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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김(光金) 조선후기(朝鮮後期) 명현(名賢) 열전(列傳)
26세 김계휘(金繼輝)(양간공파/판군감사공파/의정공파) (1526∼1582). 5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아버지는 증좌찬성 호(鎬)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정랑 광원(光元)의 딸이다.
세 살, 네 살 때 문자를 알고 일곱 여덟살 때 문의(文義: 글의 뜻)를 통하고 15세 이전에 경서와 사기를 다 읽었고 한 번 보면 거의 다 기억하였다. 1548년(명종 4) 정시 및 과시에 연이어 장원하니 전시에 직접 응시하라는 왕명이 있어 이듬해 정시에 장원하고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곧 호당(湖當)에 뽑혔다. 이듬해 부정자를 거쳐 조금 있다가 예문관 검열, 홍문관 정자, 저작박사가 되었다. 1554년(명종 10) 부수찬, 지제교, 사간원 정언, 이듬해 병조좌랑, 성균관 전적,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곧 성균관 전적으로 이조좌랑에 피천되니 이 때에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김홍도와 오로지 격탁양청(激濁揚淸)함을 주장하니 권간배의 꺼리는 바가 되어 한을 머금고 화를 전가 시키니 일시의 명류들이 혹은 귀양가고 혹은 파직당하였다. 서울을 떠나 연산에 은거하였고 1563년(명종 22) 조정의 조치가 달라져서 벼슬을 돌려주고 다시 등용한다는 명이 내렸으나 마침 아버지의 상중이라 이듬해 복제를 마치고 곧 승문원 교리, 예조정랑, 성균관 직강, 이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이로부터 여러 시(寺)의 첨정을 한 번, 정(正)을 세 번 지냈고 양사의 사간과 집의며 의정부로는 검상과 사인이요 관직(官職)으로는 응교, 전한, 직제학을 지냈다. 1566년(명종 22) 중시 문과 을과 제1인으로 뽑히니 통정에 승진하여 동부승지를 배수하였다. 중시에 올린 시표가 시정에서 걸출일 뿐만 아니라 당송명문집에도 당당히 우두머리가 될 만하니 곧 학사가 당상관이 되는 예요 상감의 은총도 받았다. 그 후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 이조참의, 대사간이 되었으며 중국에 사은사로 다녀왔고 1573년(선조 7) 가선에 승진되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로 대사간을 네 번, 대사헌을 세 번 지냈고 평안, 전라관찰사, 공, 형조참판, 상호군,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 때에는 동지성균관사,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경상감사를 재직시 백성의 제소(提訴)를 공정히 처결하여 흐르는 물같고 일의 작은 수나 이름이라도 한 번 듣고 본 것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잊지아니하니 이민(吏民)이 그 신명함을 탄복하였다. 또 급미(給米) 3백석을 연산으로 보내 고운산사에 있는 정회당을 대둔산으로 옮겨 서재를 짓고 학문을 권장했다. 종계변무(宗系辨誣: 왕조계통이 명나라 서책에 잘못 기록된 점을 바로 잡는 것) 교섭차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야 하는데 학식이 고명한 인재로 황제를 감동시켜야할 당시의 인물은 김계휘와 이이뿐이었다. 임금이 계휘로 주청사를 삼으니 고경명과 최립은 보좌관으로 수행하였다. 1600년(선조 34) 광국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으로 추증되었다.
묘(墓)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고 신도비가 논산시 연산면 거정리에 있으니 지방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27세 김장생(金長生)(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1548∼1631) 84歲,
조선 중기의 문신, 유현, 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정릉동제(貞陵洞第)에서 출생, 아버지는 대사헌 계휘(繼輝)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이간공(夷簡公) 영(瑛)의 딸이다.
1557년(명종 12) 열 살의 어린 나이로 구봉 송익필 문하에서 수업할 때 행동이 무게가 있고 말이나 웃음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식자들은 장차 덕성을 갖춘 큰 인물이 될 것이라 말했다. 장성하여 1567년(명종 23)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마침내 유학의 종장(宗匠)이오, 예학(禮學)의 태두(泰斗)가 되었다.
1575년(선조 9) 아버지 황강공(黃岡公)을 따라 관서지방(평양)에 갔었으나 언제나 조행이 방정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1578년(선조 1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을 배수하였고 1581년(선조 15) 변무사(辨誣使)로 중국에 가는 아버지 황강공을 돈녕부 참봉의 관직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황강공의 별세로 복제기간 효성이 지극하였다. 1584년(선조 18) 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병으로 사임하였는데 도리어 평시서 봉사로 승진되었고 1590년(선조 26)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되고 5월에 장자 은(?)이 왜병에게 해를 입고 서제(庶弟) 연손(燕孫)이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하는 등 불행이 겹쳤다. 1596년(선조 30) 정산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연산 향사(鄕舍)로 돌아왔는데 12월에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1) 정유재란에 조정에서 명나라 원병에게 군량을 호남에서 조달하도록 임무를 부여하니, 이 일을 완수하고 겨울에 해서(海西: 黃海道)로 돌아와 문생과 함께 강송을 하던 중 12월에 단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598년(선조 32) 군자감 첨정, 호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가을에 「근사록해의서(近思錄解疑)」1권을 저술했다. 9월에 남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이듬해 정월에 양근군수, 2월에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치 않았다. 얼마 후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어 사양하는 것이 미안하므로 마침내 취임했고 6월에 안성군수가 되었고 9월에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다.
