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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번호: 064
성명 : 정태영
완주번호 : 5940
서울둘레길에는 건강⦁인문⦁예술이 있다고 전하라
들어가며
2015년 12월 16일 수요일 18시 55분!
서울둘레길 157km를 도봉탐방센터 옆에 있는 빨간 우체통 스탬프시설에 있는 도장을 찍음으로써 완주를 이룩한 시각이다.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를 앞둔 시점이라 주위는 칠흑같이 어둡고 한기를 느꼈다. 하지만 마음은 새해에 떠 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일출의 광경처럼 밝아 오고 있었다. 또한 한 밤에 떠 있는 한가위 보름달같이 주위를 훤하게 비추고 있었다. 주변에 어느 누구도 없었지만 나 홀로 “아, 아, 아!” 환호성이 저절로 울려 나왔다. 귀가길 환희에 벅차 집으로 직행하기에 웬일인지 섭섭한 마음이 들어 비록 혼자지만 ‘나홀로 파티’를 열고 자축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도봉산 인근 식당들은 마감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자축의 새로운 시각이었다. 도봉산 산행을 마치면 들르는 단골 식당에 가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술잔을 비우며 둘레길 완주의 감회를 읊어 보았다.
이번 서울둘레길 여정은 한 마디로 건강․인문․예술 등이 담겨 있었다. 길에는 역사, 문화, 종교, 시, 음악, 그림 등이 숨 쉬고 있었다. 석기 시대의 움막, 한강을 진출했던 당시 고구려 보루, 백제 초기 한성시대의 풍납토성 등이 우리가 뿌리 깊은 민족임을 유물로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산 속에서 사찰을 만나면 경전의 구절을, 도로에서 성당과 교회를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을 새겨 보았다. 산길을 걷다 마주치는 묘지들을 보면 잊고 지냈던 삶의 본질과 의미를 사색하게 되었고, 때로는 사색과 더불어 시상(詩想)이 가슴을 울렸다. 그리고 우리만의 독특한 미(美)를 품어 내고 있는 겨울산과 한강의 풍광은 그 자체가 그림이었다. 흐르는 강물은 세월을 더듬어 주면서 과거 짝사랑 여인도 생각나게 했고, 가슴앓이 그 시절 노래도 불러 보면서 과거를 반추(反芻)하여 보았다. 자축자리를 마무리하면서 서울둘레길 완주 과정 및 느꼈던 소회(素懷)를 글로 간략히 정리하기로 하였다. 이는 다음에 반복하게 될 둘레길 여정에 참조 자료임과 동시에 향후 각종 ‘길 공부’에 보탬이 되는데 뜻을 두었다.
산행을 하면 산 정상에 가는 것을 목표로 했지 둘레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산행하면서 우연히 발견되는 서울둘레길 표지판을 보면 언제 한번 쯤 둘레길 따라 가 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울시청 홈페이지에 서울둘레길 완주 5,000명 돌파기념 초청행사 걷기대회가 있다는 소식에 기회는 이 때다 싶어 무조건 행사참여 사전 등록하였다. 이미 많은 분들이 둘레길을 다니셨고 완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보에 대해 어두웠던 것이 아쉬웠다.
서울둘레길 입문에 들어서며
11월 28일 토요일 당고개역 근처에서 실시되는 행사장에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갔다. 비가 오고 있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행사장에는 벌써 많은 분들이 도착하여 걷기행사를 기다리고 계셨다. 가을 끝자락에 내리는 비가 우산을 쓰기에 애매모호하게 내렸지만 나름 살짝 젖는 애상(哀傷)의 만추(晩秋)를 느끼고 싶었다. 행사장에서 나누어 준 우비는 가방 속으로 가고, 이벤트행사로 만든 나무 목걸이는 행운의 부적처럼 목에 걸었다.
구간은 수락․ 불암산코스, 서울 둘레길 사랑하시는 분들과 함께 출발하였다. 대부분 동행을 하셨지만 이번에는 혼자서 감상과 탐색의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선두 그룹에서 걸어가며 이따금 뒤를 되돌아보면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루어 낸 풍경이 무채색의 자연과 더불어 장관(壯觀)을 연출하였다. 몇 년 전 실천하지 못하였지만 강북 5산 불수사도북(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 완주를 목표로 하여 수락산과 불암산을 연결하여자주 등산하던 곳이었. 그런데 둘레길이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으리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둘레길을 목표로 하는 첫 길이라 생소하기도 하고 호기심이 가득하였다. 길은 잘 다져져 있어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정답게 대화하며 걸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연인과 같이 동행하면서 시도 읊고, 노래도 나지막이 부르며 산책하듯이 걷는다면 영원히 기억될 아름다운 환상의 추억의 길이 될 수 있으리라 상상하여 보았다. 이런 낭만의 시간을 갖지 못 하고 흘러 가버린 젊은 시절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주위의 젊은 청년들에게 데이트코스로 서울둘레길을 적극 추천하고 싶은 심정이다.
