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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의한 우리 역사 말살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이전에 중국이 먼저 우리의 역사를 파묻으려 했다. 동아시아 문명의 역사는 상고(上古)시대부터 중고(中古)시대까지 거의 우리민족의 전성기였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통일된 정치세력을 형성하면서부터 자신들의 역사적 기원을 우리 민족보다 더 앞선 것으로 하기 위해 상고사를 개편하고 우리 역사를 인멸시켜왔다.
중국의 역사 왜곡은 그들이 통일왕국을 건설하면서 바로 시작된다. 역사 짜맞추기가 정치 군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속성이 바로 나타나는 장면이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는 진시황의 진(秦)나라이다(기원전221년).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는데. 그가 막고자 했던 호족(胡族)은 그들이 흉노라 부른 동이족이다. 동이족이 얼마나 막강하고 두려웠으면 그 거창한 장성을 쌓아서라고 막고자 했을까!
한편 분서갱유를 단행하는데, 이는 중국의 뿌리인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모두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유가(儒家)의 뿌리가 우리 민족 문화임이다. 만리장성과 분서갱유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 다음 통일왕조, 겨우 15년만에 망한 진(秦)을 이어 실질적인 통일국가를 이룬 것은 한(漢)나라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역사를 조작하기 시작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중국 대륙의 상고사를 중국인들의 구미에 맞게 왜곡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형을 면하기 위하여 남근이 제거되는 궁형(宮形)을 당하여 옥에 갇히면서까지 살아서 기록을 역사에 남기는 사관의 역할에 충실하려한, <삶을 위해 굴욕을 참은 사나이>사마천이 설마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국인이다. 그리고 그 시대가 어떠한 역사관을 원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는 서한(西漢) 무제(武帝)때였다. 이때에 이르러 명실공히 통일제국의 면모를 갖추고 그것을 구가할 수 있게 되었다. 서한제국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통일된 제국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이론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통일제국의 출현을 합리화하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있게 되었다. 그 이론을 제공한 사람은 동중서였고, 그 이론을 설명 한 사람은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태사공자서(태사공은 사마천 자신을 말한다)>에서 사기의 편찬 방법과 내용 그리고 그 기중에 대해 "18수(宿)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고 30개 수레바퀴의 살이 모두 하나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어 그 운행이 무궁한 것처럼, 보필하는 신하들을 여기에 비기어 그들이 충신의 도를 행함으로써 천자를 받드는 모습을 내용으로 30세가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마천이 천자를 북극성 또는 수레바퀴의 속바퀴에 비유하고 제후들을 북극성의 주위를 운행하는 18수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는 수레바퀴의 살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이들과 그 주위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역사를 엮어간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사기는 중국 천자를 중심으로 한 통치질서 안에 포함된 것만을 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통일되어 진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중국에 많은 나라들이 있었지만 사마천은 오제五帝황제, 전욱, 곡, 요, 순)하, 상,주,.진등 황하 중류 유역에서 계승관계에 있었던 나라들만을 본기에 싣고 그들의 통치자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오제 이전에 있었던 삼황을 전설로 취급해버리고 서술하지 않았다. 이렇게 함으로 중국 안에서 살고 있었던 다양한 종족과 여러 신분의 사람들에게 황하 중류 유역 중심의 통일의식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면적이 유럽전체와 비슷한 중국이 결국 통일국가를 이루어내고 오늘 날 56개(64개라는 설도 있다)민족이 살고 있으면서도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심어준 통일의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마천은 오늘의 통일된 중국이 유지되도록 만든 가장 큰 공로자인 것이다. 황하 중류 유역을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사마천이 심은 황하 중심의 역사의식이 작용한 결과이다. 사마천이 황제 헌원 유웅씨(有雄氏)에서부터 시작한 이유가 있다. 한(漢)왕실인 유씨를 종(宗)으로 역사를 꾸미려는 의도이다. 나아가 삼황오제 시대를 모조리 유씨의 선조로만 엮고 있다. 이것은 공자가 전승되어오던 문헌을 모조리 없애고 요순시대의 말만으로 정교훈령(政敎訓令)을 꾸민<서경(書經)>식 수법과 같은 것으로서 하족(夏族)을 하토(夏土)의 역사 주인으로 설정해 여기에다 꿰어 맞추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가이며 소설가인 낙빈기의 말이다. 낙빈기는 황제가 제위에도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위하여 사마천은 우선 황제(黃帝)에 관한 전설을 집성하였다. 그의 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황제전기의 기원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고 오행설(五行設)의 유행에 따라서 점차 형성 된 것이다. 황제전설 중 중요한 것을 들면, 치우(蚩尤)의 난을 평정했다는 것, 의복, 주거(舟車), 가옥, 궁시(弓矢) 등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것, 약초를 시용(試用)하여 의술을 창시한 일 등이다. 즉 그는 인류에게 문화생활을 가져다 준 최초의 제왕으로 숭앙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복희씨, 여와씨. 신농씨 등의 삼황(三皇)부터 우리의 역사기록에는 그 가계와 혈통과 행적이 너무 분명하고 자세하게 나와 있다. 복희는 배달나라 제5대 한웅인 태우의(太虞義) 천황의 열두 아들 중 막내이다. 하늘같은 검스런 덕이 있어 태호(太皞)라 불리고 배달나라에서 제후로 봉토 받은 진(陳)나라를 갖게 된다. 신농은 본래 웅씨(熊氏)에서 나뉘어진 고시례(高矢禮)의 후손 소전(小典)의 아들이다. 소전은 배달나라 제8대 한웅인 안부련 천황 때 임금의 명을 받아 강수란(姜水) 곳에서 군사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이 강(姜)씨가 되었다. 그이후의 오제(五帝)는 모두 이 배달나라의 제 후국인 진나라로 부터 계보를 엮어 내림하니 결국 모두 배달나라의방계손들이다.
