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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51. [역경의 열매] 이철휘 (1-25) 37년 명예로운 軍 전역사는 “감사, 행복, 희망”
2011년 4월 15일 봄이었다. 내가 전역하는 날 아침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시인 엘리엇은 노래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은 자라고/ 추억과 욕망이 뒤엉키고/ 잠든 뿌리는 봄비로 깨어난다.” 그 혹한의 겨울을 견디고 끝끝내 푸른 생명이 움트고야 마는 자연의 강인함을 노래한 것이리라.
37년 군생활을 마감하는 순간, 어찌 회한과 아쉬움이 없겠는가? 늘 했던 것처럼 출근길에 교회에 들어가 기도를 했다. 지난 군 생활이 한 편의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사령관님, 후배들의 진출을 위하여 전역해 주시겠습니까?” 나의 전역이 결정되기 며칠 전 육군본부 관계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만일 사령관님께서 용단을 내려 주지 않으면 후배들의 진출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겠다. 그 대신 두 가지 희망 사항이 있는데 첫째는 비육사 출신, 둘째는 기독교 신자인 대장이 맥을 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답변했다. 이제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무언가 새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사령관으로서 6개월여를 더 재임할 수도 있는데 18개월 만에 전역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혹시 어떤 부정에 연관되어 불명예 퇴진을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뒷모습이 부끄럽지 않는 명예로운 퇴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했다. 그래서 나는 전역사를 준비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모두 포함하기로 하고, 모든 연설에 제목을 붙인 맥아더 장군처럼 나도 우리 군 최초로 제목이 있는 전역사를 한 번 시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감사, 행복, 희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전역사를 쓰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펜을 놓았다. 4월의 봄 밤이 향기롭다. 나의 마음을 아는 듯 달빛도 유난히 밝았다.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주님, 지난 37년의 군 생활을 뒤돌아보니 모든 것이 당신의 은혜였습니다. 당신은 길가에 버려진 돌멩이와 같은 저의 인생을 반짝이는 별로 빛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만 생각하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앞으로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도구로 써 주소서.” 다시 회상에 젖었다. 2년 전 가을 무렵이었다.
“군단장님, 지금 인터넷에 진급과 동시에 2작전사령관으로 발령되었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직할대 간부들에게 열심히 교육을 하고 있는 나에게 전속부관이 메모를 전달했다. 나는 메모지를 한눈에 읽어보고 “며칠 전에도 군 인사에 대하여 루머가 있었는데 또 누가 헛소리하냐?”고 코웃음 쳤다. 나는 오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누구 한 사람 대장 진급에 대하여 나에게 귀띔해 준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강의시간 30여 분을 다 채우고 강당을 빠져나왔다. 참모들이 도열하여 박수를 쳤다. 방금 국방부에서 공식적으로 진급 발표를 했다는 것이다. 나에게 대장이라는 영광은 이렇게 다가왔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아들 결혼식이 내일모레인데….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철휘 (1) 37년 명예로운 軍 전역사는 "감사, 행복,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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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명지대 전자공학과. 동국대 행정대학원(석사). 용인대 명예 행정학 박사. 명지대 경영대학원(박사과정). ROTC 13기 임관. 3군사령부 인사처장, 52보병사단장, 3군사령부 참모장, 8군단장, 2작전사령관. 육군 대장 예편. 한국기독군인연합회(KMCF) 26대 회장 역임. 현 명지대 초빙교수, 용인대 객원교수. 리더십연구소 ‘긍정의 힘’ 대표.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 장로.
***[역경의 열매] 이철휘 (2) 포천 시골 소년에게 별 넷을 선물한 하나님
나는 군단장을 동해안에서 했다. 휴전선과 해안선을 동시에 경계해야 하는 임무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형이 험할수록 경치는 아름답기 때문에 늘 관광객이 넘쳐났다.
많은 교회들도 이곳을 방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집회를 열곤 했다. 특히 2009년도 봄과 여름에는 은혜가 넘치는 일이 많았다. 감사한 것은 이곳을 방문하시는 별 같이 귀한 목사님들이 우리 부대를 방문하거나 집회 장소에서 나를 만나 기도를 해 주시는 것이었다.
군선교연합회 곽선희 목사님이 연합회 임원들과 부대 근처에서 워크숍을 열고 있어 집회 장소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극동방송 영동지사 개국 10주년에 오신 김장환 목사님은 우리 부대 장병들을 위해 한 시간 이상 특강을 해주시고 장병들과 식사도 함께하셨다. 대학교 때 여의도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를 통역하시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도 나는 안디옥교회로 찾아뵙고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김삼환 목사님은 통합 총회장 자격으로 전 임원과 함께 오셔서 1박2일간 GOP와 해안선을 지키는 장병들과 같이 숙식하면서 기도를 해 주셨다. 나에게는 특별히 “총회장이 왔다 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셨다. 차기 회장인 지용수 목사님의 설교도 은혜로웠다. 예상을 뛰어넘는 물심 앙면의 위문이 너무 감사해서 휴가를 내 명성교회로 찾아뵙고 감사패를 드리기도 했다.
새에덴교회 청년부 워크숍에서 열정적인 소강석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맨손, 맨발, 맨땅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 소 목사님의 사역은 마치 역전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 새에덴교회에 등록하기로 했다.
박재옥 목사님을 비롯한 사단장 시절 향군종 목사님들의 방문과 기도 또한 릴레이식으로 계속되었다. 우리 부대를 방문하신 목사님들의 기도의 끝은 한결같이 나의 진급을 위한 내용이었는데 나는 그때, 그해에 진급대상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마음 깊이 감동이 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군단장을 하면서 바로 대장이 된 경우가 거의 없고 현재 대장 중에는 ROTC 출신이 한 분 계시므로 곧바로 이어서 내가 진급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다. 하나님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하여 전역사를 마무리해 나갔다. 먼저 37년 군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했기도 하지만 나의 희망과는 달리 내가 전역하면서 이제 대한민국 육·해·공군 대장들 중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어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행복’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포천의 가난한 시골 소년에서 대한민국 육군 대장까지 된 것, 그 자체도 너무나 행복하지만 정상에서 다시 내려갈 때의 뒷모습이 더 아름다울 수 있었기에 행복이라는 말을 썼다. 더구나 나는 영예롭게도 일등급 보국훈장인 통일장까지 받게 되었으니 어찌 행복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썼다.
전역하는 내 세대보다 군에 남아있는 후배들이 훨씬 똑똑하고 성실하며 희생적이기 때문에 우리 군의 미래에 희망이 있다는 의미였다. 전역식은 군 생활 중 가장 짧고도 길게 느껴진 행사였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3) 축복 속의 전역식… 37년 군생활이 파노라마처럼
전역식은 나의 군생활의 마지막 공식행사였다.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면 한 장면이 슬로비디오처럼 느껴졌다. 부하 장병들의 경례 모습, 우렁찬 예포 소리, 열병식 때 병사들의 눈동자…. 나는 4성 장군으로 군을 떠나면서 그들 앞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그리고 최대한 담담한 마음으로 임하려 애를 썼다. 그런데도 전역사를 할 때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어색할 만큼 감정조절이 힘들었다. 전역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갈 때 하객들 틈에 앉아 있는 아들, 딸 부부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문득 2년 전 취임식 바로 다음 날이었던 아들의 결혼식이 생각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결혼식에서 신랑 아버지는 신부 아버지에 비해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그 자리에는 사진이나 갖다 놓고 당신은 새로 취임한 사령관답게 부대를 지키는 게 어떠냐?”던 누군가의 농담이 떠올라서였다.
행사가 끝난 후에 친지들을 모시고 별도의 다과회를 할 때 비서실에서 나의 어린 시절부터 사령관 시절까지를 7∼8분짜리 동영상으로 만들어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북받치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시골 소년에서 육군 대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면서 그동안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 유명을 달리한 전우들의 얼굴, 40여 회를 넘긴 이사 보따리, 초등학교를 각각 여섯 번과 네 번씩 전학하며 친구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던 딸과 아들에게 그 흔한 해외유학 한 번 보내주지 못한 미안함 등이 가슴 한켠에서는 또 다른 동영상으로 재생되어 나를 울게 했다.
전역식을 하면서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새에덴교회 소강석 담임목사님께서 참석하여 주신 것이다. 소 목사님은 그 바쁜 와중에도 “일생에 단 한 번인 우리 장로님의 전역식인데 제가 안 오면 되겠습니까?” 하면서 먼 길을 달려서 직접 참석해 주셨다. 그리고 그 주 주일 목양칼럼에 ‘정상 너머의 아름다움’이라는 글을 써 주셨다. 나는 그 글을 읽고 너무나 감사했다. 사람이 정상에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내려오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전역을 하는 나의 뒷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감격스러웠다고 격려해 주셨다. 나는 소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은 또 다른 정상 너머의 아름다움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군인으로서의 모든 일정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군에 갈 일이 없다. 그런데도 처음 며칠간은 잠시 휴가를 나온 것처럼 부대가 궁금해지고 전화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전역 전 마지막 화상회의를 할 때 나는 이런 조크를 던졌다. “나의 전역을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더라. 왜냐면 자리가 하나 늘어나니까 말이다. 심지어 우리 마누라까지도 기뻐한다. 친 마누라인지 모르겠다.” 씁쓸한 분위기 속에서도 모두 웃었다. 누구보다도 나의 전역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내였다. 군에서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고 떠날 수 있었고 또한 지금까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말했다. “그때 내가 괜히 기뻐했던 것 같아요. 당신이 전역하나 안 하나 혼자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요, 뭘.” 또 바쁘게 시작된 일상 속에서도 문득 문득 떠오르는 아픔이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4) 천안함 폭침 소식에 “주여, 한 사람이라도 더…”
천안함이 피격되는 사건이 벌어졌던 지난해 3월 26일은 합참의장 주관으로 교육사령부에서 육·해·공군의 합동성을 강화하기 위한 대토론회가 열렸던 날이었다. 각 군 엘리트급 장군과 장교들이 심도 있게 연구한 내용들이 발표됐다. 각 군에서 고민하고 있는 내용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가 잘 요약되어 있었다. 일반 대학의 교수 몇 분도 객관적 입장에서의 합동성 강화 방안들을 적절히 조언해 주었다. 각 군 참모총장들의 의견과 토의에 참가한 사람들의 태도도 사뭇 진지했다.
