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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2011년) 경남문인협회에서 모집한 <경남문학신인상> 소설부문에 당선한
승만석 단편소설 <화려한 오후>를 올립니다.
단편소설
화려한 오후
승만석
백로가 지나자 늦더위가 한여름보다 극성스럽다. 예년과 달리 사흘이 멀다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내린 비로 여름 내내 큰 더위를 모르고 지내다가 요 며칠사이 바람 한 점 없이 쏟아지는 카랑카랑한 햇볕도 그렇거니와 끝물 여름에 매달려 성깔 있게 자지러지는 매미소리에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밤 늦게까지 인쇄원고를 정리한 탓일까. 점심을 먹고 나서 설핏 선잠이 들었는데 요란한 전화소리에 깨었다.
"민수, 추연(秋蓮)선생님께서 돌아 가셨어."
순간 잠이 확 달아나면서 꿈에 벼랑을 오르다가 떨어질 때처럼 아득하다.
"삼일병원 영안실 101호이야. 지금 올 거지?"
영우의 젖은 목소리에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삼일병원으로 갔다. 장례식장 들머리에서 한껏 키대로 자란 해바라기가 검은 씨앗을 문 채 문상이라도 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갠 말간하늘에는 고추잠자리 무리가 붉은 기운을 점점이 뿌리며 어지러운 산란을 한다.
바깥 날씨와 달리 장례식장 안은 서늘하다. 101호실로 들어서자 추연선생의 자부와 지인으로 보이는 몇 사람들이 창망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다. 국화꽃으로 장식한 빈소에는 추연선생의 영정이 평소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아, 자넨가. 바쁠 텐데 뭣 하러 왔는가.라며 손이라도 내밀 것 같다.
구순(九旬)이 넘은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내 손을 꼭 잡던 힘이며 올진 목소리에 몇 년은 더 사실 거라고 하였더니 예끼 이 사람아, 늙은이에게 욕을 보여도 분수가 있지. 그 무슨 악담인가.라면서도 과히 싫지 않은 웃음을 짓던 게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었는데.
“그 참, 사람이란 알 수가 없어. 허리 때문에 그렇지 정신이야 얼마나 온전하던 분이시던가. 안 그러던가. 민수.”
먼저 와 있던 영우가 자리에 앉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 조급하게 말을 건넨다.
“그러게나 말일세. 누가 뭐래도 나는 백수를 채울 거라며 늘 자신만만해 하셨는데. 그러고 보니 당신의 오줌까지 받아 마시며 일어나고자 했던 노력이 다 허사가 되고 말았네 그려.”
거푸 마신 술기운일까. 얼굴이 달아오른다. 체질적으로 좋아하지 않은 술을, 더구나 낮술이고 보니 더 그러한가 보다.
내가 추연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새 천년이 시작되던 해 이맘때쯤이었다. 이 해 봄에 추연선생 부부의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회혼(回婚) 잔치를 아들 내외가 성대하게 열어 주었다. 여름이 되자 선생은 회혼잔치에 참석한 지인들의 축시와 그동안 틈틈이 써 두었던 자신의 한시를 정리하여 수시집(壽詩集)을 발간하려고 출판사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안 영우가 출판사를 경영하는 나에게 선생을 모시고 오게 되면서부터였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식당에 가게 되었는데 선생은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먼저 시키더니 대뜸 나더러 한잔 부어라 하고는 선생도 나와 영우에게 술을 부어주면서역시 술이란 놈은 이렇게 마셔야 제격이다 이 말씀이야.라면서 단숨에 들이키고는 호탕하게 껄껄 웃는 모습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처음 대하는 어른이고 보니 슬그니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수시집은 추연선생 자신의 이름으로 발간되는 최초의 책일 뿐 아니라 부부가 같이 한 육십 평생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은 책이라 신중하게 작업이 진행되었다. 선생은 글자 한 자 한 자는 물론 단어 하나라도 의심이 가면 여러 자료와 사전을 두루 훑어 의심이 풀릴 때까지 세심하게 살피었다. 선생은 수시집이 완성되기까지 두어 달을 넘게 매일 출판사에 출근하다시피 하였는데 늘 아들이 모시고 왔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아들은 선생과 달리 무장(武將)을 연상하리만큼 기골이 장대하였다. 올 때마다 먼저 인사를 하면서 싱긋 웃는 게 사람이 좋아 보였다.
이듬 해 4월 초순이었다. 서원곡 청 푸른 솔가지를 뚫고 훌쩍 오른 벚나무 가지마다 총총 달린 벚꽃이 봄빛보다 고운 날이었다.
휴대폰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한 사장 날세, 추연이야.”
“네 선생님. 그 동안 무고하셨는지요?”