황제 헌원은 말할 것도 없다. 소전국의 세습제후 계곤(啓昆)이 그의 아버지다. 성은 공손(公孫)이다.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므로 하남성에 있는 헌원(軒轅)의 언덕(軒丘)으로 유배시켰는데, 거기서 낳은 아들이라고 이름이 헌원이다.
<사기>오제본기에 하족의 두령인 황제가 인근의 족장인 염제를 복속시킨 뒤 동이의 두령인 치우와 탁록의 들에서 큰 전쟁을 하여 치우를 사로 잡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사마천이 중앙집권적 전제국가 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중국인들의 시조를 조작해 낸 것에 불과하다. 치우를 이겼다는 것도, 의술을 창시했다는 것도, 전부 그 이전의 역사를 외면하고 무시한 채 조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이전의 역사는 바로 우리 민족의 역사이고, 중국인들이 말하는 삼황오제는 모두 우리 배달국의 군소국들이었으며, 중국인들이 우리 조상들에게서 모든 문명을 전수 받았음이 온통 그대로 드러나므로 어물어물하며 이를 신화, 전설처럼 뿌옇게 가려버리고 황제를 내세운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 치우와의 싸움을 보자. 치우는 제14세 한웅인 자오지천황으로서, 도읍을 청구로 옮긴 분이다<사기>에는 <치우는 능히 안개를 일으키고 돌과 모래를 날리므로 대적하기가 심히 어려웠다. 황제는 지남거를 만들어 방향을 잃지 않았으므로 싸워서 마침내 그를 사로잡았다>했다. 그러나 우리쪽 기록들을 보자. 다음은<태백일사>중<신시본기>에 실린 내용이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치우천왕께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사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늘에 제사 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어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여 삶을 숭상할수 있었다.온갖 사물의 원리를 빠짐없이 몸소 살펴보시니 그 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지혜는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으며 힘 또한 갖추지 않는 것이 없으셨다.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셨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될 만한 인재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의 쇠를 태내어 도개 모극 대궁 호시를 많이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 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더라, 한 해 동안에 대개 아홉 개 제후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옹호산에 웅거하여 구야로써 수금과 석금을 개발하여 예과와 옹호의 창을 만들어 내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를 건너서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에 이르렀다 이해에 열두 제후의 나라를 점령하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서쪽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에 유망은 소호로 하여금 마주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은 예과와 용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고 또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들로 하여금 혼미케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로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 관자가 말하는바의<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웠다>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이때 공손헌원이란 자가 있었으니 토착 백성들의 우두 머리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와 더불어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감히 백 번이나 싸워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하고 자신은 보병과 기병3000을 이끌고 곧바로 헌원과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계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 내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회대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신하되기을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당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왕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 운급헌원기라는 책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몸ㅅ하고 구리고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치우를 말한다> 라고까지 썼으니, 역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 알 것이다.
