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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중국인터넷에 무정장군에 대한 내용이 있길래
번역한 것입니다.
일전에 서프 국제방에 올렸는데 몇일뒤 삭제되었습니다.
무정장군의 생몰과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알수 있는 자료여서
다시 올립니다.(특히 무정장군의 최후는 우리가 배운것과는 약간 다르더군요)
인민해방군 포병 창시자 : 조선 명장 武亭(무정)장군
武亭은 일찍이
武亭은 일찍이 1946년에 북조선공산당의 2인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지위는 매우 빨리 무너졌다. 새로 수립된 국가에서 그는 단지 순수 군사적 자리에만 임명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군사 지위도 1950년 조선전쟁으로 불명예스럽게 끝났다. 비록 그가 사망한지 이미 50여년이 지났지만, 그에 관해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매우 적다. 중국 연변출판사는 1994년에 “武亭장군전”을 출판했다. 그러나 발행부수가 매우 적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조선은 최고영도자를 제외하고는 기타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선전하지 않고 있으며, 한국은 그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역시 모든 평가를 보류했다.
武亭은 1905년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했다. 그의 본명은
武亭은 먼저 문화대학에 입학하여 중국어를 배웠다. 1924년 북방군관학교(일명 동북강무당)에 입학하여 포병교육을 전문으로 배웠다. 武亭은 아직 군사학교 학생신분으로 중국 북방군벌들간의 남구(南口)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곧이은 천진공격전에서 공을 세웠다. 졸업후 포병대위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뛰어난 군사재능으로 겨우22세때 포병 중좌로 승진했다. 1925년 20세때 武亭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는데,당시 중국공산당은 당원이 채 1,000명도 안되는 소규모였다. 그 후 武亭은 군벌부대의 직위를 버리고 제1차 국내혁명 및 북벌전쟁에 참전했다. 1927년 장개석은 공산당을 진압하고 그를 포함한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武亭은 어쩔수 없이 지하로 잠입하여 지하 비밀활동을 하였다. 武亭은 한구(汉口)로 이동하여 계속 활동하였으며, 얼마후 무창(武昌)에서 체포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다. 다행히 무창 법원의 공산주의 법관의 도움으로 중국 공산당 본부가 있는 상해로 탈출할 수 있었다.
상해에서 武亭은 다시 공산당의 정치공작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그는 조직원으로서 상해노동자 폭동을 참가했다. 武亭은 비록 외국인이었지만 그의 군사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총지휘자로 선출되었다. 폭동이 진압되면서 그는 영국군대에 체포되었으나, 2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석방후 武亭은 잠시 홍콩으로 갔다가, 그 후 다시 중국내륙으로 잠입하여 제2차 국내혁명(토지혁명)에 참가하였다. 武亭은 처음에 팽덕회 장군(중화인민공화국 건국후 원수 추대)의 휘하에 있었는데, 武亭은 이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팽덕회의 자서전>에 의하면 “악주를 점령한 후 영, 미, 일 수병들이 여전히 황석항(黄石港)에서 창궐하고 있었으며 성안에 포격을 가했다. 우리는 은밀하게 포대를 설치하고 (당시 단지 나와 조선의 동지 武亭만이 포를 다룰 수 있었다) 적의 접근을 기다리다가 몇 십발 포사격을 가했다. 대략 10여발이 적 군함에 명중했고, 그 후로 감히 적들은 성안으로 포사격을 하지 못했다” 이 전투가 武亭이 중국홍군에서 가장 일찍 세운 전공이다. 서술은 간단하지만 분명히 전과는 찬란한 것이다.
홍군3군단은
1930년 12월부터 1934년 10월까지 장개석은 홍군에 대해 5차례 포위공격을 했다. 제5차 포위공격때 중국공산당 소비에트지구는 대부분 장개석 군대에 점령당했다. 중국공산당은 강서성 서금(瑞金) 부근의 안전지대를 찾기 위해 근거지의 이전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2만5천리 대장정으로
대장정은 하루도 쉬지않고 계속해서 장개석 군대와 500여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거친 기아와 고난의 행군이었다. 당시 대장정이 막 시작했을 때 홍군부대에는 36명의 조선국적 혁명가가 있었다. 그러나, 연안에 도착했을 때는 武亭과 양림(杨林) 2명만 살아남았다. 더구나 양림은 얼마후 전투중에 희생되었다. 따라서 武亭은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武亭은 일찍이 절친한 친구 양림에 대해 회상했다. “대장정이 끝난 후 우리는 1936년2월에 황하를 도하했다. 그때 양림과 나는 유일한 조선인 군관이었다. 양림은 황하도강의 돌격부대장으로 선발되었는데 이것은 죽음을 무릅쓴 위험한 임무였다. 돌격부대는 돌진하여 강을 건넌후 상륙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양림은 총상을 입고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장렬히 전사했다.”
