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교회 이야기
재건교회는 이 땅에 우연하게 생겨진 인의적으로 만들어진 교파가 아닙니다. 재건교회는 한국교회의 유구한 역사 가운데서 일본에 의한 대핍박기(1935-1945)에 의해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역사를 살펴보면 재건교회의 태동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이 땅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성경)에 순수함과 진실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 순수함을 지키며 살려는 강한 생명의 아우성 속에서 이 땅에 재건교회가 태동하고 비록 작은 교단으로 이 땅에 남아 성장해 오면서 이 땅에 진리의 영향력을 나타내며 무수한 세월 속에서 진행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땅의 재건교회에 대해 정성 있는 진지한 관심을 가지며, 살펴보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보다 올바른 신앙으로, 진리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신앙인의 의지와 기상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제도 모든 교회와 성도를 향한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시고 일하시는 성령님의 거룩한 도전을 항상 받아드리는 개혁과 진취적인 진보의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로 인하여 진리와 믿음의 밀 까부름을 당하였다.
- 신사참배의 그 배경 - 옛날 일본은 천황이나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신사에 전 국민을 참배하게 함으로써 그 충성을 시험했고 그와 같은 국민 의례를 통해서 군국주의의 정신적 단결을 도모하려 했다. 이러한 신사를 우리나라에도 도시나 읍, 면까지도 다 세웠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강요사항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한국교회가 커지고 평양이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불리워지면서 한국교회가 계속 성장해 나가자, 본격적인 참배 강요의 마수가 뻗치기 시작하였다.
- 신사참배의 강요행위 - 1935년에도 평양의 미션학교에 대해서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하였다. 이에 대한 미션 담당 선교사들의 반발이 나타났고, “신사에서 신을 참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반대된다.”는 확실한 천명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 일본은 선교사를 면직시키면서 출국을 강요하였고 결국 학교까지 폐쇠하는 강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독교의 부흥의 진원지가 되는 모든 교단과 교회에도 마수를 뻗어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 신사참배로 장로교가 무너지다. - 모든 교단이 신사참배에 동참하는 가운데 장로교는 상당한 거부, 저항운동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일본은 결정적인 교회박멸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일을 하였다. 장로회 총회 산하 각 지 노회(老會)를 조직적으로 파괴 공작을 하였다. 그리고 그 해(1938년) 총회가 평양에 회집할 때 일본은 이 문제를 한꺼번에 결단 내릴 획책을 꾸몄다. 우선 강경파 목사들은 예비 검속하고, 총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협박으로 신사참배 가결을 촉구하였다.
1938년 9월9일 제27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을 때 경관 97명이 193 총대의 틈틈에 끼어 앉아 살기 도도한 눈길로 회의 진행을 감시했다. 첫날은 임원 선거가 있었다. 총회장에 홍택기, 부회장에 김길창, 서기에 곽진근, 회계에 고 한규였다. 둘째 날 오전 10시에 평양, 평서, 안주노회의 소위 삼노회를 패표해서 박응률 목사가 당돌하게 신사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하고 하면서 참배 결의와 성명서 발표 제안을 했다. 블레어의 반대 발언은 즉각 거친 경관의 폭력적인 재재를 받아, 강제퇴장을 당하였다. 그리고 한국과 함께 살아 온 장로교가 홍택기의 의식적인 가결 획책으로 신사참배가 기독교 신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결의하고 말았다.
“아등(我等=우리)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 교리에 위배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愛國的) 국가의식(國家儀式)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率先) 려행(勵行)하고 추이(追而)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참된 정성)을 다하기로 기(期)함. 이것이 총회의 결의문이다.