1601년(선조 35) 조정에서 주역의 구결(口訣)을 교정하는 일로 부름을 받아 종친부 전부(典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직무를 수행치 못했던 바 영의정 이항복(李恒福0의 천거로 염금리(廉謹吏)로 초선(抄選)되었다. 이듬해 봄에 정인홍이 권력을 잡자 선비들을 탄압하니,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에 내려와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도를 강의했다. 1603년(선조 37) 익산군수로 임명되고 이듬해 10월에 사임하였다. 1609년(광해 2) 익위에 임명되어으나 나가지 않고 8월에 회양(淮陽)부사를 제수받고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못하고 11월에 부임하였다. 1610년(광해 3) 10월에 회양은 북방의 요충지대이기 때문에 무인(武人)으로 임명하는 것이 적합하므로 철원부사로 체임(遞任)되었다. 1613년(광해 6) 서제 경손(慶孫)과 평손(平孫)이 계축화옥(癸丑禍獄)에 연루되어 옥사하므로 이를 계기로 관직에서 물러나 10년간을 연산에서 은거하며 경서와 고훈(古訓)을 잠심탐독하고 후진 학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고 1618년(광해 11)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을 완성하였으며, 1623년(인조 1) 3월에 인조반정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니, 상소하여 늙고 병이 있음을 들어 사양하고 반정의 원훈들에게 「군의 덕을 도와서 잘 인도하고..... 조정을 잘 보전하며.... 」라는 글을 보내고 도한 정국삼장(靖國三將)의 과오를 밟지 말도록 충고하였다. 또 경연에서 임금의 위로 말씀이 간절하므로 차문(箚文)을 올려 제왕의 학문하는 길을 아뢰니, 기꺼이 받아드리고 곧 사재감 첨정으로 체임시키니 경연의 관원들의 건의에 따라 원자(元子)를 보양하고 유생을 가르치라고 성균사업(成均司業)을 설치하였다. 10월에 거듭 상소하여 사직하였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인조가 공주로 파천할 때 어가를 맞이하고 난리가 평정된 후 임금의 수례를 호종하고 서울로 돌아와 상의원정에 임명되고 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어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퇴하고저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와 열세가지 일을 진주(陳奏)하였다.
8월에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사직하고 10월에 왕명으로 입궐하여 강의를 드렸다. 이듬해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동지중추부사를 배수하였고 1626년에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건립하였다. 이듬해 정월, 정묘호란에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되어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양호지역에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4월에 마침내 적이 물러가니 호소사의 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9월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출사치 않았고 1629년(인조 7) 윤 4월에 왕이 「마차를 타고 오라」하교 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경은 이 나라의 대로요 덕행이 뛰어나니....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노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하였으나 글을 올려 정중히 사양했다. 마침 1630년(인조 8) 4월, 83세 때 노인을 우대하는 식전이 있어 가의대부에 올랐다.
이와같이 천자가 돈후하여 자연히 도에 가깝고 뜻을 세워 대현에게 친히 배웠고 입지가 전일(專一)하여 약관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덕기(德器)가 혼연히 이루어 안면(顔面)에 나타남으로 선비들이 성덕군자(成德君子)라 일컸었다. 문하에는 우암(尤菴) 송시열,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등을 비롯한 여러 유현을 배출하여 기호(畿湖)학파를 이루었다. 저술을 일삼지 않고 글을 읽다가 얻은 것이 있으면 기록하여 경서(經書) 8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과 서소잡록략(書疏雜錄略) 천(千)편과 첨주가례집람(添註家禮輯覽) 3권이 있고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등을 저술하여 세상에 배포하였는데 지금은 이를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으로 집대성하였다. 1631년(인조 9) 5월에 병이 났으나 요양하지 않고 매일같이 문인들과 강론하다가 8월 3일 서거하니, 향년이 84세라 임금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고 세자도 강경(講經)을 폐하였다. 이때 문도(門徒)로서 복제(服制)를 갖춘분이 수백이고 장일(葬日)에 모인 사람이 수천이었다. 이해 11월에 진잠현 성북리에 안장하였고 1636년(인조 14) 조정의 공의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41년(인조 19) 묘를 연산군 고정리 우수산(連山縣 高井里 牛首山)으로 이장 하였으니, 현재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로 선조비 허씨 묘의 후편이다. 1657년(효종 9)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며, 1717년(숙종 44) 문묘(文廟)에 종향되고 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이 있다.
27세 김씨 (金氏)(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1572∼1633) 62歲,
조선 중기의 열부,
관향(貫鄕)은 순천(順天), 아버지는 증참의 수언(秀彦)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두 번째 부인이다.
1453년(단종 2)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화를 당할 때 그 아들 승규(承珪)가 아버지를 보호하려다 함께 죽었다. 이 때 여종이 겨우 세 살된 승규의 아들을 업고 도망하여 섬과 육지로 숨어 다니며 성(姓)의 본관(本貫)을 바구어 은진에 살면서 혈통을 전하게 되었다. 1588년(선조 22) 17세 때 아버지가 말하기를 "우리 선조 절재공의 충성과 절개를 다시 밝히려면 현금 온 조정의 덕망이 사계 김장생보다 높은 분이 없는데 이 분이 지금 부인이 죽었으니 네가 만일 아내가 될 수 있다면 우리집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여 시집 갈 것을 말하고 아버지가 전해오는 절재의 친필과 선대의 사적을 보이니 세계(世系)를 쌓아주며 "아들을 낳기 전에는 본색을 말하거나 사적을 보이지 말라." 하였다. 1590년(선조 14) 큰 아들을 낳은 뒤 울면서 조용히 시종 내력을 말하고 선대의 사적을 보이니 사계가 크게 경탄하고 불쌍히 여겨 장차 글을 올리려하였다. 자녀를 법도로 가르치고 평생에 선조의 원한을 풀어 드리지 못한 한이 뼈에 사무쳐 웃는 일이 없었으며 남편이 죽자 심히 애통하고 3년동안 조석상식을 몸소 올렸고 길제(吉祭)를 마친 뒤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이와 같은 효와 열행이 임금에게 상달되어 효열 포장( 奬)의 은전을 받았으며 칙명(勅命)으로 정부인에 추증되었으며 효열의 정려(旌閭)가 논산시 두마면에 세워졌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두마면 수암에 있다.
28세 김집(金集)(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문경공)(1574∼1656). 83歲,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유현, 字는 사강(士岡), 호는 신독재(愼獨齋), 서울 정릉동제(貞陵洞第)에서 출생, 아버지는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창녕조씨로 첨추 대건(大乾)의 딸이다.
