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과 성서정과>
역사
예배 시간에 성서 본문을 낭독하는 관습은 유대교 회당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렇다고 절기에 따른 성서 본문이 그때부터 고정돼있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말도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 같은 교회력이 있었고 예배 시간에 읽어야 할 성서 본문이 있었다는 둥, 또는 카롤링거 왕조 이전에 이미 성서정과가 완성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건 순전히 낭설입니다. 예배역사처럼 교회력과 성서정과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합니다. 실제로,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3년 주기 성서 읽기도 기껏해야 생긴 지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이전에는 1년 주기든 2년 주기든 아니면 그 이상의 것이든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축일을 포함하여 주일 예배마다 사복음서를 낭독한 역사는 5세기 로마 교회 예배서(Liber Comitis)까지 거슬러 갑니다. 하지만, 지역교회가 함께 합의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간헐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일뿐입니다. 교회력과 성서정과의 발전은 혼란스러운 교회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절기와 축일에 맞게 고정된 복음서 본문이 지역교회(주교회)에서 공통적으로 낭독되는 건 대략 7세기 무렵인데, 정확한 시기와 장소를 특정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교회에선 찾아볼 수 없던 서신서 봉독이 갈리아 전례에서 유래한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로마제국의 흥망성쇠가 교회의 역사와 예배의식의 형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상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유럽 역사에 한정해서 볼 때, 서로마 제국이 패망한 후 서방세계는 가히 힘센 자가 주인이 되는 각축의 장이었습니다. 권력자가 수시로 바뀌다 보니 예배 형식과 교회 조직은 조직적이고 통일된 형식을 갖추기 어려웠습니다. 이것이 9세기 신성로마제국이 출현하기 전까지 서방교회에 다양한 전례 예식서가 통용될 수밖에 없던 배경입니다.
서기 800년 카롤루스 마그누스(샤를마뉴)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자 제국의 통합과 함께 서방교회의 통합도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시작합니다. 예배와 관련된 교회력과 성서정과도 바로 이때 통일된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합한 인물이 로마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알퀸(Alcuin, 735-804)입니다. 젤라시오 성사집과 그레고리오 성사집이 8세기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전 것과 달리 알퀸은 교회력 독서 본문에 복음서와 서신서를 함께 넣어 예배에서 사용할수 있도록 만듭니다. 이 원칙은 종교개혁자들뿐 아니라 가톨릭의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의 예배서(Missale Romanum)에도 그대로 수용됩니다. 예배에서 말씀의 전례를 ‘준비 또는 예비 미사’로 이해하는 로마가톨릭 진영과 달리, 개신교회에선 설교 중심의 말씀의 전례가 강조되는데, 그때 설교 본문은 주로 교회력 성서정과에 제시된 복음서 본문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18세기 계몽기에 들어 약간의 변화가 생깁니다. 이전엔 정해진 성서본문에 따라 설교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젠 성서정과에 들어있는 본문의 개수가 늘어나고 설교자의 본문 선택권이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집니다. 1797년 코펜하겐 대학교 신학자였던 야콥 아들러가 만든 예배서(Schleswig-Holsteinischen Kirchen-Agende)에 설교를 위한 신약 성서 본문만 여섯 개나 제공되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물론, 이같은 예배서의 성서정과가 모든 지역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거나 결정된 건 아닙니다. 19세기까지 독일 지역교회에서 각 주일과 축일에는 복음 본문이 지정되어 그것으로 설교가 진행되었다는 정도의 통일성만 말할 수 있습니다. 그후 독일 개신교회는 여러 번의 개정작업을 거쳐 1958년에 6년 주기 교회력 성서정과로 통일하게 되고, 1978년 대림절 첫째 주일 독일 개신교 협의회(EKD) 전례위원회가 완전히 새로운 성서정과를 발표하여 예배를 위한 성구집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특징적인 것은 교회력 절기와 축일에 따른 매일 복음서 본문이 제공되는데, 4년 주기 성구집으로 구성되어 복음서, 구약, 서신서가 제공된다는 점입니다. 이후로 독일 개신교 내부, 특히 독일교회의 주류인 루터교회 연맹(VELKD)에선 성서정과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습니다. 두 개의 흐름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한쪽은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가톨릭과 함께 세계 주류 교회가 사용하기로 논의되고 있던 개정 공동 성서정과(RCL: Revised Commom Letionary)를 사용하자는 측과 다른 한쪽은 독일교회가 독자적으로 다듬은 성서정과를 사용하자는 측입니다.