불암산 우회코스 갈림길에서 빨간 우체통 스탬프시설을 처음으로 맞닿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이던 중 둘레길 선배 되시는 분의 안내에 따라 스탬프북 지정된 공간에 사슴이 새겨진 도장을 처음으로 찍었다. 첫 스탬프를 찍고 나서 스탬프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스탬프를 찍는 공간이 24군데이고, 그 중 익숙하고 자주 산행한 산이 제법 있었지만 고덕․일자산코스, 봉산․앵봉산코스는 미지의 코스이었다. 이 코스를 가까운 장래에 방문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서울둘레길 모든 코스를 완주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걷기행사 마무리되는 장소에 도착하여 기념배지를 수령하였다. 이 기념배지는 배낭에 부착되어 있는 여러 배지 중 둘레길 인연의 첫 배지로 장식되었다. 두 번째로 스탬프북에 행사 스태프께서 스탬프를 찍어 주는 것으로 수락․불암산 구간 첫 서울둘레길을 매듭지었다. 점심시간 포함하여 총 다섯 시간 정도의 둘레길 산길 보행이 무리한 산행도 아니었고, 호흡도 심하게 거칠지 않았으며 적절히 땀을 냈다. 이와 같은 상태의 서울둘레길 산행이라면 나이가 노년에 접어 들어가고 있는 나에게는 안성맞춤의 건강비법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활기에 넘치며
첫 둘레길 구간을 마치고 나자 스탬프북에 스탬프를 빨리 다 찍고 완주증을 서둘러 받고 싶은 욕심이 종종 생겨 억제하려고 무던 애를 썼다. 둘레길 완주를 겨울이 접어든 추운 현 시점 보다는 꽃 피는 봄철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서울둘레길 완주’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2015년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이번 완주를 시도하는 것을 일단 목표로 하기로 수립하였다. 이렇게 목표를 결정하니 더욱 빠른 시일 내에 완주하기로 마음이 다급해지기만 하였다. 우선 집에서 가깝고 친숙한 대모․우면산 코스를 선택하였다. 12월 6일 일요일 이른 아침에 간단히 행장을 꾸리고 집을 나섰다. 대모산 초입에 가서 빨간 우체통스탬프시설을 보니 너무도 반가웠다. 그런데 이 장소는 수차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설을 목격하지 못한 것이 의아스러웠다. “관심이 있어야 보인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올 날씨는 강수가 필요한 때에는 가뭄이 유독 심했는데 늦가을에 접어들면서 비 또는 간혹 눈이 내려 산길이 제법 미끄러웠다. 도중에 엉덩방아도 두어 번 찍었지만 유쾌하고 즐거웠다. 둘레길 완주 하는 동안만큼 세상사 모든 고민과 시름을 접기로 하니 저절로 행복 바이러스가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큰 어머니 산 같은 대모산은 언제나 와도 어머니 품과 같이 푸근하다. 이동 도중에 탑을 만나서는 쌓은 이의 공덕을 기리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도하였다. 여러 곳의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면서 편안하게 구룡산을 거쳐 우면산 쪽으로 향하였다. 양재시민의 숲으로 가면서 보드러운 흙길이 아니고 산길도 아닌 포장도로 인도를 걸을 때는 자연이 창조해 내는 맑고 향기로운 기운을 느낄 수 없어 다소 아쉬웠다.
양재시민의 숲 입구에서 빨간우체통 스탬프시설에 당도하니 젊은 부부가 스탬프를 찍고 있었다. 완주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체감을 느껴 다정스럽게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누었다. 나처럼 완주길 초반에 있는 실정이었다. 이들과 헤어지면서 방문한 바 있는 윤봉길 기념관 입구에 있는 동상 앞에서 묵념을 하였다. 윤봉길의사를 비롯한 애국 독립지사들의 명복을 빌고, 이 분들의 나라사랑의 참뜻을 다시금 가슴속에 새겼다. 우면산은 여러 차례 친한 동료들과 가벼운 산행으로 다니던 곳이라 힘들지 않게 일주할 수 있었다. 우면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함께 등산하였던 항상 그리워하며 잘 만나지 못 하고 있는 동료들 생각이 간절히 났다.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지 안부가 궁금하였고 다가오는 연말연시에는 안부인사 겸해 그들과 함께 하는 기회를 갖기로 다짐하였다. 둘레길 산행을 혼자 보다는 동행할 것을 권장하지만 위험한 길이 전연 없고 길을 안내하는 서울둘레길 표지판과 주황색 리본들을 중요한 길목에서 제 때 발견할 수 있어 홀로 다니는 것도 큰 무리가 없었다. 나 홀로 완주길 산행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자연의 맑고 깨끗한 공기를 흡입하며 걸어가면서 사색도 하고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주위의 사람들과 주변 일들을 차분하게 정리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우면산에서는 정상에 있는 소망탑을 방문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다음 기회에 소망하러 올 것을 기약하며 빠른 발걸음으로 우면산 둘레길을 이동하였다. 우면산 마을 입구 초입에서 스탬프를 찍고 시간을 보니 오후 2시 20분경 날씨도 포근하고 좋아 관악산코스로 갈 것인지 망설이다 겨울해가 짧다는 것을 인지하고 사당역으로 가면서 대모․우면산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둘레길 탐방에 매혹을 느껴 하루라도 빨리 둘레길을 완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주말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다음 코스를 어디로 하고 어떤 방식으로 완주할지 이리저리 궁리하였다. 궁리 끝에 돌아오는 주말에 용마산․아차산코스를 거쳐 고덕․일자산코스를 하루 만에 주파하기로 결정하면서 시간계산을 하였다. 스탬프북에는 도합 14시간 10분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장시간 걷는 것은 생애 처음으로 도전하는 내년 3월 동아마라톤을 준비하는 훈련의 일환으로 체력을 비축하는 기본과정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다만 일몰이 일찍 찾아오는 계절이라 낮 시간이 짧아 다소 염려되었다. 하지만 새벽 일찍 시작하고 속보로 이동하고 마지막 길은 탄천 방향으로 불이 잘 밝혀져 있는 익숙한 길인지라 어둠속에서도 충분히 걸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감행하기로 하였다.
인생을 생각하며
12월 12일 토요일 새벽 일찍 눈을 떴다. 여명(黎明)이 비추어 오기를 바라며 집을 나섰다.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길 BMW(Bus, Metro, Walking)로 이동하면서 일터로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시는 분들을 보며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이 분들의 노고와 희생으로 우리가 편안하게 사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6시 45분 화랑대역에 도착하였다. 4번 출구 횡단보도 건너 공원 앞 빨간 우체통 스탬프 시설을 찾아 스탬프를 찍으니 옆에는 일전에 찍은 스탬프가 있었다. 묵동천을 따라 걸으면서 중랑 캠프로 향하려고 하였지만 길이 너무 어두워 둘레길 표지판도 준비한 손전등으로 확인할 수 없고 더구나 이 길은 초행이라 방향감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중교통으로 양원역 까지 이동하면서 날이 밝기를 고대하였다. 버스를 타자 바로 앞좌석에 자리하신 분이 어두움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각에 가벼운 배낭의 등산복 차림으로 양원역의 향방을 묻는 나의 모습을 보고 단박 둘레길을 다니는 것으로 알아차리셨다. 그간 둘레길 과정을 질문하시고 둘레길 경험의 여러 도움말을 주면서 친절히 안내하여 주셨다. 전연 일자면식이 없어도 같은 행로를 향하는 사람에게 동질감과 동지의식을 느끼며 도움을 주려는 것에 감사를 드리고 뿌듯한 감성을 가지고 둘레길을 맞이할 수 있었다.
