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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곡농협 원로청년대학 강의> 삶과 죽음 ----<목차>----------------------------------------------------------- 시작하며/ 바보하인 이야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죽기를 싫어한다/ 죽은 뒤 저 세상은 있는 것인가? / 사람이 죽으면 정말 윤회하는가?/ 윤회의 과학적 증명/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 맺음말(어떻게 살아 야 하는가? --------------------------------------------------------------------
시작하며 반갑습니다. 방금 사회자로부터 소개받은 소현에 사는 정석준입니다. 이렇게 모두들 건강한 모습을 뵈오니 무엇보다도 반갑습니다. 이 여름날, 무더위를 무릅쓰고 저의 강의를 들으시려고 찾아주신데 대하여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조금 전 저의 대한 소개 말씀 중에도 언급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저는 그동안 경주불교중․ 고등학생회, 경주불교청년회, 경주교도소 수형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교도소에는 수형자의 교화를 위해 매주 월요일에 기독교, 수요일에 불교, 금요일에 천주교 집회가 열이고 있습니다)는 많이 해 보았습니다. 이들은 나이나 교육 수준이 비슷하고, 또 불교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강의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강의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것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강의였습니다. 1982년(한 30여년 전) 제가 경주불교청년회장으로 있을 때, 경주에서는 처음으로 옛날 경주시청 옆에 있는 법장사에서 어린이 여름 불교학교를 개최한 바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한 150여명이 참가 하였습니다. 청년회에서 주관한 행사였기 때문에, 제게 한 시간의 특강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 지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어린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해야 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그에 못지않게-오늘 강의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 앞이라면 뻥튀기도 좀 하고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을 터인데, 이 자리에는 형수님도 계시고, 집안 형님도 계시고 이웃에 사시는 분도 계시고, 저보다 나이 드신 분들도 많이 계셔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섶니다. 요즈음은 전국 지자체에서는 유명 강사들을 초빙하여 교양강좌를 많이 하고 있고, 경주시에서도 화백포럼 강좌를 한 달에 두 번 하고 있는데, 강의 주제가, 어떻게 하면 부자 되는가?,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사는가?,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가?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기며 사는가?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돈, 출세, 건강, 성공 등 이런 세속적인 것들에 관심을 많이 갖기 때문에 그런 강의를 많이 하고 있고, 또 그런 강의가 인기를 끌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농협대학 강사진을 보니 전국을 무대 삼아 강의로 먹고사는 이른바 스타강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저명한 강사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저의 강의를 들으면 아마 실망을 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도 매일 맛있는 음식만 먹으면 그 맛의 진가를 모르듯이, 저 같은 사람도 한 두 사람씩 끼어있어야 명강사들의 강의가 더욱 빛이 날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늘 될 수 있는 한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저도 그동안 강의를 많이 들어보았는데, 들을 때는 귀가 솔깃했지만, 나이 탓인지 몰라도 듣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런데 옛날 이야기는 기억에 오래 남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이야기 속에 내가 하고자하는 뜻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바보하인 이야기 옛날 어떤 마을에 천석이나 하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의 집에는 많은 하인이 있었는데, 그 하인들 가운데 바보하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식전에 바보하인에게“아침밥을 먹고 시장에 다녀와야 하니 그렇게 알아라.”하고 일렀습니다. 그 바보 하인은 힘이 장사인 까닭에 시장에 데리고 가서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올 심산이었습니다. 주인이 아침밥을 먹고 그 하인을 찾았으나 하인이 도통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집 안팎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인이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야 빈 지게를 지고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그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디를 갔기에 이제 나타나느냐?” “아침밥을 먹고 시장을 다녀와야 된다기에 시장을 다녀왔습니다.” “이 사람아 시장을 가면 무슨 일인가 물어보고 나와 같이 가야지 자네 혼자 갔다 오면 어떻게 한단 말이야.” “어쩐지 시장을 다 돌아 다녀도 제가 시장에 무엇 때문에 왔는지 몰라서 그냥 왔습니다.” 하인의 대답을 들은 주인은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마침 주위를 살펴보니 조그만 막대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집어서 하인에게 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네가 바보라는 상으로 주는 것이니, 너보다 더 어리석은 바보를 만나거든 전해주고 만나지 못하거든 네가 죽을 때까지 보관하여라.” 바보 하인은 비록 바보였지만 그것이 자랑스러운 막대기가 아닌 줄 알고, 자기보다 더 못난 바보를 찾아보았지만, 그런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기 방에 그 막대기를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주인 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 바보 하인이 들어가 보니, 주인 영감이 방 한가운데 누워서 신음하고 있고, 가족들이 주위에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왜 집안 식구들이 울고 있고, 주인마님은 앓고 계십니까?” “내가 멀리 갈 것 같아 이러는 모양이다.” “마님께서 멀리 가시다니요? 어디로 가십니까, 동쪽으로 가십니까, 서쪽으로 가십니까, 아니면 북쪽으로 가십니까, 남쪽으로 가십니까?” “어느 곳으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느 쪽으로 가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로 가십니까?” “무슨 일로 가는지도 모른다.” “가시는 길이 멉니까? 가깝습니까?” “먼지 가까운지 그것도 모른다.” “노자는 얼마나 듭니까?” “그것도 모른다.” 이 말을 들은 바보는 재빨리 자기 방으로 가서 단장을 꺼내 주인마님에게 전하면서“이것은 나으리가 가지십시오.” “이것이 무슨 막대기냐?” “주인님이 바보상으로 저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까? 주인 마님께서 나보다 더 못난 바보에게 전하라고 하셨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주인 나으리가 저만 못한 바보이기에 드리는 것입니다. 주인마님은 먼 길을 가신다고 하면서 가는 곳도 모르고, 가는 쪽(방향)도 모르고, 노자가 얼마나 드는 지도 모르고, 무슨 일로 가는지도 모른다 하시니, 저보다 주인마님이 더 바보가 아니십니까?” 