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전법륜경>을 끝내고 <무아경>으로 이어지는 연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 마가다와나 사슴동산에서 『초전법륜경』을 듣고 나서
모두 법안을 얻게 되었다. 다섯 빅쿠들은 나머지 도를 성취하기 위해서
다시 『무아경』을 들으려고 번뇌가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것은 <초전법륜경>의 핵심을 8정도라 주장한 이들에게,
이어서 <무아경>을 공부하면 8정도의 부족하다고 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완성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초전법륜경> 핵심은 8정도가 아닌 고집과 고멸이 나오는 4성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고집과 고멸이 핵심임을 알 게 되면 당연히 어떻게 고멸이 가능한지.. 알아야 하며..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무상이고 무아이기 때문임을 알 게 된다.
그 뿐인가?..
세존의 깨침이 극단에 치우치지지 않는 중도인 근거도..
8정도이기에 그런 게 아니라.. 바로 무상 무아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보통 수행자라면 5온 무상과 무아를 깨치는 것은 고사하고..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그런 자들에게 무아를 보여주면..
내가 없고 일체가 고이고 무상한 것이라면 그냥 막 살아도 된다는 게 아닌가?.. 하게 된다.
그와 같은 삿된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는 게 바로 바른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8정도를 강조하게 되는 연유라 하겠다.
다시 <초전법륜경>으로 돌아와..
초전법륜경에서 8정도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 4성제가 더욱 중요한 핵심이며,
그것을 이해하면 무상과 무아를 이해한 게 되기에..
이때 세존께서는 감흥어린 말로 이와 같이 ‘꼰단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단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라고 읊으셨다. 그래서 존자 꼰단냐는 안냐 꼰단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라고 끝을 맺는 경에서..
‘꼰단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는 것은..8정도를 실천했다는 게 아니라..
고집과 고멸인 4성제의 3전12행 (三轉十二行)을 이해했다는 것으로..
바로 무상과 무아를 알았다고 하는 것이다.
붓다는 정각에서 연기를 깨닫고,5비구에게 초전법륜을 굴린다.
초전법륜의 결론은 윤회는 없다는 것이다. 법륜을 굴렸으나 아직 아라한이 나오지 않았다.
즉 씨앗은 뿌렸으나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이어서 붓다는 무아경을 설한다.
초전법륜의 핵심은 정견이다.
정견은 4성제이다.
4성제는 고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의 원인은 갈애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아경에서 갈애를 중심으로 본다. 그럼 이 갈애는 왜 생기나?
이건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우기기때문이다.
내 몸이 내것이 아닌데, 이걸 내것이라 우긴다. 내가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도,
이걸 내 것이라 여기고 여기에 화장도 하고, 옷도 입히고 야단이다.
이어서 붓다는 3특상을 말한다.
바로 무상-고-무아이다.
오온이 무상하다=변한다. 무상하므로 고가 나온다.
무상하다고 반드시 고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집착하여 갈애을 느낀다면
(=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집착할 경우),
무상하므로 고를 겪게 된다.
이렇게 무상한 것을 내 것이라 여기거나,
나라고 여기면 고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오온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면 오온에서 떠나게 된다.
떠나면 사라진다. 사라지면 해탈한다.
즉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초전법륜경의 결론도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본다는 것이고,
무아경의 결론도 역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기불교 붓다 교리의 핵심이다. 이리하여 6명의 아라한이 태어났다.
이상의 모든 내용을 정리하면 윤회/중도/8정도, 4성제, 3특상(=3법인)이 모두 나왔다.
불교 교리의 핵심이 이 초기불교의 내용에서 이미 모두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