6세 때 이미 글을 읽고 작문하였으며 1581년(선조 15) 천곡 송상현과 귀봉 송익필에게 수학하였고 1586년(선조 20) 모친상에 정성껏 집상하다가 신병까지 얻었다. 1591년(선조 25)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4월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부친을 모시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 3)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치 않았고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관으로 특진하여 5월에 부여 현감(扶餘縣監)으로 부임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628년(인조 6) 임피 현령 (臨陂縣令)이 되고 이듬해 7월 연로한 부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했다. 1634년(인조 12) 선공감 첨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이듬해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치 않았다. 1636년(인조 14) 5월에 사헌부 장령, 6월에 종친부 전첨, 7월에 집의(執義), 8월에 용양위 부호군, 10월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치 않았다. 이해 12월에 병자호란이 발발했고 1637년(인조 15) 적이 물러간 후 도성에 들어가 임금께 위안을 드리고 돌아왔다. 이듬해 8월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고 1639년(인조 17) 다시 집의에 제수되어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사은한 바 5월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에 경연참찬관을 겸하라 하므로 수차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사은하고 경연에 입시하였다. 이어 우부승지에 임명하니 또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6월에 호군으로 바꾸어 연산으로 돌아온 바 7월 12월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출사치 않았으며 다시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643년(인조 21)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정하고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이듬해 8월에 공조참의(工曹參議), 10월에 좌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645년(인조 23) 10월에 동궁을 보좌하라는 논지가 있자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11월에 사양하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고 이듬해 세 번째 사직의 글을 올렸다. 1647년(인조 25) 세자시강원 찬선에 제수 되었으나 글을 올리고 출사치 않았다. 이듬해 특명으로 세자시강원 찬선으로 부름을 받았고 11월에 사직을 간청하여 허락을 얻고 12월에 부친이 저술한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다시 간행했다. 1649년(인조 27) 정월,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는데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세자 효종이 즉위하자 특명으로 부름을 받아 6월에 상경하니 왕이 식량을 하사하고 가선대부 예조참판(禮曹參判)에 특별히 임명되어 네차례 사양하여 뜻을 얻었으나 바로 공조참판에 제수되니 또 사양하는 글과 함께 상례이동(喪禮異同)과 시무 7조를 올리니 왕이 탄복하여 그 소장을 옆에 두었다. 명을 받아 소학의 주(註)와 중용의 구두(句讀)를 교정했다. 7월과 9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고 사양했다. 9월에 왕이 의식을 내리고 공조참판을 제수하였고 10월에 상소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경연에 참가하여 중용을 강술하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대해 왕에게 말씀드렸다. 11월에 귀향을 간청하니 대신, 홍문관, 성균관생들까지 글을 올려 머물도록 청원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승지 익희(益熙: 조카)로 하여금 설득하여 왕명에 따르게하였다. 대사헌,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상소, 세 번 대면해서 말씀드리고 사양하였다. 12월에 왕의 간청에 못이겨 조정에 들어가 시무를 하였다. 1650년(효종 2) 정월, 왕의 간청에 따라 인물을 전형 선발하는 일을 주관하였으나 재상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고 물러나자 왕의 거듭된 부름과 대신과 대학 유생들의 소환상소에 겨우 응했고 4월에 호분위(虎賁衛) 사직(司直)에 제수되었다. 5월에 인조의 연제사(練祭祀)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면서 겸임을 사양하는 글을 올렸고 11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1651년(효종 3) 두 번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송시열과 서신으로 국상변복지제(國祥變服之制)를 논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거듭 사양했고 1653년(효종 5) 숭정대부로 승진되니 상소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1655년(효종 7) 의례경전(疑禮經傳) 11권을 해석했다.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조정의 중대의논이 있으면 왕이 낭관을 보내어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1656년(효종 8) 윤5월 13일 별세하니 왕이 부음을 듣고 「김집은 유림의 영수이고 조정에서도 중망이 있었도다」고 말씀하고 특별예우로 장사를 치루도록 했다. 장사 지내는 날 선비들이 사방에서 모여와서 눈물로 조곡하고 「이제 도학이 없어졌다.」고 한탄했다.
순수한 자질로 정도를 닦고 학문에 전일(專一)하여 아버지 문원공의 학통을 이어받아 도학의 종사(宗師)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정에 의롭게 봉사하면서도 벼슬을 사양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일세의 사표로서 성덕군자라는 호칭을 받았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며 1883년(고종 21) 아버지 문원공(文元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부자간 문묘(文廟)에 종향되었고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효종(孝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신독재전서 20권이 있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에 있다.
28세 김반(金 槃)(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1580∼1640). 6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사일(士逸), 호는 허주(虛舟), 아버지는 문원공 장생(長生)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창녕조씨로 첨추 대건(大乾)의 딸이다.
1605년(선조 39)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2등 9인으로 합격하였고 1623년(인조 2) 인조반정후 이조의 추천으로 빙고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이듬해 이괄의 난에 상감을 모시고 공주로 피난하여 공주에서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바로 성균관 전적을 제수받고 형조좌랑을 거쳐 예조로 옮겨 사관으로 기사관을 겸했다. 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부교리에 승진되었다. 1625년(인조 3) 헌납, 직장을 거쳐 교리가 되었는데 그때 대사헌이 혼조의 척신사객이므로 탄핵하다가 면직되었다. 다시 헌납네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그 뒤 교리, 이조좌랑을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다. 지제교, 응교, 사간원 집의, 종부시정, 상의원정, 의정부 사인, 세자시강원 보덕을 겸했고 홍문관 전한이 되었고 1633년(인조 11) 장악원정과 도감(都監)을 겸했다. 그 후 통정대부로 승진되어 대사간,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병조, 형조참판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했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부임했는데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모시고 화친을 반대했다. 그 후 가선대부로 승진되고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대사성, 예조참판, 부제학, 병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한성우윤, 이조참판,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이때 아우가 남의 무고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는데 궐문밖에 대죄하니 임금이 무고함을 알고 석방해 주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궁중에서 오락이 심하므로 「인군이 정무를 마친후에는 반드시 경사에 유념하여 흥망의 자취를 근본으로 치정하여야한다」고 말하였다. 평소에는 화기가 가득하나 일의 시비에 있어서는 의연히 분발하여 외세에 흔들리지 않고 바른말로 간사한 것을 물리쳤다. 정사(靖社), 영사(寧社)의 원종훈에 책록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에 있다.
29세 김익렬(金益烈)(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남원공)
(1602∼1665). 64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자장(子章), 호는 학주(鶴洲),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안동김씨로 첨추 진려(進礪)의 딸이다.
1631년(인조 9) 선공감 가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라 귀후서(歸厚署) 별제로 승진되었다가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횡성현감이 되었고 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병정을 모아 원수의 막하로 가니 원수는 적의 세력이 팽창함을 두려워하여 자위하고 있을 뿐이었다. 원수에게 "지금 군부가 계시는데 어찌하여 앉아서 보고만 있고 나가지 않느냐."고 하였으나 듣지않자 물러나와 군사를 모아 남한산성으로 가던중 화친이 이뤄졌다. 항상 이 일을 생각하면 주먹을 쥐고 탄식하였다. 1644년(인조 22) 이인찰방이 되어 선정을 베푸니 백성이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1646년(인조 24) 진잠현감, 1650년(효종 2) 사복시 주부, 활인서 주부를 거쳐 한성부 판관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진산군수로 나갔다가 5년만에 돌아와 한성서윤에 제수되었고 곧 영천(榮川)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효종 9) 임천군수, 1659년(현종 1) 군자감 주부, 사복시 판관을 역임했다. 이듬해 옥천군수에 임명되었고 1664년(현종 6) 철원부사로 승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곧 선혜청랑(宣惠廳郞)에 제수되고 이듬해 남원부사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향리로 돌아왔다.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대전시 서구 정민동에 있다.