이 이야기는 불교『백유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 바보하인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 속의 바보 하인이나 주인마님만이 바보이고,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떻게든 바보하인이나 주인 마님같은 바보는 면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바보를 면하기 위해서는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죽은 뒤의 저 세상은 과연 있는 것인지,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이 죽으면 정말 윤회하는 것인지 알아보고, 끝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여러분과 함께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해방 직 후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은 50살을 겨우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해 말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자의 평균 수명은 79세, 여자의 평균 수명은 82세라고 합니다. 2~30년 전만 해도 한 동네에 회갑을 넘긴 노인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 부모가 회갑 때가지 살아 계시면 큰 경사로 알고, 온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함께 축하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인생은 육십부터', ‘육십은 청춘'이란 말이 있듯이, 회갑나이는 노인 축에 끼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회갑연을 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고, 그 대신 칠순잔치를 많이 하고 있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공학자들은 인간의 건강과 수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밤잠을 설쳐가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미 1953년 왓슨에 의해 DAN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였고, 1997년 영국 에딘버러의 로슬린 연구소에서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켰으며, 2003년 유전자의 비밀을 밝히는 인체 게놈프로젝트를 완성하여, 인간의 의도대로 유전자를 조작해 각종 질병의 치료는 물론 대물림되는 체질마저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의학자들은 향 후 5~10년 이내에 현대의학으로서는 해결하지 못하는 암이나 에이즈를 완전 정복하고, 20년 이내에는 인간의 수명을 130세까지 연장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학이나 유전공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지난 가을 친구 몇 명과 함께 남산 등산을 갔다가 팔각정에서 10년 만에 한 동기생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생이 대뜸 한다는 말이“야, 니 와 이리 늙었노?'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나는 어디가면 내 나이로 안 보는데(실제 나이보다 적게 보는데)…내가 보니 니가 더 늙었구만?"하는 생각이 번쩍 뇌리를 스쳐지나 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늙어가는 것은 잘 모릅니다. 남은 늙어도 자기는 안 늙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아야 하는데, 친구는 늙어도 자기는 안늙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른바‘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자 말자 달려가고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어디인가요? 기실(其實)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곧 늙어가고 죽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이미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종착역이 저만큼 보이는 곳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종착역이 어디인가요? 그것은 제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말이기에 하지 않겠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이 "시간은 돈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하루가 지났다는 것은 내 생명이 하루 단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것은 내 생명이 일 년 단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흐르는 시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잠시 잠깐이 하루가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됩니다. 그러는 사이 해가 거듭되면 병들어 결국은 길기만 한 것 같은 인생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이 세상에 확실한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안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현재 살아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도 부인할 수없는 사실입니다. 그러함에도 사람들은 나와 내 가족의 죽음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3대 독자를 잃은 한 과부가 비탄에 빠져서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울기만 하다가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와서 슬픔을 하소연하였습니다. “부처님 저는 오직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갑자기 중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모자의 정이 깊어 어쩔 수 없으니 제발 저의 아들을 살려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살리고 싶으면 지금부터 거리로 들어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불을 얻어 오라.” 과부는 이 말을 듣고 기뻐 날 뛰며 성안으로 들어가 집집마다 외치고 다녔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습니까? 나는 불을 얻어 자식을 살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너는 정신이 돌았구나.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데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이라니…썩 나가거라.” 가는 집마다 과부에게 사람이 죽은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과부는 불을 얻지 못하고 맥이 빠진 채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로 돌아왔습니다. “불을 얻어 왔느냐?” 부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물으셨습니다. 그때서야 그 과부는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을 알아 차렸습니다. 부처님을 우러러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슬픔의 그림자가 지워져 있었습니다.(잡비유경)
사람은 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한국인의 사망률 1위는 각종 암으로 인한 사망(26.3%)이고, 2위는 뇌혈관질환으로 인한 사망(13.9%)이며, 3위는 급성심근색으로 인한 사망(7.3%)이라고 합니다. 늙그막에 암이나 뇌출혈로 쓰러진다면 본인의 고통은 말 할 것도 없고, 간병하는 가족들이 겪는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구구팔팔 이삼사'란 건배사가 크게 유행을 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구십구세까지 병치레 안하고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아픈 뒤에 죽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이 건배사대로 되었으면 오직 좋겠습니까만 인생사가 어디 뜻대로 대는 것입니까?. 노인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잠자듯이 죽는 것"이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잠자듯이 편안하게 죽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50대 중반 이후 종교를 찾는 경향이 부쩍 늘어난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심리학자은 '마음의 평안' 또는 '사후에 대한 불안감'때 문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죽음이 불안으로 다가오는 것은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옛날에 장조류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장조류의 소꼽 친구 중에 도인 스님이 있었는데, 그 스님이 선정 삼매에 들어보니 장조류의 명(命)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조류를 찾아가서 권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자네도 이제 염불도 좀 하고 참선공부도 좀 하게." "나도 그럴 생각이라네, 그런데 다음의 세 가지를 다 이루고 난 뒤 그렇게 하겠네." "그 세 가지가 뭔가?" "첫째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좀 더하여 돈을 벌이는 것이고, 둘째는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내는 일이고, 셋째는 아들딸들이 잘 사는 것을 보는 일이라네." 오늘 여기 계시는 분들에게 누가 이런 권유를 해 온다면(인생 공부 좀 하라고 한다면), 아마 장조류와 별반 다름없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장조류의 첫 번째 대답은 아직은 돈을 좀 더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글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장조류가 농사꾼인지, 장사꾼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 아직-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장조류나 우리들이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대게 입을 것 안 입고, 먹을 것 안 먹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이러한 부모님들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요? 그리고 그렇게 알뜰살뜰 모아서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한들 그 재산이 얼마나 오래 갈지도 의문입니다.