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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ölkerschlachtdenkmal: 라이프치히에 있는 전승기념비.
전승기념비가 세워진 결정적인 전투는 1813년 나폴레옹과 프로이센 연합군 사이에 있었던 라이프치히 전투라고 한다.
독일어로 Schlacht는 전쟁, 전투 Voelker는 민족이라는 뜻, 이 둘을 합치면 서로 다른 두 민족 간의 전투라는 뜻이 되는데, 독일에서는 하나의 대명사로서 1813년도에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나폴레옹군과 독일연합군의 전투를 말한다고 한다.
당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고 참전 군인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이 전승기념비를 건축했다고 한다.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많은 사상자가 나와 그들을 애도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91m 높이의 비석에는 전투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프랑스와 연합군의 주요 부대를 상징하는 45개의 아펠 석(Apel-stones)이 있다.
저녁시간이 돼서 시내의 유명한 식당에서 하이케를 대접했다.
하이케와 헤어진 후에 밤거리의 야경을 보면서 호텔로 향했다.
라이프치히(독일어: Leipzig, 소르브어: Lipsk)는 독일 작센 주의 가장 큰 도시이다.
2013년 국제기능올림픽대회를 개최하였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이곳에 살았었다.
1813년에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졌다.
1980년부터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월요기도회는 이후 독일 통일의 도화선이 되었다.
독일 작센 주의 서쪽에 있는, 독일에서 10번째로 큰 도시.
플라이세·파르테·바이세엘스터 강이 만나는 지점 바로 위쪽에 있으며, 베를린에서는 182㎞ 남서쪽에 있다. 독일 중동부의 갈탄이 넓게 매장되어 있는, 비옥하고 지대가 낮은 라이프치히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공원과 유원지로 이용되는 그린벨트로 둘러싸여 있지만, 이곳은 주요 산업 중심지이자 수송 연계지점이며 팔레-라이프치히 대도시권의 중심부에 있다. 도시 주위에 있는 시골지역은 집약영농을 하는 평야로 이루어졌다.
이 도시는 게르만족 정착지 주위의 작은 공동체로부터 발전했다. 1015년 우르브스리브치라는 요새 마을로 기록되기 시작했으며, 1170년경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주요교역로들이 지나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곧 해외교역이 활발해졌다. 에아스터와 미카엘마스에서 매년 열리던 2개의 시장은 1497년 제국박람회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그 밖의 다른 경제적 특권으로 인해 1700년경 독일에서 가장 앞서가는 상업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이곳의 도로망도 발달하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중심부에 위치해서 다소 불리한 면도 있었는데, 도시 내부나 부근에서 몇 차례 중대한 전투가 벌어진 것이 그 예이다. 1631년과 1642년에 브라이텐펠트 마을(지금은 교외지역)에서 벌어진 2차례의 전투, 즉 30년 전쟁 중이던 1632년 뤼첸에서 있었던 전투와 나폴레옹 전쟁 중이던 1813년 10월에 일어났던 라이프치히 전투(다국간 전투) 등이 그것이다.
경제상황이 선망의 대상으로 발전하자 문화생활도 크게 향상되었는데, 이는 특히 일찍이 인쇄업이 발달하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관련하여 음악이 전성기를 맞은 데 기인한 것이었다. 무역이 계속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이 되었는데 주요교역품은 서적, 모피, 직물용 실, 직물 등이었다. 1839년 독일 최초의 철도가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 사이에 개통되었으며, 뒤이어 은행들이 성장함으로써 발전하는 직물과 야금업의 자본 공급원이 되었다. 이처럼 일찍이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이곳은 독일 노동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의 몇 년 사이에 이 지역 1/4이 파괴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후 복구와 재건 사업은 동독의 공산주의 정책에 따라 이루어졌다. 라이프치히 박람회, 여러 전시회, 이곳에서 열리는 의회 등에 새로운 관심이 집중되면서 다시 여러 유럽 도시 가운데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전통 깊은 모피제조업과 도서출판업은 아직도 유명하다. 현재의 산업으로는 대규모의 건축토목 공업과 전기제품·직물·의류·화학제품·기계공구 제조업 등이 있다. 매년 봄에 개최되는 라이프치히 박람회는 동서 유럽 간의 가장 중요한 국제교역장이 되고 있다. 여러 철도 노선의 중심지로 이곳의 주요철도역은 중앙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여객 철도역 중 하나에 속한다. 또한 주요도로가 모이는 곳이며, 공항도 2개가 있다.