예정된 시간보다는 늦게 끝났지만 모두들 토의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는 표정들이었다. 마지막 순서인 기념촬영을 마친 뒤 합참의 계획대로 그날 참석했던 대상자들 중에서 나를 비롯한 육·해·공군 작전사령관은 부대로 복귀했고, 각 군 참모총장과 민간 교수들만 합참의장 주관으로 만찬을 하였다. 결과론적 얘기지만 작전사령관들을 만찬에 참석시키지 않고 천안함이 피격당하던 순간 자기가 지휘하는 부대에 복귀해 정위치하게 한 것은 참 잘한 조치였다.
“사령관님, 서해안에서 원인미상으로 해군 함정이 침몰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황장교는 긴장하긴 했으나 우리 작전사령부에서 신속히 조치해야 할 사항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비교적 침착한 어투로 보고했다. 합동성 강화 토의가 끝나고 6·25전쟁 6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우리 작전사령부가 주관하는 마라톤 대회를 지원할 업체 대표를 만나고 부대로 복귀 중이던 나는 즉각 참모들을 소집할 것과 합참의 조치를 잘 확인하도록 지시한 뒤 곧장 상황실로 이동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 큰 해군 함정이 자체 문제로 침몰할 리는 만무하고 틀림없이 적의 소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군인으로서는 마땅히 그렇게 판단하고 조치해야 맞는 것이었다. 곧 이어 “북상하는 고속 물체를 다른 함정이 사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분명히 적의 기습 공격에 의한 침몰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 동시다발을 기본 전략으로 하는 적의 수법상 우리 책임 지역에도 무슨 도발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예하 지휘관들의 소집도 지시했다. 확인해 보니 내가 지시하기 이전에 이미 각급 지휘관들은 모두 정위치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작전사령부 전 참모와 지휘관들이 필요한 사항들을 조치하면서 참으로 기나긴 밤을 지새웠다. 생존 용사들의 구조 숫자가 하나씩 알려질 때마다 “하나님,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 주옵소서”하는 기도가 마음속에서 저절로 나왔다. 부대마다 차려진 분향소에는 군 장병은 물론 지역 주민들까지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과학적인 사고조사 결과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의심하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아무리 생각이 달라도 그 아까운 젊은이들의 죽음 앞에서도 하나 되지 못하는 우리의 안보 현실이 서글펐다.
그래서 지금도 천안함 46용사와 고(故) 한주호 준위를 생각할 때면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전역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난 3월 군악 연주회를 할 때 우리 작전사령부 지역에 거주하는 천안함 순직 장병 유가족을 초청해 위로 연주회를 해 드린 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천안함 피격으로부터 7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은 또 하나의 아픔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5) 이번엔 연평도 포격… 북한 위해 긍휼의 기도를
지난달 23일은 북의 연평도 포격도발이 있은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은 대낮이었다. 집무실에서 결재를 하고 있었다.
“연평도에 적의 포탄이 날아들고 있다”는 상황장교의 보고는 믿기지 않았다. 천안함 피격 사건과는 달리 명확하게 상황이 파악되고 있어 합참의 조치들은 비교적 군의 매뉴얼대로 상황 처리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나중에 언론에서 적의 포병진지를 항공기로 공격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정확한 현장의 상황 변화와 여러 가지 고려사항을 잘 알지 못했던 내가 언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여튼 우리는 휴전 이후 우리 땅에 최초로 적의 포탄 공격을 받았다. 그로 인해 우리의 소중한 젊은이 둘을 잃었다. 명확한 적의 포병 공격으로 비롯된 사건인지라 안보에 대한 공감대가 비교적 높아지긴 했지만, 그 원인에 대해 또 다른 주장을 펴는 이들도 있어 개운치가 않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격이다. 이 때문에 연평도 전투에서 최후까지 부여된 책임을 다하다 산화한 고 서정우 병장과 문광욱 이병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다.
안보는 ‘만에 하나’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안보에 관한 한 국민의 여론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군인으로 하여금 오직 전방만을 바라보게 하는 큰 원동력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국민의 여론은 큰 힘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고 계신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신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참으로 많은 전쟁이 있었고 그때마다 위기를 넘기게 하셨다. 심지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고통 속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듯이 우리 민족도 구원해 주셨다. 그런데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을 막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는 남북분단의 오랜 반목과 대립은 언제 끝날까? 하나님은 언제까지 북한 동포들을 사이비 종교 집단에 맡겨 놓으실 것인가?
북한이 체제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주체사상은 정치나 국가통치 이념이라기보다는 공산주의라는 탈을 쓴 일종의 사이비 종교적 이념에 불과하다. 종교 관련 인터넷 통계사이트인 ‘어드히어런츠닷컴’(adherents.com)에서도 북한의 주체사상을 주체종교라 하여 세계 10대 종교의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이 주체사상이란 종교는 불행하게도 우리 기독교의 체계를 모방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역설적이긴 하지만 지혜롭게 설득만 하면 오히려 북한 동포들이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따라서 감상에 젖어 북한 동포를 돕는 일을 일회성 행사로 만족하거나 교회마다 마구잡이식, 경쟁적으로 북한을 도울 게 아니라 좀 더 조직적인 방법으로 남북통일 이후를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느 순간 북한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면 남한의 선교사들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보다 북한에서 살다 온 사람들을 강한 신앙으로 무장시켜 북에 파송한다면 거부감 없이 훨씬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이 전개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작전사령관과 한국기독군인연합회(KMCF) 회장으로서 무언가 할 일 다 하지 못하고 군복을 벗은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가끔은 군과 부대에 대해 궁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휴전 직후 훈련하는 군인들을 자주 보면서 전쟁놀이가 유일한 오락이었던 어린 시절을 시작으로 해 37년간의 긴 군 생활의 긴장감이 아직 몸에 배어있는 탓인 것 같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6) 초등학교 6년 내내 반장… 장날엔 꼭 결석을
나의 고향은 경기도 포천의 산골, 열두어 채의 집이 모여 사는 작은 동네였다. 당시는 6·25 한국전쟁 때문에 너무나 가난했다. 더구나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신다고 시내로 나가서 사셨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5남매를 혼자 키우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그때는 정말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들었다.
워낙에 작은 시골 마을이라 초등학교 전체 학생이라고 해 봐야 열 명이 채 되지 않았고 심지어 학생이 한 명도 없는 학년도 있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던 첫 해가 1학년 학생이 한 명도 없던 해였다. 그 다음 해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동네 여자 아이 두 명과 같이 1학년에 입학하면서 무난하게 학교를 다니게 됐다.
나는 새로 입학해서부터는 전년도에 이미 학교에서 한 달 정도 적응을 했고 또 누나들로부터 유치원 과정을 배운 덕택에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앞서 갈 수 있었다. 1학년부터 시작해서 6학년까지 6년 내내 줄곧 반장을 했고 마지막엔 수석졸업을 해서 교육장상도 탔다. 그런데 개근상은 한 번도 타지 못했다. 왜냐하면, 5일에 한 번씩 서는 포천장에 동네 사람들을 따라 가서 시내에서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를 만나 식구들이 5일 동안 먹을 쌀을 사 갖고 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대부분이 그랬지만, 특히 나에게는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내셨다. 답 두 개를 보기로 주시고는 맞다고 생각하는 답에 차례로 손을 들라고 하셨다. 나는 첫 번째 답이 맞는 것 같아 손을 들었고 반 아이들 대부분이 나를 따라 손을 들었다. 반면 두 번째 답이 맞다고 손을 든 아이는 한두 명에 지나지 않았다. 첫 번째 답은 오답이었다. 선생님은 “이것이 맞는다고 했던 사람은 다시 손을 들라”고 하셨다. 나는 스스로 답이 틀렸다고 손을 드는 것이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나를 콕 지목해 물어보시는 것이 아닌가. “너는 몇 번에 손을 들었느냐?” 선생님은 나를 주의깊게 보고 계셨던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일 번에 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다시 손을 들라고 했을 때 손을 들지 않은 것도 일종의 거짓말이다”라고 하시며 교실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내 두 손을 칠판에 대고 한쪽 발을 들게 하시고는 발바닥을 때리셨다. 너무나 창피했다. 반장으로서 언제나 당당하고 모범이 되었던 내가 거짓말한 것이 탄로 나서 친구들 앞에서 매를 맞으니 발바닥의 아픔보다도 얼굴이 더 화끈거려 참을 수 없었다.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데 건너편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교회의 하얀 십자가가 보였다. 거짓말을 하면 죄 짓는 거라고 중얼거리던 짝꿍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번 크리스마스 때 사탕을 받으러 교회에 갔다가 목사님께 들은 말이라고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지금도 이 말씀을 묵상할 때면 그때의 기억이 큰 깨달음으로 떠오르곤 한다. 중학교에 가서도 가난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 다녔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7) 가난 속 아버지 “고교 졸업후 面 서기가 되거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시험을 치러 중학교에 가서도 문제는 가난이었다. 기성회비를 한 번도 제 날짜에 내 본 적이 없다. 매번 몇 달이 지나서 냈고 그것도 아주 어렵게 냈다. 그런데 그때는 선생님들이 기성회비를 제 기간에 내지 못한 학생들을 불러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지금도 그때 친구들이 나를 쳐다보던 동정 어린 눈빛들이 눈에 선하다. 특히 여학생들 앞에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했다. 지금 생각해도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부끄러운 기억이다.