“머니(돈), 머니해도 머니가 제일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돈이라고 하는데, 왜 돈을 돈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고 해서 돈이라고 한답니다. 저승에서 현대 정주영회장이 삼성의 이병철 회장을 만났는데, 정주영 회장이 이병철 회장에게“형님 버스비가 없어서 그러니 500원만 빌려 주세요?"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이병철 회장이 무엇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자네도 이승 올 때(죽은 뒤에는 저승이 이승이 되고 이승이 저승이 됩니다), 돈 한 푼 못 가지고 왔나?. 나도 한 푼도 못 가지고 와서 무일푼이라네."라고 하더랍니다. 옛 말에 3대가는 부자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재물이란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을 뿐 영원히 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승 갈 때 한 푼도 가져 갈수 없는 것이 또한 재물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지 않습니까?. 재물뿐만 아니라 명예나 지위 또한 영원히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내가 그 직을 맡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영원히 국회위원 줄 알고, 시장인줄 알고, 경찰서장인줄 알고 목에 힘주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을 많이 보는데, 이런 사람은 아직까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은 돈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올바른 생각,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심어주는 일일 것입니다. 즉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고, 웃어른을 받들 줄 알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를 심어주는 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 줄 참된 유산이 아닐까요?.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웃어른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경로효친(敬老孝親)사상을 윤리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웃나라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란 칭송을 받았으며, 공자님 같은 분은“동방의 예의 바른 나라인 동이(東夷)에서 살고 싶다."고 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미풍양속은 해방 이후, 물릴 듯 밀려오는 서구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관계로, 또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대가족중심사회에서 핵가족중심사회로 급격하게 이행되는 과정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경로효친사상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텔레비전에서도 집중 보도된 바도 있지만 지금 전국 각지에서 노부모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고 합니다. 그중 제주도에서 유기하는 사례가 가장 많다고 하는데, 그 이유인 즉 다시는 부모가 집으로 찾아 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장조류의 두 번째 대답은, 아들 딸 시집 장가는 보내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부모로써 당연한 의무이자 책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도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얼마 전 어떤 모임에 갔더니, 평소에는 술을 권해도 사양하기만 하던 친구가 소주를 연거푸 몇 잔 들이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느냐?"하고 넌지시 물어 보았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마누라하고 한바탕 싸우고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늙그막에 마누라하고 싸울 일이 뭐 있느냐?"하니까, 그 친구가 핏대를 세워가며 열변을 토하는데“아 글쎄, 아들놈이 금년에 서른여섯인데, 그동안 선을 수십 번도 더 보고, 모두 싫다고 하더니, 한 달 전에 선을 본 아가씨에 대해서는 싫다는 소리를 안해서‘이제는 며느리를 보게 되는가 보다'하고 속으로 잔뜩 기대를 했지. 그런데 아들놈이 통 말을 하지 않아서, 한 2주전쯤에 아들에게‘어떻게 잘 되어 가느냐?'하고 물어 보았더니 아들놈이 한다는 소리가‘그 동안 몇 번 만나 보았는데, 통 필(느낌)이 오지 않아서 더 이상 안 만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들으니 화가 치밀어 올라 마누라하고 의논한 끝에 금장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얻어‘너 혼자 한 번 살아 보라'며 내쫓아 버렸지.‘아들놈이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 것은 부모가 해 주는 밥 먹고 직장에 다니니 편해서 그런가 보다. 고생을 좀 해 보아야 정신을 차리겠다'싶어서 그렇게 했지. 그런데 마누라가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 되어서 아파트에 찾아가 보았던 모양이야. 가서 보니 청소 상태는 엉망이고 아침밥도 굶고 회사에 다니는 것 같아 나 몰래 반찬을 해다 주고 방청소도 해 주었는데, 그 사실을 난 오늘에야 알고 마누라에게‘고생 좀 하도록 내버려 두지 왜 그렇게 했느냐?'고 하였더니,‘그럼, 아들이 굶고 다니는데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요?'하고 막 대들지 않은가? 그래서 한 판 싸우다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아들이 서른여섯이면 나는 걱정도 안하겠다. 우리 딸은 서른아홉인데, 지난 해 설에 친척들이 와서 "너는 왜 시집 안가느냐?."고 한 소리씩 하자 "스트레스 받아 못 살겠다."하며, 아예 짐을 싸가지고 나가 버렸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처녀 스트레스 1호가 뭔지 아십니까?니는 왜시집 안 가노?”랍니다. 앞으로 다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때에는 결혼이란 무조건 해야 되는 것인 줄 알았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은 결혼이란 필수조건이 아니라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며, 좋은 사람(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혼자 살지 억지로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아가씨들은 대부분 직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장조류의 세 번째 대답은 아들 딸 들이 결혼하여 잘 사는 것 보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모든 부모님들의 공통된 바램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결혼을 시켜놓아도 걱정이 태산입니다. 왜냐고요?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즉 3쌍 중 한 쌍이 이혼한다고 하니, 결혼을 시켜 놓아도 의좋게 잘 살지 첫 손자 볼 때까지는 항상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갔습니다만, 도인 스님은 친구인 장조류에게 아무리 권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고 그냥 절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장조류가 사망했다는 부고장이 날아왔습니다. 스님은 문상을 가서 조문하기를, 나의 친구 장조류여! 내가 참선, 염불을 하라고 했지 그러니까 친구는 세가지를 다 이룬 뒤에 한다고 했지 염라대왕 그 양반 분수가 어지간히 없네. 세가지 일을 마치기도 전에 갈고리로 끌고 가다니. 스님의 조문은 염라대왕을 나무라는 듯이 지었지만, 세상일에 매달리다 보면, 인생 공부를 할 시간이 없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불시에 저승사자가 밀어 닥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후다닥 정신을 차려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입니까?