이곳은 유럽의 학문 및 문화 중심지이다. 1409년에 세워진 대학교는 1953년 라이프치히카를마르크스대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리하르트 바그너도 이 대학교를 다녔다. 박물관과 연극예술·음악사·그래픽아트 학교 등이 많이 있으며, 도서출판업은 국제적으로 유명하다. 시립도서관으로는 독일도서관과 유럽에서 가장 큰 교육 분야 전문도서관인 코메니우스 도서관 등이 있다. 대학교 도서관과 라이프치히 시구(市區) 도서관, 시립 고문서 보관소 등도 유명한 곳이다. 토마너 합창단,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의해 음악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훌륭한 오페라 극장(1963)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복구된 사적으로는 옛 시청, 옛 상업거래소, 옛 시장 광장, 아우어바흐의 지하실, 13세기 장크트토마스 교회 등이 있다. 현재의 도시 번화가에는 새로 지은 대학교 탑, 새 호텔, 상업·거주 빌딩 등이 들어서 있다. 강둑을 따라 발달된 이 도시의 옛 삼림지대는 일부가 공원으로 바뀌었으며, 중요한 위락시설의 기능을 맡고 있다.
라이프치히 전투-Battle of Leipzig
독일과 폴란드에 남아 있던 프랑스 병력을 완전히 격파시킴으로써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긴 전투(1813. 10. 16~19). Battle of the Nations라고도 함.
약 18만 5,000명에 달하는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및 기타 군인들과 약 32만 명의 동맹군이 작센 지방 라이프치히에서 교전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스웨덴 군대로 이루어진 동맹군은 각각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 게프하르트 레베레흐트 블뤼허 장군, 레온티 레온티에비치 베니히센 장군, 스웨덴 왕세자 요한 베르나도트의 지휘를 받았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에서 퇴각한 후, 1813년 독일에서 새로이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베를린 점령에 실패하고 엘베 강 서쪽으로 철수해야 했다. 동맹군이 라이프치히를 통과하는 나폴레옹의 병참선을 위협하자 그는 그 도시에 병력을 집결시켜야만 했다. 10월 16일에 남쪽에서 슈바르첸베르크가 이끄는 7만 8,000여 명의 부대의 공격과 북쪽에서 블뤼허가 이끄는 5만 4,000여 명의 부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는 있었으나 어느 쪽도 결정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했다. 17일 전투가 잠시 멈추었을 때 베니히센과 베르나도트의 부대가 도착해서 그를 포위한 군대수는 증가했다(→ 나폴레옹 전쟁).
18일 30만 명 이상의 동맹군이 공격을 위해 라이프치히 주변에 모였다. 9시간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프랑스군은 도시 외곽지역으로 몰렸고 19일 오전 2시 나폴레옹은 엘스터 강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 모두가 무사히 건넜으나 동맹군의 공격 위험도 없고 아직 퇴각하는 프랑스 군대로 붐비고 있던 때에, 놀란 하사 1명이 다리를 폭파시켰다. 이 폭파로 인해 3만 명의 후위군(後衛軍)과 부상군인들이 라이프치히에 갇혔고 이튿날 모두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3만 8,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동맹군측은 총 5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나폴레옹 전쟁(1800~15)중 가장 격렬했던 전투에 속하는 이 전투로 라인 강 동부의 프랑스 제국은 붕괴되었다.