- 신사참배로 나타난 상황 - 총회 폐회 후 부회장이 임원을 대표하고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해서 곧 평양신사에 참배했다. 이후 일본은 총회의 결의문과 이 종교 단체법을 마음것 이용해서 박해의 칼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 신학교가 폐쇠 당했고 2백여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의 교역자들이 순교의 면류관을 섰다. <위의 글은 민경배 한국기독교 교회사 P343-350 인용 요약함 것임>
2. 신사참배 강요의 의도를 알아봅시다. 1) 민족으로 하여금 일본 신들에 대한 신봉과 민족정신의 말살의 의도가 있었다. 2) 일본의 식민정치의 기본정책인 일체사상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신사참배로서 민족정신 말살과 한국인을 소위 일본의 황국 신민으로 삼기 위한 의도였다. 4) 한국교회의 신앙생명을 송두리째 말살해 버리려는 의도가 있었다. <최훈목사의 한국교회 핍박사 P21>
3.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항의서한을 쓴 일이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동일 1939년 9월9일 오후1시에 선교사들(회원 30명)은 따로 모여 총회에 항의서를 제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내용으로 ⑴ 신사참배 가결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이요 ⑵ 장로교 헌법과 규칙을 위반함이요 ⑶ 일본 국법인 종교 자유 헌장에 위법이요 ⑷ 이번 처사는 보통 회의법의 위반이다 등이요
그리고 9월12일에는 권찬영 외 25명의 연서로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 예수교 장로회 헌법에 위반될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집행한 것은 일본헌법에 부여한 종교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라는 요지의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재건교회가 한국교회에서 등장하게 된 것은 한국 기독교가 아픈 역사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 아픈 역사는 하나님의 계명(십계명 1-3계명)과 진리(합2:18-19, 시편115:4-8, 단3:13-18, 사44:9-20 등)를 거역하고, 일본의 강압적인 협박과 핍박 앞에서 놀란 한국교회 목회자와 장로 그리고 교인들, 곧 그 무수한 자들이 하나님과 성경이 금하신 보이는 형상 앞에서 참배와 요배와 서사낭독을 하였으니, 하나님께서도 하늘에서 기도 안 찬 일을 보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소수이지만 오직 하나님과 오직 진리(성경)대로의 삶을 위해서 산 자들이 있다. 그들의 등장과 그 삶의 배경과 요인이 되는 점을 본 지면에서 밝혀본다. ※. 아래의 글은 최훈목사의 한국핍박사의 요약이다.
☆ 일본신사 불참배 운동(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운동)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를 한 후부터 당국은 교회가 집회할 때마다 교회 지도자와 직원들은 먼저 신사참배를 하고 소위 국민서사(國民誓詞=국민이 맹세하는 일)를 외우고 동경에 있는 궁성을 향하여 동방요배(東方遙拜)를 드리고 12시가 되면 죽은 영령들을 위한 묵도를 해야만 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양심을 저버리고, 환난과 핍박을 모면하기 위한 지도자들은 일본 당국에 복종하여 자녀교육을 시켜 가면서 무고히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신사불참배 하려는 신자들을 경찰에 고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채택한 지도자들은 1939년 초에 이르러 평부, 평남, 경남, 전남, 만주 등지에서 신사 불참배 운동을 크게 일으켜 조직화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주도적 인물들은 평북에 이기선목사, 평남에 주기철목사, 채정민목사, 경남에 한상동목사, 전남에 손양원목사, 만주에 한부선선교사 등이 있다. 이들이 주장하고 나섰던 신사 불참배 운동의 요지는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사 불참배 운동을 일으켜서 현실교회와 노회를 약체화내지 해체시킬 것, 둘째 신사 불참배 신자들과 동지들을 규합하여 따로 예배를 드리게 하고, 그들을 육성하여 교회와 새 노회를 조직할 것, 셋째 신사참배하는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지 말 것, 넷째 신사참배한 목사에게는 세례를 받지 말 것, 등이었다.
이러한 기본방안을 내 걸고 신사 불참배운동을 구체화시키고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하여 만주, 평북, 평남, 경남지방에는 신사 불참배 교회들과 신도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만주와 평양 부산 등지로 왕래하면서 신사 불참배운동의 실황과 정보를 전달하며 격려하는 역할을 평양의 이주원전도사가 담당했다. 1940년 3월28일 한상동목사는 이주원전도사와 더불어 전국적 확대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평양 주기철목사의 석방 기회를 이용하여 전국운동자들의 회집 당시에 구체적으로 토의할 것을 상약(相約) 하였다.