옛날 어떤 사람이 악한 짓만 하다가 명이 다하여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저승사자는 그 사람을 염라대왕 앞으로 끌고 가서 "대왕이시여 이자는 세상에 살아있을 때 부모에게는 불효했고, 스승과 어른을 공경치 않았으며 갖은 악행만 일삼았습니다. 이 사람에게 적당한 벌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저승사자의 말을 들은 그는 염라대왕에게 "대왕님 저는 살아생전에 염라국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다음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더라면 제 인생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대왕님 정말 너무 하셨습니다.”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너는 내가 보낸 세 명의 사자(使者)를 못 보았단 말인가?” “못 보았습니다.” “너는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을 못 보았단 말인가?” “그런 사람은 수없이 보았습니다.”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이 내가 보낸 사자니라. 너는 그런 사람을 수 없이 보고도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느냐. 너는 이제 죄에 대한 업보로 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너의 부모나 형제, 자매 친구나 친척이 한 일이 아니고 네 스스로가 받아야 한다.” 염라대왕이 말을 마치자 저승사자는 그를 끌어다가 활활 타는 불구덩이 속에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노인과 병자와 사자(使者), 우리는 누구나 이 세 명의 사자를 수없이 보고 듣고 만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건성으로 지나치기만 할 뿐 정작 저 세 명의 사자가 나에게 보내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저 세 명의 사자가 나를 직접 찾아왔다는 엄연한 사실을 느닷없이 통고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지나온 자신의 인생이 너무 잘못 투성이였고, 나쁜 일 투성이였고, 후회 투성이였음을 알고 다시는 나쁜 일 않겠다고 애걸복걸 해 보아도 세 명의 사자가 직접 나에게 다가온 후에야 무슨 소용이 있을 것입니까?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죽기를 싫어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굼뱅이도 건드리면 죽은 채 얼마동안 꼼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종의 위장전술이죠. 그러나 태어난 자는 누구도 예외없이 언젠가는 죽기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록펠러> 미국에 록펠러(1839~1937)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대에 자수성가하여 세계적인 갑부가 된 사람이며, 아흔아홉(99세)살까지 장수한 사람입니다. 그만하면 누가 보아도 참으로 행복하게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록펠러는 만년에 이르러 위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암이란 지금의 발달된 현대의학으로도 웬만해서는 고치지 못하는 병인데, 지금부터 70년 전인 그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갑부로서 온갖 부를 누렸고, 또 아흔아홉 살의 천수를 누렸으니 그만하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한 데도, 그는 자기가 암에 걸려 곧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자 도저히 그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명을 10년도 아니고, 3년도 아니고 단 1년만 더 연장시켜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온 세계에 광고를 냈습니다. 그 광고비만도 이백만불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록펠러가 낸 광고를 보고 그 엄청난 돈도 욕심이 낫겠지만, 록펠러를 한 해만이라도 더 살려 놓으면 자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란 욕심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들이 찾아와서 온갖 처방을 다 내놓았지만 결국 록펠러는 아흔아홉 살에 죽고 말았습니다. <진시황> 그 유명한 진시황(기원전 259~210)의 경우는 또 어떠합니까?. 그는 중국 춘추 전국시대 6국을 정벌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대제국 진나라를 건국한 만고의 영웅가운데 영웅입니다.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보니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좋은 물건, 좋은 음식, 좋은 옷, 미인들은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자기가 거처하는 궁궐을 지어 아방궁이라 불렀는데, 궁궐의 길이가 무려 칠백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한양의 궁궐둘레가 40리라 하니, 아방궁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뒷날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아방궁을 불태웠는데 석 달 동안이나 탔다고 합니다. 진시황이 이렇게 천하를 자기 것으로 하여, 호화스럽게 살면서도 딱 한가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자기 목숨이지만 이것만은 자신의 권세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나고, 기운은 자꾸 쇠약해져서 마침내는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천하에 영을 내려 죽지 않는 불사약(不死藥)을 구해오는 사람에게는 수만금의 상금을 주고 벼슬도 내리겠다고 방방곡곡에 방을 붙였습니다. 그러자 얼마 뒤에 서시(徐시)라는 사람이 나타나 진시황에게 아뢰기를 "여기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면 바다 한 가운데에 삼신산(三神山)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그곳에 불로초(不老草)라는 약초가 있는데, 그 약초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시황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그 약초를 케 오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서시가 대답하기를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3천명과, 그들을 싣고 갈 배만 준비해 주시면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시황은 곧 영을 내려 동남동녀 3천명과 그들이 먹을 식량과 의복 등을 수십 척의 배에 실어 보내어 삼신산의 불로초를 케 오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진시황의 호사가 넘치다보니 사람의 힘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공연한 짓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진시황의 욕망을 이용하여, 처녀총각 6천명을 데리고 저 바다 가운데 있는 좋은 무인도 섬에 가서 자기의 왕국을 하나 만들어 왕 노릇 해 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남쪽 남해 금산 밑에 가면 서씨각(徐氏刻)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시가 중국을 출발해서 남해 앞을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록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어찌되었던 서시는 처녀총각 6천명을 배에 싣고 제갈 길로 가버렸고, 이를 알리가 없는 진시황은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불로초를 구해오기를 가다렸습니다. 결국 진시황은 자기가 서시에게 속은 것을 알고 원통해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렸습니다. 진시황은 죽어도 그냥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서, 죽고 난 뒤에 자기의 무덤을 생전의 아방궁처럼 꾸미도록 엄명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최근 진시황 무덤을 최근 발굴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데, 전세계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가보았습니다만, 경주에 있는 왕릉을 거기에 비하면 능도 아닙니다. 가히 산이라고 해야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만큼 큰 릉이 진시황릉입니다. 진시황은 임종 시에 내가 죽은 뒤에 내가 먹든 안먹든 3끼 음식을 차려 올리고, 궁녀 가운데도 가장 아름다운 궁녀 3천명을 뽑아 늘 자기 옆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자기의 무덤이 있는 방을 지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진시황이 죽고 난 뒤에 신하들은 그의 명령대로 궁녀 3천명을 뽑아 묘안에 넣고 그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출입문을 봉해버렸습니다. 진시황이 죽은 뒤, 유방과 항우가 들고 일어나 진나라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항우가 먼저 함양에 들어가 아방궁을 불태우고, 진시황의 묘를 파헤쳐서 그 속에 갇혀있던 3천명의 궁녀를 구해내어 제갈 길로 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우도 그 3천명의 궁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궁녀는 남 주기가 아까워서 자기가 차지하였으니, 그 미인이 천하에 유명한 우미인입니다. 나중에 항우가 유방과 싸우다가 대패하고 오강(烏江)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천하를 덮어도 때가 이롭지 못하니 천리마도 앞을 달리지 않는구나 천리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거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나는 어찌할거나. 사람의 욕심이란 이와 같이 허무할 뿐만 아니라 그 욕심으로 인해 자기와 남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진시황이 아방궁을 짓고 거대한 무덤을 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했겠습니까?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눈물 위에서 진시황은 일시적인 행복을 누렸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삼천궁녀를 그 속에 가둬두고 춤추게 하는 등, 별별 짓을 다 했어도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죽은 뒤의 저 세상은 있는 것인가? 육신의 죽음은 생(生)의 끝인가. 또 다른 생의 연속인가? 저 세상-천당과 지옥은 정말 있는 것인가? 윤회한다는 것이 사실인가?