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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동은 종로3가, 종로4가, 을지로4가 사이 동네다. 조선시대에는 육의전의 중심지였고, 해방 후에는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서는 걸어 다닐 수 없는 시계/조명/귀금속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쇠락해 발길이 뜸해진 곳이다.
시계는 핸드폰으로 대체되고, 조명은 인터넷으로, 귀금속은 백화점에서 구매하는 ‘신’생활방식과 예지동은 거리가 있다. 재개발 이슈로 상인이 떠나고, 손님이 떠나며, 다시 상인이 떠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지만, 재개발은 요원하다. 쇠락하는 예지동, 그 안에는 역사와 전통과 사람과 현재가 숨쉰다. 삶의 기쁨과 슬픔과 우여곡절이 있다. 예지동이 지금의 온전한 빛과 시간을 잘 살려 아름답게 빛나기를 희망한다. 우리 모두의 관심과 발걸음이 필요한 예지동에서 빛과 시간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는 피터팬과 팅커벨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당신의 시간에는
빨간 글씨가 있나요?
.... 시간을 쓸 때는 빨간색으로 쓰세요. 못다 핀 시간들이, 마음과 정성과 아쉬움이 씨앗 되어 내일은 빠알갛게 피어날 수 있도록
“시계를 수리하면, 시계 안에 나만 알 수 있게 수리한 날짜하고 바꾼 부품을 써 놔요. 다른 사람들은 검은 색으로 표시하는 데 나는 빨간색으로. 알아보기 쉽게. 저 아저씨는 나한테 수리 안 해갔어.”
“시계? 시계는 삶의 리듬을 가르쳐 주는 거”
“시간? 글쎄. 뭐라고 할까. 글쎄. 시간은 생명을 단축시키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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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지동 빛과 시간의 마을 >에서 시계를 고친 지 44년 차.
로렉스쎈타 오태준 사장님이 살아낸 79년의 시간,
그리고 못 다 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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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깊은 시간 골짜기에서 꿈을 꾸다
우주에 별동별이 이상하게 생겼다. 구멍이 뽕뽕 뚫린 동그란 별동별이 자주 꿈에 나타났다. 6인실에 있는 누워 있는 나를 금호동에 사는 친구 딸이 간호해 준다. 저 아이는 언제 간호사가 되었나. 큰 아들아, 네 이모네 집에 가자. 처제네에 누워있는 데 커튼 밖에서 처제 남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들아 이제 그만 병원에 가자. 아버지, 이상한 소리 자꾸 하질 말아요.
중환자실에서, 2인실, 6인실로 올 때까지 의식은 없었지만 꿈은 참 많이 꿨다. 지금은 거뜬히 혼자 다니지만, 아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두 번도 더 죽었다가 살아났다. 의사들은 이 사람 가망 없으니 가까운 친척들 불러 얼굴이라도 보여 주라고 했다 한다. 의사도 장담하지 못한 생명이 큰 아들 덕에 살았다. 가슴팍에 주사를 꼽아 폐에 가득한 고름을 빼내고 나니, 아침마다 두통으로 판콜 먹던 습관이 사라졌다.
아내를 잃어버린 시간들...
내가 지금도 그 소리만 하면 목이 메인다. 아침밥을 먹지 않는 아내에게 짜증을 내고, 나도 아침을 먹지 않고 가게로 나와 버렸다. 나와 있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집에 전화를 해서 도우미 아줌마에게 집 사람 귀에 전화기 좀 대 달라고 했다. “여보 오늘 내가 아침에 괜히 화내고 나와서 미안해. 미안해” 아내는 그저 “네네” 하기만 했다. 보통 저녁 6-7시에 문을 닫는데 그 날은 5시에 문을 닫고 헐레벌레 집에 갔더니 아내는 여느 날처럼 침대에 누워있었다. 약국에 가서 관장약을 사다가 변을 못 누는 아내 변을 빼 주고, 이젠 밥을 좀 먹을 수 있으려나 생각하다 소파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밤 11시쯤 깨고 나니 아내가 걱정된다. 뭐라도 좀 먹어야 할텐데, 물이라도 좀 마셔야 할텐데. 침대 옆에 놓아둔 물을 먹이려고 보니 침이 흥건히 흘러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코에 숨이 없고 맥도 잡히지 않았다. 119에서 와서 보더니, 이미 갔다고 했다. 말 한마디 없이 신음 한 마디 하지 않고, 내가 잘못해서 아내가 죽었다. 더 일찍 병원에 갔어야 하는데 내가 잘못해서 아내가 죽었다. 그렇게 쉽게 죽을 줄을 몰랐다. 파킨슨으로 3년을 고생한 아내는 하나님 곁으로 갔다. 아쉽고 그립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아내와 나는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내가 20살, 아내가 16살에 만나 12년을 연애하다 결혼했다. 우리 고향에서 총각위원장이라 불릴 정도로 결혼을 늦게 했다. 내가 소심하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해서 결혼이 늦어졌다. 사진 좀 봐봐. 예쁘잖아. 내가 꼬셔서 결혼했지.