29세 김익희(金益熙)(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창주공)
(1610∼1656). 4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이고,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澍)의 딸이다.
신독재 김집, 기암 정홍명, 계곡 장유의 문인이며 1627년(인조 5)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50인으로 합격하였고 1633년(인조 11) 증광시 문과에 병과(丙科) 2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었고, 곧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전적에 승진, 세자시강원 사서로 옮겼고 옥당에 선발, 수찬에 임명되어 정사의 대본과 천리, 인욕, 공사, 의(義)와 리(利)등을 나누어 상소하였으며 부교리 겸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임금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산성을 고수하며 척화를 주장했다. 1639년(인조 17) 어머니 상(喪)을 마치고 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다가 영광군수로 나갔다. 이듬해 아버지 상을 당하여 벼슬을 버렸고 1644년(인조 22)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합하여 부른 말)에 들어가 보덕을 겸했는데 이때 대소관원이 무사안일하고 법도가 해이하여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1646년(인조 24) 동부승지, 승문원 부제조를 거쳐 1648년(인조 26) 태안군수로 옮겨 선정을 베푸니 백성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인조가 승하하자 효종의 부름을 받아 우부승지가 되어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왔다. 1651년(효종 3) 강원감사가 되어 단종의 묘를 수축하고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653년(효종 5)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형조참의, 대사성을 거쳐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곧 성균관 대사성 겸 동지경연사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옮겼다. 1655년(효종 7) 대사헌, 이듬해에 양관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곧 사양하니 형조판서로 임명하자 또 사직소를 올렸고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4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과 도의로 사귀었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며 문집이 있다.
配는 정경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묘(墓)는 대전시 유성구 가정동에 있다. (대전시 도지정문화재 제5호)
29세 김익겸(金益兼)(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
(1615∼1637). 23歲, 조선 중기의 충신, 字는 여남(汝南),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澍)의 딸이다. 1635년(인조 13) 증광생원시에 장원하고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1636년(인조 14) 건주의 오랑캐가 참람하게 황제라 일컬으니 우리 사신 이곽(李廓) 등이 겁내어 그 궁안에 들어가 여러 사람들과 같이 축하하였다. 이때 상소하기를 "오랑캐가 오만무도하니 천지의 대변이요 이곽 등이 사신의 임무를 버리고 위조(僞朝)를 축하하여 군명을 욕되게 했으니 그 부도한 사람을 죽여 나라안에 조리돌리고 또 오랑캐의 사신이 거만하여 우리로 하여금 부모의 나라를 배반하고 흉한 무리와 화친하라 하니 이 말이 어찌 마땅하다 하리오, 청컨대 몽고 사신도 함께 죽여 함에 담아 명나라에 알리고 대의를 들어 삼군을 격려하면 벙어리와 앉은뱅이라도 백배나 기운이 날것이니 어찌 힘이 적은 것을 근심하랴." 하였다. 그러나 이 해 겨울에 오랑캐가 쳐들어와 어머니 서부인을 모시고 강화도로 갔다. 이듬해 정월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 침범하자 동지들과 함께 군관을 도와 사수할 것을 약속하고 활을 잡고 성에 올라 말하되 한 사람씩이야 어찌 대적하지 못하겠느냐 하였다.
22일에 청병(淸兵)에게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자 강화(江華)로 가서 성을 사수(死等) 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선원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남성루문에 올라가 분신(焚身) 자결하였다. 뒤에 보조공신 영의정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이며,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 및 논산의 충곡사(忠谷祠)에 배향되었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으며 충신의 정려(旌閭)를 받았다.
配는 贈정경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이다.
묘(墓)는 대전시 서구 정민동에 있다.
29세 김익훈(金益勳)(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헌공)
(1619∼1689). 7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무숙(懋叔),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澍)의 딸이다.
1648년(인조 26) 음직으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고 사옹원 직장을 거쳐 전생서 주부로 승진하였다가 시복시로 옮겼다. 첨정에 승진되어 내승(內乘)을 겸했고 장성부사로 취임,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을 세웠다. 공조정랑, 한성서윤, 군기시첨정, 사도시정, 장악원정, 돈녕부도정을 거쳐 외직으로 남원부사, 수원방어사, 충청병사를 지냈다. 1678년(숙종 5) 광주부윤으로 임명되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았다. 어영대장에 임명되었다가 전라병사로 임명되었으나 또 반대파의 반대로 1680년(숙종 7) 다시 광주부윤에 임명되었다. 곧 가선에 승진되어 한성부 우윤에 부총관을 겸했고 경신대출척의 공으로 부사정훈에 추록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한성부 좌윤,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익년에 경기총융사를 겸했다가 어영대장으로 옮겼다. 1687년(숙종 14) 부총관에 제수되고 가을에 충청병사에 제수되었다.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세력을 잡자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헌공(忠獻公)이다.
配는 정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있다.
29세 김익경(金益炅)(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도헌공)
(1629∼1675). 4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계명(季明),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澍)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 진사시 동방진사과에 3등 66인으로 합격하였고 1662년(현종 4) 중광시 문과에 갑과 3인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집의(執義)가 되고, 1564년 형조 참의(刑曹參譏) 동부승지등을 거쳐 1666년 호조 참의(戶曹參譏) , 다음해에 대사간 원양도 관찰사(原襄道觀察使)를 지냈으며 1672 (현종 14) 대사헌을 지냈다.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1674년(현종 16) 예조 참판(禮曹參判) 때 죽은 인선왕후(仁宜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서인(西人)으로서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 : 만1년)이 채택되자 양성(陽城)에 유배되었다가 바로 사면되어, 이듬해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어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配는 정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건업리에 있다.
30세 김만균(金萬均)(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창주공파)
(1631∼1675). 45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정평(正平), 호는 이호(梨湖), 아버지는 문정공(文貞公) 익희(益熙)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한산이씨로 대사간 덕수(德洙)의 딸이다.