이런 두 의견은 결국, 2018년 독일 “천 년 이상 서방교회에 권위를 부여해 온 예배에서의 성경 사용 전통은 그대로 유지하되, 이미 '독서 및 설교 본문 순서'에서 상당히 현대화된 (독일교회 성서정과) 형태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유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각주]는데 합의하고, 그 결과물로 2019년 독일 루터교회 예배서(Evangelischer Gesangbuch)엔 기존 성서정과를 약간 수정한 형태를 선보이게 됩니다. 독일의 거의 모든 개신교회 교회력 성서정과는 1978년에 틀이 만들어지고, 2019년에 개정된 4년 주기 성서정과를 따릅니다. 이로써 독일교회는 세계 교회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3년 주기 성서정과와 달리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는데, 유럽의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이탈리아, 러시아에 있는 일부 독일어권 교회들과 리투아니아와 슬로바키아 루터교회에서 이를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루터교회는 독일교회처럼 중세 교회력 성서정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대 독일 교회의 노선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알퀸이 마련한 틀을 바탕으로 3년 주기 성서정과로 발전시켰고, 이들의 3년 주기 성서정과는 20세기 로마가톨릭의 전례 개혁에 영향을 주어서 3년 주기 교회력 성서정과(Ordo Lectionum Missae)를 마련하는 토대가 됩니다(1969년). 그리고 이것이 후에 현재 가톨릭과 세계 교회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개정 공동성서정과(RCL)의 원형적인 유래가 됩니다.
이쯤 해서 유럽의 개혁파 교회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장로교회라고 하는 게 더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북미와 달리 독일과 스위스 개혁파는 교회력과 성서정과에 큰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교회력 설교보다 연속 강해 설교가 여전히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스위스 개혁교회에선 지금까지도 교회력 성서정과 도입을 공식적인 차원에서 반대합니다. 구습에 저항하고 성서 말씀만 순수하게 설교하는 게 16세기 개혁파 정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지역교회에선 독일어권 교회에서 제공되는 설교 보조자료는 압도적인 비율로 독일 개신교 협의회(EKD)의 4년 주기 성서정과 자료라서 그 영향을 피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3년 주기 성서 읽기
이제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교회력 성서정과를 알아볼 차례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력’, 또는 ‘교회력 본문’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구분하면, 교회력은 교회에서 사용하는 교회의 활동주기로써 교회 절기와 축일을 담은 예배력입니다. 여기에 따라붙는 성서 본문들은 ‘교회력에 정해진 성서 본문’이라해서 ‘성서정과’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교회력 성서정과의 공식 명칭은 ‘개정 공동 성서정과’(Revised Common Lectionary)입니다. 이 공동 성서정과는 북미 공동 정과 위원회(Consultation on Common Texts)와 국제 영어권 예배위원회(English Language Liturgical Consultation)가 함께 만들어낸 열매입니다. 1994년 공개된 이 성서정과는 9년간의 시험 기간을 거친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CCT 회원으로 미국 가톨릭 주교회와 캐나다 가톨릭 주교회, 미국 루터교회(ELCA, LCMS), 북미 성공회, 장로교, 감리교 등 미국과 캐나다의 대부분 교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만들어진 교회력 공동 성서정과는 북미지역뿐 아니라 영국과 호주에서도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각 교회의 여건에 맞게 수정하는 방식으로 전 세계 교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교회력 성서정과입니다. 여기에는 교회력과 절기에 따라 3년 주기(마태/마가/누가) 성서 본문이 제공되는데, 시편 구약 서신 복음서가 주일과 특정 절기와 축일에 맞게 제공됩니다.
글.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