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이 문제는 정말 난제(어려운 문제)요 수수께끼요 아포리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형이상학적인 문제로써, 과거에는 철학과 종교에서 18세기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라는 사람이 사후의 문제는 논증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철학에서 제외시켜 버림으로서 오늘날에는 종교의 영역에서만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세가 있기는 뭐가 있어?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한 일 하라고 공연히 지어낸 이야기이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하루살이가 어떻게 내일이 있음을 알겠으며, 가을 한철 사는 메뚜기가 어떻게 이듬해 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까? 인간은 그 알량한 지식으로 죽으면 그만 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4대성인이라면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를 들고 있는데, 그중 공자님은 살아 계실 때, 십대제자의 한 사람인 자로가 하루는 공자에게“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물으니, 공자께서 대답하기를“금생의 일도 다 모르는 데, 내생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유교는 매우 현실적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유교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에는 내세관이 없기 때문에 유교를 종교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지금까지 늘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공자님을 제외한 다른 성인들은 한결같이 내세를 말하고 있는데, 문제는 내세에 대한 견해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은 뒤에 심판이나 천당이나 지옥도 없고 오직 자유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도교의 장자도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자의 처가 죽자 혜자가 문상을 간 즉, 장자가 토기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혜자가 이를 보고 "한 평생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처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자, 장자는 "그렇지 않다. 내 처가 죽은 것이 이것이 처음이라면 어찌 처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본디 근본을 생각하면 본래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하니 내 어찌 소동을 피우며 통곡하고 슬퍼하겠는가? 그런 짓은 사리를 분별치 못한 행위이니, 이 때문에 곡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보았습니다.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신이 만들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때에도 남자는 남자의 육체, 여자는 여자의 육체, 그리고 유아로서 죽은 사람은 성인의 육체를 가지고 승천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당에 가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이때에 그렇게 가는 것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따라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당에 갈 수 있는가? 그 선결조건은 철저한 믿음, 무조건적인 믿음입니다. 그럼 기독교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이 구세주(救世主)임을 믿어야 하고, 성령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여 태어난 것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이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과 하늘로 승천하신 것, 그리고 이 세상에 다시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다르고, 개신교 내에서도 사뭇 다릅니다. 가톨릭에서는 전통적으로“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루터는“인간은 선행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신앙)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였고, 칼뱅은“인간의 구제 여부는 전지전능한 신의 자의에 의하여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豫定說)을 내세웠습니다. 16세기 초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발을 계기로 벌어진 이 논쟁은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서며 종교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칼뱅이 예정설을 내세운 이유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무조건 천당에 간다면,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기독교의 교리와 모순되기 때문이었습니 예컨대 수능350점을 받으면 서울대학교에서는 그 학생을 불합격시키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도 어쩔 도리가 없이 그 사람을 천당에 보내 주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칼빙은 천당에 가고 못가고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는 대부분 칼빙계통의 장로교파인데,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칼빙은 예정설을 주장하였는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천당간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불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을 같은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것도 아니다(不一不異)라고 봅니다. 즉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은 하나(生死一如)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과 육신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또한 다른 것도 아니며, 마음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육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육신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기 때문에, 그 육신으로써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경우에 마음은 그 육신을 떠나는데, 이것이 죽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집을 짓고 살다가 그 집이 허물어져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새 집을 지어 이사를 가는 것처럼 마음이 육신이라는 집에 살다가 그 육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을 때 그 육신을 떠나는 것이 죽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떠나가는 마음은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자유를 되찾아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육신이 생전에 지은 업(業)의 전부를 고스란히 지닌 채 자신의 업에 맞는 새로운 몸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불교의 윤회설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정말 윤회하는가? 부처님께서는『법화경(法華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 금생에 받은 것이 그것이다. 욕지래생사(欲知來生事)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 금생에 짓는 그대로이다. 전생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받은 것을 보면 전생의 나를 알 수 있고, 내생의 내 모습을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만든 결과이며, 어제의 나는 그 이전의 내가 만든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만들고, 미래의 나는 또 미래의 나를 만들어서, 나라는 것은 과거를 따져 보아도 그 과거가 끝이 없는 것이며 미래를 따져 보아도 미래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무시무종(無始無終)-시작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윤회란 고정불변(固定不變)하는 어떤 주체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면서 계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비는 알에서 애벌레-번데기-나비로 변화하는데, 알과 나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기까지 변하지 않고 옮겨가는 것은 어떤 것도 없지만 알과 나비의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즉 알 속에는 나비가 될 수 있는 조건이 쓰며 있습니다. 이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우리가 짓는 업입니다.