1940년 4월 주기기철목사가 석방되자 동월 2일 한상동목사는 평양으로 와서 만주의 운동자들과 먼저 신사 불참배 노회를 전국적으로 재건하자고 맹약을 하였다. 그 다음날 채정민목사 집에서 주기철목사를 중심한 전국 신사 불참배 운동자 총연합회에서 신사참배하지 아니한 노회를 재건하기로 하고 앞서 신앙동지 획득과 그 확장으로 현 노회 해체운동을 힘쓸 것을 결의하였다. 신사 불참배 운동의 지도자 경남남도 편에서 보면 부산에 조수옥,손명복 전도사, 김묘년, 박경애 집사, 마산에 최덕지, 이찬수 전도사, 이약신 목사, 함안에 이현속 전도사, 거창에 주남선 목사였다. 남해, 통영에 최상림 목사, 최덕지 전도사, 진주에 강문서 장로, 이봉은 권사, 하동에 박성근 목사, 김점룡 전도사, 창녕, 합천에 한영원 전도사, 강착주 집사 등이 있다. <최훈목사 한국교회 핍박사 P40-44>
☆ 수난 당하는 교회 동남아를 제패하려는 일본의 야망은 마침내 1941년에 태평양전쟁을 일으켜서 장기간의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에 조선통치의 암적 존재로 여겨온 한국교회에 대하여 온갖 박해를 가하여 박멸하려고 했다. 이리하여 1938년 전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한 뒤 교회 특별집회가 있을 때마다 회의 벽두에 신사참배를 강요시켰으며, 신사 불참배자들을 색출해 내기 위하여 교회 지도자 전원에게 ① 신사참배가 국민의식이냐 종교의식이냐 ② 천조대신이 높으냐 그리스도가 높으냐 ③ 국가가 첫째냐 종교가 첫째냐 등의 해답을 요구하고 불응하거나 불만족한 해답자는 가차없이 검속 투옥하였다.
이렇게 투옥된 자의 수는 무려 2천명이 넘었다. 1941년 12월8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은 전국적으로 검속 투옥되었고 선교사들은 거의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1942년 3월에 강제로 일본 기독교 조선혁신을 조직케 하고 전필순 목사가 의장에 피선되어 민족사상과 내세사상이 강하게 표현된 모세오경과 요한 계시록을 성경에서 삭제시켰고, 찬송가 중에서는 그러한 이유로 여러 장을 삭제 또는 변개시켰다. 나중에는 구약 성경을 전부 부정하고 신약전서에서는 4복음만 사용케 하였다. 그리고 내세심판과 재림론은 영적 해석에 그치게 했다. 교회의 공적 집회시에는 국민의례를 강요하여 교회 내에서 극기에 대한 배례를 위시하여 황성요배 및 출전장병의 무운장구를 위한 묵도와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도록 강요하였다.
주일학교는 일요수련회로 부흥회는 연성회로 개칭시켜 종교집회를 전시 체계화하였고 1943년 9월부터는 주일 오후 및 야간 집회와 수요일 밤 기도회 등을 일체 금지하였으며 예배당 안에서 일본이 강습 및 근로작업 등을 강행시켰다. 그리고 교회들을 무조건 폐합시켜서 일면(一面) 일 교회 제도로 만들고 남은 예배당을 군용공장으로 징발하여 별별 장난을 다 하였다. 이때 많은 교역자들과 신자들이 만주를 비롯하여 해외로 망명하였으며 뜻있는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깊은 산중에 묻히거나 지하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오기도 했다.
☆ 수난을 감수한 지도자들의 노선 이 비참한 수난 속에서 견디다 못해 비참하게 쓰러지는 동역자들, 심지어는 변질되어 이질적인 신앙관과 교회관을 수립해서 방향을 잃고 발광하는 지도자 중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백절불굴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순수한 신조와 교회를 파수해 나아가려는 지도자들에게는 처참한 박해가 뒤 따랐다.
이 참혹한 고난 속에서라도 목숨을 걸고 투쟁하여 수난을 당한 지도자들의 노선을 걸은 자는 소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을 받아 수난을 겪은 지도자가 70명의 수준이요, 주기철목사를 위시하여 옥고로 순교 당한 지도자가 50명이었다. 사경(死境)에서 살아 나온 지도자가 20명 정도였다.
