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11째 이야기
2번째 단락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受想行識 亦復如是 는 수즉시공 공즉시수,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즉시공 공즉시식
이것이 오온개공의 내용이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2번째 단락에 대한 내용을 짚어본다.
우리는 반야심경을 공부하면서 그 목표를 확실히 해 왔다. 1째 단락에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하리라!
그럼 둘째 단락에서 얘기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오온개공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수행의 내용이다. 오온 개공을 어떻게 보느냐!
반야로 공의 이치를 밝혀서, 물질은 색즉시공이다. 일체가 다 공이다. 육진 12처.. 다 공이다.
사리자여
색불이공 공불이색 –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고 서로 상대(대치)해서 부정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 서로 상즉했다. (같다) 색이 곧 공이다. 공이 곧 색이다.
일체가 공성이다. 공이 곧 색이니까!
색이 곧 공하다, 그러니 ‘색’에 집착하지 마라!
물질은 생멸하고 실체가 없다, ‘공’에 집착하지 마라,
공이 곧 색이니까 집착하지 마라!
실상은 색(물질)과 공(진리)이 둘이 아니다.
다시 한번 얘기 하지만,
색은 불이 (다르지 않다)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곧 공이 따로 있고 색이 따로 있다! 가 아니다.
따로 있지 않는 걸 얘기 하고 있다. 중생 따로, 부처 따로가 아니다. 또 극락 따로, 지옥따로가 아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 오온 (蘊-쌓을온)은 온은 쌓인다는 것이다, 뭐가? 지각이 자꾸 쌓인다. “업” 말이다.
수상행 (심소) 식 (왕) 으로 왕은 항상 수행원이 따라 다니다. (심소), 수상행의 움직임이 있어야 식이 일어난다.
집착해서 쌓아 놓으니까 ‘상’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주관이 뚜렷 해진다 (상황따라 변한다), 주관이 뚜렷해 지면 고정관념이 생기고, 이 고정관념에서 괴로움이 온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정관념을 깨 부수는 것이 바로 ‘조견오온개공’해야 ‘고’에서 벗어난다.
찰라생 찰라멸 인줄 모르고 쌓아 놓으니까 문제가 된다.
<무상, 고 , 무아>를 모르니까!
중생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쌓지 마라! 무상하다.
모르니까 ‘고’ 가 생긴다. “집”“멸”“도”
부처님께서 오온을 먼저 얘기 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
‘오온’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이걸 못 알아들으니까 12처를, 18계를 얘기 하신 것이다.
색은 물질, 수상행식은 정신이고, 물질은 형태로 변한다, 자꾸 변해가서 무상하다. 그것이 무상,고,무아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무상,고,무아다, 정신도 변화한다.
수 (느낌)- 즐겁고, 괴롭고, 그저 그런 느낌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나의 상황에 따라,
상 (표상, 이미지) - 특징을 파악하고 길다, 짧다, 크다, 작다 로 대상을 구분한다.
행 (의지작용)- 심리 현상들, ‘의도’** 가 없으면 ‘업’이 되지 않는다.
식 (아는 것)- 수상행식의 도움으로 하는 알음알이다
수상행식이 차례로 일어나는 게 아니고 동시에 일어난다.
자,
지금까지 우리고 알고 있던 것 중에 하나가 ‘알고 짓는 죄’, ‘모르고 짓는죄’ 어느것이 더 크냐? 했을 때 모르고 짖는 죄다 더 크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공부가 된 사람은 알고 짓는 죄가 더 크다. 왜 그런가?
어리석은 중생에게 말할 때는 알아야 한다!고 하고, “모르는 죄 크다”
수행의 입장에서는 ‘의도’가 있나, 없나! 가 중요하다. “알고 짓는 죄가 더 커진다.”
“의도”가 들어 가니까!
이게 바로 “중도”다, 유.무를 여의는 것, 분명히 아는 것.
이제 공부를 하는 사람인 만큼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럼 우리는 왜 집착하나?
색수상행식으로 나눠보면 ‘공’인데 우리는 이를 다섯가지 오온을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나’로 집착한다.
오온을 더 집착하는 것이 바로 ‘오취온’ 집착의 대상이 된다. 가장 집착하는 것이 ‘나’다.
마음은 조건따라 일어난다. 연결된 부분에 작동 될 뿐! 이 몸 어디에도 ‘나’란 건 없다.
마음은 대상따라 (의지작용대로) 마음간다. 반대로 얘기하면 무엇이든 내 마음이 일어나니 마음도 내 몸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 대상이 마음이다.
“식”이 내 주위(행)가 대상(색)을 촉하게 되면 수(느낌) -상(이미지)로 매 찰라 수상행식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난다.
“일체유심조”다. 모든 것에 내 마음이 있다. 하나 하나 다 내 마음이 있다.
“일미진중함시방”이다.
어떤 현상을 보거나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 그 일어난 현상을 알 수 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체험한다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으로 내가 만든 세상을 통해 보고 느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인식한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불교의 “세상”이란? 밖의 세상을 말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인식한 세상을 말한다.
‘내가 아는 세상’ 그래서 일체가 12처라 한 것이다. 밖의 세상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지 세상을 사는 것‘이다.
일어나는 현상 그대로가 아니고 내가 일어난 현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인식하느냐!)
‘지 세상을 사는 것’이다.
불교는 괴로움의 소멸이다.
밖에 어떤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괴롭게 보고 있다. ‘내가 보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수상행을 통해 인식 하는 것.
상- 이미지, 표상,개념 이들은 현상이 없으면 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식 – 인식이 없으면 ‘식’이 일어나지 않아, 이것들이 다 동시에 일어난다.
수행은 가지가지 방법이 있다. 수행을 왜? 하는가? 결국 조견오온 개공 하려고 한다.
‘나’를 보려고 한다. ‘참나’가 없는 것을 아는 것이다. 바로보라!,
‘본래면목’
수행을 내가 나를 보는 것이다.
‘참선’은 내가 나를 찾는 것이다.
‘간경’은 나를 보려고, 염불은 내가 ‘나’를 부르는 것...
이 모든 수행을 결국에 ‘나를 찾는 것’ 이다. 바로 ‘이 뭣꼬?’ 제일 쉬운 수행이다.
생각이 밖을 향 할 때 이것을 느끼는 ‘이것이 뭔가?’ 돌이켜라!
그리고 스스로 물어보라!
11번째 이야기 입니다.
일화 합장.
첫댓글 일화보살님 감사합니다
고마운 마음의 표현을 알고 있는 문자로만 전한다는것이 안타깝네요 거듭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