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비안공(比安公:三近)선조님 산소 사진
삼근 할아버지는 1419년(세종 1) 사마시에 합격함으로서 (신)안동김씨 초유의 生員 합격자가 되었다. 그리고 비록 고관은 아니지만 봉화현감․비안현감 등의 관직을 역임하여 가문 내에서는 比安公으로 불려지고 있다. 삼근 할아버지가 풍산 소산으로 이주한 시기는 대략 1430년(세종 12) 전후로 짐작된다. 이주와 동시에 第宅(살림집과 정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건립하여 정착의 토대를 다지는 한편 자질들의 교육에도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이런 기반 위에서 안동김씨는 무려 600년 만에 비로소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게 된다. 김삼근에게는 係權․係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바로 차자 金係行(1431-1517)이 1447년(세종 29) 진사시에 합격하고 1480년(성종 11) 50세의 고령으로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김계행은 벼슬이 대사간에까지 올랐으며 淸白을 <傳家之至寶>로 삼아 향리에서는 寶白先生으로 칭송되었다. 말년에는 안동부 吉安面 墨溪로 이주하였는데, 후학들이 그의 학덕을 추모하여 이 곳에 墨溪書院을 건립하였다. 그의 가계는 안동김씨 중에서도 寶白堂派(定獻公派)로 불리고 있으며, 후손 중 현달한 인물로는 月川 趙穆의 高弟(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 金中淸(1567-1629)을 들 수 있다.김계행의 문과 합격은 안동김씨로서는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아버지 김삼근이 득성 이래 최초의 사마시 합격자였다면, 그는 최초의 문과 합격자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동김씨는 김계행을 통해 과거의 문턱을 넘음으로서 鄕班에서 점차 道班․國班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그러나 김계행은 어디까지나 장동김씨(삼근-계권-영수-번-생해-대효,원효,극효-상용,상준,상헌,상관계열)의 직계 조상은 아니었다. 장동김씨의 선대가 과거를 통해 출사하기까지는 이로부터 2대를 더 기다려야 했다. 청음(김상헌)의 5대조 김계권은 과거 출신이 아닌 관계로 벼슬이 한성부판관(종5품)에 그쳤다. 그러나 그는 醴泉權氏 權孟孫의 사위가 됨으로서 자식들에게 출세의 길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권맹손(1390-1456)은 1408년(태종 8) 문과에 합격하고, 1429년(세종 11)에는 문과 중시에도 합격한 수재였다. 특히 그는 예문관 대제학으로서 세종조의 문병을 좌우하였으며, 泰齋 柳方善과 같은 문사와의 교유도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