아버지가 살아낸 시간은 굽이굽이 아들에게로 흘러
일제강점기, 아버지는 배우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시계 고치는 법을 터득했다. 시계가 귀하고, 시계 고치는 사람이 귀할 때라 아버지는 돈을 잘 벌었다. 아버지는 부자들과 친했고, 아무나 하기 힘들다는 재봉침 대리점도 하셨다. 아버님이 오병열인데, 오병열씨 돈은 개도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잘 벌었다. 한량이라 바람도 무지하게 피웠지. 그런데 어둔하셨나 봐. 돈 버는 대는 영리하셨는데 부동산을 안 해놨다. 결핵을 앓던 아버지를 뒷바라지 한 머슴 집은 사 주고, 우리 집은 사 놓질 않았다. 저축은 않고 현찰만 열심히 쓰다가 돌아가셨다. 그 날 먹을 쌀은 그 날 새벽에야 사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님은 공부하라며, 시계 고치는 책상에는 나를 앉지 못하게 했다. 6.25 한국전쟁 때 형님이 군대에 가자, 아버님이 쓰던 연장을 가지고 놀았다. 아버님 피를 물려 받은 나도 스스로 터득해서 시계를 고치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쓰던 망치를 아직도 내가 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100년도 더 살아낸 이 망치가 유일한 아버님 유품이며, 우리집 보물이다. 아. 혼자 배워 사진관도 잠시 했더랬다.
고약한 시간이 흐르는 시계 골목. 이 시간을 길들일 수 있을까?
1970년에 예지동에 왔으니까, 이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44년을 일했다. 6.25 직후에 형성된 이 거리는 사람이 넘쳐 흘렀다. 밀리지 않고서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지금이야 기껏해야 하루에 시계 3-4개를 고치지만, 70-80년대에는 일거리가 봉투째 들어왔다. 한 봉투에 100개, 200개 담겨 있으니까 새벽 4시-5시까지 일해야 끝낼 수가 있었다. 돈도 많이 벌었다. 그 때 벌어서 집도 샀으니까. 그 때는 이 동네 가게 권리금이 수 천 만원이었는데, 지금은 월세가 12만원이다. 장사가 잘 안 되고, 사업이 망하고, 사기를 당해서, 밀린 월세는 예지동 일대 재개발로 다들 건너 세운 스퀘어로 이전할 때 보증금에서 제했다. 재개발은 흐지부지되고 건너편에도 별 수가 없을 것 같아 여기 그대로 남았다. 지금은 세금을 포함한 월세가 12만원이다. 재계발 한다고 떠나고 나이 들어 죽고, 이제 지키는 사람도 오고 가는 손님도 없다. 여기도 동대문처럼 천막 치고 다시 노점거리를 만들면 장사가 잘 될 텐데. 시간이 흐르는 시계 골목이니까.
살아온 시간으로 치자면 이젠 여기가 내 고향이지만, 정은 없다. 돈을 벌었으면 정이 있는데 돈을 못 벌었거든. 옛날에 벌었던 거야 다 옛날 이야기다. 시계 고치는 재미? 이것을 뚝딱 고치면 돈이 뚝딱 나온다는 게 제일 재미있다. 아까 시계 가지고 온 아저씨 있지? 그 사람이 ‘외무’다. 시계 골목에는 고장난 시계 모아오는 사람과 시계 고치는 사람이 있는데, 시계 걷어오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번다. 아까 그 사람은 수원, 평택에서 시계를 수거하는 사람이고, 영등포쪽 다니는 사람, 구파발로 다니는 사람, 미아리쪽으로 다니는 사람이 따로 따로 있다. 한 때는 시계 수리 가격을 누가 정하나 등을 두고 외무와 수리공 사이 기 싸움도 대단했는데, 이젠 외무도 다 떠나고 몇 남질 않았다.
딸아, 네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느냐? 네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더냐?
딸 하나, 아들 둘이 있는데 다 결혼을 안 한 천년기념물들이다. 지금은 딸이 살림을 한다. 딸이 조금 모자라서 반찬은 잘 못하는 데 빨래 같은 건 열심히 한다. 가끔 신경질을 내서 그렇지 겉으로 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신장애가 있다. 우리 딸이 뭘 먹으면 그 자리에 둬 버리고 치우질 않는다. 시간 있을 때야 내가 치워주지만 감당을 못한다. 저도 자기 자신을 아니까 도우미 아줌마를 보내달라고 해서 도우미 아줌마가 방 치워주고 반찬 해주고 청소도 해 준다. 어떤 것은 너무 영리하고 어떤 것은 너무 무딘 데, 특히 따지기를 좋아한다. 파출소에서 누가 좀 불친절하면 감찰과에 전화할 정도로. 강한 사람한테는 무지하게 강하고, 약한 사람한테는 무지하게 약한 날 닮았나 보다. 나는 사기도 많이 당하고 속기도 참 많이 속았다.