라이프치히 전투(Völkerschlacht bei Leipzig)는 제국민(諸國民) 전투 혹은 전쟁, 국가 간 전투(Battle of the Nations)이라고도 불린다. 이 전투는1813년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벌어졌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겪은 가장 결정적인 패배중 하나이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독일에서 벌어졌고, 전투를 벌인 양측에 독일 출신 병사들이 참전해 있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병력이 참여한 연합군은 물론 나폴레옹 휘하의 병력에도 라인 연방(Confederation of the Rhine)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라이프치히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가장 규모가 큰 전투로 양측 합쳐 500,000명이 넘는 병력이 참여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끔찍한 실패를 맛보았고, 반도 전쟁(Peninsular War)에서도 패하였다. 이에 대프랑스 연합군이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란 이름하에 신중하게 재집결 하였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웨덴,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중부 독일의 군소 국가들이 참여하였다. 연합군이 투입한 총 병력은 100만이 넘어갔다. 특히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질 무렵 라인 강 동쪽에 배치된 연합군의 병력은 아마 100만을 넘었을 것이다. 반면에 나폴레옹 휘하의 병력은 점차 줄어들어 몇 십만 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외젠 드 보아르네가 나폴레옹을 돕기 위해 이 전투에 출전하려 했으나 프랑스 제국의 황위 찬탈을 획책하고 있던 조아생 뮈라의 훼방으로 출진을 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독일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5월 2일 뤼첸(Lützen)에서 전투를 벌였고, 5월 20일에서 21일 사이에는 바우첸(Bautzen)에서 전투를 벌여 격전 끝에 프로이센 - 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이 승리로 인해 짧은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게프하르트 폰 블뤼허(Gebhard von Blücher), 스웨덴의 카를 요한 왕세자(Crown Prince Carl Johan of Sweden), 카를 폰 슈바르첸베르크(Karl von Schwarzenberg), 베니히센 백작(Count Benningsen), 러시아의 바클라이 드 톨리(Barclay De Tolly of Russia) 휘하의 연합군은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본대와의 싸움을 피하고, 그의 부하 원수들이 지휘하는 분대와 전투를 벌이기로 한 트라첸베르크 작전(Trachenburg Plan)에 따른 전략을 수행하였고, 그로스베렌(Großbeeren), 쿨룸(Kulm), 카츠바흐(Katzbach) 그리고 드네비츠(Dennewitz)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니콜라 우디노 원수(Marshal Nicolas Oudinot)는 1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베를린 공략에 나섰으나 실패하였고, 이에 나폴레옹은 북쪽으로부터의 위협을 피하고자 서부로 퇴각해야했다. 나폴레옹은 9월말 엘베 강을 건너 보급선을 유지하며, 연합군을 맞아 싸우기 위해 병력을 라이프치히 근교에 배치하였다. 라이프치히 근처 중에서도 병력을 타우차(Taucha)에서 나폴레옹의 지휘소가 있는 슈퇴테리츠(Stötteritz)에 이르는 범위에 집중시켰다. 프로이센군은 바르텐부르크(Wartenburg)에서 진군하였고,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 군은 드레스덴(Dresden)에서, 스웨덴군은 북쪽에서 라이프치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0월 16일의 상황
프랑스군의 총 병력은 190,000명이었고, 연합군은 거의 330,000명이었다. 양측 모두 상당한 수의 포를 가지고 있었다. 양측의 포를 합치면 2,500문 이상이었다. 전투는 10월 16일 남쪽에 있던 78,000명의 연합군과 북쪽에 있던 54,000명의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공격함에 따라 시작되었다. 이때 나폴레옹은 남쪽에서 주력부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초기에 우위를 점하는 듯하였으나 얼마 못가 퇴각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부대는 수적으로 밀리는 상태였기 때문에 연합군의 전열을 붕괴시키지 못했고, 격전 끝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2군단의 될리츠(Dölitz) 점령
폰 메르펠트(von Merveldt)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제2군단은 가우츠흐(Gautzsch)를 통해 코네비츠(Connewitz)를 향해 진군하였고, 이곳에 있는 프랑스군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가야할 진격로를 미리 프랑스군이 점거하여 방어를 충실히 해놓았고, 공격을 지원할 만한 포를 설치할 곳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군에게 격퇴당한 오스트리아군은 이동하여 돌리츠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들은 2개의 다리를 건넜고, 영주의 저택과 제분소로 통하는 길을 따라 내려갔다. 제24연대의 2개 부대는 소규모 폴란드 수비병들을 물리치고 거점을 장악했다. 즉시 프랑스군이 반격을 개시해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었고 전황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오스트리아군은 중포를 설치하여 프랑스군에 소속되어 있던 폴란드 수비병들에게 포격을 가했고, 결국 거점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폴란드 병사들은 치열한 방어전 끝에 전사한 아군의 시체만 남겨둔 채 퇴각해야했고, 물러나는 와중에 장원과 제분소에 불을 붙였다.
마클리베르크의 전투(Battle of Markkleeberg)
클라이스트(Kleist) 장군은 플라이세 강(Pleisse River)을 따라 이동하면서 마클리베르크에 있는 포니아토프스키(Poniatowski)원수와 오주로(Augereau)원수를 공격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다리를 수리하고 학교건물과 장원을 장악하였다. 프랑스군은 반격을 개시하여 오스트리아군을 학교건물에서 내쫓고 강 건너로 물러나게 하였다. 프랑스군은 장원에 공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 공격으로 프랑스군과 폴란드군은 피해만 입었을 뿐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러시아 제14 사단이 폴란드 군에 측면공격을 계속 수행하였고, 폴란드 군을 마클리베르크에서 쫓아내었다. 포니아토프스키 원수는 퇴각을 멈추고 반격을 시도해 러시아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별다른 경계도 없이 야외에 서 있는 프로이센 제12여단 소속 4개 대대를 본 포니아토프스키는 포병대와 기병대로 하여금 이들에게 공격을 가할 것을 명했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러시아 경기병대가 프로이센군을 구원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포니아토프스키 원수는 마클리베르크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겨우 2개의 프로이센 대대에 의해 다시 물러나야만 했다. 오스트리아 척탄병부대는 마클리베르크 앞에서 전열을 이루고 프랑스-폴란드군에 측면공격을 가하여 패주시켰다.