양원역 앞 2번 출구 앞에 있는 서울둘레길 표지판을 보니 가까운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듯 너무 반가 왔다. 동이 트는 동쪽 하늘을 이따금 바라보면서 중랑 캠프숲을 거쳐 망우리 묘지공원으로 향하였다. 멀리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태양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새해 소망을 염원하는 간단한 의식을 하였다. 망우리 묘지공원 내에서 올라가는 도중에 벌써 운동을 마친 분들이 내려오는 것을 이따금 볼 수 있었다. 공원묘지를 깜깜한 겨울 새벽에 비록 포장도로이지만 혼자서 다녀온 것을 보니 담력이 있는 분들이고 세상사에 초연한 분들로 여겨졌다. 눈앞에 있는 수많은 묘지들을 보면서 숙연한 마음가짐을 가졌다.
평소 존경하고 좋아한 만해 한용운 선사, 시인 박인환 아동문학가 방정환선생, 화가 이중섭을 비롯하여 13인의 독립유공자들과 많은 분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다. 聖(성)스러운 곳이라 발걸음도 완보로 발소리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이동하였다. 고교시절 수없이 읊고 외웠던 만해의 ‘알 수 없어요’의 시구 중 마지막 연인 “--- 타고 남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를 읊조리며 잠시나마 시상(詩想)에 젖었다. 또한 시인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의 노래화 된 구절 “---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람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을 가슴 속으로 노래하며 젊은 시절의 낭만을 그리워하며 추억 속으로 빠져 들기도 하였다. 특히 이중섭의 대표작 ‘흰 소’를 비롯하여 은화지 및 말년의 불행한 삶을 그림으로 승화한 가족 사랑의 여러 작품이 눈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공(空)의 세상인데도 무슨 탐욕이 많아 분노하면서 갈등을 빚으며 어리석게 사는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욕심 때문에 번민이 많아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들에게 서울둘레길 코스를 안내하고 싶다. 걸으면서 마음 정화도 하며 망우리 공원묘지 구역을 일주하면서 죽음이라는 명제를 두고 깊은 사색을 한다면 한결 마음이 안정되고 삶의 참된 의미를 추구할 수 있으리라 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내가 걷고 있는 이 길도 ‘사색의 거리’로 명명되어 있었다.
인생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걷는 와중에 어느덧 아차산 경계 지점에 이르렀다. 여기부터는 계속 오르막길이고 깔딱고개를 넘어 가야 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부지런히 속보로 이동하였다. 깔딱고개 마무리 지점에 ‘570계단’이 눈앞에 딱 버티고 있었다. 평소 산에 있는 계단 길은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수 없는 길이라 뛰다시피 하면서 등산하는 여러 사람을 추월하여 올랐다. 계단 종착지점에 있는 ‘생명이 35분 연장되었다’는 푯말을 보고 미소가 얼굴에 절로 번졌다.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야 참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스쳐 갔다. ‘100세 시대’라고 불리는 고령화시대에 접어든 요즈음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건강하지 못하여 자식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는 것을 주위에서 왕왕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장수한다는 것이 축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가정에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을 챙겨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힘찬 걸음으로 능선을 따라 한참을 걸었는데도 근처에 있어야 할 빨간 우체통 스탬프시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길가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쉬면서 지나가는 등산객에게 스탬프시설 소재 여부를 묻기로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지팡이만 소지한 채 지나 가시는 나이 지긋하신 분에게 스탬프 시설의 소재를 알아보니 ‘570계단’ 밑에 있다고 한다. 아뿔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고 적지 않은 수의 계단을 다시 올라야 한다니 낭패감에 잠시 어찌할 줄 몰랐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계단을 오르면 35분 수명이 연장된다는 표지판 글귀에 안위하면서 되돌아가야만 했다. 서둘렀기 때문에 빨간색 스탬프시설도 미처 보지 못하는 실수를 하였다. 둘레길 지도도 그 부분만 유일하게 상세도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였다. 이후 둘레길 완주는 지도를 찾기 쉬운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로 하였다.
역사를 생각하며
아차산은 고구려와 연관이 있는 산으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는 장소인 보루가 다섯 군데 있었다. 특히 고구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설화가 담겨 있는 역사적 유적지이다. 한강 유역인 이 지역을 차지하고자 신라와 고구려 간 전투가 격렬하게 있었고 온달장군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년시절 어머니와 함께 영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를 무척 진지하게 보았던 기억이 또렷이 상기되었다. 또다시 영화를 보면 지금은 어떻게 느끼게 될까 하는 궁금증이 유발되었고 작고하신 어머님이 그리워졌다. 아차산은 구리시와 광진구가 관리하는 산이다. 구리시 둘레길은 한강 유역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것에 반하여 서울둘레길은 서울 시내 일부와 북한산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일출을 멋지게 바라볼 수 있는 명소인 해맞이 광장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굴곡 많은 우리 역사를 상기하였다. 향후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가 펼쳐져 세계평화와 인류발전에 공헌하였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 보았고, 흘러가는 저 한강물이 북한 대동강물과 드넓은 서해 바다에서 합치듯 우리 민족의 통일이 빨리 이루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아차산은 인접성이 좋고 산세가 험하지 않아 많은 분들이 애용하는 산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오전 10시경 많은 사람들이 아차산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아차산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스탬프시설에서 8번째 스탬프를 찍었다. 스탬프를 찍고 있는 모습이 어느 한 일행의 눈에 띠어 이들로부터 서울둘레길에 관한 여러 질문을 받고 알고 있는 정보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 분들도 서울둘레길을 완주하겠다는 말씀들이 오고갔다. 아차산을 벗어나서 광나루역을 걸쳐 고덕․일자산 코스 첫 관문인 광진교에 도착해서 9번째 스탬프를 찍었다. 광진교를 건널 때 겨울 강바람임에도 너무도 시원하여 정신이 맑았고 그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강바람과 함께 강줄기를 따라 흘려보냈다.
송파구에 오랜 동안 거주한 관계로 인접지역인 강동구 일대 암사동, 천호동둔촌동, 명일동 지리는 숙지되어 있고 길눈이 밝은 상태에 있다. 특히 암사 유적지에 관한 정보는 집에서 지근거리인 올림픽 공원 내 한성 백제박물관을 수차례 방문으로 잘 습득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 구간은 내년에 참가할 동아마라톤 대비 훈련으로 걷기 보다는 천천히 뛰었다. 끈기와 안내를 가지고 일자산 초입인 고덕역으로 갔다. 고덕역 앞 E마트 광장 건너편에 있는 빨간 스탬프 시설을 발견하고 스탬프를 찍었다. 제법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운동량도 많았고 점심시간도 되어 허기졌다. 근처 벤치에 앉아 준비한 빵과 과일 등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 주며 휴식을 잠시 취하였다.
