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열도를 울려주는 신비의 범종
최치원이 글을 지은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에서
-최치원의 4산비 중의 하나-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있는 구산선문의 개창지인 '실상사'에는 특이한 범종이 있다. 이 범종에는 우리나라지도와 일본의 지도가 범종에 새겨져 있다. 일본의 지도는 종을 치는 곳에 있어 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실상사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 철불 약사여래불은 지리산 천왕봉을 향하여 근엄하고 인자하게 앉아 계시는데 이는 청왕봉 과 일직선상에 있는 후지산을 향하여 앉아 계신다. 한국의 기(氣)가 후지산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란다.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 하고 실상사가 망하면 일본이 흥한다" 전설이 있는 호국 도량이 바로 실상사이다.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 범종은 조선조 강화33년(1694)에 주조한 범종으로 현재 보광전에 있는데 예불시간에 일본지도를 타종하고 있다. 종의 형태로서 무게는 800근이고 종을 만든 사람은 김상립 외3인으로 이 종은 실상사 주지었든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 할 때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용머리는 앞을 바라보고 있고 뒤에 붙은 소리통은 형식적으로 작게 만들었다.
이 종에 얽힌 이야기로는 실상사를 중창하고 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종을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나라번창 하기를 기도하며 종을 쳤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는 주지스님이 이 범종으로 인하여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일본지도가 일부 남아 있는데 '훗까이도'와 '규수'지방만 타종 부위에 남아 있어 아침저녁으로 스님들이 울리고 있다.
백두대간의 동쪽 지역은 흔히 경상도로 알고 있으며 그 물은 낙동강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 곳만은 예외이다. 즉 남원시 산내면의 실상사는 백두대간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나 전라북도이며 그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있다(한국하천연구소 이형석확인).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 구실을 하고 있다.
천년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하여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종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령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는 석장승 3기가 있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이 있다.
http://www.silsangsa.or.kr/
▶종 아래 부분에 일본지도가 그려져 있으나 많이 지워져 있다.
▶ 앞면 탑 외쪽 보광전에 법종이 있음
첫댓글 배웁니다 우리가 몰랐던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