역설적으로 양림의 영웅적인 희생은 武亭의 생명을 구했다. 武亭은 회고했다 “양림 희생후 팽덕회는 당회의에서 많은 외국인 혁명가들이 중국 혁명 사업을 위해 희생됐다. 만약 우리가 계속 그들을 중국에서 죽게 한다면 누가 남아 그들 조국의 혁명사업을 위하여 전투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쓰러져간 동지를 위해 무엇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외국 동지들의 생명을 다시 낭비해서는 안된다. 팽덕회의 호소로 군사위에서 휴식 명령을 내렸고, 나에게 교육명령이 내려졌다.” 이때 武亭은 위장병이 악화되어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팽덕회가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사람은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가 되었다.
1936년 武亭은 홍군대학에서 전략 및 당역사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홍군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군관학교에서 수업도 받았다. 홍군대학 졸업후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에 임명되었다. 1937년말 팔로군 포병부대 재건 임무를 부여받은 후 그는 팔로군 총사령부 포병처 주임으로서 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1938년초 팔로군 총사령부 포병단장에 임명되었다. 홍군에서 武亭은 포병의 최고 권위자였다.
武亭은 재차 과로로 건강을 해쳐 사령부에서 다시 휴식 명령을 받았다. 건강 회복 후 그는 새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 대일작전을 위해 연안에 온 조선청년들을 모집시키는 업무였으며,조선의용군의 창설 업무에 착수했다. 즉 토지혁명시기에 참여했던 10여명의 조선 혁명가들을 골간으로 하여 연안의 조선청년,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조선청년, 또는 동북에서 활동했거나 모스크바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을 모집한한 후 철저한 훈련을 시켰다. 1939년 팔로군 전방사령부(산서성 东南)에 도착하여 팔로군과 함께 항일 전투에 참가했다.
이와 같이 武亭은 이미 외부적으로 조선반일역량의 지도자였으면서도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에서 그의 지위는 변함없이 팔로군 장령이었다. 중국공산당은 武亭에게 조선의용군의 조직 창설을 맡겼으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즉, 광범위한 국제항일통일전선의 모범으로 여겨 국민당휘하의 보다 많은 조선인을 끌어오는 것을 보증할 수 있었다. 동시에,일본군대내의 조선인 사병들을 대상으로 선전을 하여 역시 동일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武亭의 전기적 이미지는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져서 원래 국민당 통제하에 있던 조선의용군(광복군)의 89% 대원들이 낙양(洛阳)、중경(重庆) 등지에서 산서성의 태행산(太行山)으로 대거 귀순해 왔다. 그들은 화북지대 각 분대로 재편성된 후 하북성, 산서성 태행산 등지에 전진 배치되어 적후에서 일본군에 대한 유격전과 와해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항일유격지 기층 당조직 건설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武亭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명망은 계속 높아져서, 조선의 저명한 독립운동 지도자 김두봉(金枓奉)도 중경에서 태행산으로 왔으며, 멀리 조선 국내의 여운형도 연락원 김명시(武亭의 연인)를 서울에서 연안으로 파견하여 武亭과 건국과 관련하여 연합방안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사실,武亭의 명성은 크레물린까지 알려졌다. 1941년 7월 스탈린은 연안에 항공기를 보내 武亭을 소련으로 데려 갈려고 했다. 명의상은 武亭의 비범한 포병기술을 인정하여 그가 소련 전선의 포병부대를 지휘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안전을 이유로 소련으로 파견을 거절했다. 비록 소련행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스탈린의 항공기 지원 사건으로 武亭은 국내외에서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1945년12월 추운 겨울날,낡은 증기기관차에 70여명의 승객이 평양기차역에 도착했다. 승객중에 武亭、
300명의 선봉대가 9월 5일 연안을 출발했고, 이어서 여자와 어린이들이 뒤따랐다. 동북에 도착했을 때 이미 3,000여명으로 증가하였으며 모두 적후 근거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단지 2대 마차 분량의 보급품을 가지고 있었고, 武亭과 김두봉 및 기타 소수인원만 말을 타고 대부분은 걸어서 긴 행군을 했다. 60여일의 힘든 행군후 부대는 심양에 도착했다. 이때가 이미 1945년 11월초였다. 간부들은 병영에 숙소를 정했고, 기타 인원들은 민가에 분산되어 휴식을 취했다. 11월7일,의용군은 조선인학교에서 의용군 군인대회를 개최했다. 武亭은 소련과의 교섭결과를 대원들에게 통보했다. “즉 소수 간부만 귀국허용, 잔여인원은 중국공산당 동북국 지시에 의거하여 7개 지대로 편성(실제 4개지대 편성)하여 한편으론 중국혁명에 참여하고 다른 한편으론 귀국 기회를 기다린다.” 제1지대가 남만(南满)에서 신속하게 창설되었다. 지휘관은 김웅(金雄), 방호산(方虎山), 최인(崔仁);제3지대는 북만(北满)에 창설되었고 지휘관은
