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은 노비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얼자로 과거시험을 볼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왕위 찬탈자 세조에게 잘 보여 출세의 길로 간다
양반과 양인인 첩에서 태어난 서자보다 한단계 아래 신분
본관은 영광(靈光), 자(字)는 우후(于後). 경주부윤을 지낸 류규(柳規)의 얼자로 1439년(세종 21년) 전라도 남원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서얼 신분으로 과거를 보지 못하고 갑사가 되어 경복궁 건춘문을 지키는 일을 하다가,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 방책을 상소하여 세조에게 발탁, 왕을 호위하는 겸사복이 되었다.
이시애의 난 토벌에 자원하여 종군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병조정랑(정5품)에 올랐다.
1468년 세조의 온양 행차 때 치른 온양별시(溫陽別試) 문과에서 세조가 직접 장원으로 뽑아 급제했고, 이어 병조참지(정3품)에 임명되었다. 29세에 불과한 서얼 출신의 일개 갑사가 단 8개월만에 정3품 당상관에 오르자 대간 등의 반발이 빗발쳤지만, 류자광의 능력을 높이 산 세조의 비호로 임명이 관철되었다.
같은 해, 예종 즉위 후, 평소 시기하던 남이를 역모죄로 무고하여 사형에 이르게 했고, 이 일로 익대공신 1등에 책록되고 무령군에 봉해졌다. 성종에게도 총애를 받아 숭정대부에 올랐고, 도총관, 행지중추부사, 한성부판윤, 장악원제조, 황해도체찰사, 의정부 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며, 사신으로 두 차례 명에 다녀오기도 했다. 연산군 대에도 겸도총부도총관, 숭록대부 무령군에 제수되며 권세를 누렸다.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아버지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에 비하면, 예종은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다.
예종은 그 때문에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다.[8]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1468년(세조 14년, 예종 원년) 어떤 사람이 그가 공주와 간음하였다고 소문을 날조하여 곤욕을 치렀는데, 그해 숙직을 서면서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이 들어설 징조”라고 했다.
이것을 엿들은 유자광은 그가 영의정 강순 등과 모여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하옥되었다. 남이는 장인 권람의 친구들인 대신들에게 구명을 요청했지만 한명회와 신숙주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외면하였다.
권람의 아들들은 누이가 일찍 죽어서 예종 초 남이 집안과 아무런 관련도 교류도 없음을 들어 극적으로 멸문지화를 면하였다. 1468년 10월 27일 남이는 군기감 앞 저자거리에서 강순 등과 함께 효수당했다. 또한 그를 변호하던 조숙(趙淑) 등도 처형당했고, 그가 역모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자 그의 모친 역시 연좌되어 상중에 고기를 먹고, 아들인 그와 간통하였다는 죄로 능지처사되었다.
#벌거벗은한국사
https://youtu.be/0XgUU6al9l8?si=lNKkGLrIJMxOJQMw
00:00 회심의 상소! 한명회를 겨냥하다
02:25 벼랑 끝 유자광! '간신'이라 불리다
05:04 생존을 위해 올린 기막힌 상소는?
06:24 조정으로 다시 복귀한 사연은?
09:50 폭군 연산군! 네 번째 왕을 모신 유자광
12:20 연산군의 마음을 사기 위한 묘책은?
15:12 '무오사화'의 씨앗을 직접 뿌리다
19:00 갑자사화! 유자광마저 공포에 떨다
21:33 중종반정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다
26:00 상소 역풍으로 몰락한 유자광
'유리천장'
'유리천장'은 충분한 능력과 자격이 있는 여성이나 소수민족 등이 직장 내 성 차별, 인종 차별 등의 이유로 고위직으로 승진하거나 경력을 개발하는 데 가로막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1970년 미국의 경제 전문지 《월스트리트저널》이 만들었으며, 직접적인 차별이 아닌 암묵적인 차별과 편견을 비유합니다.
핵심 의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승진의 한계를 뜻합니다.
주요 대상: 주로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막는 장벽으로 언급되지만, 인종이나 소수 계층에게도 적용됩니다.
유사 개념: 비슷한 개념으로, 소수 집단이 오히려 위기 상황에 놓이는 '유리절벽(Glass Cliff)'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