휴식 후 고덕․일자산 구간에 진입하였다. 일자산은 초행이라 제대로 완주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지만 서울 둘레길 표지판과 주황색 리본을 믿고 따라 가기로 하였다. 비교적 낮은 구릉으로 길이 높낮이 없이 평지로 이어져 있어 속보로 편안하게 이동하였다.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애완견을 데리고 운동 겸 나들이 하는 모습을 제법 목격할 수 있었다. 여러 곳에 있는 간이 운동시설터에는 운동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로 붐비고 있었으며 주말 한낮 건강을 다지고 있는 모습들이 건전하게 보였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이 있듯이 건강해야 건전한 정신으로 생활할 수 있고, 건전한 생활 속에 행복이 깃들 수 있다. 따라서 행복의 원천은 건강한 신체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돈과 권력과 명예가 있다 하더라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완주하고 있는 서울둘레길의 기본취지가 바로 건강을 위한 것이다. 모든 서울 시민들이 서울둘레길을 자주 이용하여 건강과 더불어 행복해지시길 바랄 뿐이다. 일자산에는 고려 말 충신 이집(李集)이 당시 세도가 신돈(辛旽)의 모함을 피해 토굴을 파서 은거한 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집은 쓰라린 고난을 후세까지 영원히 잊지 않게 하기 위해 호를 둔촌(屯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둔촌동으로 불리는 지명의 유래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의 지명중에 여러 곳이 역사적 연고와 지역 특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명에서 역사의 교훈과 조상의 슬기 등을 엿볼 수 있다.
일자산에서 내려오니 좌측 멀리 하남시에 위치하고 있는 검단산이 보이고 바로 앞은 내가 살고 있는 송파구 방이동 일대이다. 같은 서울지역인데도 그리운 고향을 찾은 듯 너무도 반가 왔다. 반가움에 다리에 힘이 생겨 힘찬 걸음으로 성내천에 있는 방이동 생태경관보존 지역을 찾아 나섰다. 성내천은 송파구 걷기연합회 주관 아래 매주 토요일 오전에 지난 일년동안 얼마 전 까지 걸었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방이동 생태경관보존 지역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공교롭게도 이 지역에서 성내천 가는 길은 잘 이용하지도 않는 인도지역인데도 대규모 공사 중이라 표지판과 주황색 리본이 눈에 잘 띠지 않았다. 뒤늦게 보존지역으로 가는 길목을 놓치고 한참 지나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단 성내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 생태경관보존지역을 찾기로 하였다. 인근에 사는 분의 길 안내를 받아 생태경관 보존지역 사무소를 찾을 수 있었다. 사무소 앞에 있는 빨간 우체통 스탬프시설이 주위의 골목풍치와 어울려 예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길을 놓친 이유는 보존지역 들어가는 길목을 자동차들이 가로 막아 표지판과 주황색 리본을 목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생태경관 보존지역과 사무소는 인도 건너 편 자전거 이용도로에 있어 잘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내천을 빠져 나와 탄천으로 가서 오늘의 계획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그런데 다리도 아프기 시작하고 이 지역은 자주 이용하여 구석구석을 아는 편이고, 또한 집은 가까운 곳에 있고 하니 꾀가 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교통편을 이용하여 탄천지역으로 가서 스탬프를 찍고 싶은 유혹이 자꾸만 생겼다. 이러한 유혹이 마음속에서 갈등을 일으켰지만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실히 수행한 노력이 의미를 상실한다고 판단이 들었다. 한편으로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성을 찾고 용기를 내서 오금동, 문정동, 장지동 일대를 발걸음을 옮기면서 더욱 전진하여 나갔다. 비록 다리는 아프고 무거웠지만 마음을 비우며 유혹을 이겨낸 자신을 스스로 자찬하며 위로하였다. 탄천 진입부에 도착했을 때 주위는 상당히 어두워졌지만 어둠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다소곳이 서 있는 다정한 친구 빨간 우체통 스탬프시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탬프북에 절반을 채우면서 하루의 여정을 끝내고 수서역으로 가서 귀가 길을 서둘렀다. 귀가 길 지하철 내에서 서울둘레길 지도를 보면서 내일은 일요일 아무 일정도 없고 하니 신체에 이상이 없으면 관악산코스와 안양천 코스를 동시에 완주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운 사람 생각하며
다음날 12월 13일 일요일 새벽 5시 저절로 눈이 떠졌다. 전날 12시간여 보행으로 자기 전에 다리가 무척 아팠는데도 지금 이 순간 신기하게도 전연 아프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 귓전에다 “오늘도 힘차게 걸어요”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마 12시간 보행을 하였을지라도 공기 좋은 산속에서 완만한 둘레길을 걸었기에 다리 근육에 무리가 가지 않아 빨리 회복한 것으로 처방을 내렸다. 날이 밝아지는 시간을 계산하면서 사당역 도착시간을 7시 30분 경으로 예상하고 집을 나섰다.