치우천왕은 더욱더 군대의 힘을 갖추고 사방면으로 진격했던 바10년 동안 헌원과 싸우기를 73회 했으나 장수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은 물러설 줄 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원한은 더욱더 커졌다. 군대를 일으켜 우리 신시를 본 따 크게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의 수레도 만들어 감히 싸움터마다 출전하는 지라, 치우천왕은 불같이 진노하사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시더니, 형제와 종당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서 헌원의 군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뜻을 품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더불어서 한바탕 크게 싸움이 일어나자 한 무리를 마구 죽여버린 후에야 비로소 멈췄으니, 이 싸움에서 우리 쪽 장수 가운데 치우비라는 자가 있어 불행히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사기>에서 말하는 치우를 잡아 죽이다 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인듯 하다. 치우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을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헌원의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삼한지기에는 그싸움에서 헌원은 사로잡혔고 치우의 신하가 된 다음 이쪽으로 고신씨 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했다>치우천왕이 돌아가신지 수천 년이 된 지금 오히려 만장의 광열이 있어 능히 후인으로 하여금 흥분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하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성의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붉은 깃발 모양의 연기 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고 한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상은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다른 바가 있어서 천 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하는 듯 하다. 헌원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도 이에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전역유기에 왈, 제나라 풍속에 여덟 신의 제사가 있다. 이들 여덟 신은 천주, 지주, 병주, 양주, 음주, 월주, 일주, 사시주를 말한다. 천주로서 삼신께 제사하고 병주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으로서 용강의 조라 할지니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또 만세 도술의 조종으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고 모든 귀신을 보른다. 이로써 태시의 세계에서부터 항상 천하 전쟁의 주가 되었다. 유방은 동이 계통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병사를 풍과패에서 일으켰는데 곧 풍, 패의 풍속은 치우에게 제를 지내므로 나라도 역시 그 풍속을 따라 치우에게 제를 지냈다. 그리하여 혼고(짐승의 피를 북에 바르고 제사지냄)하고 깃발을 들고 마침내 10월에 패상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을 평정하고 즉위하여 한나라 임금이 되었던 바, 이로 인해 10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정했다. 이것이 진나라의 정월 초하루를 빼앗는 일이기는 하나 역시 동황태일을 받들어 공경하고 치우를 공경하여 제사지낸 때문이라 할 것이다. 뒤에 4년만에 진나라 땅이 이미 평정되니 축관에게 명하여 치우의 사당을 장안에다 세우게 했다. 그가 치우를 존경함이 이와 같았다.<태백일사 신시본기>
유방은 항우를 쳐부수고 한나라를 세운 고조이다.그만한 인물이 큰 전쟁을 앞두고 하필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쪽의 기록대로라면 치우는 형편없는 인물이고 황제 헌원에게 잡혀 죽었는데 유방이 왜 치우에게 제사를지내는가 중국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한단고기>를 처음 번역한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는 <사마천의 사기>는 한민족의 중국지배를 감추기 위해 대단히 역사 위조를 했다. 한漢민족의 이름도 한韓의 이름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제중 황제 이후의 나머지 사제도 마찬가지다. 제전욱(전욱고양, 제곡(제곡고신), 제요(요임금), 제순(순임금)등의 가계와 혈통 및 그들이 한 일이 우리 기록에는 자세하고 명백하게 나온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에는 그런 것들이 감춰지고 심히 왜곡되어 신비하게 가려지거나 과장되어 ㄹ대단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기실 그들은 모두 동이의 후손들이므로 그들의 역사는 모두 우리 역사이다. 중국은 이를 감추기 위하여 삼황오제를 신화 내지 전설인 것처럼 뿌옇게 가리고는 과장의색칠을 하였다.
중국의 강단사학이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묻어버린 삼황오제 시대(기원전2517~2298.9대 219년간)가 사실은 실존했던 역사시대이고 그것도 한국의 고대사이었음을 가장 명쾌하게 밝혀낸 사람은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역사학자인 낙빈기(1917~1994)이다. 그는 고대 금문을 연구했다. 금문金文은 일반적으로 각종 금속에 새겨진 글자를 총칭하는 것인데. 낙빈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삼황오제 시대의 청동으로 만든 각종 농기구와 병장기, 돈, 제기 등에 새겨진 글자인 상고금문(또는 오제금문이라한다)을 풀어냈다. 상고금문은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보다 1000년이나 빠른 고대 상형체 문자이다. 낙빈기는 논리 정연한 증거를 바탕으로 필생의 역작인<금문신고를 1987년에 발간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이어서 정부의 허가를 얻어 800여권을 인쇄했으나 대부분이 출간즉시 몰래 회수되어 금서처럼 묶여버렸다는데, 다행이 그중 네 댓권이 국내에 들어와 알려지게 되었다. 상고금문의 내용은 우리말로써만 해독이 되고, 우리말 중에서도 특히 신라계의 경상도 말로 잘 풀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고 있는 말 중에서 상당히 많은 말들이 바로 중국의 고대언어라는 것이다. 문자가 생기기 이전에 말이 먼저 있었고 그 말을 기록하기 위하여 문자가 만들어졌음에 비추어보면, 상고금문의 주인은 우리조상이었다는 것이 바로 증명되어 버린다
한족(漢簇)이라는 말 자체가 삼황오제 시대에는 없었다. 안호상박사의 고찰에 의하면 한족이란 명칭은 근대에 오면서 생긴 것이지 그런 부족이나 민족은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당, 송 시대에 범엽의 엮은 후한서만 해도 지나대륙에서 살아온 민족들에 대한 상세한 분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족이란 명칭은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주나라 말기의 어지럽던 천하를 통일한 것이 진시황의 진나라요, 그 진나라를 잇는 것이 전후 4백년에 걸친 한나라인데, 후한서에 한족이란 명칭이 없으니 그 한나라조차도 한족과는 상관없었다는 말이 된다. 한족이란 명칭은 신해혁명을 일으킨 손문으로부터 겨우 시작된다. 그는 만주족의 청나라를 뒤엎고 중화민국을 새로 세웠다. 그러자 그 이름을 줄여서 중화니 중국이니 하는 이름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중국은 한족, 만주족, 몽고족, 회족(흉노족), 서장족의다섯 민족이 모여 된 나라라 했는데. 한족이란 이름은 그때 처음나타나고 사용되었다.