기초수급자라 한 달에 50만원 가량 나오고, 장애 수당으로 20만원 나오고, 쌀도 만 원이면 동에서 20kg을 살 수가 있다. 우리 세 식구는 20kg이면 충분히 먹고 산다. 그 전에야 큰 집에 살았지만, 돈은 못 벌지, 월세는 안 들어오지, 집을 줄이고 줄이다가 지금은 임대주택에서 산다. 내가 아플 때 또 돈이 나갔다. 큰 아들도 나를 돌본다고 회사를 그만 뒀다.
시계를 고치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나요?
기억에 남는 손님? 별로 없는데. 아. 시계 장사를 하다가 나한테 사기치고 도망간 사람들. 세 사람이나 되니까. 한 사람은 미국 오가던 여자인데, 한국에서 저렴하게 수리해서 미국으로 수출하면 장사가 되니까 처음에는 선불로 주고 시계 가져가다가, 돈이 떨어졌다면서 비싼 금 시계 몇 개만 달라고 하더니만 비싼 시계 다 가지고 도망을 갔다. 고향 후배놈이 형님형님 하면서 외상 달래서 줬더니 도망갔다. 여기 차 배달하는 아줌마가 큰 일 났다고 500만원만 빌려달라고 했다가 갚는 날짜가 딱 되니까 도망을 갔다. 내가 그런 짓을 많이 한다. 그 전에는 로렉스 시계가 20개 정도 있었는데 전부 사기를 당했다. 누가 달라면 줘 버리고. 우리 집 사람이 그랬다. 돈 있어서 장사 하면 안 된다고. 달라면 다 준다고. 주기는 잘 하는 데 받지를 못한다. 못 받은 돈은 부지기 수다.
요 전에는 50대인 사람이 와서 시계를 고쳐 달라고 했다. 보니까 태엽이 나가서 태엽을 갈고 분해 수리해서 30만원이 나왔다. 저녁에 와서는 돈 찾아 와야 한다면서 '시계 맡기고 갈까요' 하길래 그냥 차고 갔다 오라고 했더니, 사람을 그리 쉽게 믿어서 되겠냐며 나가더니 오질 않았다. 30만원을 그냥 못 받았다. 내가 바보야 바보. 내가 사람이 못났어.
누나와 아들 사이에서 서성이다 못 다 핀 시간들
막내 아들은 옷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데, 베트남에서 중역으로 일한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올해 초에 갔다. 그 놈이 지 엄마를 엄마라고 하질 않아서 아내가 평생 막내 아들에게 엄마 소리를 못 듣고 살았다. 서울 와서 막내를 낳았는데 생활이 곤란하니까 우리 누나가 보고 석 달만 키워 보내마 하고 고향에 데려가서는 고등학교 졸업하고서야 서울에 왔다. 큰 아들은 같이 사니까 정이 있는데, 작은 놈은 고집이 있어서 서울 와서도 저대로 사니까 마음이 어렵다.
우리 어머님이 한복을 잘 했는데, 누나가 어머니 솜씨를 이어받았다. 한복 잘 한다고 소문이 나서 집에서 한복을 만들었다. 우리 누나는 최은희 타입으로 굉장히 예쁜데 굉장히 차가워서 결혼을 못했다. 지금 같으면 납골당에라도 모셨을텐데 그 땐 정신이 없어서 화장해서 산에 뿌렸다. 후회스럽다.
시간 공장으로 안내하는 시계 선생님
안산 시화공단에서 내비게이션 관련 일을 하는 아이가 시계에 취미가 있었다. 시계를 배우고 싶어서 예지동에 와서 사방을 다니면서 어떤 사람이 자기 스승이 되면 좋을까 찾다가 나를 낙점했다. 시계 기술을 배우고 싶은 데 가르쳐 줄 수 있겠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15년이 됐다. 토요일이면 와서 가게 앞에서 노점 장사를 하는데 꼭 아들 같다. 사람들이 아들이냐고 물으면 아들이라고 한다. 15년차니까 이제 핵심적인 것은 다 알고, 웬만한 시계도 다 잘 다룬다. 고놈이 나보고 그래. “선생님 이거 그만두시면 내가 인수해서 할래요.” 그 때 보자고 했다. 그 놈? 50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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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동 '빛과 시간의 마을'
브랜딩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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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대 시계, 귀금속, 조명거리였으나 쇠락한 예지동을 '빛과 시간의 마을' 이라는 컨셉트로 브랜딩한다. 예지동이 본연의 빛으로 다시금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서는 걸을 수 없는 명소가 되기를 희망한다. 예지동에 없는 것을 이야기 하기 보다, 쇠락하는 예지동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하고 전한다. 변화의 물결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된 사람들, 30-40년 한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장인의 길을 걷는 사람들, 장돌뱅이의 삶을 사는 사람들, 보통의 장사꾼들, 옛 것과 새 것을 넘나드는 물건의 가치를 되새긴다. 우리네 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을, 나의 시간을, 내 자식의 빛을 생각한다. (글 김현정, 사진/디자인 이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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