예정된 시각에 사당역에 도착하니 겨울철 이른 시간인데도 역내 곳곳에서 많은 분들이 등산복을 입고 무리를 지어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나 홀로 여정이다. 그렇다고 고독하거나 전연 쓸쓸하지가 않았다. 오늘의 목표가 있고 완주 도중에 나목(裸木)들과 무언(無言)의 대화를 마음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관음사를 향해 가는 길에 집안과 국가의 안녕을 발원하고 ‘나무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며 발걸음 하나하나에 염원을 담았다. 관음사 입구에 있는 스탬프시설에서 오늘의 여정을 탈 없이 마치길 바라며 스탬프를 힘껏 찍었다. 보통 등산 도중 사찰을 경유하면 대웅전에 가서 참배를 하였다. 이번 서울둘레길 완주 시 마주치는 사찰은 입구에서 합장하는 것으로 부처님에 대한 예와 공경을 표하기로 하였다. 관음사 앞에서 합장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관악산은 연주암을 찾아 다양한 루트로 자주 등산하던 곳이라 둘레길은 어려움 없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사고는 오히려 예상치 못한 방심한 장소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에 조심스럽게 다녀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관악산 안내소까지 가는 도중에 강감찬장군 탄생지 낙성대와 서울대를 거쳐 갔다. 거쳐 가는 도중 관악산 정상을 향해 가는 등산객들을 횡(橫)과 종(從)으로 마주칠 뿐이었다. 가는 길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송이 맺히고 몸에서 땀이 나고 있었지만 호흡은 그리 거칠지 않아 ‘중간산행’의 안락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관악산 중간 거점인 관악산 안내소 앞에서 스탬프를 찍고 천주교 삼성산 성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세 분 외국인 신부의 유해를 안장한 곳이다. 천주교는 갖은 탄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정착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병들고 고난에 처한 이들을 위해 봉사를 많이 하고 있다. 믿음을 달리 하고 있지만 천주교의 활동에 감사와 찬사를 드린다.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카톨릭 신자 분들의 건실한 생활과 교우관계 및 봉사활동은 내 눈에는 아름답게 비추고 있다. 성지에 있는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나서 약수물을 받아 챙기고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만나고 싶고 그리운 미아리 성당 중고등부 출신 신자모임 산악회 ‘미산회’ 식구들이 생각이 났다. 몇 년 전 개인적인 불찰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여러 어려움이 생긴 이래 미산회 모임을 멀리 하고 있는 중이다. 미산회에서 매달 행사하는 이산 저산 찾아다니던 산행을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이 넘게 동참하여 고락(苦樂)을 함께 했는데 스스로 낙오되어 안타깝고 때로는 이를 생각하면 분노가 난다.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마산회 행사에 빠른 시일 내에 경제적 안정과 정신적 건강이 회복되어 참석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파이팅’을 외치며 휴식자리에서 박차게 일어서며 오르막길 호압사 쪽으로 발길을 내디뎠다. 호압사 옆에 있는 쉼터는 꽤 포근한 느낌이 들어 어디서들 오셨는지 많은 등산객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호압사 대웅전 앞에서 합장을 하고 나서 호압사를 뒤로 한 채 석수역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하산길을 재촉하였다.
초행인 둘레길에 들어서며
관악산 초입 마을에 당도하여 인근에 있는 빨간 스탬프 시설을 찾아 스탬프를 찍고 안양천 코스 출발지역인 석수역 2번 출구로 갔다. 석수역은 가까운 곳에 있어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안양천을 따라 자전거 타는 모양이 새겨진 스탬프를 16번째로 찍을 수 있었다. 새겨진 스탬프 모양을 보니 안양천은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에 적합한 장소로 간주되었다. 서울에서 나고 줄곧 자라 온 서울 태생인 나는 예전에 안양천은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에 범람하는 곳으로 뉴스로만 접한 지역이지 전연 가보지 못한 장소이다. 생소한 지역이라 약간 긴장감을 가지고 안양천을 향해 가는 도로를 따라 한참 가다가 둘레길 표지판도 놓치고 주황색 리본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지나가는 행인도 거의 없었고 길을 알려고 묻기에는 심사도 편치 않았다. 그리고 땀이 마르면서 몸에 한기와 배고픔을 느껴 석수역으로 철수하였다. 석수역 부근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면서 얼은 몸을 녹이니 정상적인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안양천코스 1은 따뜻한 봄날 방문하여 제대로 완주할 것을 기약하고 안양천코스 2 시작점인 구일역으로 전철을 타고 이동하였다. 역 앞에서 17번째로 스탬프를 찍는데 1코스를 제대로 완주하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완주 중 무리하여 탈이 나면 완주계획에 차질이 오니 미리 예방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며 나름 현명한 결정을 하였다고 자위하였다. 이번 코스는 걷기운동에 나선 대부분 주민들께서 운동효과를 극대화하려는지 빨리들 걸으시기에 이에 박자를 맞추었다. 이와 같이 보조를 맞추어 가니 재미있었고 낯선 곳에 대한 심적 부담도 크게 덜 수 있었다. 상단에 있는 흙길과 하단에 있는 부드러운 포장길을 번갈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구간에 나열해 있는 영등포 수변천 표지판을 보면서 한편으로 건너편 풍경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이 구간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은 올해 완공된 고척동 돔구장이었다. 야구팬으로서 내년에는 구장구경 겸 경기를 보러 오겠다고 약속을 하며 돔구장을 향해 멀리서나마 반가움의 손을 흔들었다. 구장이 시야에서 벗어날 때 까지 자주 뒤돌아보며 걸었다. 안양천은 일정 구간에 다리들이 건설되어 있었고 다음 다리까지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대략 2km 정도)를 안내되어 있었다. 그래서 계산하며 다음 다리를 찾아 걸어가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오금교, 신정 1교, 오목교, 양천교, 양화교를 거쳐 직선방향을 유지하며 쭉쭉 박자를 맞추어 가며 걸었다. 양천교를 지나 한강을 맞닿으니 강바람에 가슴이 뻥 뚫리며 그간 쌓였던 피로를 확 날려 보내는 청량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강에는 강태공들의 유유자적한 모습, 옆 도로에는 씽씽 자전거로 달리고 있는 장면이 너무 평화스로워 잠시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태양빛은 부드럽고 이에 순응하여 황금빛에 물들어 있는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이런 황금빛으로 물든 고요한 장면이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한강을 배경으로 주변 환경을 담은 감동적인 풍경화가 연상되게 하였다. 조선 정조 시대 화가인 겸재 정선은 한강 여러 지역에서 그린 그림들을 남겨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 지역도 겸재의 그림에서 배경이 된 것으로 추측하였다. 완주가 끝나면 확인하기로 하였고 그 외 한강을 배경으로 한 우리 그림들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아쉬움 속에 뒤로 한 채 안양천 마지막 코스인 염강 나들목을 빠져 나왔다. 지척에 있는 황금내 근린공원에서 스탬프를 찍었다. 안양천을 직간접으로 끼고 있는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강서구는 나와 인연이 별로 닿지 않은 지역으로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곳이었다. 이번 이 지역 둘레길을 통하여 친숙함을 느끼게 되어 짬을 내서 다시 오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예정을 훨씬 초과하며
황금내 근린공원에서 가양대교가 인근에 있고, 가양대교가 봉산․앵봉산코스 시발점이고 가양역도 가까이 있어 거기까지 가서 스탬프를 찍고 일정을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양대교 앞에서 스탬프를 찍고 나니 생각이 달라져 가양대교를 건너가기로 하였다. 빠르게 오가는 차량들 옆으로 인도를 따라 다리를 건너가는데 만감이 교차하였다. 주현미씨가 부른 ‘비내리는 영동교’의 첫 소절 부분인 “--- 홀로 걷는 이 마음 그 사람은 모를거야 모르실거야 ---”를 흥얼거리면서 청년 시절 짝사랑도 떠올랐다. 이와 함께 ‘과거는 흘러갔다’라는 노래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 나왔다.