“그래, 자네도 잘 지냈는가. 접때 자네가 애써서 만들어 준 수시집 덕분에 책을 본 지인들마다 아주 잘되었다고 호평이 자자하였다네. 그래서 말일세. 다가오는 일요일 우리 해산서원에서 모시는 향례에 자네를 부르고 싶은데 어떤가? 시간이 나겠는가?”
“그럼요, 선생님.”
엉겁결에 대답은 하였지만 실은 불안하였다. 여태껏 향례참배는 고사하고 관심조차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참배를 안 하자니 선생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모처럼 정장을 하고 어색한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해산서원에는 많은 참배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소원문(溯源門)을 걸타고 넘은 소슬 대문 그림자가 하얀 목련꽃잎을 자분자분 흔들고 있었다.
향례는 홀기에 따라 엄숙하게 진행되었고 집례를 하는 선생의 근엄한 모습이 올곧은 선비라면 이러리라 싶었다. 한 시간여에 걸친 의식이 끝나자 선생은 마당 한편에 서있는 나를 향하여 햇살이 부딪쳐 검게 빛나는 대청마루에 오르게 하고는 잘 왔다면서 주변 참배객들에게 소개를 시켰다. 근래에 참신한 젊은이라면서. 그리고 기골이 장대하여 무장 같은 아들을 불러 점심까지 챙겨 주시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 추연선생은 종종 출판사에 들러 전과 다름없는 식사를 하거나, 겨를이라도 나면 유교문화나 한학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곤 하였는데 몰라 하면 자상하게 일러 주었다.
한번은 경주이씨 문중의 세보를 맡아 일을 하게 되었는데, 참고자료로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에서 발행한 50여장의 장적(帳籍)을 보내 왔다. 이 장적들 말미에는 길협무개(吉陜無改)라는 알 수 없는 글이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장적의 내용과는 무관한 것 같았지만 볼 때마다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여도, 알만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도 한결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답답함이 더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야릇하고 애매한 글의 내용이 도대체 뭘까 궁금해 하며 보고 있었는데 마침 들린 추연선생이 펼쳐 논 장적을 보시더니
“자네, 이 글 때문에 끙끙거리고 있는 게지.”하면서 길협무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니 선생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자네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는 걸. 허허.”
순간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을 쳐다보는 나의 당황한 모습이 즐거운 듯 지긋이 바라보시더니 천천히 말을 하였다.
“그래, 자네가 생각하듯이 길협무개라는 글은 장적내용과는 무관하다네. 자, 들어보라고. 길협(吉陜)은 골짜기 협(陜)과 길할 길(吉)의 파자(破字)로, 골짜기 안(冂)에 길(吉)을 넣으면 주나라 주(周)가 되고, 무개(無改)는 고치지 않겠다는 뜻이지. 말하자면 비록 조선이 청나라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사대(事大)를 하지만, 주나라 전통을 이은 명나라와의 의리는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는 그런 내용이라네.”
“그러면 선생님, 이미 망해 없어진 명나라와의 의리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이렇게까지 하면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선생은 얕은 신음을 하였다. 얼마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을까.
“그건 말이야, 조선 사대부들이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고 으스대면서 오랑캐라고 깔보던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운 뒤 조선을 침범하게 되자,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임금은 두 달도 버티지 못하고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지. 그러자 조선 사대부들은 그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하던 소중화라는 자존심이 불식간에 깡그리 채 뭉개지는 수모를 당하고 만 것이지. 그래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구겨진 그들의 자존심을 세우는 한편 반청의식을 널리 퍼뜨려 보자는 그런 의도가 은밀하게 깔려있는 것이 이 글이 품고 있는 이유라면 이유라네.”
말을 멈춘 선생이 마른 침을 삼켰다.
“선생님, 음료수라도 한 잔 드릴까요?”
“시원한 물이 좋겠구먼.”
그때였다.
살집이 좋아 보이는 여인이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들어왔다. 빈소에 이르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형님, 너무 상심마세요. 몸도 성치 않은 분이 오시면서 애를 많이 태웠을 텐데…….”
추연선생의 자부 말에 여인은 설움이 더 북받치는지 목 놓아 운다. 얼마를 지켜보던 집안사람들이 이제 그만 되었다면서 달래자 그제야 울음을 그친 여인은 선생 자부의 손을 잡으며 애틋한 눈으로 선생의 영정을 바라본다.
“형님 마음 다 알아요. 아버님도 여러 번 형님 안부를 묻곤 하셨는데…….”
여인을 진정시키던 추연선생의 자부가 제 설움에 겨운 듯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자 조용하던 영안실이 들먹이기 시작한다. 선생의 싸한 영기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비로소 사람 훈기로 채워지는 것 같다.
