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2일 (수) 촬영
원성왕릉(괘릉) 옆에 3층 석탑이 있다는 이정표를 보고,
무턱대고 이정표가 가리키는 동네로 들어 갔더니 석탑은 보이지 않고 고택만 몇채 보였다.
삼층석탑은 놓쳤지만 대신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고택으로 들어 갔다. 아무도 없었지만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다.
전면엔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또 있고, 좌측에는 수리 중인 건물이 있었는데. 바로 그 앞에 작은 탑이 있었다.
삼층탑이긴 한데 이정표가 안내하던 탑은 아닌것 같았다. 설명문이 없다.
그러나 절이 있었던 곳인 것은 맞는것 같다. 탑 앞에 탑의 부재가 하나 엎어져 있다.
옛 석물들도 많이 있다.
안채의 모습
왕릉에서 보았던 사자상도 있다.
수봉정이다
수봉정
이 건물은 정자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구휼과 교육,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수봉 이규인(1859~1936)이
1924년에 지은 학교이자 의원이다. 서당인 비해당과 약국인 보인재를 갖춘 2층 건물이었으나,1953년에 1층 건물로 고쳐 지었다.
건물의 형태는 앞면 7칸, 옆면 3칸이고 홑처마에 팔작지붕이고,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학교와 의원을 겸하도록 설계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근대 민족 교육의 터전과 민중 의료의 장을 연 건물로,
선생의 선각과 '실제로 몸소 이행한다.'라는 뜻의 실천궁행(實踐窮行)의 정신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다. -현지 설명문-
지금까지 본 사진은 '수봉정'의 부속건물이었다. 마을에는 한옥들이 많았다.
경주 불국사로 가는 길에
감산사라는 사찰에 잠시 들렀다.
누각을 지나니 바로 앞에 대웅전 인듯한 건물이 보였다
계단을 올라서며 마음을 빼앗긴 건 다름아닌 작은 3층 석탑이었다.
석탑이 이리 고울수가....
아마도 부서진 탑의 옛돌을 수습해 없어진 부재는 만들어서 세운 탑임이 분명하다.
한 참을 바라 봤다.
볼수록 아름답고 우아했다. 황홀하기까지 했다.
감산사의 정전은 대적광전이었다. 돌사자와 동자상이 대적광전을 지키고 있었다.
대적광전의 내부모습이다.
특이하게도 개금하지 않은 석불을 모셨다.
바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 좌측에는 아주 작은 부처님도 계시다. 찾아보고 가자.
귀한 인연이기를
이세상을 살아가다 힘든일 있어
위안을 받고 싶은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살아가다 기쁜 일 있어
자랑하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
내게 가장 미더운 친구
내게 가장 따뜻한 친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지금의 당신과 나의 인연이
그런 인연이기를 (법정스님 글 中에서. 대적광전 벽에 걸려 있는 글)
감산사지 삼층석탑.
감산사지 삼층석탑.甘山寺址 三層石塔 / 문화재자료
감산사지 삼층석탑은 감산사의 옛터에 남아 있는 삼층 석탑으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에 다시 세웠다.
탑은 통일 신라 시대의 일반적인 형태인데, 2층과 3층의 몸돌은 업어지고 1층 몸돌 위에 지붕돌만 3층으로 쌓아 놓은 상태이다.
바닥돌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기둥이 모두 있으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이 있고, 네 귀퉁이는 치켜 올라간 모양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현지 설명문-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그 일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상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두 불상의 광배 뒷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어 탑의 제작 연대와 조성 배경이 확인된다.
불상은 모두 191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두 불상은 현재 국립중앙바물관 불교시에 전시 중이다.
산신각.
금당
옛 석물들.
석불에서 본 대적광전.
아름답고 호젓한 절을 떠난다.
작성자 : 바위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