다리 한 가운데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우리네 인생도 저 강물처럼 세월이 흘러 늙어 가고 병들며 이 세상을 떠나 갈 것을 생각하니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단어가 가슴속에 와 닿았다. 모든 사람들이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활한다면 불교에서 언급하는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痴)인 성냄도 욕심도 어리석움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탐진치가 없는 생활은 ‘날마다 좋은 시절’(日日好時日,일일호시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중생들은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우매하게 살아갈까?” 의문이 가득하다. 아마 해답은 종교적 차원에서 모색할 수 있으리라 유추할 뿐이다.
가양대교를 건너 지도를 살펴보니 다음으로 거쳐 가야 할 곳이 지난 가을 개최된 ‘유방암 예방 걷기대회’에 참가했던 월드컵 경기장 부근 공원일대이다. 또 지도에는 대회에 참여해서 인상 깊게 새겨진 메타세콰이어길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이 길을 또다시 걸어 볼 작정으로 예정을 초과해서 강행군하였다. 소박한 길 양 옆으로 하늘 높이 직선으로 쭉 뻗어 있는 메타세콰이어나무들 사이로 걷는데 이국의 어느 한 숲길 속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길과 위에 있는 하늘공원이 한 때 서울지역 온갖 쓰레기가 모이는 하치장으로 악취가 진동하고 각종 벌레들이 들끓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접근하기 곤란한 장소였는데 아름다운 길과 공원으로 변모한 것이 놀라웠다. 겨울철 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하고 있었고 그들의 얼굴에는 평화로움과 풍요로움이 깃들어 있어 보였다.
지난 가을에 본 하늘공원에서 노을 지는 장면에 어울려 펼쳐져 있는 억새풀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선하다. 자연과 인간이 창조해 낸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취하고 감동했다. 이러한 감동을 기억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월드컵 경기장에 당도하였고 불광천을 안내하고 있는 서울둘레길 표지판을 목격하였다. 인근지역에 무지한 나로서는 불광천이 근처에 있는 것이 신비하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나도 모르게 또 걷게 되었다. 예상을 훨씬 초과한 오랜 보행임에도 불구하고 다리는 조금도 아프거나 무겁지 않았다. 산행이 장기화되면 가끔 찾아오는 좌측 무릎의 경미한 통증도 전연 없어 오히려 이상하다고 느꼈다. 전심전력을 다해 열중하면 가벼운 신체적 고통은 잊게되고 사라진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 해당되는지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불광천에 당도하니 많은 분들이 운동 삼아 걷고 계셨다. 완주 당시 겨울날씨답지 않게 춥지 않아 운동하기도 좋고 둘레길 걷는데도 지장을 받지 않았다. 서울둘레길표지판 안내에 따라 걸으니 불광천을 벗어날 수 있었으며 주택가에 접어들었다.
주택가 도로에 줄쳐져 있는 화살표 방향을 따라 걸으니 쉽게 증산체육공원에 갈 수 있었다. 이 부근에 있는 스탬프시설서 일정 마지막 스탬프를 찍고나니 주위는 어느덧 어두워졌다. 기다리고 있는 가족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려고 서둘러 6호선 증산역으로 갔다. 지하철 내에서 스탬프북을 보니 어느덧 2/3가 채워져 있어 마음은 뿌듯하고 양 이틀 강행군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둘레길을 이으며
12월 14일 월요일 오전에 볼일을 마치고 오후에 어제 다녀간 증산역으로 가서 봉산․앵봉산 코스2와 코스3을 증산체육공원 앞에서 시작하였다. 월요일 오후인지라 인적이 거의 없고 능선은 고즈넉하였다. 봉산에서는 송림숲을 지나 봉수대를 거쳐 서오릉로 입구인 앵봉산으로 갔다. 앵봉산은 산 이름이 예쁘다고 느껴 알아보니 꾀꼬리가 많다 하여 ‘꾀꼬리 앵(鶯)’자가 들어갔다고 한다. 더불어 앞서 거쳐 간 봉산은 정상에 봉수대가 있다 하여 ‘봉화 봉(烽)’자를 쓴다고 안내판에 설명되어 있었다. 서오릉도 인근에 있는지라 조선의 역사를 되새기며 천천히 걸었다. 특히 서오릉이 숙종임금과 관련되어 있는 능이어서 그런지 TV 사극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비극의 여인 장희빈이 연상되었다. 장희빈의 묘는 1969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서오릉 지역으로 이장되어 대빈묘로 불리우며 자리잡고 있다.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는 사후에도 이어지는 끈질긴 숙명의 인연을 보는 것 같았다. 이와 아울러 연산군의 모친 폐비 윤씨, 문정왕후, 명성왕후 등 조선의 궁정여인사가 뇌리에 스쳐갔다. 앵봉산 하산길에는 탑골생태공원과 보덕사가 있었다. 은평 환경플랜트 건물 뒤에 있는 스탬프시설에서 스탬프를 찍고 귀가하기 위해 인근에 있는 3호선 구발발역으로 갔다.
12월 15일 화요일 오전에 하계역 부근에 위치한 북서울미술관에서 예약되어 있는 근세미술사 특강을 수강하고 나서 오후에 11월 말 지난 행사시 첫 서울 둘레길인 수락․불암산 1코스에서 생략되어 가보지 못한 구간을 챙겼다. 서울 창포원 관리 사무소 앞에 있는 스탬프시설에서 스탬프북 앞면 유일하게 비어 있는 첫 공간에 스탬프를 찍으니 비로소 스탬프북 앞면이 모두 채워졌다. 가까운 곳에 서울둘레길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인 도봉탐방지원센터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하루 빨리 완주를 마치고 싶은 심정뿐이고 완주를 위해 다음날 예정된 일정을 차후로 미루었다.