그런 날이면 기가 팍 죽어서 집으로 돌아오며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을까? 우리 집은 왜 부자가 아닐까? 친구들 앞에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말을 읊조리곤 했다. 지금이라면 “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떼같이 지켜 주시나니(시 107:41)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시 68:10)”라는 말씀을 믿고 견뎠겠지만,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나는 복음을 알지도 못한 채 가난이 주는 고통 속에서 소망 없는 날들을 보내야 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생 때부터 과외를 해서 용돈을 벌어야 했다. 때마침 친한 친구가 중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는 자기 조카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것을 계기로 방학동안 예비 중학생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과외지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겨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 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는 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면 서기를 해야 한다.” 아버지는 시내에서 사업을 하면서도 동네 이장을 십 몇 년 동안 하셨다. 그러니까 마을 이장이셨던 아버지 시각에는 지금 말로 하면 면 서기가 로망이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닭을 잡는 날이 있었다. 그날은 면 서기가 우리 마을을 방문하는 날이다. 그날은 아버지께서 시내에서 오셔서 면 서기와 마을 일을 의논하시는데 닭을 잡아 대접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고등학교를 하루 빨리 졸업하고 군대를 지원해서 다녀 온 후에 면 서기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께서 내 가방을 열어 공책을 펼쳐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글씨를 못 써서 면 서기는 못 되겠다.” 그때만 해도 면 서기는 모든 서류를 직접 손으로 써서 작성했기 때문에 필체가 좋은가, 안 좋은가가 합격의 결정적 기준이었다. 이후 타자기가 나와서 글씨를 못 써도 상관없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랬다.
결국 면 서기의 꿈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하게 다른 꿈을 꾼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하든지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아야 취직이 되고 그렇게 해야만 어려운 가정 형편을 살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결심 덕분에 항상 반에서 상위권에는 들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목표일 뿐이었다. 나는 전혀 대학 진학을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돈이 없어서 겨우 다닌 내가 어떻게 남들이 소 팔고 땅 팔아서 다니는 대학을 꿈꿀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한낱 뜬 구름 같은 헛꿈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고도 구체적인 계획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8) 인생 바꾼 첫번째 하나님의 간섭 ‘대학 진학’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예비고사 제도가 있었다. 예비고사에 합격한 사람만 대학입학 본고사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예체능계는 예외였지만 인문·자연계는 반드시 예비고사에 합격해야 했다. 예비고사에서 떨어지면 대학에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은 S대학교에 몇 명이 들어갔는가가 고등학교의 간접적 평가 기준이 되듯 그 당시는 예비고사 합격자 수가 고등학교의 서열을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자기 학교의 합격자를 늘리려고 애썼고, 대학 진학에 관심 없는 학생들도 합격권에 들기만 하면 무조건 의무적으로 예비고사를 보도록 강요했다.
나는 예비고사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선생님의 강요(?)에 의해 인천까지 가서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그런데도 나는 전기 대학에 응시도 하지 않은 채 군대나 빨리 다녀와 취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졸업 전 마지막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명지대학교 교무처장님이 포천 출신인데 공부는 잘하지만 집안이 어려워 대학에 갈 수 없는 형편인 학생을 몇 사람 추천하면 장학생으로 키워 보겠다며 학생을 보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왜냐하면 당시 소위 일류대학이 아니면 정원을 채우지 못하던 상황에서 명지대의 부름은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때는 예비고사 합격 여부만 발표할 뿐 개인 점수는 발표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 예비고사에 붙은 학생들은 자신이 공부를 굉장히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좋은 대학이 아니면 아예 지원 자체를 안 해버렸다. 시골 출신들마저 자기가 원하는 대학이 아니면 전부 재수를 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3명만이 명지대에 응시하게 됐다.
나는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대학교 등록금을 면제받은 것까지는 좋은데 서울에 가서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에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선생님들께서 “나중에 성공하려면 꼭 대학을 가야 한다. 지금 대학을 못 가면 영원히 못 가게 된다”고 하시면서 얼마씩 돈을 걷어 입학금까지 마련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그때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진다. 주변에서 그렇게 나의 미래를 아껴주고 걱정해 주시는데도 나는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생님들의 강한 권유에 의해 대학을 간 것이다. 그때 만약 명지대 교무처장님이 전화를 주시지 않고, 또한 선생님들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대학에 가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는 말씀처럼 나는 이것이 내 인생을 바꾼 하나님의 첫 번째 간섭이라고 믿는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9) 혼돈의 대학생활… 주님, 영혼의 문을 노크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입고 먹고 자는 문제가 전혀 준비가 안 되었다. 그래서 고향에서 같이 간 체육과 동기들 자취방에 끼어 살기도 했다. 혹은 가정교사로 일하며 겨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학원에서 강의도 했다. 하지만 대우가 형편없었다. 겨우 차비 정도만 주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화장품 외판원 교육까지 받은 적이 있다. 누나들을 따라 다니면서 화장품을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 체면에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둔 적도 있다. 내 신세가 너무 처량했다.
3일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당시 너무 배고프고 굶주리던 시절, 지혜 아닌 지혜를 얻은 게 하나 있다. 배고플 때는 라면에다가 막걸리 한 사발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는 사실이다. 그처럼 나의 대학생활은 낭만적인 청춘 시절이 아니었다.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던 초라한 청춘이었다. 고난과 역경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내가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6·25 한국전쟁 중에 우리 친척 한 분이 몸이 아팠는데 어느 교파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소위 예수쟁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분을 가운데 몰아넣고 마구 때렸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 나름대로 안수기도를 한 것이다. 그런데 병을 낫게 해 준다며 안수 기도를 하는 도중에 그 아저씨가 그만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마을에는 예수쟁이들이 사람을 때려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왔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척 아저씨의 죽음으로 인한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 때문에 내가 학교 친구들을 따라 부활절이나 성탄절 때 교회에 가려 하면 우리 부모님은 펄쩍 뛰셨다. 교회에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나를 단속하시곤 했다.
또한 당시만 해도 남녀 교제가 활발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학생들이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어딘가 몸이 많이 아프거나, 죄를 많이 지은 아주 나쁜 사람이거나, 연애를 하기 위해 불순한 목적을 갖고 다니는 것으로 부모님은 여기셨다. 이 같은 집안 분위기와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나 역시 기독교는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하나의 종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는 일이 있었다. 제일 친한 같은 과 김충용이라는 친구가 하루는 내게 말했다. “학장님 방에서 하는 기도회가 있는데 같이 참석하자.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하신 분들이 돌아가면서 강의도 하시니까 그냥 좋은 말씀 듣는 교양강좌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자.” 그 친구는 내가 가장 어렵고 힘들 때 가장 많이 이해해주고 밥도 가끔 사준 고마운 친구였다. 그렇지만 난 친구의 권유를 몇 번 거절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떤 이유에선지 기도회에 참석하게 됐다. 유상근(명지대 설립자) 장로님 주도로 교수와 학생들 50여명이 함께 예배드리고 있었다. 찬송도 부르고 주기도문도 낭송하는데 나만 혼자 멀뚱멀뚱 쳐다보는가 하면 교수님의 15분 설교를 교양강좌로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내 영혼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0) 신길동 작은 개척교회서 만난 믿음의 삼총사
명지대학교 기도회에 참석할 때였다. 복음성가를 부르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왈칵 솟구치더니 목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날 위하여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크신 사랑에 놀라고 감격했고, 또 그 사랑을 받기에는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생각에 참회와 회개의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기 위하여 고난과 역경을 주셨던 것 같다. 대부분 간증하는 사람을 보면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자살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면 나 또한 비슷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그런 고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친구인 김충용을 따라서 서울 신길동에 있는 작은 개척교회에 나가게 됐다.
그곳은 공장 지역이라 청년 대여섯 명과 직장에 다니는 여자들 10여 명이 전부였다. 청년부 교인도 별로 없는 워낙에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나는 세례도 미처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맡았다. 그때는 신앙이 아니라 지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 같다. 그리고 1975년 대학교 1학년 여름에 안홍기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때 만난 사람 중에 한 분이 DJ정부 때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방용석 장관이다. 나와 김충용, 방 전 장관이 청년부에서 앞장서서 많은 일을 했다. 그때 방용석 전 장관은 군대도 다녀온 집사로서 나와 친구에게 많은 신앙 지도를 해 주었고 어느 회사에서 노조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도 하나님 일에는 참으로 열심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그만 개척 교회에서 육군 대장, 노동부 장관, 하나님을 잘 믿는 장로도 나왔으니 교회는 작았지만 영향력은 큰 교회였다고 하겠다.