11월 20일 귀국길에 오른 간부단은 중조 변경도시 단동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입국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 후 평양 소련군은 비무장, 개인자격으로 입국을 허용하는 통지를 武亭에게 보냈다. 武亭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0일후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했고, 소련군은 열차 한대를 그들에게 배차하여 평양으로 후송해줬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은 평양역에서 차량으로 태평양여관에 잠시 여장을 풀었다. 이때 조선독립동맹 지도자들은 매우 난처한 처지에 빠졌다. 그들은 평양의 정치분위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미래 계획이 없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은 자기의 국가에서 군대를 보유하지 못했다. 단지 그들은 잠깐 머무르는 손님 같은 신세였으며 소련군의 안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 인사들은 계속 직책을 부여받고 여관을 떠났다. 단, 대다수는 여전히 그들의 알 수 없는 운명을 기다리며 여관에서 대기상태였다. 하루는
武亭은 조선인민의 영웅이었으나 소련군은 武亭을 싫어했고 그와 조선의용군에 대해 매우 냉담했다. 그 이유는 소련군이 武亭에 대해 잘 모르는데 오히려 높은 명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군인보다는 문인이 조선의 지도자가 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설령 군인이어야 한다면 차라리 그들이 잘 알고 있는
武亭은 정치투쟁능력이 매우 부족하였으며 권력투쟁에 별로 뛰어나지 못했다. 武亭은 매우 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연안시절에 여러 번 독립동맹의 지도자들과 의견충돌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대다수 독립동맹 간부들과 화합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마지막에는 중국 공산당이 내분을 피하기 위해 武亭을 부득이하게 군사부문만 책임지게 했고 독립동맹의 정치지도권은 비교적 화합적인 인사인 김두봉에게 맡겼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후 수상
1948년2월,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고 武亭은 정식으로 중장계급으로 포병사령관에 취임했다. 같은해 9월9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武亭은 민족보위성 副相 겸 인민군 포병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조선전쟁 발발 후,
미군과 근 1개월의 전투를 통해서 武亭은 미군과 인민군과의 실력차가 매우 크다는 것을 깨닫고, “8월공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에 따라 武亭은 766유격단에 울진방향에서 출발하여 안강리 다리를 파괴하도록 특별명령을 내렸다. 전투는 8월5일부터 24일까지 계속되었다. 인민군이 영덕, 군위를 해방하고, 왜관을 일시 점령하고 인민군의 포탄이 대구시내에까지 도달했다. 12사단은 가장 잘 싸웠는데 한국군 3사단 1만여명을 포항에서 포위하였다. 그러나 해상봉쇄를 할 수 없어서 한국군이 해상으로 의기양양하게 철수하는 것을 눈뜨고 볼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일정부분 승리했지만, 산악지대 작전과 연합군의 공습으로 후방작전이 크게 방해받았다. 동부전선의 인민군 부대는 8월 12일 이후 쌀 한 톨 보급이 없었으며 산악지대에서 자체 조달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8월 16일 이후 전투 능력이 없었으며, 어떤 경우는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부득이 무리한 작전을 감행하였다. 武亭은 766유격단에 유일한 희망을 걸고 유격 작전으로 청도 터널을 파괴하고 연합군의 후방도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러나 766유격단장은 분산침투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고 또한 남한 경계방을 뚫을 수도 없기 때문에 반드시 정규작전으로 돌파전을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뛰어난 유격전 부대는 안강리 지구에서 정규작전으로 심한 타격을 입었으며 분노한 武亭은 유격단을 해체하여 12사단에 편입했다. 연합군의 우세한 화력 및 병력의 계속적인 반격으로 힘에 부친 인민군은 낙동간 외곽으로 물러났다. 8월 공세 실패후,인민군은 사기가 저하된 상황에서 다시 전진을 위해 9월 공세를 준비했다. 객관적으로 전쟁형세는 역전되었다. 인민군은 이미 전면적 공세를 취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으며,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사실 도박에서 올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였으며, 이번에도 武亭은 주공을 맡았다.
