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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교회 제2회 시민성서강좌
강사: 김규항
”패악한 물질세계를 건너는 예수운동”
예수의 일성(一聲):
“회개하라!” 회개로 번역되는 ‘메타노이아’라는 말의 의미는 ‘돌아서다’.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기존의 삶/관행/제도 등에 관한 ‘돌아섬/회개’에 관한 것.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의 돌아섬이 있어야.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현존얼개를 파악하고 있어야 함.
현 한국사회 진단:
넘쳐나는 민주주의 속에서 사회가 후퇴하는 있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음. 1) (민주화 이전의 군사독재에 의한) 권위주의 2) (민주화 이후의) 시장주의/신자유주의. 현재 한국의 진보세력들은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에만 몰입할 뿐, 정작 양극화/물신주의/비정규직문제 등의 근본원인인 시장주의에 대한 비판에 소홀하며, 이는 386세대로 대변되는 현 진보세력들의 사회적 위상의 변화맥락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 시장주의 한국사회의 가장 아픈 부분은 교육. 한국 부모들의 바램은, 보수적인 부모일 경우 자녀가 명문대학생이 되는 것이고, 진보적인 부모일 경우 자녀가 진보적인 명문대학생(한겨레나 경향신문을 보고, 거리시위에 나서는 부모를 지지/응원할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이 있는)이 되는 것일 뿐,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보수/진보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상황. 이러한 가운데 1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한국의 어른들은 무릎 꿇어야.
386의 정체성:
80년대/20대로서의 체제저항성-> IMF이후 시장주의체제/30,40대로서의 신흥 기득권 중산층
현 진보세력들이 중산층이기에 자본주의를 대면하기 어려운 실정인 것. 결국 현재 한국의 ‘보수 vs. 진보’는 실상 ‘수구 기득권 vs. 신흥 기득권’으로 양분되어 있어 좌/우, 보수/진보의 구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기이한 구조에 놓여 있음.
좌파/진보가 부재한 한국사회:
박근혜(박정희의 정치적 아들), 문재인(노무현의 아바타), 안철수(착한 MB)로 구성된 이번 대선구도를 살펴볼 것. 자본주의 사회 내부의 보편적 정체성은 크게 시민과 노동자라 할 수 있으며, 좌파의 핵심은 ‘노동과 계급’의 존재여부임. 현 한국사회는 시민의식만 높아져 갈 뿐, 시민 대부분이 속해있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각이 희미한 상황. 따라서 사회계획의 에너지도, 내면을 돌볼 에너지도 고갈된 ‘멘붕’의 시대를 맞이하여 (왜 아픈지에 대한 묻고 대답하기 전에, 미리)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라는 말을 흘리는 여러 ‘멘토’들만이 소비되고 있는 상황. “맘몬(물신)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에, 우리의 오늘은 하느님 나라의 최대 위기라 할 수 있음. 이러할 때 일수록 거시적/지구적 상황을 찬찬히 조망해 나가려는 차분한 노력이 있어야.
임계점에 놓였다, 새로운 시기가 온다:
자유주의->케인주의->신자유주의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서, 자본주의는 일정 단위를 주기로 변동하고 있음. 앞으로 올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대안체제에 대한 고민 및 연대가 필요한 상황. 우리에게 가장 결여된 부분이 바로 연대인 듯. 연대는 함께 하는 것이지, 불쌍한 노동자운동 세력들을 돕는 불우이웃돕기가 아님
횡적인 연대의 필요성: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현장’이라는 의식이 필요하며, 이는 ‘일하는 이들이라면 노동자’라는 자의식으로부터 시작됨. ‘(강정/쌍용자동차/재능교육 노조현장 등에서 ‘운동’하고 있는 소수만이 아니라, 어디서든) 일하는 나는 노동자다’라는 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수평적인 연대가 있어야만, 수구 기득권 세력이 ‘노동자 시민’들을 농락하지 않게 될 것.