이중에 김린희 전도사(이북 재건교회 설립자)는 진리의 투사로서 1908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1926년 선천 공옵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보성중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에 가사 형편에 의해서 중퇴하고 동년 동경으로 가서 사립국민학회 예비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역시 1년 후 폐병으로 귀향하였다. 약 5년간 집에서 정양하는 동안에 기독신자가 되었다.
1933년에 2월 평북 의주 고관면 토교동 교회 전도사로 시무 중 1938년 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 동년 9월에 신사참배 문제로 신학교가 폐쇄됨에 따라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가담하게 되어 열렬히 활동하였다.
당시 시무하던 선천 삼봉동 교회를 사임하고 성경연구를 깊이 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위해서 준비하였다. 1939년 12월 평양 경창리 이주원전도사 댁에서 박의흠전도사를 만나 경남지방에서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로에 선천에서 김려희, 박신근집사를 만나 본격적으로 불참배 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논하였다. 1940년 3월 무순에서 박의흠, 김윤섭(봉천 감옥에서 순교한 전도사들)을 만나 다음 사랑을 결의했다.
① 신사참배등 반 계명정책에는 죽음으로 반항할 것 ② 신사참배하는 교회에는 출입하지 말고 이를 취소할 것 ③ 신사 불참배 동지를 다수 획득하여 새 교회 건설에 힘쓸 것 이 신성하고 엄숙한 운동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런데 옥중에서도 신사참배 문제를 중심해서 지도자들간에 의견이 엇갈리었다. 신사참배는 공동적으로 반대하나, 동방요배와 영령을 위한 묵도 강요에 대해서는 의견을 서로 달리했다. 옥중에서는 신사 참배는 반대하나 동방요배와 묵도는 시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를 극구 죄악시하여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박신근 집사, 최덕지 전도사 등이었다.
김린희 전도사는 신사참배, 동방요배, 국기정배, 묵도 이 네가지 모두 반해하고 더욱 혹독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언제나 독감방에서 수갑을 차고 지냈으며 식사를 금하고 잠을 못 자게 하는 등 가혹한 옥고를 치루었다. 그러나 주기철, 이기선, 한상동의 여러 목사는 동방요배와 묵도는 시인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해방 후 한국교회 분열의 도화선이 되었다. 김전도사는 재건교회를 창설 지도했다. 김린희 전도사는 15년 징역 언도를 받고 평양 감옥에서 최권능, 주기철 목사와 같이 모진 악형을 받다가 출옥하였다. 이제 끝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그 수난에 대한 신학적인 배경은 어떠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이근삼 교수는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⑴ 신사참배 거부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절대복종이라고 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참된 사랑이라고 하였다(요일5:3). 신사와 타협한 자들은 교회를 유지하고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순종만이 진정한 교회를 사랑하고 유지하는 길이며 양떼를 사랑하고 바로 지도하고 파수하는 길이다. ⑵ 신사참배 거부는 종말론적 희망과 그리스도 왕권에 대한 신뢰와 위탁이라고 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자들이 그 강하고 담대한 행동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획실한 신앙적 희망 그리스도의 우주적 왕권에 절대 신뢰와 위탁에서 이루어진 엄숙한 행위이다. 이러한 신앙으로 현재의 환난과 핍박을 극복하되 인간 천황(天皇)을 신으로 섬길 수 없고 왕권을 가지고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기다리었던 것이다.
⑶ 신사참배 거부는 하나님의 진리를 타협없이 증거하고 국가와 교회의 지상명령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다. 한국교회는 우리민족에게는 복음을 전했다. 그 때 일본인들에게는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런데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서 영어(囹圄=옥에 갇힘)의 신세가 되었으나 저들에게는 원망과 저주보다 새로운 사명을 깨닫고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호 기회로 알았다. ⑷ 순교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한다. 이왕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생일 바에는 순교의 반열에 참여라기를 원했다. 이는 염세주의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교하기를 원했다(계14;13)
<최훈목사, 한국교회 핍박사에서 P39-64>
출처:아름다운교회(재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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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하는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청지기(K.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