안호상 박사가 참고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한족을 말하여 <한나라 때 그 위업이 이역에 널리 떨쳤으므로 위진 시대를 지난 이후까지 외국 사람들은 중국을 자주 한이라 말하게 되었다. 또 본국에서도 자칭 한이라 하다가 드디어 한(漢)은 종족의 명칭으로 굳어졌다. >고 했다. 이와 같은 역사의 조작과 함께 중국인들은 우리 쪽의 기록을 없애는 방법으로도 우리 상고사의 흐름을 단절시켰다. 고구려 초기 동천왕때 유주자사 관구검의 군대가 환도성에 쳐들어 온 것은 구토침략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서책을 훔쳐가기 위한 목적에서 였다. 그때 실어간 서책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 서진의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이다.
결정적인 것은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온갖 역사책들을 보관해 오던 만주 요동 지방의 경관에 제일 먼저 파괴하고 그 역사를 당나라의 소유물로 만든 것이다.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게 무너질 때 먼저 불이 난 곳도 역사 서고다 4개월 여를 탔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할 때도 당나라 군인 이세적은 당 고종으로부터 <백제의 서책을 반드시 불지르라>는 명령을 받고 와서 사비성의 역사서책 창고를 맨 먼저 불태웠다. 불길은 몇달 동안 꺼지지 않아 서고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몽고족의 원나라가 고려를 침략했을 때 전국의 사고를 불태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모두 중국의 지배세력들이 우리의 뛰어난 옛 역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파묻으려 한 짓들이다.
중국인들이 견지하는 주된 역사적 관점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남긴 사서를 연구할 시에 주의해야 할 점으로 흔히 중화사관(中華史觀)이라고 하는데,
첫째, 중국에 수치스런 기사는 숨긴다.
둘째. 중국은 높이고 외국은 깍아 내린다.
셋째, 국내사는 상술하고 국외사는 약술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관의 뿌리는 사마천의 <사기>보다도 휠씬 이전인공자의<춘추>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가 싶다.
공자는 자신의 모국인 노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은공으로부터 애공에 이르는 242년 동안 시해 당한 임금이 다섯이나 있었고 내쫓긴 왕도 있었으나 그런 사실들을 <춘추>의 기록에 전혀 올리지 않았다. 존자와 현자와 친자의 허물은 말하지 않는 것이 예라고 변명 대었으나 진짜 이유는 모국노나라의 자존심을 위해서다.
공자의 제자들 역시 그랬다.
다 알면서도 스승이 은폐한 사건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었고, 누가 혹 물어도 춘추를 방패해서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것이 춘추의 명분이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억지와 자존심이지만 이것이 후세로 가면서 중국의 사가들을 순전한 제 이익의 필법으로 자연스럽게 길들인다. 그러한 자세는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사를 자신들의 변방사로 폄하하여 자국사에 편입하려는 억지 시도도 그러한 자세의 연장이다. 동북공정에서 더 나아가 2003년6월부터는 그들이 신화와 전설로 채색해 놓았던 3황5제화 하나라를 역사시대로 편입하려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단계로 넘어갔다. 이는 동북공정보다 휠씬 거대하고 근본적인 역사왜곡으로서, 중화만족의 위대성을 고대 역사를 통해 확인하려는 오래된 패권주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줄기차게 괴롭혀 왔던 그 패권주의가 다시 요동치는 것이다. 이 패권주의는 한반도 통일 이후의 동북아시아 정세 변화를 내다보고 일본 및 미국과의 패권경쟁을 염두에 둔 것이다
중국의 역사왜곡의 뿌리가 이렇게 깊고 단단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지키는데 피나도록 두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안 되는지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의사가 못 고치는 환자는 어떻게 하나?> - 황종국 지음
잘못된 역사관와 식민사관으로 후손을 엉터리로 가르치면 민족이 멸망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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