종적인 연대의 필요성:
수평적 연대만이 아닌, 자라나는 세대와의 연대인 종적 연대도 실천해 나가야. <고래가 그랬어>의 존재이유.
질의응답
질문(청라)
첫번째 질문: 실답게 연대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역사적/정치적 주체의식을 지닌 채 만나야 할 듯.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위한 최소한 물리적 시간과 내부와 외면을 향한 침묵 혹은 여백이 필요할 터인데, 오늘을 살아가는 깨어있는 사람들은 ‘침묵’하기보다는 강박적으로 말을 하며 그것이 공부라 여기는 듯. 과연 이러한 이들과는 어찌 (횡적으로) 연대해야 하는 건지, 아니, 더 단순히 이러한 이들을 어찌 응대해야 하는 건지가 큰 고민임.
두번째 질문: 스스로가 공부를 통해 주체로 태어난 뒤에야 연대가 가능하다는 점이 옳다면, 아이들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백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이런 면에서 볼 때, <고래가 그랬어>는 너무도 친절한 잡지여서, 아이들이 스스로 역사적/정치적 주체로 자라나기 위해 치러야 할 시간이나 에너지를 지나치게 응축시켜버리는 건 아닌지 궁금함. 정작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괄호치기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듬.
답변(김규항)
첫번째 질문에 대하여: 한국은 인터넷을 통한 우민화 정책이 성공한 듯. ‘진보’라 일컬어지면서 언론을 기이하게 이끌어가는 인사들에 의해 수구 세력이 원하는 방식으로의 여론몰이가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음. 사람들이 조갑제의 말에 귀 기울인다고 생각하면 오산. 최고의 반동주의자가 이제는 대체 누구인 것인지 고민해야. 경청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토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인터넷을 통한 민주주의 토론/담론에 보다는 작은 소통의 시도와 실천이 중요함.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상황에 관한 작은 소책자를 준비 중임. 청년들 사이에서 큰 파장이나 호응이 없더라도 해야 할 일이라 여김.
두번째 질문에 대하여: 한국은 아이가 완전히 대상화된 상태임. ‘보리출판사’의 직원과 이야기 하던 중, 그곳에서 나온 책을 좋아하는 건 아이가 아니라 부모라는 말을 듣고, 창간예비호로 준비해 온 <고래가 그랬어>의 ‘말끔한’ 버전을 폐기 처분해 버렸음. 어른이 아이에게 권할 수 있는 책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책을 만들기로 방향을 바꿈. 창간호를 받아본 교육전문가들은 ‘정신이 산만해서 어디 아이들이 보겠는가?’라는 식의 부정적인 견해를 비췄지만, 막상 <고래>를 받아본 아이들은 놀랍게 빠져들었고, 잡지의 내용에 대해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먼저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함. 허나, <고래>가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한 필수품이라 여기거나 주장하지 않음. 사실 부모의 지적 허영이나 취향으로서의 진보의식 때문에 아이들에게 <고래>를 읽도록 하는 부모가 많은 것이 사실임. 때문에, 혹여라도 아이가 <고래>를 싫어한다면 속히 구독을 중단하길 권하고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질문은 <고래>의 딜레마로 남아 있음은 분명함.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고래>가 아니라 홀로 먼산을 바라볼 수 있는 여백의 시간이라 스스로도 생각함. 아이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시간과 느린 놀이 속에서 영혼이 깊어져 가는 것이지, 수련이나 프로그램을 통해 영성을 얻는 게 아니기에.