1652년(효종 4) 증광생원시 동방진사과에 2등 6인으로 합격하였고 1654년(효종 6) 춘당대방 문과에 병과 4인으로 급제하여 설서, 검열, 교리(校理), 응교, 보덕, 사인을 역임하고 1669년(현종 11)에 문성공 이율곡(李栗谷)과 문간공 성우계(成牛溪)을 문묘에 종향할 것을 소청하였으며 승정원 좌부승지에 오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配는 정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묘(墓)는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있다.
30세 김만증(金萬增)(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창주공파)
(1635∼1720). 86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경능(景能), 호는 돈촌(遯村), 아버지는 문정공(文貞公) 익희(益熙)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한산이씨로 대사간 덕수(德洙)의 딸이다.
1663년(현종 5) 진사시 동방진사과에 3등 34인으로 합격하였고 교관을 배수하고 세자익위사의 벼슬과 고을의 수령을 거쳐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며 하사 제문(祭文)과 영정(影幀), 돈촌유고(遯村遺稿)가 있다.
配는 정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이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모촌리에 있다.
30세 김만기(金萬基)(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33∼1687). 55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영숙(永叔), 호는 서석(瑞石), 아버지는 충정공(忠正公) 익겸(益兼)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해평윤씨로 참판 지(지)의 딸이다.
숙종(肅宗)의 국구(國舅: 즉 숙종대왕비 인경왕후의 아버지)이며, 숙부 익희(益熙)에게서 수학(受學)하였고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1652년(효종 4) 생진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장예원, 승문원(承文院) 주서, 설서를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60년(현종 2) 교리, 이듬해 병조좌랑이 되었고 곧 정랑으로 승진되고 1662년(현종4) 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응교, 사복시정, 성균관 사성, 의정부 사인, 동부승지를 거쳐 1666년(현종8)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편모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대사간이 되고 곧 좌승지로 옮겼다. 이듬해 예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그 후 광주부윤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71년(현종 13) 예조참판에 승진, 승문원 제조, 도총부부총관, 관상감 제조를 겸했다가 병조참판으로 옮겼다. 1671년(현종12) 딸이 세자빈(世子嬪)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곧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양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했다. 이듬해 병조판서에 지춘추관사를 겸했고 1674년(현종 16)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되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돈령부사에 승진,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 및 총융사(摠戎使)를 겸관(兼管)함으로써 병권을 장악하여 남인(南人)인 윤휴(尹鑛) 허적(許積) 등의 질시를 받았고,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대제학이 되었다. 1680년(숙종 7) 경신대출척(廉申大黜涉)때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 공을 세워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1686년(숙종 13) 풍정도감(豊呈都監) 도제조를 지냈다.
효종(孝宗)이 승하한 뒤로 국세가 쇠약해 지고 국방력이 차츰 무너지므로 벼슬을 버리고 정양할 뜻이 있었으나 갑자기 국구가 되어 거취가 양난할 뿐 아니라 위기를 당하여 형세가 급박하고 사화가 잇따르니 충성과 지혜를 다하여 종사를 편안케 하고 훈업을 이룬 뒤 벼슬을 헌신같이 버리고 일 없는 듯이 자처하려 했으나 국가에서는 주석같이 의지하고 선비들은 산악같이 우러렀다.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헐뜯었으나 아무리 살펴도 털끝만큼도 흠 잡을 곳이 없으므로 결국은 따랐다. 경서 사기외에도 제가서에도 달통하였으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다. 시문(詩文) 16권과 문집이 있으며, 광산김씨의 족보를 처음으로 편간하니 서석보(瑞石譜)라 이른다. 1719년(숙종 46) 현종(顯宗) 묘정에 배향되었다.
配는 서원부부인(西原府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에 있다. (도지정문화재 제131호)
문충공(文忠公) 만기(萬基) 신도비(神道碑) (도지정문화재 제131호)
30세 김만중(金萬重)(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37∼1692). 56歲,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효자, 字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아버지는 충정공(忠正公) 익겸(益兼)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해평윤씨로 참판 지(지)의 딸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며 1652년(효종 4)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65년9현종 7) 정시 문과에 갑과 1인으로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에 임명되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 사임하고 곧 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다. 1667년(현종 9)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이 되었고 병조좌랑으로 전보되고 교리, 헌납을 거쳐 함경도 병마평사로 임명되었으나 노모곁을 떠날 수 없다고 사양하니 교리에 제수되었다. 1670년(현종 12) 이조정랑에 지제교를 겸했고 이듬해 암행어사로 경기도 일원을 순찰하였다. 집권파의 허적을 논박하다가 도리어 임금의 미움을 받아 국문을 받고 금성으로 귀양갔다. 1674년(현종 16) 석방되어 교리 겸 사서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헌납, 이조정랑을 제수받았으나 부임치않았다. 곧 응교로 승진, 사간으로 옮겼다가 호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나가지않았다. 병조참의가 되고 그 후 예조참의, 대사간, 대사성으로 승문원 부제조를 겸했다. 홍문관 제학, 동지경연사, 대사헌을 거쳐 교서관 제조와 예문관제학을 겸했다. 1681년(숙종 8) 예조, 병조참판을 거쳐 대사성, 공조참판, 도승지, 호조참판이 되었다. 공조판서, 양관대제학, 좌, 우참찬에 도총관을 겸했고 1685년(숙종 12) 지중추, 지돈녕, 예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숙종 13) 장희빈에게 은총을 줌이 잘못이라고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선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689년(숙종 16) 다시 남해에 위리안치되었다. 이곳에서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 하기 위한 글을 지으니 그 유명한 소설 구운몽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고 어머니에게 극진히 효도하여 밤이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옛 사기와 잡기를 모아 읽어 드렸고 남해에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신위를 차려놓고 조석으로 음식을 올리며 통곡하니 섬 사람들이 따라서 슬퍼했다. 담제를 마치고 애통한 나머지 병들어 죽었다. 1694년(숙종 21) 복관되어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으며 숙종(肅宗) 묘정에 배향되었고 효자의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다. 저서로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西浦漫筆), 영정(影幀)이 있다.
配는 정경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니 父는 판서 은상(殷相)이요, 曾祖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이다.
묘(墓)는 경기도 장단군 서도면 대덕산 하고기에 있다.
30세 김만채(金萬埰)(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헌공파)
(1644∼1715). 72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자봉(子封), 아버지는 충헌공(忠獻公) 익훈(益勳)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김씨로 민숙공(愍肅公) 언(언)의 딸이다.
1666년(현종 8) 생원시에 2등 25인으로 합격하였고 1680년(숙종 7) 사복시 주부로 별시 문과에 병과 16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정언, 지평을 지내고 참의, 대사간, 관찰사, 개성부 유수(留守)를 거쳐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配는 정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있다.