청년 시절,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했다. 그렇다고 나의 어렵고 힘든 생활이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아르바이트도 잘 안 되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민하던 중이었다. 하루는 서울시 교육청 옆을 지나가는데 초등학교 준교사를 모집하는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정교사는 아니지만 준교사가 되면 섬마을 선생님으로라도 취직을 해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열심히 준비해서 초등학교 준교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그길로 곧장 나를 명지대학교에 오게 한 정동준 교무처장님을 찾아갔다. 나중에 명지전문대학 초대 학장을 지내셨고 과로로 순직하실 정도로 충직하시고 좋은 분이셨다. 그분을 찾아가 면담을 했다. “학비는 면제되었지만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어렵습니다. 초등학교 준교사 자격증을 땄으니 학교를 그만두고 섬마을 선생님이라도 가겠습니다.” 교무처장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으시더니 방으로 곰탕을 주문하셨다. 그리고 둘이서 곰탕을 먹으면서 말씀하셨다. “너 여기서 그만두면 대학 다니기 어렵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아봐라.” 특별한 대책을 주신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용기를 얻고 더 참아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에 기쁜 소식이 하나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2학년 2학기 즈음, 학군단에서 내년도 ROTC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세 번째 간섭하시는 것이었다. 나를 대학에 오게 하신 것이 첫 번째이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 놀라우신 간섭이 두 번째였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1) 고난 속 한줄기 빛 ‘ROTC’… 육군 소위가 되다
가난 때문에 더 이상 대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나에게 학군단(ROTC) 모집 광고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특별히 이번 ROTC 모집은 군 복무를 연장할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는 장학금까지 준다는 것이었다. 원래 복무기간은 2년인데 2년을 더 연장하면 연장한 기간만큼인 2년 치의 장학금을 받는 것인데, 그 장학금의 액수가 당시 내 생활비 수준에서는 엄청났다. 그때 나는 학기별 성적에 따라 전액 또는 반액 면제를 받는 장학생이었는데, 그 나머지 등록금을 다 내고도 생활비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액수였다. 그렇게 대학 3∼4학년은 장학금 때문에 적은 액수나마 용돈도 쓸 수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어진다. 왜냐하면 학군단 장학제도가 마침 그때 처음 생기고 그 덕택에 ROTC 장교로 군대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군은 나의 운명과도 같다. 나는 운명처럼 군을 만났다. 다른 동료들은 기초 군사훈련이나 야외훈련을 받으면 매우 힘들어했다. 그런데 나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먹고 자고 입는 문제가 해결되고 봉급까지 받게 되니까 훈련이 너무나 행복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훈련제도가 달라졌지만 우리 때는 여름방학마다 군부대로 가서 4주씩 훈련을 받고 왔다. 동료들은 그 기간을 매우 힘들어했다. 그런데 나는 마치 어렸을 때 전쟁놀이하듯 재미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전쟁 직후이니까 친구들과 산을 뛰어다니며 전쟁놀이를 많이 했다. 미군들이 마을을 지나가면 “기브 미 초코레트” 하면서 초콜릿을 받아먹기도 하고 탱크에 올라타 보기도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군의 모든 것이 낯설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어쩌면 그 당시 윗사람이나 동료들이 보았을 때 내가 군이 체질에 맞는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초등군사반(OBC) 교육을 받을 당시 보병 학교장은 월남전에 맹호부대 사단장으로 참전한 정득만 소장이었다. 그분이 월남전에 가보니까 소대장들이 중요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소대장들을 많이 육성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신 분이셨다. 특히 ROTC 장교 중에서 장기 복무자들을 많이 획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전 군의 소대장 절반 이상을 ROTC 출신들이 맡고 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의무복무 2년만 마치고 전역하기 때문에 소대장으로서의 사명의식과 주인정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 소장은 뜨내기가 아닌 주인의식을 가진 소대장을 배출해야 군의 전투력도 올라갈 것이라는 확신 아래 ROTC 장교의 장기복무를 적극 권유하셨다.
어느 날 장학금을 받고 복무기간이 연장된 장교후보생들을 별도로 큰 강당으로 불렀다. 그 당시 교육받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풍성하게 다과를 준비해 놓은 것이 아닌가. 다과회가 끝날 무렵 장기복무를 할 사람은 이름을 쓰라며 학교장이 직접 권유하셨다. 거기서 많은 동기생들이 감동을 받아 장기복무를 하겠다고 결심했고 그때 나도 장기복무 지원을 했다. 장군이 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냥 군대가 좋았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약한 믿음이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앞길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어렴풋한 기대도 있었다. 꿈에 그리던 야전으로 나갈 순간이 다가왔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2) 7사단 신참 소대장 ‘호랑이 대대장’ 사랑 독차지
드디어 고대하던 실무부대 생활이 시작됐다. 7사단 소대장으로 첫 부임을 했다. 나는 사실 소대장을 마치고 서울에 있는 학군단 교관으로 오고 싶었다. 당시 대대장께서도 “너는 장기복무자로 선발됐으니 학군단 교관으로 갈 수 있는 우선권이 있다. 교관으로 가서 대학원 공부를 마저 하고 결혼도 하고 고등군사반(OAC)을 갔다 온 다음에 전방에 다시 와서 중대장을 하라”고 권유하셨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하고 휴가 때 학군단 교관 지원서를 제출하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학군단 교관으로 가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소대장 생활 1년간 민통선 이북에서 근무하느라 민간인 구경을 한 번도 못해서 사람 냄새가 무척이나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마침 대대장께서는 나를 좋게 보셔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다. 그 대대장님은 소대장들이 잘못을 하면 소대원들이 보는 앞에서도 부끄러울 정도로 불호령을 내리시는 열정적인 분이었지만 나는 그분에게 한 번도 꾸지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대대장님이 나를 좋게 보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소대장들이 소대원들을 데리고 어떤 교육을 하면 그 과목 하나만 하기 때문에 일정 수준에 오른 병사들은 추가적으로 더 할 일이 없었다. 가령 사격훈련을 하게 되면 사격장에서 소대원 전체가 동시에 사격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여덟 명 정도가 사격을 하면 나머지 인원들은 대기를 해야 한다. 그 가운데 몇몇 병사들이 소대장이나 선임 하사관(지금의 부사관)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흐트러진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럴 때 갑자기 대대장님이 교육 현장에 나타나서 야단을 치곤 하셨다.
어느 날 나는 소대원을 데리고 나가서 사격 훈련을 하게 되었는데 실사격을 하기 위해 대기 중인 병사들에게는 조준 및 격발 연습 등 PRI를 시켰다. 또 사격을 마친 병사들을 놀게 할 수 없어 추가로 수기 훈련을 시켰다. 수기 훈련이란 전시에 무선이나 유선이 다 두절이 되었을 경우에 깃발을 이용하여 서로 신호를 보내서 의사를 전달하는 훈련이다. 한창 교육이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대대장님께서 나타나셨다. 처음에는 사격훈련 시간에 엉뚱한 짓을 한다고 야단을 맞을 각오를 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대대장님 표정이 밝아지면서 얼싸안을 정도로 등을 두드려 주시고 악수를 깊게 해 주셨다. 수동적이지 않고 창의적으로 훈련을 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대대에서 회의를 할 때도 몇 번이나 “1중대 3소대장 이 소위는 이렇게 교육훈련을 잘하고 있더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또한 나에게는 만날 때마다 너무나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셨다. 지금 회상해 보면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습 3:20)던 말씀이 나에게 처음으로 이루어진 시절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분이셨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이처럼 나는 대대장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소대장을 잘 마치고 학군단 교관으로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독립중대에 근무하느라 주일도 지키지 못했던 나에게 하나님이 큰 상을 주시는 것 같아 송구스러웠지만 좀 더 자유롭고 편한 군 생활을 기대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학군단 교관으로 가라는 전속명령은 내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조바심이 났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모든 것을 맡길 때 내가 짧게 드리는 기도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3) 어긋난 ‘학군단 교관’ 꿈… 그러나 주님은 새 길을
상관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미래가 보장된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어서 빨리 학군단 교관으로 갈 날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소식이 없었다. 이미 보름 전부터 다른 부대에 근무하는 동기생 중에는 학군단으로 차출돼 가는 사람이 있다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다시 대대장님께 휴가를 받아 육군본부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러 갔다. 지금 생각해봐도 소대장 시절 모셨던 대대장님은 상하관계를 떠나 큰 형님처럼 자애로운 분이셨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불호령을 내리고 무서운 분이셨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주시고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셨다.
관련 부서에 도착해 “이미 학군단 교관 발령 통보날짜가 보름이나 지났는데 왜 나는 아직도 명령이 안 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담당자는 오히려 나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학군단 교관 발령이 날 때까지 보직을 변경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않느냐. 근데 너는 이미 대대 인사장교로 명령이 나 있는 탓에 교관 선발에서 제외된 거다.”