9월2일 밤,武亭은 대규모 야간공격을 지휘했으며 전쟁은 매우 순조롭게 개시되었다. 특히 12사단은 한국 수도사단 및 5사단을 연이어 격퇴하고 연합군 동부전선에 약 12KM의 돌파구를 뚫었다. 9월5일에 이르러 미군1기병사단 및 한국군 3사단의 양방향 공격을 격퇴시키고 포항 동쪽을 점령하였으며 8일에는 영천을 점령하였다. 미8군 및 한국군사령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 인민군은 오히려 격퇴당했으며 모든 압력이 동부전선으로 집중되어, 武亭도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그가 사방팔방으로 진력을 다해 반격을 가하려고 할 때쯤인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로 남쪽에 있는 인민군은 완전히 포위되게 되었다.
인민군은 부득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대대적인 철수 명령을 받자 유격전술에 익숙한 武亭은 각사단의 퇴로를 안배한 후 모든 무선통신망을 단절시켰다. 결과적으로 미군뿐만 아니라 평양도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武亭은 큰 타격없이 안동의 사령부에서 원주를 거쳐 삼팔선 이북의 김화로 철수했다,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13사단을 제외하고 武亭 휘하의 나머지 사단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북쪽으로 철수했으며, 간부 역량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평양을 매우 분노하게끔 했다. 왜냐하면 평양은 오랜시간 동안 그들의 행방을 몰랐고, 소련 군사고문은 공개적으로 이를 “개인주의”경향으로 비판했다. 계속해서 武亭은 평양방어를 명령받았으나 만명 미만의 2개 예비사단밖에 없었다. 그는 전멸 또는 포로가 되고 싶지 않아 인민정부가 북쪽으로 철수한 후 가벼운 저항만하고 부대를 인솔하여 철수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정확했다. 왜냐하면 연합군이 이미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수가 제때에 이루어져서 단지 1개 연대의 손실만 입었다. 그러나 쉽게 수도를 포기한 행위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명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여기에 武亭은 간부를 임명할 때 정당한 행정절차를 거치지 않는 것까지 더해졌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예비군단인 7군단장으로 전보 조치되었다. 군인으로서 명예실추였다. 1950년12월21-23일의 조선노동당 제2기 3중전회석상에서 그는 “전쟁중 엄중 과오”처분을 받았다. 武亭의 성격상 그는 분하고 답답함을 억제할 수 없었으며, 정치상으로 그리고 전장에서의 이중의 실패는 훗날의 비극적 결말로 이어졌다.
당시 7군단이 만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하루는 武亭이 부상당한 군관을 데리고 야전병원에 왔는데 그 군관은 팔로군 시절의 부하였다. 武亭은 매우 바쁜 군의관에게 그의 부하를 보살필 것을 요구했다. 매우 불행한 군의관은 그 자리에서 武亭에게 반박했다. : 부상병이 너무 많다. 반드시 순서를 기다려라. 이 “오만”한 태도에 격분한 武亭은 권총을 꺼내 군의관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이 죄행은 엄중해서 그는 즉시 지휘권 및 계급을 박탈당했다. 얼마후 그는 대장정 시절의 위장병이 갑자기 도졌고 중국인민지원군 팽덕회 사령관은 즉시 그를 만주의 가장 좋은 병원으로 후송했다. 그러나 회생할 가망이 없었다. 武亭의 최후 소망은 그의 고국 조선에서 죽는 것이었다. 따라서 1952년 10월 그는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며 얼마후 군인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후 조선 정부는 성대하게 그의 장례를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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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가 유능한 군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절차]를 무시하는 독단적, 독재적 발상을 가진 자로서
절차를 중시하는 행정권력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네요.
그저 게릴라식의 무법적 전투방법만 이해했던 사람인듯....ㅉㅉ
[핵심단어]:절차 !
節次(절차):
★節-마디 절/단계:대나무의 마디를 생각하고 막솟아난 죽순을 보세요.
아무리 작은 죽순이라할지라도 이미 그 속에는 작고 많은 마디가 촘촘히 형성되어있지요.
★次:버금 차 /차례 다음:시작부터 마무리까지는 " 다음"이라는 단계가 꼭 있지요.
죽순 속의 마디하나라도 이상이 생기면 그 죽순은 완전한 대나무로 성장하지 못하지요~
매번 과정 단계의 연속은 완성을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