목이 마르다. 술이 깨려나. 생수를 마신다. 편안하다. 참, 그때도 단숨에 물을 들이켰던 선생이 편안해 하며 말을 했었다.
“장적 첫머리를 보면 연도가 나오지. 이 장적은 건륭 6년 8월로 되어 있는데 건륭은 어느 나라 연호인지는 알고 있는가?”
“그럼요 선생님, 청나라 연호가 아닌가요?” 이 정도의 상식은 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래 맞아. 그런데 말이야. 비석이나 개인 문집의 연대 기록을 보면 거의가 숭정으로 되어 있다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데 왜 조선 사대부들은 그 연호를 고종임금에 이르기까지 고집스레 쓴 이유가 뭘까?”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은 해야겠는데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어설픈 상식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열없는 마음이 졸아들기만 하였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은 능청스레 말을 이어갔다.
“이 역시 청나라를 배척한다는 의미지. 청나라 연호를 써야하는 공식문서와는 달리 개인들의 기록에는 의식적으로 숭정을 쓴 거야. 여기서 가까운 월영동에 가면 고운 선생께서 소요하셨던 월영대가 있지. 거기에 중수비가 있는데 ‘崇禎 後 五 壬辰 十月’이라는 연대 기록이 있어. 이는 숭정으로부터 다섯 번째 되는 임진년 시월이란 뜻으로, 계산해 보면 1892년 10월로 고종 29년이 되는 해라네. 언제 시간이 나면 월영대를 한번 둘러보게나. 모르긴 해도 자네한테는 좋은 경험이 될 걸세.”
날이 저물자 문상객이 들기는 하지만 자리가 듬성듬성하다. 선생이 연로한데다가 부인은 몇 년 전에 전 노환으로, 기골이 장대하여 무장 같았던 아들은 작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고 보니, 문상객이 적음은 그게 세상살이 같다. 새삼스럽게 아들의 장례를 치르며 암담해 하던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추연선생의 아들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영안실로 갔을 때는 이른 오전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선생이 나를 보자 맺혔던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차마 소리 내어 울지 못함은 속으로 삭히는 부모의 심정 같은 것이었으리라.
“상심이 커시겠습니다. 선생님.”
“잘난 자식을 둔 내 잘못이지. 누굴 탓하겠나. 자네 보기가 민망하네 그려.”라며 눈물을 훔치며 의외로 담담해 하는 모습에 마음이 쓰렸다. 저녁이 되자 문상객들로 북적거렸다. 정승 말죽은 데는 가도 정승 죽은 데는 안 간다는 말이 실감이 났었다.
흰 도복 차림에 망건을 쓴 사람 여럿이서 선생이 가는 마지막 길을 추모라도 하듯 선생의 빈소 앞에 정중하게 앉아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다들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영안실을 나와 건너편 야외휴게소 벤치에 앉는다. 한낮더위가 꺾인 저녁바람이 선선하다. 등나무 사이로 흐르는 초열흘 달빛이 희멀겋다. 암컷을 유혹하는 귀뚜라미 소리가 소란스럽다. 수고스러움만큼 그들의 씨가 퍼뜨려질까? 이제 곧 가을이 깊어질 텐데.
한동안 뜸하던 추연선생이 불콰한 얼굴로 뜬금없이 찾아온 것은 막 퇴근을 하려고 나서던 참이었다. 그날도 저녁바람은 선선하였고 도심을 비켜 앉은 여린 초열흘 달빛은 개똥나무 열매를 여물게 하고 있었다.
“한 사장, 내가 기원에서 친구 놈과 바둑을 두었는데 말이야. 막판에 그만 어이없는 실수로 다 이긴 바둑을 놓치게 되었지 뭔가. 그래서 한수 무르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을 했는데도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절대로 안 된다고, 절대로 물러 줄 수 없다면서 버티는 거야.”
“그래서요, 선생님.”
“그래서 ‘야, 한수 무르자면 물러주면 되지. 그게 어디 죽고 사는 문제야. 친구 좋다는 게 뭔가.’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그 얼어 죽을 영감탱이가 뭐라고 그랬는지 알겠는가.”
“뭐라고 그랬는데요?”
‘그래 죽고 사는 문제가 맞지. 물러주면 내가 도로 다 죽는데 누가 물러 주겠어. 네놈 같으면 물러 주겠나. 암, 절대로 물러줄 수 없지.’라며 약을 올리기에야, 이 좆같은 놈아, 성질머리 더러운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아, 물러주고 새로 한판 더 두면 되지 뭘 그걸 가지고 유세를 하냐. 유세하기를. 이 늘어진 쇠불알 같은 놈아. 내 더러워서 네놈하고는 두 번 다시는 바둑을 안 둔다. 안 둬. 이 좆같은 놈아.하고는 지금 자네한테로 오는 거야.”