바하우 공격 (Attack on Wachau)
러시아의 제2 보병군단은 프로이센 제9 여단의 지원을 받아 바하우를 공격하였다. 러시아군은 별다른 경계도 없이 진군하다가 미리 준비하고 있던 프랑스군에게 기습을 당했고, 측면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프로이센군은 기습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바하우에 진입하였다. 이윽고 바하우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프랑스 포병대는 바하우 외각에서 프로이센군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이로써 프랑스군은 바하우를 탈환할 수 있었다.
리베르트볼크비츠 전투(Battle of Liebrtwolkwitz)
리베르트볼크비츠는 중요한 거점에 있는 큰 마을이었다. 이 지역은 마크도날 원수(Marshal MacDonald)와 로리스통(Lauriston) 장군 휘하의 병력 18,000명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4군단 24,500명이 피르스의 제10여단(Pirth's 10th Brigade; 4,550명), 지에텐의 제11여단(Ziethen's 11th Brigade; 5,365명)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격전 끝에 프랑스군을 리베르트볼크비츠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안가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이번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물러나야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드루오(Drouot) 장군에게 갈로브(Gallows) 언덕에 대규모 포병대를 배치할 것을 명했다. 이 명령으로 인해 100문의 포가 아무런 방비없이 노출된 러시아 제2군단에게 포격을 퍼부었다. 이들을 지원하던 프로이센 대대는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겼다. 한편 뷔르템베르크 공작 오이겐(Eugene Duke of Württemberg)은 포격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휘하 병사들의 용감함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이 바라는 대로 구멍이 열렸다. 이때 나폴레옹은 뮈라 원수(Marshal Murat) 휘하의 프랑스, 이탈리아, 작센 기병대 10,000명을 전장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적의 진형을 공격하기 위해 뮈라 원수가 선택한 밀집종대 진형은 프랑스군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소규모 진형을 편성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성공적으로 뮈라의 사단을 괴롭히는 데 성공했고, 결국 프랑스 기병대를 프랑스 근위 용기병대(Guard Dragoons)가 지키고 있던 포병대가 배치된 곳으로 퇴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신참 근위 사단(The young Guard Division)이 연합군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전장에 투입되었고, 이것은 나폴레옹에게 돌파구를 열어 주었다. 이들은 리베르트볼크비츠와 바하우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중기병대(Cuirassiers)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 근위대와 오스트리아 척탄병들이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정예라는 세간의 평판에 부끄럽지 않게 방진을 형성하여 프랑스 기병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프랑스 포병대에 공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남쪽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지역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연합군의 전열을 흐트러뜨리지는 못하였다.
북쪽의 공격
북쪽 방면의 전투는 란게론(Langeron) 휘하의 러시아 군단이 프랑스군의 북쪽 전열 가운데에 위치한 그로스 비덴리츠흐(Groß-Wiederitzsch)와 클레인-비데리츠흐(Klein-Wiederitzsch) 마을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거점은 4개의 보병대대와 2개의 기병대대로 이루어진, 돔브로프스키(Dabrowski)가 지휘하는 폴란드 부대가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첫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폴란드 부대는 공격을 개시했다. 전황은 4번의 공격과 반격으로 요동쳤다. 결국 란게론은 휘하의 병력을 재집결시켜 총공격을 감행했고, 많은 피해를 입고 두 마을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모케른 전투(Battle of Möckern)