30세 김만길(金萬吉)(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정자공파)
(1645∼1697). 5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자적(子迪), 아버지는 증참판 익후(益煦)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청송심씨로 청성군(靑城君) 정화(廷和)의 딸이다.
1669년(현종 11)에 생진양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9) 사복시 주부로 춘당대방 문과에 올라 2인으로 급제하여 부수찬 지평, 정언, 교리,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의 등 여러관직을 거쳐 강원, 전라관찰사로 재직시 치적이 나타났고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에 이르렀다.
묘(墓)는 화성군 동탄면 장지리에 있다.
31세 김덕령(金德齡)(낭장공파/참봉공파/습독공파)
(1568∼1596). 29歲,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며 충신, 字는 경수(景樹), 아버지는 습독 붕변(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로 직장 계종(繼宗)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從軍)의 명령을 받고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하루아침에 6천여명의 의병이 모집되어 사기가 충전하였다. 그러자 광해분조(光海分朝)에서 익호장군(翼虎將軍)을, 선조임금은 충용군(忠勇軍)이란 군호(軍號)를 내리고 형조좌랑에 제수되었다. 1594년(선조 28) 의병 6천여명을 거느리고 호남, 영남, 거제도, 등지에서 신출귀몰하는 계략으로 왜적을 무찔렀고 전략노선도 발표했는데 영, 호남지방과 동해와 대마도를 거쳐 일본 대판으로 쳐 들어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놀란 왜장 가등청정은 몰래 화가를 시켜 장군의 초상을 그려다 보고는 「참으로 장군이다」하고 경탄하면서 소진(小陣)을 철수하고 대진(大陣)으로 구축해 놓고 감히 도전해오지 못하였다. 이때 승병(僧兵) 팔도 도대장인 사명대사 유정(惟政)에게 격려편지를 보냈고 또 왜적 2백여명이 고성지방에 칩입하여 남녀 50여명을 생포해 가는 것을 장군이 복병을 배치하여 모두 무사히 탈환하였다. 이에 선조는 장군에게 호피립(狐皮笠), 이엄(耳掩: 관복을 입을 때 사모밑에 쓰던 모피로 만든 방한구)등을 하사하고 1594년(선조 28)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거제도에서 수륙 연합작전을 전개하여 왜적들을 무질렀고 이듬해에는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의령, 정암에서 합동 기습작전으로 왜적을 크게 섬멸하였다.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 격퇴하여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1596년(선조30) 도체찰사(都體察使)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한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이때부터 왕의 신임을 질투하는 대신들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이던 신경행(幸景行)의 무고로 피체, 국문을 받았으나 혐의 사실을 부인, 대신들 간에도 찬반 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6차례의 엄형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 춘산화연곡(春山火燃曲)을 남기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원통하게 옥사(獄死)했다. 1661년(현종 3)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 참의(兵曹參譏)에 추증(追贈)되었으며, 1678년(숙종 5) 벽진서원(碧津書院)에 합향(合享)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병조판서에 가증(加贈)되고 벽진서원에 의렬사(義烈祠)로 사액(賜額)하였다. 1712년(숙종 39)에는 장군의 봉사손 수신(守信)을 음직으로 녹용하여 벼슬이 별검에 이르렀다. 1788년(정조 13) 충장공(忠壯公)의 시호가 내리고 이듬해 좌찬성(左贄成)에 추가 증직되었으며 1974년 정부에서는 장군의 묘하에 충장사(忠壯祠)를 건립하여 성역화 하였다.
묘(墓)는 광주시 충효동 이치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亂中日記)
『춘산화연곡(春山火燃曲)』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31세 이씨(李氏)(낭장공파/참봉공파/습독공파)
(1568∼1597). 30歲, 조선 중기의 열부, 관향은 흥양(興陽), 아버지는 첨정 대록(大祿)이며, 남편은 충장공(忠壯公) 덕령(德齡)이다.
부군의 비보를 듣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하종하려 하였으나 친정 어머니의 위안과 설득으로 마음을 돌렸다. 정유재란에 담양 추월산에서 피난하다가 왜적의 위협을 받자 굴복하지 않고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절벽 아래로 투신 순절하니 1840년(헌종 7) 조철영이 담양부사로 부임하여 그 석벽(石壁)에 "金忠壯公德齡 夫人 興陽李氏 罵倭賊殉節處" 라고 각자(刻字)하였다.
묘(墓)는 충장공 묘와 합폄.
31세 김진구(金鎭龜)(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51∼1704). 54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수보(守甫), 호는 만구와(晩求窩), 아버지는 문충공(文忠公) 만기(萬基)이며, 어머니는 서원부부인(西原府夫人) 청주한씨로 군수 유랑(有良)의 딸이다.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
1673년(현종 15) 사마양시에 합격하였고 1680년(숙종 7)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16인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어 「현종실록(顯宗實錄)」을 수찬(修撰)하고 정언(正言), 헌납(獻納), 교리(校理), 응교(應敎), 집의(執義) 등을 거쳐 좌승지(左承旨), 광주 부윤, 수원 부윤(水原府尹), 경상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으로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고 서인(西人)이 실각하자, 앞서 김석주(金錫胄)와 함께 남인을 가혹한 수법으로 숙청했다는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호조 참판(戶嘗參判)으로 기용되었다. 도승지(都承旨), 전라도 관찰사,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등을 역임하고 형조, 공조, 호조, 병조, 예조의 판서를 지낸 뒤 지돈녕부사, 좌우참찬(佐右參贊) 겸 어영대장, 도총관, 수어사, 세자빈객, 판의금에 승진하였다. 숭정대부에 승진되고 광은군(光恩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경헌공(景獻公)이요, 유가가 전하여 가장되어있다.
配는 정경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군포시 반월면 대야미리에 있다.