학군단 교관으로 지원하고 명령을 기다리는 사이에 후임 소대장이 전입을 왔다. 나는 인수인계를 하고 부중대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대대장님이 부르시더니 “어차피 학군단 교관으로 갈 것이니 그동안 대대 인사장교 대리근무를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임시로 대대 인사장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장교인사에 대한 명령권이 있는 연대본부에서 나를 대대 인사장교로 보직 명령을 내버린 것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지만 하는 수 없이 나는 대대 인사장교로서 전방에서 계속 생활을 하게 됐다. 그때는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보직을 가로막고 새로운 선물을 준비해주신 것이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알 까닭이 없었던 나의 마음은 너무나 후방에 오고 싶었다. 학군단 교관을 하면서 대학원 공부도 하고 결혼도 해 따뜻한 가정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학군단 교관의 꿈은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고 대대 인사장교를 마친 후에는 연대 인사장교로 계속 근무해야 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것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중대장은 물론 전방 위주로 야전생활을 해서 나중에 장군까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 그런데 전방 중대장을 하고 있는 선배들의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야전부대 중대장의 일상은 너무나 힘들고 초라하게 보였다. 보통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업무를 하고 그 이후에는 관사나 독신장교숙소(BOQ)로 퇴근해 개인 여가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병영에서의 정상적인 장교생활이다. 그러나 전방 중대장들의 일과는 시작되는 시간도 끝나는 시간도 없이 계속 부대 내에 머물면서 밀려 있는 일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휴가는 거의 갈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얼굴은 새까맣게 타고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 중대장들의 모습을 보니 야전에서의 군 생활이 별로 매력이 없어졌다. 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역경의 열매] 이철휘 (14) 중대원 두명, 크레모아 폭약을 버터로 알고…
나는 고민 끝에 전방 위주로 전투경험을 쌓는 야전형 군인이 되기보다는 다시 교관을 하거나 위탁교육을 받아 학문을 하는 군인이 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성균관대학교에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이라는 석사과정이 있었다. 군이 전산화를 도입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매우 전망이 밝은 코스였다. 나는 이 과정을 밟기로 마음먹고 육군본부에 지원해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야전군의 소대장들이 너무 많이 지원해 공석이 많이 생기자 모두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서울로 가는 꿈이 더 이상 나의 길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왜 나의 소망을 방해하셨을까?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논 베르크 수녀원의 한 기둥에 씌어 있다는 “하나님은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다른 한쪽 문을 열어두신다”는 사실을 그때 체험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또 다른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곳에서 친척집에 놀러왔던 아내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설렌다. 그 후로 함께 교제하면서 사랑을 키워갔고 지금의 가정을 이뤘다. 결혼하고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경계초소(GOP)에서 중대장을 시작했다. GOP 중대장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다. 24시간 내내 부대에 있어야 한다. 민간인은 구경도 못하고 한 달에 고작 2박3일 동안 외박을 나갈 뿐이다. 그래서 딸아이는 낯선 나를 보기만 하면 울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 자체가 안 됐다. 계속해서 산 속에만 있다 보니 다시 후방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던 중 이제까지 육군에 전례가 없던 대형 사고가 터졌다. 우리 중대가 사단장님을 모시고 야간 각개전투 시범을 보이는 임무를 받았다. 예행연습 과정에서 ‘크레모아’의 위력이 예상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자칫하다간 대항군 역할을 하는 병사들이 다칠 우려가 있었다. 중대 간부들이 모여 토의한 결과 폭약의 양을 적게 하기로 하고 폭약을 조금씩 잘라내어 시범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런데 잘라낸 폭약을 처음 본 병사 두 명이 버터로 착각해 야외훈련 중 밥에 비벼 먹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처음 두 명의 병사가 똑같은 증상으로 내 앞에서 쓰러지자 나는 식중독일 것이라 생각했다. “둘이 같이 밥을 먹었는가?” 물었더니 선임하사가 “둘이 밥에 버터를 비벼 같이 먹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식중독이라 확신한 나는 대대 상황실에 앰뷸런스를 요청한 후 대대장님에게도 지휘보고를 했다.
대대 군의관이 훈련장에 와서 환자들을 태우고 떠나자마자 이번엔 대대장님 지프차가 나타났다. “한겨울에 식중독이라는 것이 좀 이상하다. 먹다 남은 버터를 가져와 봐라.” 그런데 선임하사가 들고 온 것은 버터가 아니었다. 신문지에 둘둘 말려져 있는 것은 지난 시범 때 잘라내어 감춰뒀던 폭약이었다. 나는 그제야 상황파악이 됐다.
“대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제 보니 병사들이 먹은 건 버터가 아니라 폭약 덩어리입니다.” 내 얘기를 듣는 대대장님의 낯빛이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대대장님은 신속히 무전으로 헬기지원을 요청하셨다. 나는 그 길로 연대장님에게 불려갔다. “자네는 육군 역사에 없는 사고를 저질렀으니 나를 원망하지 말고 새 길을 찾기 바라네.” 그러더니 중대장 보직해임 명령서에 내가 보라는 듯이 아주 천천히 서명을 하셨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5) ‘폭약 버터’ 사건… 그건 시련 아닌 예비된 연단
나는 중대장실로 돌아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기도를 드리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앞으로의 일들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헬기로 수도통합 병원까지 후송됐던 병사들이 위세척을 빨리 하는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소식이 왔다. 아까운 젊은이 둘을 어처구니없는 일로 잃을 뻔했는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덕분에 나의 보직해임은 없던 일로 용서가 됐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간 분망한 군 생활을 핑계로 잠시 소홀했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두 손을 모았다. 마음속에서 나지막이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이번 일로 뼈저린 교훈을 몇 가지 얻었다. 사고는 예상치 못한 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폭약 덩어리를 버터로 생각하고 밥에 비벼 먹을 거란 상상을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 발단이 된 편법적인 일을 하지 말아야 했다. 원형의 탄약에서 폭약을 잘라낸 것이 잘못이었고 시범 후에는 그것을 즉시 반납해야 했다. 또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보고에만 의존하지 말고 현장이나 현품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대대장님이 먹다 남은 버터 덩어리를 가져와 보라고 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선임하사의 보고만 믿고 현품을 확인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만일 내가 버터의 실체를 빨리 확인해 헬기 요청시간을 앞당겼더라면 병사들의 생명은 더 안전했을 것이다.
나는 군 생활 동안 이 교훈을 적용하려 노력했다. 결심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어느 방안이 원칙에 가까운가에 기준을 두었다.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반드시 결과보고를 받았다. 현장에 자주 가보고 지휘관들이 보고하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래? 어디 한번 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나의 현장방문 시간은 항상 계획보다 오래 걸렸다. 어떤 때는 부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지만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현장이 확인되고 행동으로 실천되는 풍토가 조성되는 거라 믿었다.
드디어 1980년 2월 기다리던 고등군사반(OAC) 입교 명령이 났다. 첫 부임지인 7사단에서 60여 개월을 보낸 후 처음으로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면 퇴근이 보장되는 보병학교에서의 군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도 매주 빠짐없이 나갔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도 늘었다.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나는 교육을 받으며 여기저기 어떻게 하면 보병학교 교관으로 남을 수 있는가 물어보았다. 첫째는 전방에서 중대장을 마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 조건은 충족됐다. 둘째는 교육성적이 상위 30% 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위해 매일 밤샘을 하며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교육과정의 3분의 2 가량을 지나면서는 상위 10% 안에 들게 됐다. 나는 교관으로 남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마음 편히 교육수료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후반기 군인력운영계획이 변경되면서 우리 기수에서는 교관을 한 사람만 뽑게 됐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전방으로 가는 신세가 됐다. 이처럼 나의 군 생활은 이상할 정도로 나의 희망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처럼 그것은 나를 위한 또 다른 축복의 시작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6) 원치 않던 중대장 또 맡게 되자 ‘재구상’ 영예가…
고등군사반(OAC) 교육을 수료한 뒤 서부전선의 분대장을 양성하는 제3하사관학교의 중대장 요원으로 분류됐다. 나는 이미 전방에서 중대장 근무를 했기 때문에 학교장 신고를 할 때 중대장을 하는 것보다 교관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아무래도 지휘관보다는 교관을 하는 것이 부담이 적고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보병학교에서 하지 못한 교관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미련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나는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면서 이미 초등학교 준교사 자격증과 중등학교 2급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였다. 그 당시만 해도 나처럼 교사 자격증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군인은 드물었기 때문에 멋진 교관이 되어 보겠다는 개인적 욕심과 자신감도 있었다.
그랬더니 학교장님께서는 “잘 알았다. 네 바람대로 교관을 시켜주겠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지금 중대장 중 한 사람이 보안사령부로 가기 위해 면담을 하고 왔는데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다. 지휘관 보직인 중대장을 공석으로 놔둘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보안사령부로 가면 너는 중대장을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교관으로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직도 없이 1주일을 대기하던 중 결국 그 중대장이 보안사령부에 선발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2차 중대장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달갑지 않게 여기며 억지로 맡게 된 중대장을 하면서 ‘재구상’을 받게 됐으니 참으로 하나님의 계획은 알 수 없는 오묘한 것이었다. 재구상은 훈련 도중 부하가 실수로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자신은 산화하면서 부하 장병들의 목숨을 구해낸 고(故) 강재구 소령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군인에게는 최고의 영예다.