이제 남은 구간은 서울둘레길 마지막코스인 북한산코스이다. 이 코스는 북한산과 도봉산을 연결하는 구간으로 스탬프북은 17시간 소요되는 것으로 안내되어 있다. 겨울해가 짧기 때문에 하루에 완주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시작점인 선림사길과 마지막 도봉지원센터로 연결되는 무수골은 수차례 등산으로 길을 잘 알고 있는 상태라 어두움 속에서도 길을 잘 밝히면 하루만에도 완주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리하여 밤길을 밝힐 손전등 등을 준비하며 부산을 떨었다.
지난 세월 그리워하며
12월 16일 수요일 새벽 5시 반에 집을 나섰다. BMW(Bus, Metro, Walking)가 잘 연계되어 낭비하는 시간 없이 구파발역에 도착하였다. 주위는 어둡고 이른 시간이지만 출근하는 행인이 많았다. 역 부근 아파트 사이로 난 개천(불광천의 일부로 판단?)을 따라 선림사로 향하였다. 선림사는 어머니에게는 깊은 사연과 인연이 있는 사찰이고 운명하시기 직전 까지 삼십여년 다니셨다. 선림사 가는 길은 거주하시는 금호동에서 교통편으로 1시간 이상 소요되는 먼 거리이고 다리는 무릎 관절염으로 성치 않으시고 건강 마저 좋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의 안녕과 행복을 발원하기 위해 한결같이 선림사 부처님께 빌고 또 빌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까운 친지들을 모시고 49재도 선림사에서 했다. 그런 까닭에 선림사에 오게 되면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지고, 어머니 보고파 눈물을 짓게 된다. 몇 년 전 어머니 그리움에 선림사라는 제목으로 보잘 것 없는 시를 한 수 지었다.
선림사
꿈길 따라 인연 닿은
북한산 자락에 있는 소담한 절
어머니 佛心 영글고
부처님 자비가 서려있는 터
육신이 무너져 가도
한결같이
자식만을 위해 기도한
발원과 정성이 가득 차 있는 터
대웅전 법당에서
참회의 절을 하고
극락왕생을 빌며
孤魂을 위로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나비가 날아들어
緣起(연기)의 法(법)을 설하며
중생을 구원합니다
선림사 종각에서
자식들 이름 새겨놓은
종을 어루만지며
당신의 체온을 느낍니다
선림사에 당도하였지만 대웅전에 가서 참배를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이른 시각에 절식구들에게 폐를 끼칠 것 같아. 절 앞에서 합장만 하고 아쉬움에 발길을 재촉하여야만 했다. 밝지도 않은데 절 옆 공터 운동시설에는 몇 분이 계셨다. 이 분들 덕에 어둑어둑한 산길을 들어가야 하는데 불안감은 가셨고 손전등에 의지하여 갔다. 벌써 반대편에서 손전등을 밝히며 하산하시는 분들이 이따금 계셨고 마주칠 때마다 간단한 인사로 예의를 차렸다. 장미공원을 향하여 일보일보 전진하였다. 불광사 앞에서 북한산 코스 2번째 스탬프를 찍었다. 잠실에도 불광사 라는 건물 5층에 우리 고유 건축양식의 대웅전을 갖춘 현대식 건물로 된 동명의 절이 있다. 내 생활권과 지근거리라 마음잡이로 자주 찾고 예배드리는 사찰이다. 은평구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곳이라 사료된다. 동네 이름도 ‘부처 불(佛)’과 ‘빛날 광(光)’으로 구성된 불광동이 있으며, 일대 북한산 봉우리도 관음봉, 문수봉, 원효봉, 의상봉, 등 부처님 명호와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님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 일대가 불교와 관련된 유래는 알 수는 없으나 불교와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다고 추측할 뿐이다. 이는 차후 조사하기로 하였다. 과거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사실도 관심을 기울여 조사하려는 자세를 가지게 된 것도 이번 둘레길 여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느 덧 날은 밝았고, 산속 공기 냄새가 향기로웠고 이 향기에 취해 무아지경속에 걸었다. 북한산둘레길 구간은 옛성길, 명상길, 흰구름길, 순례길, 왕실묘역길로 구성되어 있다. 옛 성길 구간인 장미공원으로 가는 길에 인근에 작은 공원들이 있어 헷갈렸으며 표지판도 중간에 끊겨 있었다. 또한 장미공원은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었고 눈에 띠지 않아 이 지역에서 약간 헤맸다. 오후에 순례길 근처에서 만난 100인 원정대 일원이신 분과의 여러 대화가운데 이 지역에서 많은 분들이 길을 놓친다는 언급이 있었다. 장미공원을 지나 탕춘대 성암문으로 가는 도중 옛 성터를 목격할 수 있었다. 옛 성터를 보면서 지난달에 경험하고 마무리한 서울 한양도성 스탬프투어가 상기되었다. 이 문화투어는 4코스로 구분되어 성에 얽힌 조선의 역사와 서울에 있는 각종 건물과 지역에 관련된 최근세사를 해설사들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현장에서 옛 성터 위치를 확인하고 서울의 역사를 공부하는 ‘배움의 즐거움’을 가진 유익한 시간을 보낸 바가 있었다.