31세 김진규(金鎭圭)(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58∼1716). 59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아버지는 문충공(文忠公) 만기(萬基)이며, 어머니는 서원부부인(西原府夫人) 청주한씨로 군수 유랑(有良)의 딸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며 1682년(숙종 9) 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686년(숙종 13) 정시 문과에 갑과 1인으로 장원급제하여 전적에 제수되고 예조좌랑(禮曺佐郎)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으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자 다시 지평(持平)으로 기용되어 수찬, 헌납, 부교리, 이조좌랑, 정랑, 사서, 교리 겸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소론(少論) 남구만(南九萬)으로부터 척신(戚臣)으로서 궁중 출입이 잦고 월권 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고, 그 후 대신들의 천거로 사인, 보덕, 사간, 필선, 부응교를 지냈고 1696년(숙종 23) 회양부사가 되었다. 1699년(숙종 26) 통정에 승진되어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가 되어 스승 송시열을 배반한 윤증을 공박하여 소론(少論)과 대립하였다. 1700년(숙종 27) 예조참의, 좌부승지, 공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간, 대사성, 좌승지, 호조참의을 거쳐 가선에 승진 호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이조참판(吏曹參判), 공조참판을 거쳐 1706년(숙종 33) 병조참판에 이르렀다가 소론의 집권으로 덕산에 유배되었다, 1710년(숙종 37) 양관대제학, 1712년(숙종 39) 예조판서, 이듬해 정헌에 승진, 좌참찬(左參贇)이 되었다. 문장에 뛰어났고, 전서(篆書), 예서(隸書) 및 산수화(山水畵), 인물화(入物畵)에도 능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청공(文淸公)이며, 저서로 축천집이 있으며 아버지 서석보를 이어 광산김씨의 족보를 편찬했으니 죽천보(竹泉譜)이다. 영정(影幀)이 있으며, 거제(巨濟)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었다.
配는 정경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 繼配 정경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묘(墓)는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에 있다.
31세 김진옥(金鎭玉)(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창주공파)
(1659∼1736). 78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백온(伯溫) , 호는 유하(柳下) 온재( 齋), 아버지는 증판서 만균(萬均)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연안이씨로 문숙공(文肅公) 일상(一相)의 딸이다.
1700년(숙종 27)에 감역이었고 그 후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수원부사, 경주부윤을 지냈고 호, 형, 병조참의, 동부승지, 통정대부 강원도관찰사에 승진되었다. 숙종조에 대보단(大報壇)을 설립하자는 조정의 공의가 통일되지 않으니 공이 비원안에 축단하고 소지제천(掃地祭天)하는 것이 도리에 합당함을 주장하여 조정이 이에 따랐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유고가 있다.
配는 정경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묘(墓)는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있다.
31세 김진상(金鎭商)(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헌공파)
(1684∼1755). 72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여익(汝翼), 태백(太白), 호는 퇴어자(退漁子), 아버지는 증판서 만채(萬埰)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현손, 어머니는 증정부인 전의이씨로 집의 항(抗)의 딸이다.
1699년(숙종 26) 진사시에 3등 45인으로 합격하였고 1712년(숙종 39) 정시 문과에 병과(丙科) 15인으로 급제하여, 1718년(숙종 45) 주서, 수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다. 1722년(경종 3) 신임사화(辛壬士禑)로 무산(茂山)에 유배 되었다가 1724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이조 정랑(吏曹正郎)에 등용되었고, 이어 수찬, 필선, 부교리,사간, 이조참의,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다. 1741년(영조 18) 대사헌에 승진되고, 1753년(영조 30)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학덕으로 사류들의 추앙을 받았고 글씨에도 능하여 이름을 떨쳐 많은 비문(碑文)을 썼다. 타인의 소점이 된 평장동에 처음으로 왕자공의 유허비를 세워 유허를 보존토록 하였다. 저서로 퇴어자유고가 있으며 1864년(고종 2)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다.
配는 정부인 한양조씨(漢陽趙氏), 정부인 경주박씨(慶州朴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1세 김진동(金鎭東)(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도헌공파)
(1683∼1765). 8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진경(震卿), 아버지는 증판서 만재(萬哉)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청주한씨로 증승지 태유(泰愈)의 딸이다.
1721년(경종 2) 참봉이 되고 현감 돈녕부 도정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차되고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광산김씨 정묘대보(丁卯大譜: 1747년)를 발간 하였다.
配는 정부인 은진송씨(恩津宋氏)이다.
묘(墓)는 강원도 춘천시 칠전동 모란봉 하에 있다.
32세 김춘택(金春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70∼1717). 48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훈신과 적장자를 우대하는 전례에 따라 대호군에 제수되었고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으로 서인(西入)이 제거되고,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그 집안이 크게 화를 입어 그도 여러 번 유배 또는 투옥되었다.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南人)이 실각하자 사면되어 재등장 하였으며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도운 공이 있었다. 서인(西人)이 다시 노론(老論) 소론(少論)으로 갈라지자 노론에 속하여 1697년 소론의 탄핵으로 한때 유배, 1701년 무고의 옥사(獄事)로 부안(扶安)에 다시 유배, 1706년 세자(世子: 景宗)를 모해(謀害)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죄가 가중되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으나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1886년(고종 24) 이조판서, 성균관 좨주, 광령군(光寧君)에 추증되었고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으며 시호는 충문공(忠文公)이요, 시재(詩才)가 뛰어나 명망이 높았으며, 종조부(從祖父) 김만중이 지은 소설 「구운몽(九雲夢)」과「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했고, 저서로는 시문 10 책과 만필(漫筆) 1책을 남겼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작품으로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이 전한다. 《별사미인곡》은 작자가 제주도로 귀양가 있을 때 지은 가사인데, 그 시대에 한문 숙어가 거의 없는 순한글체로 언어 구사의 평이성을 살린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글씨로는 《호판김진귀표(戶判金鎭龜表)》가 있다.
配는 정부인 완산리씨(完山李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대야미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史大事典)
32세 김보택(金普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72∼1717). 46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시(仲施), 호는 척재( 齋),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1695년(숙종 22)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 11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감사, 검열(檢閱) 정언(正言) 등을 역임했다. 1703년(숙종 30) 노론(老論)의 선봉으로서 소론(少論)인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이 윤강을 무너뜨리고 오역( 逆)을 두둔한 죄를 상소하여 논박하였고 1717년(숙종 44)에 또 윤선거,, 윤증 등의 어진이를 모욕하고 스승을 배반한 죄를 논척하여 간악한 무리들의 시기를 받게되었다. 1722년(경종 3)에 화를 입어 벼슬을 추탈당하였다가 1725년(영조 2)에 복관되었고 1887년(고종 5)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익헌공(翼獻公)이며 문장, 글씨, 그림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고가 있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대양미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2세 김운택(金雲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73∼1722). 50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행(仲行), 호는 백운헌(白雲軒),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1699년(숙종 26) 진사시에 3등 15인으로 합격하였고 1704년(숙종 31) 춘당대방 문과에 병과(丙科) 5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설서, 병조좌랑, 전라도 도사, 지평을 거쳐 홍문관의 선발로 이조(吏曹)에 녹선되었다. 그 후 사복시정에 승진 되었다가 응교, 동부승지, 형, 형조참의,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副提學)등을 역임했다. 글씨를 잘 써 존호를 색인 인장 및 능비의 전자를 쓰고 가선에 승진되었다. 호조참판(戶曺參判) 등을 거쳐 형조참판, 좌승지에 임명되고 또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홍문관의 금오(金吾), 춘추(春秋), 비국(備局)을 겸했다. 그러나 1721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영변(寧邊)에 유배된 뒤 다시 반역을 도모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무고로 옥중에서 장살(杖殺)되었다. 1725년(영조 2)에 신원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1852년(철종 4)에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고 유고가 있다.