당시에는 사단 내에서 가장 탁월한 중대장 한 명에게만 주는 상이었다. 나는 3군사령부 직할 부대 중대장 가운데 선발되어 받게 된 것이다. 내가 재구상을 받은 것은 그것 말고도 다른 의미가 있었다. 재구상은 통상 정규 사관학교 출신이 받는 게 관례였는데 나는 학군(ROTC) 출신으로서 그 상을 받음으로써 더 빛이 났을 뿐 아니라 그 덕분에 우수한 장교로 인정 받아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보병 소령 기록장교로 뽑혀 갔다. 나는 거기에서 ROTC 13기 동기회인 ‘녹성회’도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이른바 동기생들 중에서 선두그룹의 한 사람이 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재구상을 수상한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후방에서 근무하거나 교관 같은 편한 직책에서 근무하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이 그 모든 길을 막으셨다. 그리고 전방에서 중대장 생활을 하도록 하고 그 결과로 재구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얻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길을 막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다시 길을 열어서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 28:13) 재구상 수상을 계기로 나의 군 생활은 더 높은 정상을 향하여 비상하는 나래를 펼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7) “아폴로 눈병을 막아라”… 해법은 매뉴얼 대처
제3하사관학교에 근무하면서 잊지 못할 일이 하나 있었다. 그때 학교장님은 매우 성실한 분이었다. 일요일 저녁에는 직접 손전등을 들고 하사관(지금의 부사관) 후보생들의 내무반(지금의 생활관)을 한 곳도 빠짐없이 돌며 꼼꼼히 순찰할 정도였다. 유리창은 잘 닫혔는지, 청소는 잘 되었는지 부대 곳곳을 직접 점검하셨다. 처음에는 학교장이 매주 정기적으로 순찰을 하니까 그 시간에 맞춰 일부러 일하는 척하는 사람도 있곤 했는데, 그런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면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그래서 학교장님이 순찰오시는 시간이 되면 일부러라도 퇴근을 해야 했다. 그 정도로 철저한 분이었다.
그런데 한번은 학교 전체에 아폴로 눈병이 크게 돌았다. 지금은 위생 여건도 양호하고 약도 좋아져 그렇게 심하게 번지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아폴로 눈병이 한번 돌았다 하면 걷잡을 수 없이 확 퍼졌다. 교육이 1주일씩 연기될 정도로 엄청난 지장을 초래했다. 때문에 어떻게 하면 아폴로 눈병을 초기에 차단하느냐가 큰 과제였다. 그만큼 골치 아픈 문제였다.
하루는 학교장님이 순찰을 하면서 우리 중대에 오셨는데, 20여명의 병력이 별도 내무반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보셨다. 의아하게 생각하신 학교장님이 이유를 물어보셨다. 당직사관으로 근무하던 중위가 보고했다. “지금 저희 중대에 눈병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대장이 눈병 환자들은 수건도 따로 쓰게 하고, 잠자는 곳도 별도로 격리하도록 지시하여 그대로 조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장님이 16개 중대를 다 돌아보아도 그렇게 하는 부대는 우리 중대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다음날 전 후보생 가운데 눈병 환자를 파악해 보니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런데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은 나머지 중대장들은 전부 크게 혼쭐이 났다. 한편으로 나는 다른 중대장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사실은 눈병이 유행하면 본디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는데, 학교장님에게는 두드러지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았다. 또 하나는 중대장을 시작한지 7∼8개월 지났을 무렵 이번엔 내가 보안사령부 요원으로 추천되어 면담을 가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 심사가 해당되는 해여서 나는 현재의 부대에서 계속 근무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것을 아신 학교장님이 야전에서 군 생활을 하려는 훌륭한 장교로 칭찬해 주셨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학교장님이 나를 재구상(고 강재구 소령을 기리기 위한 상) 후보로 추천을 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아폴로 눈병 사건을 잊지 않고 무슨 일을 할 때 적당히 하려 하지 않는다.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네가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신 23:23)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약속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럴 때에 다른 사람들도 나를 신뢰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아폴로 눈병 사건은 군 생활을 하면서 기본과 원칙을 지키고 정상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 주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보통 다른 사람이 보는지 안 보는지를 의식하게 되지만 사실은 어떤 경우라도 충직하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적당히 해서 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8) 불의의 지뢰 폭발… 부상자 후송하며 간절한 기도
나는 소령 시절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에 근무하면서 육군대학 정규과정을 들어가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때는 육군대학 선발방법으로 필기시험과 평정, 교육 성적 등을 포함한 자력심사를 병행했는데 인사운영감실에는 육군대학을 일등으로 졸업한 사람을 비롯해 우수한 선배들이 많아서 공부를 하다 모르는 것을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었다. 또 교범에 씌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시원한 설명도 들을 수 있어서 시험공부를 하는데 과외 선생님을 모시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도 육군대학이 중요한 과정이지만 그 당시에는 육군대학 정규과정에 들어가는 것이 커다란 꿈이었다. 왜냐하면 육군대학 정규과정을 나오면 대령까지는 보장이 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엘리트 과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육군대학 교육을 마친 후 새로운 보직을 받아 옮겨가야 하는데 나는 어느 자리로 가야 좋을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곳이나 가라는 대로 가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옆에서 “교관을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육군대학 교관이 되는 것은 권위도 있고 경력에도 아주 좋은 요직이었다. 과거에 보병학교와 제3하사관학교에서 교관을 하려다가 못했던 아쉬운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육군대학에서 교관을 한번 해봐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여러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교사 자격증을 두 개나 가지고서도 끝내 군 교육기관에서 선생(교관) 노릇은 한번도 하지 못했다.
다시 야전부대인 30사단으로 가게 됐다. 그곳에서 연대 인사과장을 하면서 중령으로 진급도 했고 필수직위인 대대장도 마쳤으며 다시 전방으로 부대를 옮겨 3사단 인사참모로 근무했다. 그렇게 야전근무를 마친 후 정책부서인 국방부 인사국으로 가서 인사과의 제도 담당을 맡게 되었다. 그 직책은 인사에 관련된 정책적 제도를 연구하는 것인데 장교들의 추서진급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추가 임무도 맡게 됐다.
“인사장교님, 큰일 났습니다! 전방에 지뢰사고가 났는데 중대장님이 다치신 것 같습니다. 빨리 앰뷸런스 좀 보내 주세요.” 기억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도 생생했다. 3중대 행정보급관의 목소리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나는 그때 학군단 교관으로 가지 못한 상태에서 대대 인사장교를 계속하는 중이었고 우리 대대는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경계지역(GOP)에 투입되어 있었다. 당시 3중대는 철책선 안에서 지뢰를 제거하는 작전 중이었는데 큰 사고가 난 것 같았다.
나는 급히 대대 군의관과 함께 1/4톤 지프를 개량해서 만든 앰뷸런스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앰뷸런스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실제 사고현장 몇 백m 후방이라 그곳까지 임시 들것으로 옮겨왔다. 중대장이 맨 앞에 들려 나오고 병사 두 명이 뒤따라 옮겨졌다. 응급조치를 하는 군의관은 반쯤은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그 작은 차에 환자 3명에다 군의관, 나까지 탄 채 큰 길로 나와 연대에서 지원된 4/5톤 앰뷸런스에 옮겨 탔다. 중상을 입은 중대장은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도 연신 신음 같은 기도를 간간이 토해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내 입에서도 기도가 흘러나왔다. “주여, 부디 이 어린 양을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한시가 급했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9) ‘지뢰사고’ 故 정경화 대위, 참군인 표상으로 부활
중대장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양팔과 다리는 다 골절된 상태여서 링거를 꽂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겨우 혈관이 연결된 오른쪽 발등 한 곳에만 간신히 링거를 꽂은 상태에서 국군춘천병원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중대장의 기도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화천에서 춘천까지의 비포장도로는 참으로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중간 중간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치는 중대장의 몸을 꼭 잡고 있었는데 가까스로 한군데 꽂아놓은 링거바늘마저 빠질 것 같아서였다. 병원에 도착하는 순간 중대장의 숨이 멎기 시작했다. 재빨리 응급실로 옮겨 여러 명의 군의관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본 최초의 죽음이었다. 머리가 멍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이처럼 가까이 있는 것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사단에서 같이 온 군의관은 환자를 내려놓고는 바로 돌아가 버리고 전방에서 온 촌 군인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얼마 뒤 병원에서 안내해주는 대로 임시 빈소를 차린 그날 밤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나는 이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국방부 인사제도 담당으로 보직되어 전임자에게 업무를 인계받는 중에 오래된 민원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 ‘고(故) 정경화 대위의 추서진급건!’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민원 내용은 이랬다. “고 정 대위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 비석 뒤에 새겨진 사망 경위가 ‘안전사고’로 순직했다고 돼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뢰제거는 ‘작업’이 아니라 ‘작전’이었고 지뢰를 제거하는 순간도 병사들에게 시키지 않고 중대장이 직접 안전핀을 꽂다가 폭발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닌 솔선수범의 표상이니 당연히 추서진급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민원인이 유가족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 대위를 존경하는 그 당시 중대원들이 ‘맹호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끈질기게 민원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국방부는 “추서진급은 타의 귀감이 되는 내용으로 순직한 경우 사망 당시에만 해당되는 것이지 사망한 뒤 시간이 오래 지난 다음에는 진급시킨 전례가 없다”는 요지의 답변을 보내곤 했다. 나 역시 안타깝기는 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국회에서 추서진급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생겨나 정 대위의 사고도 재조사를 거쳐 소령으로 추서진급이 됐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내가 처음 본 죽음, 정 소령의 일을 내 손으로 마무리할 기회를 주셨으니 말이다. 맹호회와 유가족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순직 장소인 화천군 ‘경화동산’의 동상에는 계급장을 바꿔 다는 진급식도 거행했다고 한다. 맹호회 회원들의 정 소령에 대한 추억은 애틋하다. GOP에서 염소를 키워 생일을 맞은 병사에게 어머니를 생각하라며 양젖을 보내주는 중대장, 70년대에 벌써 군에서 무인 병영매점(PX)을 운용할 정도로 부하를 배려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진 중대장, 사격을 잘 못하는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부여하기 위해 영점 표적지를 자기 양다리 사이에 세워 놓고 쏘게 하는 담대한 중대장! ‘그때 그 자리’, ‘백암산 접동새’라는 진중문고는 정 소령을 추모하는 맹호회원들의 노래이다. ‘죽어도 살리라…’ 나는 장군이 되어서도 그분의 리더십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곤 했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20) 동기생 중 첫 대령진급… 그러나 복은 시련과 같이 와
나는 국방부 인사국에서 제도 담당에 이어서 근무 담당과 인력 담당을 하면서 동기생 중에서 제일 먼저 대령으로 진급했다. 대령 진급심사가 시작되는 날 새벽에 꿈을 꾸었다. 전날 부대에서 회식을 하고 늦게 들어와서는 아내하고 다음날 새벽기도를 같이 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는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셨던 김진영 장로님(비전2020운동본부장)이 꿈에 나타나서 “새벽기도 가냐? 너 참 착하다. 추운데 옷을 두툼히 입어라” 하시면서 다정하게 직접 옷을 입혀 주시는데 어깨를 보니 파란 견장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때 문이 털커덕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아내가 나를 깨우지 않고 혼자 살짝 새벽기도를 나가는 소리였다. 나는 얼른 뒤쫓아 나서서 함께 갔다. 꿈에 참모총장님이 나타나서 옷을 입혀주시더니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다른 한 명의 동기생과 함께 선두 그룹으로 대령 계급장을 달았다.