북쪽의 전황은 모케른 전투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전투는 4개의 국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측 모두에게 격전이었다. 모케른은 장원과 영주의 성, 벽이 쳐진 정원, 낮은 성벽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전투가 벌어짐과 동시에 요새가 되었고 벽에 설치된 총안에서 프랑스군을 사격을 가해대었다. 이 지역의 서쪽에 위치한 땅은 수풀이 우거지고 땅이 질퍽했기 때문에 포를 설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4m정도 깊이의 도랑은 엘스터(elster) 강을 따라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오귀스트 마르몽 원수(Marshal Auguste Marmont)는 보병 종대를 거점 뒤에 배치하여 거점이 함락될 경우 예비대로서 투입하여 반격을 개시하려 하였다. 란게론 휘하의 러시아 부대와 요르크(Yorck) 휘하의 프로이센 군단의 통솔을 맡은 블뤼허는 마르몽의 제6군단(VI Corps)에 공격을 개시했다.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마르몽은 기병대에 돌격 명령을 내렸으나 휘하의 기병부대 사령관은 공격을 거부했다. 후에 프로이센 경기병대가 공격을 감행하여 프랑스 방어부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하였다. 전투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연합군 사상자 9,000명, 프랑스군 사상자 7,000명의 대부분은 상대방의 포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자와는 별도로 프랑스군은 2,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10월 17일에는 두개의 작전이 수행되었다. 러시아 장군 작켄(Sacken)이 돔브로프스키 장군 휘하의 폴란드 부대가 방어를 맡은 고흘리(Gohlis) 마을을 공격하였다. 폴란드 부대는 영웅적인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 모습은 작켄 장군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사를 말하게 만들었다. 결국 수적인 면과 전투 지속 의지에서 우위에 있던 러시아군이 승리하였고, 폴란드 군은 프파펜도르프(Pfaffendorf)로 퇴각하였다. 전날에 육군 원수(field marshal)가 된 블뤼허는 란스코이(Lanskoi)장군 휘하의 제2 경기병 사단(러시아군)에게 알리히(Arrighi)장군 휘하의 제3 기병 군단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전날 6차 연합군 기병대가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준 것처럼 이번에도 프랑스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여야만 했다.
프랑스군은 겨우 14,000명의 지원병을 얻었으나, 반면에 연합군은 145,000명의 지원부대를 얻었다. 이 지원부대에는 베르나도트 원수(Marshall Bernadotte 오늘날 스웨덴의 왕세자 카를 요한)와 러시아 장군 폰 베니히센(von Bennigsen)이 지휘하는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10월 18일 연합군은 전 방면에서 총공격을 감행했다. 9시간이 넘는 사투는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돌파를 막아냈으나, 서서히 라이프치히 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의 공격은 스웨덴의 카를 요한 왕세자, 프로이센의 블뤼허 육군 원수가 북쪽을 담당했고, 남쪽은 러시아의 바클라이 드 톨리, 베니히센 장군과 오스트리아의 폰 헤센-함부르크 공(Prince von Hessen-Homburg)이 맡았다. 서쪽은 오스트리아의 규레이(Gyulay) 장군이 공격을 주도했다.
프로이센 제9 여단은 프랑스군이 포기한 바하우 마을을 접수하였다. 그 와중에 비안치(Bianchi) 장군 휘하의 헝가리 부대가 주력을 맡은 오스트리아군은 뤼스니치히(Lößnig)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었다. 오스트리아군은 훌륭한 협동 작전을 보여주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우선 프랑스 보병대를 공격하여 오스트리아 보병대가 전장에 도착하여 전열을 짤 시간을 주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은 돌리츠를 공격하였다. 신참 근위대 사단은 이들을 간신히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때 3개의 오스트리아 척탄병대대가 포병대의 지원을 받아 마을을 공격하는 데 나섰다.
그동안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장교들의 간청에 따라, 휘하의 경보병대에게 라이프치히에 대한 돌격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였다. 스웨덴 야게르(jäger) 부대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 공격에 121명을 잃었다.
전투 중에 장 레이니에(Jean Reynier)의 7군단(VII Corps)의 작센 출신 병사 5,400명이 프랑스군을 배신하고 연합군에 참여하였다. 나폴레옹은 10월 18일에서 19일로 가는 저녁 이를 보고 전투에서 졌다고 판단하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엘스터 강을 건너 퇴각하였다. 연합군은 아침 7시까지 프랑스군의 철수를 믿지 않았다. 라이프치히 시내에는 우디노 원수가 맡은 후방 부대가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고 있었다. 퇴각은 막 정오가 되었을 무렵 장군이 몽포르 대령(Colonel Montfort)에게 엘스터 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까지 순조롭게 시행되었다. 이 대령은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대해 지나치게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퇴각작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몰랐기 때문에, 아직 프랑스 부대가 다리를 건너고 우디노 원수 휘하의 후방부대가 여전히 라이프치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탄에 불을 붙였다. 이 폭발로 인해 혼란이 찾아왔고 이로 인해 수천의 프랑스군이 사망하였다. 또한 후방에 남겨진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혔다. 이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용감한 폴란드인 사령관 조제프 안토니 포니아토스키는 다리를 건너는 와중에 익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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