윤회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강원도 설악산에는 신흥사, 백담사, 오세암 등, 절이 많이 있는데, 오세암 대웅전에 조그만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고 합니다. 혹시 오세암에 갔다 오신 분 있으세요? 저는 신흥사와 백담사는 갔다왔는데, 오세암에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현판에 세긴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한문으로 쓰여진 것을 우리말로 풀이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발로 한번 걷어찬 것이 볼 귀 세대로 돌아왔고 떡한 개 준 것이 3년 양식으로 돌아왔네 이와같은 사실이 명백할진데 불자여 모름지기 인과를 한치도 의심하지 말게나. 이 시가 쓰여진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시대 강원도 설악산은 인제군수의 관할이었습니다. 지금부터 한 400여 년 전, 인제군수가 새로 부임하여 초도순시 차 오세암을 찾았습니다. 마침 점심때가 되었는지라 주지 스님이 점심상을 차려왔는데, 워낙 가난한 절이라 달리 대접 할 것도 없고하여 보리밥 한 그릇에 된장과 꼬치 몇 개를 내어 왔더니, 인제 군수가 벌컥 화를 내고 점심상을 뒤엎으며“이걸 나더러 먹으란 말이냐?"하면서 볼기를 3대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엉겁결에 볼기를 맞은 노승이 저만큼 나가 덜어지자 무슨 마음이 들었던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며, 수행하고 있던 아전에게“앞으로 이 절(오세암)에 3년 먹을 양식을 대 주라.”고 분부하고는 훵하니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볼기를 맞은 노승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볼기를 때릴 때는 언제이거, 3년 먹을 양식을 주라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인가? ‘볼기3대 3년 양식, 볼기3대 3년 양식’노승은 이것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몇날 며칠을 씨름 하던 어느 날, 노승의 눈앞에 전생이 훤히 보였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백석이나 하는 시골부자 살았습니다. 섣달 그믐날 점심 때 쯤, 새해 차례에 올릴 떡을 빚어서, 하녀가 쟁반에 담아 주인마님에게 드리려고 가지고 오는데, 집에 기르던 개가 그 떡을 낚아채려고 뛰어오르니, 마루에 앉자있던 주인이 벌떡 일어나서 개의 목을 걷어찼습니다. 그러자 개가‘깨갱갱'하며 저만큼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무슨 맘이 들었던지 떡 한 조각을 떼어서 개에게 던져주니 개는 덥석 그 떡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생의 부자는 죽어서 노승이 되었고, 개는 죽어서 인제 군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인과가 한 치도 어김없이 명명백백한 것을 깨달은 노승은 후세 사람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글을 지어(발로 한번 걷어찬 것이 볼 귀 세대로 돌아왔고 떡한 개 준 것이 3년 양식으로 돌아왔네. 이와같은 사실이 명백할진데, 불자여 모름지기 인과를 한치도 의심하지 말게나) 법당에 달아 두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윤회의 과학적 증명 그런데 근대에 와서 과학문명만이 아니라 정신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영혼이 있다는 것이, 윤회가 있다는 것이 그리고 인과가 분명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윤회한다는 것이 오늘날에 와서 과학적으로 증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첫째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는 대개 두서너 살 되는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나는데, 아이들이 말을 배우면서 전생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곧“나는 어느 곳에 살던 누구인데, 이러이러한 생활을 했다”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따라서 조사를 해보면 모두 사실과 맞다는 것입니다. 흔히 천재니 신동이니 생이지지(生而知之, 태어날 때부터 아는 것)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태어난 뒤로 한 번도 글을 배운 일이 없는데 글자를 다 아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이지지라고 합니다. 1993년(벌써 한 20여년이 지났네요), 4월16일 아침 8시 MBC TV에 부산에 사는 13살 된 정연득이란 아이가 출연하여, 일어로 물으면 일어로 대답하고, 영어로 물으면 영어로 대답하고, 중국어 러시아어 불란서어로 물으면 중국어 러시아어 불란서어로 대답하는 등 5개 국어를 구사하는데, 아나운서가“누구한테 배운 것이냐?”고 물으니“누구한테도 배운 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한국에 태어나기 전에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1968년 일본에서 개최한 동경올림픽경기를 직접 참관하였다고 하며, 그때 상황을 이야기하는데, 사실과 똑 같았습니다. 그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그때 그걸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때 TV에서 보나까 정연득군이 얼굴색이 마치 병자처럼 노랗게 보였고, 몸이 허약하여 학교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고 했는데(5개 국어를 하는데, 학교에 다닐 필요도 없겠지만), 금년 봄에 정연득이 TV에 또 한 번 출연 하였습니다. 정연군은 이제 어엿한 30대 중반의 모습이었고, 몸이 뚱뚱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지금 대구에서 살고 있는데, 텔레비전에 나온 이후 기자들이 하도 찾아 와서 숨어 지냈다고 하며, 이제는 보통사람과 다름없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몇 년 전 KBS 방송에 경북 안동에 사는 초등학교 1학년생인 여자아이가 출연하여 피아노를 치는데, 아나운서가“피아노 누구한테 배웠어요?”하고 물으니“그냥쳐요."라고 답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연득 군이나, 안동에 사는 여자 아이는 배우지 않고 알고 있으니, 다 전생의 기억(배운 것)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이러한 전생기억에 대해 누구보다도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이안 스티븐슨 교수입니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서 사실을 조사하고 확인하거나 다른 학자들을 보내어 조사토록 했는데, 1973년까지 2,000여건의 전생기억을 가진 사례를 조사하여 학계에 보고하고, 그중 대표적인 사례를 뽑아서「윤회를 나타내는 20가지 사례」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는데, 어떤 사람이든 반대의견을 제시하기 어려운 책입니다. 두 번째, 차시환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내 몸뚱이는 아주 죽어 버리고, 남의 송장을 의지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입니다. 1916년 2월26일자 중국 신주일보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중국 산동성에 최천선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무식한 석공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서른 두 살 되든 해에 그만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죽은 뒤 3일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관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부랴부랴 곽을 열고 보니 죽은 사람이 살아나 멀뚱멀뚱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 아빠가 살았다.", “아이구 여보."하며, 그 부모, 자식, 부인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식구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죽었다가 깨어나더니 정신착란이 되어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수일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 기운을 차리고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식구들을 못 알아보고, 또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주위에 붓과 벼루가 있는 것을 보더니 종위 위에 글을 쓰는데, 본시 최천선이라는 사람은 일자 무식꾼인데 글을 아주 잘 쓰는 것입니다. 그 글의 내용인 즉‘자기는 월남에 사는 유건중이라는 사람인데, 병이 들어서 치료하기 위해 어머니가 땀을 낸다고 두꺼운 이불을 씌워 땀을 내다가 그만 꼬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여기 이렇게 와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월남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한자문화권으로, 말은 다르지만 한자를 쓰면 통합니다. 