대령이 되어 66사단 동원연대장과 국방대학원 1년 과정을 마친 뒤에는 3군사령부에서 근무과장을 하게 됐다. 나는 그곳에서 군생활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최대 고비를 맞았다. 근무과장이라는 직책은 어느 과에도 속하지 않는 부대의 자질구레한 행사나 온갖 애매한 일을 처리한다. 예를 들면 매월 첫째 월요일에는 국기게양식을 한다. 그런데 바로 2∼3일 전에 지휘관 이취임식이 있었다면 이런 경우 며칠 간격으로 전 병력을 모아야 한다. 이때 어느 지휘관은 “이미 병력을 모아 의장 행사를 다 했는데 또다시 병력이 집결하는 국기게양식을 하는 것은 부대 운영에 무리가 있으니 약식으로 하거나 생략하라”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휘관은 “이취임식과 국기게양식은 행사 성격이 엄연히 다르니 또 하라”고 지시하는 분도 있다.
이처럼 지휘관의 개념을 잘 맞추지 못하면 사사건건 스트레스를 받는 자리다. 어떤 때는 부대 안에서 차가 규정 속도 이상을 내면 “근무과장이 질서를 잡지 못해서 그렇다”고 책임추궁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는가. 윗분과의 소통 부재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쉬운 예를 들면, ‘1+1=2’라는 것은 명확한 답이다. OK만 하면 일은 쉽게 끝난다. 그런데 왜 ‘1+1=2’가 되는가를 다시 설명하라고 하면 일이 두 배, 세 배로 늘어난다.
매일 야근이었다. 더 이상 도저히 군생활을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도 “내가 이렇게 군생활을 계속하면 암에라도 걸릴 것만 같다”고 하소연하며 전역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내는 “열심히 기도하며 견뎌보세요. 당신이 나중에 이곳에 와서 그 직책에 있을 때는 베풀면서 살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인내해 보세요”라고 나를 설득했다.
그때부터 잠시 쉬고 있었던 새벽기도를 다시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기도 내용의 90% 이상이 이 직책에서 잘 견디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잔잔한 음성이 들려왔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마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머리를 짧게 깎고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그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다시 시작하자.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로 이겨보자.”
***[역경의 열매] 이철휘 (21) 위기에도 계속된 새벽기도… 드디어 안수집사를
군 생활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지만 반대로 나의 신앙의 불꽃은 활활 타올랐다. 당시 부대교회 홍순영 담임목사님은 나중에 군종감까지 지내신 훌륭한 분이다. 군목 세계에서는 강직하면서도 은혜가 풍성한 명설교가로 통한다. 그런데 그 분이 내가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니까 안수집사를 받으라고 권면하셨다. 그러나 나는 받을 수가 없었다. 믿음이 좋아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서 현 직책에서 잘 견디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었으니 양심이 찔렸다.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말은 못하고 목사님께는 “제가 아직 술을 끊지 못해서 안수집사를 받기는 부족합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그랬더니 며칠 후에 다시 부목사님을 보내셔서 “술은 일단 안 먹는 것을 목표로 하되 지금은 실수를 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줄여 나가면서 안수집사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그렇게 해서 나는 안수집사 직분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내 삶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께 한 발자국 더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람의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장군이 되어 3번째로 보직되어 간 곳은 3군 인사처장이었다. 군 생활 중 나를 가장 어렵고 힘들게 했던 근무과장의 상관이 된 것이다. 7년 전, 아내는 나에게 다시 이곳으로 와서 남에게 베풀면서 군 생활을 하라고 했는데 그 말이 실현된 것이다. 지금도 나는 하나님께서 아내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라 믿는다. 안수집사를 받은 후에 군산지역에서 연대장과 사단 참모장을 하였는데 향군종이신 조남인 목사님의 기도는 큰 힘이 되었다. 그 이후에 육군본부 군무원 담당과장으로 발령 받았다.
그때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는데 3년 반이나 병원에서 고생하시다 소천하셨다. 어머니는 그 당시 대부분의 시골 아낙들이 그랬던 것처럼 절에 다니고 계셨다. 딱히 불심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어른들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불교 신자가 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대학에 가서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을 아시고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다니는 며느리감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없으셨다. 따라서 나도 어머니가 절에 다니시는 것에 대하여 참견하지 않았다. 군 생활 때문에 떨어져 살다보니 그렇게 몇 십년을 지내왔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뇌수술을 하신 분들은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고 의식을 잃게 되면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깨어나지 않으면 운명하시는 것이라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나는 집 앞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 목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어머님의 의식이 돌아오자 나는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설득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전도를 한 것이다. 어머님은 의외로 흔쾌히 세례를 받겠다고 동의하셨다. 할렐루야!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리고 후회했다. 왜 진작 건강하실 때 전도하지 못했을까 하고…. 세례를 받기로 한 날은 정작 내가 부대일로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아내가 목사님과 전도사님을 모시고 가서 세례예식을 베풀었다. 어머님은 목사님의 말씀에 순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셨다고 아내가 전해주었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22) 포천 소년, 소위 임관 25년 만에 별을 따다
2001년도 장군 진급 예정자가 발표되었다. 그 속에 내 이름이 있었다. 포천에서 태어나 어렵게 대학생활을 마치고 육군 소위가 된 지 25년 만에 대한민국 육군의 장군이 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장군 예정자 명단이 발표되던 날은 전투체육을 하는 수요일 오후라 나는 우리 인력획득과원들과 함께 육군본부 근처의 작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통해 들려온 축하전화의 그 감격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나는 진급 예정자로서 51사단 작전 부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아직 대령 계급장을 붙이고 있었지만 장군으로의 예우는 깍듯했다. 사단장 문영환 소장을 통해 사단장이란 어떤 일을 어떤 자세로 수행하는지를 똑똑히 보고 배웠다. 6개월 후에는 수도군단 참모장을 하게 됐다.
보직이 끝나갈 무렵 나는 국방부의 어느 한 직할 부대장을 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직책에 보직되면 다음 진급이 유리하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 직책에 계신 분이 전방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배라서 나를 후임자로 추천했고 그대로 확정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인사명령이 발표될 때는 다른 사람이 보직되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섭섭했으나, 3군 인사처장이라는 나의 새 보직도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는 직책이라서 위로가 됐다. 몇 개월 후 내가 가고 싶어 했던 국방부 직할대장이 전역을 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내가 그 자리에 갈 뻔했던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너는 참 운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막으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는 여러 번 고백하곤 했다.
2002년 여름은 수해가 심했다. 부대별로 모금을 해 언론사에 기탁했다. 나는 군사령부에서 모금한 돈을 기탁하기 위해 모 방송국에 도착했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굳이 생방송에 출연해 한마디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령관 누구누구 외 장병 일동이 모금을 했고 나는 이를 전달하러 온 누구라고 카드를 작성해 제출하고 인터뷰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 저녁 정규 뉴스 후에 수해성금을 보낸 사람들 명단을 자막으로 방송할 때였다. ‘3군사령관 대장 이철휘 외 장병 일동 금일봉’ 그 자막을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 내가 제출한 카드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새 양식에 옮겨 적어 뉴스부로 넘긴 탓이라고 했다. 다음 날과 그 다음 날까지 자막 뉴스를 다시 내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사령관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야! 너 대장됐더라”라고 놀리는 눈치 없는 동료들 때문에 사령관께는 더욱 송구한 노릇이 됐다. 매스컴 타는 것은 가급적 멀리 하는 게 좋다는 선배들의 충고가 떠올랐다.
3군사령부 인사처장에서 수도방위를 담당하는 사단장이 됐다. 전방에서 소대장을 하는 아들 녀석이 특히 기뻐하며 전화를 했다.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소대원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사단장 되셨다고 자랑했더니 장군 아들이 어떻게 전방에 오느냐, 친아버지가 맞느냐고 되묻는데요?” 우리 사회에 한때는 군에 가는 문제 등을 놓고 ‘신의 아들’ 운운한 적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나의 친아들이 컴퓨터 무작위 분류에 의해 최전방에서 소대장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 좀 믿으려는지 모르겠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23) 사단장 부임후 2년간 “예배당 청소는 내 몫…”
사단장 부임 후 첫 주일 환영예배가 진행 중이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중에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강대상 쪽을 비추는데 놀랍게도 먼지투성이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앉아 있는 긴 의자 구석에도 먼지가 쌓여 있었다. 솔직히 그 시간 이후부터는 은혜가 되지 않았다. 예배 후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전속부관과 공관에 있는 병사들과 함께 교회 청소를 했다. 그렇게 2년을 매주 빠짐없이 했다.