명상길 시작점인 형제봉 입구로 가는 도중에 평창동 지역을 걷는데, 동네 구간으로는 다소 길었다. 인적은 없고 담이 높은 큰 집들이 많고,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소리에 개 짖는 소리도 유난히 높아 편안한 마음으로 걸을 수 없었다. 이 구간은 축소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지루하였던 길을 지나 형제봉 입구에 있는 명상길 시작점에 이르렀다. 스탬프를 찍고, 의자에 앉아 빵과 과일을 먹으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방전된 몸을 충전한 후 산길로 들어섰다. 이 길은 오래 전에 한 번 가 보았던 북한산 자락길이라 그동안 눈에 익은 서울둘레길 표지판과 주황색 리본들이 보이지 않고 북한산 표지판만이 보여 제대로 가고 있는지 가끔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가니 정릉 청수장 쪽에서 보국문으로 가는 입구인 북한산 관리사무소가 보였다. 삼십여년 전 등산을 취미로 하는 가까운 후배의 권유로 이곳에서 북한산을 처음으로 올랐던 곳이라 그 시절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당시는 등산이 대중화되어 있지 않고 등산인구가 지금처럼 많지 않아 산이 붐비지 않았고, 등산용품도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다. 일요일 봄철인 그 날도 청바지 차림에다가 운동화 신고 산에 갔으며, 운동화 바닥이 조금 닳아 있어 산길이 미끄러웠으며 몇 번 엉덩방아를 찍었다. 또한 그 때는 몸이 약간 비대하여 땀을 엄청 흘려 옷이 다 젖었다. 보국문에 도착하니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시원한지 올라가느라 힘들었던 과정은 모두 잊었다. 준비해 간 김밥은 또 어찌나 맛있었는지 꿀맛이 따로 없었다. 보국문에서 백운대로 이동하면서 중간에 쇠 난간을 만날 때 마다 어찌나 두려웠는지 등산초보로서 엄살도 제법 있었다. 그 날은 약간의 고소공포증 때문에 백운대에 오르지 못하고 하산하였다. 하산 도중에 다리에 쥐가 나서 쩔쩔 매고 있는데 어느 친절한 등산객이 수지침을 놔 주어서 근육통증이 완화되었다. 무척 지치고 다리는 천근만근 상태에서 간신히 도선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인근에 있는 식당에서 후배와 술자리에서 막걸리를 마셨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유쾌한 분위기에서 많이 마셨지만 다음날 숙취는 없었다. 며칠 다리가 약간 아팠지만 머리는 맑았고 몸은 가벼워 일도 능률적으로 처리되었다. 그 이후 주말마다 등산을 가는 것이 최고의 낙이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등산 후 가까운 지인과 어울려 마시는 뒤풀이 술자리는 미인이 시중드는 아방궁 같은 호화스러운 술좌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라사랑의 뜻을 새기며
옛 추억을 잠시 보류하고 성북생태 체험관을 경유하여 흰구름길 시작점에 도달하였다. 그 지점에서 스탬프를 찍으니 이제 스탬프를 찍을 남은 공간은 두 곳이었다. 이제는 빨래골공원 지킴터, 화계사, 4.19 국립묘지를 경유하여 우이령 입구까지 가는 것이다. 화계사는 한국불교를 해외에 알리며 해외포교에 정성을 쏟으신 숭산스님(1927~2004)이 주석하셨던 사찰이다. 숭산스님의 미국인 제자 현각스님이 쓴 베스트셀러였던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열림원,1999)에 언급된 사찰이기도 하다. 현각스님이 미국 유명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지만 삶의 궁극적 목표를 찾지 못하던 중 숭산스님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한국에 오게 된 그간의 과정을 쓴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한국불교가 외국인 엘리트층 젊은이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우리는 우리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을 쓰는 도중 숭산스님의 외국인 제자 대진스님(계룡산 무상사회주)께서 원적(圓寂)하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였다. 스님의 극락왕생을 빌 뿐이다.
4.19국립묘지부터 이어지는 우이동 북한산 둘레길은 근대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장소이며 순례길로 명명되어 있다. 이 순례길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여 자결하고 독립 후 우이동에 안치된 이준열사의 유적지가 있다. 또한 천도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대표 의암 손병희묘소가 있다. 그 외 몽양 여운형, 성재 이시영, 심산 김창숙, 해공 신익희선생 등 애국선열 및 애국지사 16위의 묘역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일일이 묘역을 찾아 참배할 수 없었지만 마음의 순례길이었다. 시간이 제법 많이 흘러 어느덧 어두워지고 있었고, 왕실 묘역길 앞 시작점에 이르렀다. 여기서 스탬프를 찍으니 스탬프북에는 마지막 한 공간이 남았다. 어두워지고 있지만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로 각오를 단단히 하였다. 이 구간에 있는 무수골은 미산회 식구들과 자주 지나친 길이고 한 밤중에도 지나간 일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손전등에 의지하여 갔으며, 도중에 어둠이 짙게 깔렸는데도 산책하시는 인근 주민들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둘레길 완주일정을 끝낼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도봉탐방지원센터 옆에 있는 스탬프시설에서 마지막 스탬프를 찍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 왔다. 또한 서울둘레길 완주를 ‘해냈다’라는 성취감과 더불어 기쁨의 환희에 흠뻑 젖었다.
나가며
서울둘레길에 관한 정보를 상세히 알게 된 것은 11월경이었다. 첫 구간인 수락․불암산 코스 걷기행사에 참여한 후 서울 둘레길 완주를 결심하였다. 결정한지 한 달도 안 되는 단기간에 서울둘레길 완주를 한 것은 2015년 내에 마무리하고 싶은 작은 욕망에서 비롯하였다. 이번 완주는 혼자서 대체로 속보로 진행하였다. 등산을 하게 되면 산 정상을 목표로 향해 가는데, 나이가 듦에 따라 이것이 자꾸 힘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서울 인근산은 주말이 되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뤄 자연과 충분한 교감을 나누지 못해 유감이었다. 최근 몇 년간은 산에서 느낄 수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누리지 못해 안타까웠다. 그러던 중 이번 서울둘레길 여정에서 주말임에도 산길은 호젓하고 고요하였다. 이러한 차분한 분위기에서 자연과 무언의 대화 속에서 자신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적당한 높이의 산길을 걷는데서 오는 쾌적함, 무릎에 충격을 주지 않는 산행, 심장에 무리를 가하지 않는 서울둘레길 걷기는 최상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서울둘레길을 걷는 순간만큼은 세상으로부터의 불안과 걱정 등을 내려놓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이러한 내용을 소설가 김형경씨가 쓴 심리여행 에세이인 『사람풍경』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면 “--- 걷는 행위는 그 자체에 온존한 충만감과 해방감이 담겨 있다. 걷는 동안은 세상으로부터, 일자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오감을 열고 눈앞의 대상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시간이 찾아온다.---” 고 한다. 상당히 공감하였다.
무엇보다도 서울둘레길에서 역사, 지리, 종교, 문화 등의 인문(人文)을 만났으며, 그림과 음악과 시를 상상하며 예술과 교유하는 보물 같은 귀중한 기회를 가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 자신과 우리 국가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봄이 오면 다시 서울둘레길 여정에 나설 것이다. 이때는 여유를 가지고 꽃과 풀과 나무와 대화를 할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서울둘레길을 찾아 갈 것이다. 비가 오면 비에 젖으면서,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서울둘레길에서 ‘사람의 느낌’을 가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