월남 사는 유건중의 육신은 죽어버리고 혼만 중국 산동성에 사는 최천선의 몸을 빌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가 기력을 완전히 회복한 후 중국말을 조금씩 가르쳐서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자꾸 전생에 살던 곳으로 갈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 소문이 나서 중국 북경대학에서 데리고 가서 정신감정을 해 보았는데, 정신은 조금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한 월남에 유건중이라는 사람이 살다가 죽었는지 조회를 해보니 모두 다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참으로 희귀한 일이라 하여 중국 정부에서 이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 연금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최면을 걸어 전생을 알아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분야에 유명한 사람은 영국의 케논 박사입니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도 몇 년 전에 연예인을 대상으로 최면을 걸어 전생을 알아보는 프로를 방영한 일이 있었는데, 가령 스무 살이 되는 사람을 최면을 걸어서 열 살 때로 돌아가면 그때의 말이나 행동을 하며, 세 살 때로 돌아가면 세 살 먹은 어린 아이의 말과 행동을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50년 전에 어디 있었느냐고 최면을 걸면 성명이나 주소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그것을 조사하여 사실과 맞춰보면 모두 일치하는 것입니다. 케논은 1,382명에 대한 전생사례를 수집하여 학계에 보고하고, 1952년에「인간의 잠재력」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케논 보고서」에 의하면 환자를 아무리 치료해도 병이 낫지 않아 최면을 걸어 전생회귀(前生回歸)를 해 보니, 그 병이 전생에서 넘어 온 것을 알고, 그 전생의 발병원인에 의거해서 치료하여, 병을 고친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전생요법인데, 이 전생요법은 요즘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전생투시(前生透視, 불교에서 말하는 숙명통과 유사함)를 통하여 전생을 알아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분야에 유명한 사람은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인데, 에드가 케이시는 사람을 딱보면-사진만 보아도-전생을 알아내는 사람이어서, 사람들은 그를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라하여 기적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에드가 케이시는 2,500명의 전생을 조사하여「초능력의 비밀」.「윤회의 비밀」이란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세계 거의 모든 국가에서 번역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책입니다. 그러면 죽은 뒤에 다음 생이 있고, 윤회를 한다고 할 때 어떤 법칙에 의해서 윤회를 하는가? 내가 내 마음대로 천당을 가고 지옥을 가고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는가? 에드가 케이시의 보고서에 의거해서 살펴보아도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내가 지은대로 받는다는 인과법칙(因果法則)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내가 아주 오래 전에 학생회 법회에 가서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한 학생이 일어나서“방금 법사님께서는 윤회를 말씀을 하셨는데, 윤회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왜 윤회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라고 물으니까, 그 학생이“죽고 나면 끝이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하겠는데, 내생이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니 겁이 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윤회도 없고, 인과도 없으면 저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윤회가 있고, 인과가 있다니 어떻게 합니까? 이는 마치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해를,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지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큰일을 많이 겪게 됩니다. 중학교는 추첨으로 들어가니까 복불복(福不福)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고등학교부터는 시험을 치러 들어가기 때문에 일류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큰일이고, 또 일류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큰일이며,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도 큰일이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는 것도 큰일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나고 죽는 일을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라고 하여 제일 큰 일로 치고 있습니다. 죽는 일이 큰일이란 것은 이해가 가지만, 태어나는 일이 큰일이란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큰일임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사람의 몸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맹귀우목(盲龜遇木)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맹귀우목이란 목숨을 헤아릴 수 없으리만치 오래 산 눈 먼 거북이가 바다 한 가운데 살고 있는데, 이 거북이는 백년마다 한 번씩 바다 위에 목을 내 민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다 위에는 구멍 하나만 뚫린 나무 한토막 하나가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마침 눈먼 거북이가 바다 위로 목을 쑥 내밀 때, 거북기가 그 구멍으로 머리를 뚫고 머리를 내 미는 것처럼, 사람 몸 받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의학적으로도 3억개의 정자 중 단 하나만의 정자만이 난자를 만나 자궁에 들어 사람이 되고, 나머지는 다 자궁 밖에서 죽어 버린다고 하니 사람 몸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 모두, 3억 대 1의 경쟁을 뚫고 이 세상에 나왔으니 다들 장한 분들이십니다. 제가 어떤 강연회에 갔더니 강사가“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부모님의 실수때문"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그 사람은 웃으개 소리로 한 말인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불교적으로 볼 때 내가 태어난 것은 부모님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과 지중한 인연이 이 있어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할 때, 빛보다도 더 빠른 내 마음이 그 속에 들어가서-이것을 불교적인 용어로 탁퇴라고 하는데-하나의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결혼한 지 5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안 생겨, 남편이나 아내 중 어느 한 쪽에 문제가 있는가 싶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았더니, 둘 다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대도 임신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이 될 인연이 없어서 그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즈음 자식들 중에 부모를 잘못 만나서 자기가 고생한다고 부모를 원망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는데, 자기가 부모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나와 놓고 누구를 원망한단 말입니까?(이 강의를 젊은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데). 부모를 원망하는 것은 불교를 몰라서, 아니 생명탄생의 원리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 몸 받기도 어렵거니와, 사람 몸 받았어도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도 잘 사는 나라(부잣집)에 태어나기 어렵다고 했는데, 다행히 우리는 건강한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대한민국에 태어났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아프리카 우간다나 북한 같은 나라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2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나라에 태어났다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때(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이 몸을 제도하지 않으면 또 어느 때를 기약하겠습니까? 다시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계에 태어나거나 인간의 몸을 받으려면, 노느니 염불한다는 옛 말이 있듯이 염불도 많이 하고 참선도 많이 하고 선근공덕을 많이 지어야 합니다.