配는 정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묘(墓)는 충남 서산군 성연면 아남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2세 김민택(金民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78∼1722). 45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치중(致仲), 호는 죽헌(竹軒),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1702년(숙종 29)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31인으로 합격하였고 1719년(숙종 46) 별시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동년 교리, 지평(持平), 정언(正言) 수찬(修撰)등을 역임하였고, 1722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옥중(獄中)에서 혹형을 당하여 졸하였다. 김제겸(金濟謙) 조성복(趙聖復)과 함께 신임(辛壬)의 삼학사라 일컬었다. 1725년(영조 2)에 신원되어 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죽헌집(竹軒集)이 있다.
묘(墓)는 충북 청원군 진현면 중척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2세 김조택(金祖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80∼1730). 5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극념(克念), 호는 평재(平齋),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1711년(숙종 38) 생원시에 3등 21인으로 합격하여 음사로 현감이 되었고 1721년(경종 2) 정시 문과에 병과 5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1722년(경종 3)에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2) 사면되어 귀환하였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마명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2세 김복택(金福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82∼1740). 59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후오(厚吾), 호는 묵헌(默軒),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1722년(경종 3)에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노론 사대신의 일파로 지목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2)에 사면되어 영휘전(永徽殿)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나가기를 주저하다가 은권이 융숭하여 부득이 부임하였으나 1727년(영조 4) 사퇴하고 귀향하였으며 그 후 익릉참봉과 사옹원 봉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1740년(영조 17) 신임여흉(辛壬餘兇)인 당시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등의 무고로 또 다시 투옥되어 옥중에서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1746년(영조 23)에 신원(伸寃)되어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配는 숙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대야미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2세 김양택(金陽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712∼1776). 65歲,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서(士舒) , 호는 건암(健菴)이며, 아버지는 문청공(文淸公) 판서 진규(鎭圭)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일정씨로 소하(昭河)의 딸이다.
1741년(영조 18)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743년(영조 20) 알성 문과에 병과(丙科) 3인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 문학을 거쳐 강동현감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홍문관 부수찬이 되자 좌의정 정석오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노여움을 받았다. 곧 산청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다시 수찬이 되고 시강원 필선이 되었다. 1751년(영조 28) 통정에 승진되어 좌승지가 되었다가 부사로 나갔다. 그 후 대사성(大司成), 이조참의, 양관대제학과 병조, 이조판서를 거쳐 1776년(영조 53) 의정부 영의정에 오르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며 1784년(정조 9) 벼슬을 추탈당하였다가 1864년(고종 2) 복관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配는 정경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건건리에 있다.
35세 김재일(金在一)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 (1826∼1898). 73歲,
조선 후기의 학자, 초명은 재락(在樂), 字는 도심(道心), 호는 일부(一夫), 만년에 항(恒)으로 개명, 세칭 일부선생이라 한다. 아버지는 인로(麟魯)이며, 어머니는 대구서씨로 유추(有秋)의 딸이다.
천자가 영민하여 어려서부터 호학하며 성리학에 잠심하였고 심청신명(心淸神明)하여 역리에 정통하였다. 1861년(철종 13) 부터는 동학의 최제우와 남학의 김광하 등과 연담 이운규에게서 수학하여 종래 성리학의 차원을 넘어서 유학의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여 서경과 역경을 중심으로 연구 정진하였다. 저술활동으로는 1879년(고종 17)에 복희 문광래와 공자 십익의 도학전통을 계승하여 정역괘를 그리고 정역의 서문인 대역서를 썼다. 1884년(고종 22)에는 정역 상편의 십오 일언을 저술하고 이듬해에 정역 하편의 십일 일언을 저술하여 정역을 완성하였다. 그 후 논산군 부적면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성균관(당시 경학원)에서 정역의 대가인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찬양문을 씀과 아울러 비각을 세우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은 찬양문만 남아있고 묘소에는 후학들에 의해 묘갈비와 성덕비가 세워졌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침동에 있다.
36세 김상현(金尙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
(1811∼1890). 80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위사(渭師), 호는 경대 (經臺),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9대손, 아버지는 증판서 재곤(在崑)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기계유씨로 경주(擎柱)의 딸이다.
1827년(순조 28) 증광 생원시에 3등 2인으로 합격하여 인릉참봉, 사재감 봉사, 군자감 봉사, 직장, 주부, 청양현감, 증산현감을 지냈는데 가는곳마다 유도를 숭상하고 학문을 진흥시켰다. 영평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859년(철종 11) 별시 문과에 갑과(甲科) 3인으로 장원급제하여, 통정에 승진, 공조참의, 동부승지, 좌부승지, 병조참의, 대사간, 안동부사를 거쳐 1864년(고종 2) 좌부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1866년(고종 4) 가선에 승진, 한성좌윤, 형조참판, 도총부부총관, 동지경연, 의금부, 돈녕부, 춘추관, 성균관사, 개사성,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도승지, 제용감 제조를 역임했다. 그 후 경기, 평안감사, 양관대제학, 도승지, 제용감 제조를 역임했다. 그 후 보국 봉조하에 들어가고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묘(墓)는 서이면 일동에 있다.
37세 김영수(金永壽)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 (1829∼1899). 71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복여(福如), 호는 하정(荷亭), 아버지는 증우의정 우현(宇鉉)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남양홍씨로 목사 집규(集圭)의 딸이다.
1858년(철종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사로 군수를 지냈고 1870년(고종 8)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 2인으로 급제하여, 규장각의 요직을 거쳐 승지에 승진되었고 임오군란과 신미양요에 호종한 공이 있으며 양관대제학, 시강원(侍講院) 이사를 역임하고 보국에 승자(陞資)되었으며, 평안도, 경상도 관찰사, 1884년 전환국 관리(典還局管理), 협판내무부사, 1886년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어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고 유고가 있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지음리 사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