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권. 무어의 [프린시피아 에티카 Principia ethica].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이것은 논리학에 대한 훌륭한 연습이다.
그는 "善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장장 2백페이지 이상을 소비한다.
그리고 그가 도달한 결론은 "선이란 결국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다! 그는 숙제 풀듯이 논리를 전개해 나갈 뿐이지
신비가들이 하듯이 얼른 결론으로 비약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답게 아주 천천히, 단계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그리하여 결국 신비가들이 내리 것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善은 정의내릴 수 없다. 美도 마찬가지다. 神도 마찬가지다.
사실 가치를 지닌 모든 것은 정의내리는 일이 불가능하다.
이것을 꼭 메모하라. 만일 어떤 것이 정의내려질 수 있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임을 뜻한다. 정의내릴 수 없는 것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아직 가치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철학의 다른 모든 연구분야에서도 그렇거니와 윤리학에 있어서도 윤리학
사상에서 허다히 보는 난해한 문제나 의견이 구구한 것은 극히 간단한
원인 한 가지에 주로 기인하는 것 같다. 그 원인인즉, 여러가지 문제를
해명코자 할 때 그 해명하려는 문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먼저 정확하게
알아 내려고 하지 않고 그저 대답해 버리려는 태도다.
문제의 초점을 명백하게 정해 놓으면 그 문제를 해결해 내기가 쉬운 경우가
많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각도에서만 노력하면 철학상 가장 복잡한
난제, 의견 등은 태반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사실인즉 윤리학의 목적은 모든 선한 사물에 붙어있는 다른 특성들이
어떤 것인가를 발견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자들 중에는
자기들이 이러한 다른 특성에 대해서 이름을 붙일 때 실지로는 그것을
선을 정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은 이러한 특성들이 사실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선과 절대적으로
또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부를 것을 제의하는 바이다.
지금까지의 윤리학적 고찰에 있어서 거의 전적으로 결핍되어 오던 것은
실로 문제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그 "정확성"이었었던 것이다.
철학에서 불합리한 이론을 내어 걸게되는 원인은 실로 이러한
"정의되지 않은 용어"들을 함부로 쓰는데 주로 있는 것이다.
직관만이 어떤 명제를 진정하다고 생각하는데 대한
이유를 제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직관이 등장해야 할 경우란 어떤 명제가 자명하여
사실상 그 명제의 진리성을 증명해 줄 이유들이
하나도 없는 경우라 하겠다.
미덕이라든지 의무라는 용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질 식별해 주지도 않고
그저 어떠한 것들이 미덕 또는 의무인가를 묻는다는 것:
수단으로서 그런지 목적으로서 그런지를 즉 그 자신을 위해서 그런지
그의 결과들을 위해서 그런지를 식별해 주지도 않고
그저 어떤한 것이 현재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것:
어떤 표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이 정당하고 어떠한 것들이
잘못된 것인가를 첫째로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 없이
정당과 부당의 유일한 표준을 구하려고 한다는 것:
또 유기적 통일체에 관한 원칙을 무시한다는 것: - 이러한 잘못의 원천들은
지금까지 윤리학에 있어서 거의 보편적으로 성행해 왔던 것들이다.
정신병자가 말 하기를
나는 이 세상이 미쳤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세상 놈들은 날더러 미쳤대.
그래 제기랄 그놈들 수가 나보다 많으니까
내가 졌단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