맺음말(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끝으로 한 말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대답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잘 살아야 하는 것일 것입니다. 잘살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공통 목포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잘 살려면 사람들은 우선 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권세나 지위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이 많아야 한다면 돈을 얼마나 가지면 만족할까요? 저 같으면 한 10억이면 만족할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얼마를 가지면 만족하겠습니까? 이명박 최측근인, 방송통신공사 사장을 했던 최시중이란 사람의 재산은 10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몇 억원에 눈이 어두어 지금 구속 수감 중에 있고, 며칠 전에는 이상득 전의원도 구속되었다는 뉴스를 접하였습니다. 이상득 전 의원이 누구입니까? 그는 6선의 국회의원이자 대통령의 친형으로서, 현 정권 실세 중에 실세가 아닙니까? 그만하면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누린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인데, 몇 억원을 집어 삼켰다가 쇠고랑을 차게된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 최고 갑부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유산 문제로 형제간에 법정다툼을 벌리고 있습니다. 옛 말에 아흔 아홉 섬 가진 부자가 머슴 새금한 섬 뺏어서 100석을 채운다는 말이 있듯이, 100석 하는 사람은 천석꾼이 되고 싶고, 천석꾼은 만석꾼이 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부처님은 법구경에서“설사 히말리야 산(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황금으로 덮는다 하더라도 결코 한 사람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인간의 욕망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정말 끝이 없는가 봅니다. 또 권세나 벼슬(지위)은 얼마나 높아야 만족하겠습니까? 시의원한 사람은 도의원이 되고 싶고, 도의원한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고 싶고, 국회의원 몇 선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합니다. 최고 정상의 자리는 한 자리뿐인데, 요즈음 신문지상을 보면, 여․야할 것 없이 너도나도 대통령하겠다고 야단들입니다. 그들은 말은 하나같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대부분 권력의 화신들입니다. 우리나라는 60대 이후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악착같이 일을 하여 이제 세계 12대 경제부국으로 등장하였고, 지난 6월23일부로 세계 일곱 번째로 국민소득 2만달러, 국민 5000만 명의 20-50클럽의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지금 행복합니까? 현재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국민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맨 꼴찌이고, 자살율은 세계 1위이며, 3쌍에 한 쌍이 이혼하는 이혼율 세계 1위인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잘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빔비사라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왕은 우리 인간들이 목숨을 바쳐서까지 추구하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곧 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언제든지 취할 수 있었고, 맛있는 음식은 항상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모든 것은 왕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항상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외국 군대가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불안했고, 어느 신하가 모반을 꾀할지도 몰라 불안했습니다. 왕자들이 호시탐탐 왕위를 넘보지는 않는지 불안했고(당시 인도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음식에 독약을 넣지는 않았는지 불안했습니다. 그는 하루도 마음이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틈나는 대로 수레를 몰고 부처님을 찾아와서 마음의 위로를 받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가진 것이라고는 분소의 한 벌과 바릿대(밥그릇)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나무 밑에서 잠을 잤고, 맨발로 걸어 다녔으며 남의 집에서 밥을 빌어먹었습니다. “부처님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그래 잘 잤다. 너도 잘 잤느냐?” 이른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깬 부처님과 아난(부처님을 시중들고 있는 부처님의 제자)이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부처님의 일상은 이렇게 늘 행복과 평화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잘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구할 것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원망 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성냄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미움과 질투가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공 포와 불안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강제와 속박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해탈과 자유가 있는 것이 잘 사는 것 이다.”(숫타니파타) 바다에 빠진 사람은 바닷물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순간의 갈증을 이기지 못해 바닷물을 마시게 되면 이내 더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고, 그러다가는 마침내 바다에 빠져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 속에 살면서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 다시 말해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스님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스님 도가 무엇입니까?”그러니까 그 스님이“배고프면 밥먹고 졸음이 오면 잠잔다. 이것이 나의 도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다 그렇게 하는데, 그러면 모두 도가 높고 참선을 많이 한 스님과 같은 것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은“나와는 전혀 같지 않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왜 그렇습니까?"하고 물으니“다른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도 백가지 생각을 하고 있으며, 잠 잘 때에도 천가지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와는 전혀 다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기에 도인의 삶과 우리 중생들의 삶이 차이가 납니다. 도인의 삶이란 밥을 먹을 때는 밥 먹고, 잠을 잘 때는 잠자고, 갈 때는 가고, 올 때는 오는 것으로 족해서 매사가 자연스럽고 걸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갈 적에는 오는 걸 생각하고, 오면서도 가는 걸 생각하고, 밥 먹으면서도 온갖 걱정에 사로잡혀 있고, 잠을 자면서도 공연한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서 걱정 근심에서 떠날 수 없는 우리 중생들의 삶입니다. 옛말에“오만가지 생각이 다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조사를 해보니 사람들은 하루 평균 5만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 5만 가지 생각 중 95% 이상은 걱정거리이고, 또 그런 걱정거리 중 90%이상은 현재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가상의 걱정이라고 합니다.‘걱정도 팔자'라는 옛말이 하나도 허튼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직 않았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오지 않는 미래에 연연하지도 말고, 오직 현재에 충실한 사람 많이 값진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해마다 피는 꽃은 같거니와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모하는 것은 어찌 인간사(人間事) 뿐이겠습니까? 올 해 핀 꽃도 엄밀히 따지면 지난해 피었던 꽃은 아닙니다. 만물은 끊임없이 유전(流轉)하고 모든 것은 물처럼 흐름니다. 똑같은 시냇물에 두 번 다시 발을 씻을 수 없습니다. 흐르는 물이 다르듯이 발을 씻는 나 자신도 늘 변모합니다. 오늘은 오늘로서 영원한 것입니다. 똑같은 하루는 영영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루하루를 천금(千金)보다 귀하게 여기고, 알뜰살뜰 살아야 합니다. 만약 하루를 헛되이 보낸다면 그것은 영원히 헛된 자국을 남기고 말게 될 것입니다.
이상으로 저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에 유의하시고, 한사람도 낙오자가가 없이 명예로운 수료자가 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2012. 7.10. 14:00-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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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바보이야기 카피해 갑니다.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