질문(부용)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예수를 동시에 말함으로 인해, 정치/사회개혁과 종교/영성의 문제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형국이 되어, 자칫 사람들로부터 여러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과 예수’를 함께 논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답변(김규항)
세상이 변하려면 사회구조와 개인이 동시에 변해야 함. 예수는 이 두가 지 변화가 하나임을 체현해 낸 사람. 싸우면서 기도했던, 혁명가이자 영성가였음. 007 제임스 본드의 실체는 그의 일과시간이 아니라 그의 여가시간에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는 새벽에 홀로 깨어 기도했음. 물론, 나를 비워 내 안의 하나님을 찾기 위한 기도였을 것.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의 영성은 사회구조개혁과 다를 바가 없음. 예수를 통해 혁명과 영성이 둘이 아님을 발견했고, 현실사회주의와 생명주의 등으로 편향되는 태도를 어떻게 극복할지를 보여준 모델이라 여겨짐. 맑시즘이 계량할 수 없는 마음의 지옥을 해결할 순 없는 것. 맑스가 말하는 사회변혁은 여전히 중요하나, (복잡한)우리의 모든 것을 맑스가 해결해 줄 순 없음. 적보다는 동지를 죽이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며, 이는 혁명가들끼리/영성가들끼리도 마찬가지. 내 안의 지옥/번민/파괴성이 관계/사회/조직에 반영되기 마련인데, 이렇듯 설명 불가한 지점들 때문에라도 혁명가에게는 더욱 더 기도(영성)가 필요함. 이런 이유에서, 내 주장을 향해 좌파와 영성가들 양쪽 진영 모두가 오해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겨짐.
질문(최지만,)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았듯, 좀더 본질적인 차원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와 제자들의 연대는 청년들 사이의 문화연대로 옮겨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청년들의 사회참여를 독려하는 문화연대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더불어, 대안교육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답(김규항)
문화연대의 필요성이나 효용에 대해서는 긍정하지만, 운동의 스타일이나 형식을 내용으로 치환시키는 경향을 주의해야.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더는 진보적인 운동일 수 없을 것.
대안교육과 관련해서는, 대안학교가 대안입시학교가 되어가고 있는 실정. 귀족학교라는 비판을 받고 있음. 대학입시 이외의 대안적인 삶을 제시할 수 있는 대안학교라면 존경 받을 수 있을 것. 허나, 교육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한국의 부모들 때문에라도 한국의 대안학교 가운데는 그러한 목표의식을 지닌 대안학교가 힘들 듯. 독재체제는 공포를 일으키지만 자본주의는 불안을 일으키고, 불안에는 명확한 대상도 한계도 없다는 게 문제. 대학 정원의 2.5%만이 대학 교육을 통해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오늘날의 대학 진학률은 90%에 육박(386세대 대학 진학률은 17~18%). 사교육을 통해 상류층들이 제 아이들의 교육 수준을 비정상적으로 끌어올려버린 상황에서, ‘경쟁’이란 아예 성립하지 않는 것. 일류대에는 서민가정 출신 아이가 거의 없고, 실제로 그런 대학에 강연을 가보면 학생들이 ‘한 동네’ 아이들 같다는 기이한 느낌을 받게 됨. 불안에 의해 비현실적인 행동(무조건적인 대학진학)을 하도록 내몰리고 있는 것이 한국의 부모들과 아이들. 대학을 가지 않는 편이 오히려 합리적인 셈. 비교우위를 점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족/소박/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을 대학 바깥에서 찾도록 하는 것이 (계산을 아무리 해 봐도) 더 합리적. 지배체제의 거대한 지배전략인 교육에 있어서 만큼은 좌파도 대책없음. 진보인사들이 제 아이들을 한시바삐 해외로 보내는 게 더 이상은 이슈도 되지 않을 정도. 교육문제야 말로 진보운동의 최전선.
첫댓글 총 세시간의 강연 이후, 뒤풀이 자리에서도 강사님과 긴밀하게 말씀 나누웠습니다. 긴 말을 짧게 해보자면, '아이가 좋아하는 잡지를 만든 게 성공의 열쇠'라는 정도겠습니다. <고래>는 한국의 모든 현존 잡지 중에서 상당히 안정된 운영을 하고 있는 수준이라고 말씀하셨고, '고래동무'로 불리는 후원이 수입의 반정도를 차지하며 나머지 반은 정기구독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연재글들이 향후 단행본으로 출판될 정도의 수준이어야만 한다는 나름의 기준이나 원칙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고래출판>이 곧 선보일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지요. <고래기업>의 미래는 꽤 크고 거창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