하나님의 축복은 넘쳤다. 2005년은 한 해에 대통령,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 부대표창을 모두 받는 영광이 있었다. 참모들은 부대표창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고 즐거워했다. 군 교회를 지원해 주시는 향군종 목사님들의 은혜도 잊을 수가 없다. 자랑스러운 부하들과 10년 후 재회를 약속하고 타임캡슐을 묻은 뒤 사단을 떠났다. 5군단 부군단장을 마친 후에는 다시 3군사령부 참모장으로 보직되었다. 은혜가 넘치는 홍은해 목사님과 함께했던 3번째 선봉대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너무도 즐거웠다. 사령관이신 백군기 대장님의 인품도 훌륭하셨다.
하루는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군단장 인사 후보로 올라와서 몇 가지 질문 좀 하겠습니다.” 나는 군단장으로 나가는 줄 알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명단이 발표될 때 내 이름은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누구에게 청탁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탈락되었다는 소문이 뒤따랐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억울했다. “네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하니 억울하냐? 그러면 네가 잘못하고도 비판받지 않은 일을 생각해 보아라.” 이런 음성이 들려와 위안이 됐다. 하나님께서 모함을 통해 눈동자처럼 지켜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이때 군단장을 나갔으면 2년 후 인사주기상 새로운 보직으로 연결될 수가 없었고 개정된 인사법에 의거, 전역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6개월 후 또 군단장 인사가 이뤄지는 시기가 되었는데도 이번에는 청와대에서 전화가 없었다. 군단장 명단을 발표하는 날,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목사님의 위로기도를 받고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표된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는 앞으로 더 세월이 지난 후에 그 과정을 알게 될 터이지만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이 너무나 분명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군단장이 되었다. 군단장이 되어서는 교회 청소를 할 기회를 잡지 못한 대신 소망교회의 도움으로 리모델링을 하는 데 일조했다.
2작전사령관이 되어서는 대구 인근의 교회에서 하나님 살아계심을 간증하곤 했다. 군선교연합회 김승렬 장로님과 이수교회를 담임하시는 신현진 목사님의 군선교에 대한 열정은 참으로 뜨거웠다.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개최한 민군성회의 열기는 지금 생각해도 은혜가 된다. 두 분께서는 군선교 관련 집회 때마다 나에게 격려사를 부탁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격려사가 아니라 감사의 인사로 제목을 바꿔서 말씀드리곤 했다.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대구를 되살리자는 생각으로 황교안 고등검사장, 김신길 장로 등과 함께 기독 CEO 조찬기도회도 만들었다.
나는 안수집사 16년 만에 장로가 되었다. 장로 안수를 결정하지 못한 큰 원인은 술 문제였다. 술과 신앙과 군생활의 삼각관계는 나에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한때 술을 잘 먹는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런데 장로가 되고 나서는 더 이상 술 문제로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24) 내 삶 원동력은 10여년 지켜온 ‘출근 전 기도’
나는 장군이 되어서는 ‘출근 전 기도’를 했다. 야근 또는 야간 훈련 식사모임 등으로 불규칙하게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아 새벽기도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고, 예배 후에는 잠시 조용히 묵상기도를 드리고 싶은데 꼭 한두 명 가량 통성으로 기도하는 분이 계셔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전역을 할 때까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출근 전 기도를 했다. 관사에서 20∼30분 전에 출발하여 교회로 들어가서 하루의 일정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일정마다 참모나 예하부대 지휘관에게 지침을 주어야 할 내용들을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때로는 중얼거려 보기도 했다. 결심이 서지 않는 일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기도 했다.
이 ‘출근 전 기도’의 효과는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이었다. 먼저 나를 수행하는 전속부관과 운전병을 기도하게 만든다. 그 날 있을 각종 회의, 행사, 신고, 시범 등에서 내가 해야 할 코멘트의 핵심 키워드가 정리되었다. 때로는 부하들의 입장과 상급부대의 고민들을 떠올려 보는 역지사지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 해결되기 어려운 일들도 헤쳐 나갈 묘안이 떠오르기도 했다. 계급과 직책이 개인이 해야 할 모든 지혜를 저절로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출근 전 기도’가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를 만들어 준 원동력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전역식이 있던 날도 나는 ‘출근 전 기도’를 했다. “하나님,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저를 육군 대장까지 높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샘솟는 지혜를 주셔서 부끄럽지 않은 저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인생의 후반전도 모범이 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 원합니다.”
전역 후에는 참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전에는 분야별로 전문가인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처리하던 모든 일들을 이제는 혼자서 하려니 아는 게 없었다. 특히 운전하는 문제는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앞으로는 잘 가겠는데 좌우측 차 사이 좁은 공간에 주차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간간이 대상도 없는 불평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전역 후 오래지 않아 소강석 담임목사님이 부르셔서 할 일을 주셨다. 새에덴교회는 벌써 5년 전부터 한국전쟁 미군 참전용사들을 한국으로 초청하기도 하고 미국으로 가서 위로행사를 하기도 했다. 행사의 실무를 담당하는 해군제독 출신 김종대 장로님을 도와드리는 것이었다. 작년에는 100여 명의 참전 용사들이 내가 사령관으로 있던 2작전사령부를 방문했다. 전 장병과 대구·경북 주민들과 함께 그들을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올해 6월 15일부터 20일까지는 참전용사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판문점과 연합사령부를 방문하고 천안함을 견학하는 등 보은행사를 열었다.
이어 6월 22일에는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참전용사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가졌다. 한덕수 주미대사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미 상·하원 의원들이 참가하여 새에덴교회와 소 목사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나는 오랜 만에 예복을 입고 인사말을 했다.
“먼저 우리나라가 공산군의 침략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대한민국을 위해 피 흘려 지켜주신 참전용사 여러분에게 감사합니다. 둘째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미국의회 의원 여러분과 미국 시민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끝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해야 할 이런 행사를 한·미 유대 강화와 순수한 애국심으로 시행하시는 소강석 목사님과 새에덴교회 성도 여러분에게 군 출신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도 새에덴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25·끝) 전역 후의 소명 ‘십자가 리더십’ 간증에 감사
전역 후 가끔 전국 여러 교회의 요청으로 간증을 하는 경우가 있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나병 환자 중에서 병 고침을 받자마자 딴 곳으로 달려가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와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세울 것 하나 없던 시골 소년을 육군 대장으로 세워 주시고 눈동자처럼 지켜주신 은혜와 ‘십자가 리더십’을 갖도록 지혜를 주심을 감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간증 후에 교회에서 주시는 사례비를 받는 것이 못내 쑥스러웠다. 대부분 사양해 보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이 문제로 소강석 담임목사님께 의논드렸더니 사례비를 모아서 의미 있는 일에 유용하게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이 사례비를 모아서 군종목사님들을 격려하기로 하고 서울 광현교회 간증 때부터 처음 사례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군 출신에 장로이기도 하고 26대 한국기독군인연합회(KMCF) 회장도 했으므로 큰 오해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 군인교회를 위한 헌금과 격려는 가끔 있지만 군목 개인을 위한 격려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을 오랜 군 생활 동안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모은 돈의 액수는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취지를 이해하신 광현교회 김창근 목사님과 독지가 한 분이 일부를 보태 주시고 모자라는 돈은 소강석 목사님이 지원해 주셨다.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군종목사님들이 가족과 함께 짜장면이라도 먹으면서 힘을 내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함께 보냈다. 군 선교의 전장에서 창끝 역할을 하는 목사님들에게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일부 목사님들은 ‘보이스 피싱’으로 오해하고 전화를 끊기도 했다. 제한된 예산으로 군인교회에서 봉사하시는 민간 목사님들을 모두 포함시키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아프다.
이제 한 해가 또 저물어 간다. 나로서는 민간인이 되어 처음 맞는 송구영신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까지 이제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다는 기도를 드려 본 적이 없다. 기도는 내게 무엇을 달라고, 내가 무엇이 되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과 사명을 받는 것이 더 성숙한 모습일 것 같아서이다.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모든 것이 다 감사한 일 뿐이었다.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행복 그 자체였다. 고비고비 내딛는 발걸음마다 희망에 가득 찼었다. 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런가! 이제 겸손의 옷깃을 다시 여미고 또 다시 걸어가야 할 내 인생의 후반전, 내게 가장 적중한 길을 예비해 놓으시고 함께 가자 부르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하여, 이 시간 내가 드리는 새해의 기도 제목은 또 다시 감사, 행복, 희망이다.
“하나님, 부족한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딸 부부와 귀여운 손자손녀들이 건강하게 지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또 한 명의 손자를 더 주시어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분수를 알게 하셔서 분수에 넘지 않는 일을 하니 행복합니다. 아름다운 교회와 열정적인 목사님과 은혜로운 성도들을 만나게 해주시니 정말 행복합니다. 이제껏 오직 한 길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려 했으니, 앞으로도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더욱 힘써 일하고 더욱 힘써 기도함으로 내 이웃에게 희망을 전하는 긍정의 나침반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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