작에는 상상력도 동원되어야 한다.
상상이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관하여 마음속에 그려보는 심리활동이라 하겠다.
그 심리활동에는 접근연상接近聯想도 있고 유사연상類似聯想도 있다.
접근연상은 진주 촉석루를 보면 논개가 생각난다는 경우고,
유사연상은 원앙새를 보면 부부의 다정한 금슬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수필의 틀 속에는 동식물이나 사물을 인격화하는 의인법이 등장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동식물이나 사물의 얘기가 곧 인간의 얘기로 비유될 수 있는 탁물법托物法도 활용될 수 있다.
또 '석탄은 검은 금이다', 혹은 '물은 돈이다'와 같이 사물의 본뜻을 숨기고 다만 겉으로 비유하는 은유법이나
'보름달 같은 얼굴', '수줍은 처녀인 양'처럼 ...같이, ...인양, ...처럼 등 직유법도 적절히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격 높은 유머며 재치 있는 위트가 있으면 작품이 돋보인다.
그러나 수필은 무형식의 문학이다.
형식이나 틀에 너무 얽매이게 되면 허구가 끼어들게 되고 참신한 개성미를 잃게 된다.
뛰어난 예술작가는 항시 어떤 격률을 따르면서 파격을 즐겼다.
수필도 역시 파격의 문학이다.
그 파격의 수필 속에 소설인 양 테마가 있고,
시처럼 이미지가 있고,
철학같이 깊은 의미가 있고,
평론인 듯 비평이 있고,
수필다운 무드가 있으면 그것을 아름다운 수필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한 편의 수필은 한 덩어리의 유기체이다.
전체와 부분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조그마한 자구 하나의 이동이나 증감도 함부로 할 수 없다.
돌탑에서 돌 하나 빼내면 탑이 무너지듯이,
한 글자 한 구절 중에도 전편에 흐르고 있는 주제의식이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