“ 참 선생님두. 그렇다고 친구사이에 욕을 하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생은 단호하게 손을 가로저으며,
“아니야,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더러는 욕도 필요한 거야. 욕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건 아니야. 경우에 따라서는 욕이 오히려 생활의 활력을 주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묘약이 되기도 하지. 그렇다고 자주하면 안 되네. 버릇되면 사람 모양새가 고약해져.”
그러면서도 분이 삭지 않는지 인사할 틈도 없이 휑하니 가버렸다.
며칠 후 선생은 파안대소를 하면서 오셨다.
“한 사장, 내 그 영감탱이를 보기 좋게 때려눕히고 오는 길이라네. 그것도 아주 통쾌하게 말이야.”
“아니 선생님. 다시는 그 친구 분과는 바둑을 안 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아 그랬지. 그런데 그날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어. 생각을 하면 할수록 괘심하고 분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 싫다는 아들놈을 억지로 구슬려서 몇 수 배우고는 오늘 기원에 나갔는데 마침 그 영감탱이가 바둑구경을 하고 있지 않겠나. 그래, 옳다구나 하고는 슬그머니 옆에 가서 한판 붙자고 그랬지.”
“그랬더니요, 선생님?”
“그랬더니 그 영감탱이가 싫은척하면서도 바둑판을 슬슬 당기는 게 아니겠나. 그래, 한판 붙었는데 말이야. 하하, 아들한테 한수 배운 덕인지, 아니면 오늘 일진이 좋았는지 아주 묵사발로 만들었지 뭔가. 그것도 무려 세 판이나 연속으로 말일세.”
“기분이 좋았겠습니다. 선생님.”
“그깟 일에 기분은 무슨 기분. 하하. 그럼 나, 감세.”
으스스하다. 일어서려는 온몸이 뻐근하다. 팔을 재치며 몸을 추스른다. 장례식장을 빠져 나가는 승용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지럽다. 뚝, 잠시, 제 씨를 퍼뜨리기에 여념이 없던 귀뚜라미들이 긴장을 한다. 영안실로 돌아오니 영우 혈색이 단풍을 닮았다.
“술 많이 한 거야.”
“아니, 그런데 자네는 어딜 쏘다니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한참을 찾았어.”
“응, 바람 쐬려 나갔다가. 근데 왜?”
“어쩔거냐고?”
술 냄새를 풍기는 영우의 말투가 퉁명스럽다.
“뭘? 뭐 땜에 그러는데, 알아듣게 말을 해야지.”
“우리, 밤샘 말이야.”
“그야 당연한 말이 아닌가.”
“자네도 그렇지. 그래서 꼭 빈소를 지키고 싶은데, 그런데 상주가 영…….”
에둘러 말하는 영우가 불안하고 초조해 보인다. 밤샘을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뜸을 들이는지. 상가 밤샘이 뭐 대단한 거라고 한다면 딱히 뭐라고 대답하기가 난감하지만 추연선생을 두고 보자면 적어도 우리들에게는, 아니 영우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루가 아니라 사흘을 해도 시원찮을 판이다.
추연선생은 영우의 6학년 때 담임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윈 그에게는 동생이 셋이나 있어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할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그때 영우의 재주를 눈여겨 본 추연선생이 그의 어머니를 여러 번 찾아가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야간중학교를 갈 수 있었다. 추연선생은 틈틈이 그와 외식을 하고 더러 용돈도 주곤 하였지만,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하더라도 절대로 용기와 희망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추연선생의 격려가 그가 힘들어 할 때마다 무엇보다 큰 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학으로 야간고등학교를 마치자 곧바로 삼사관학교에 지원해 대위로 전역한 후 모 중소기업 특채로 입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살게 된 것은, 오로지 추연선생이 친자식처럼 보살펴 준 덕분이라며 종종 내게 이야기를 하던 터이었다.
“상주가 왜?”
“응, 조금 전에 선생님 지인 한 분이 그런 말을 상주에게 하였는데 달갑게 여기지 않아 보이더군. 요즘 서울서는 밤 12시 이전에 문상객이 모두 돌아간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걸 보면……. 하기야, 상주가 손자인데다가 오랫동안 서울생활을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영우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진다. 그때였다. 왜 가을햇살로 검게 반질거리던 해산서원 대청마루가 불현듯 떠올랐는지.
내가 두 번째로 해산서원을 찾은 때는 해산서원 팸플릿용으로 사용할 사진을 촬영하려 간 늦가을 오후였다. 늙은 고욤나무가 까맣게 익은 열매를 조롱조롱 매단 채 고단한 육신을 담장에 기대고 있었다.
그때 대청마루 끝에 앉아 가을볕을 쬐고 있던 선생의 얼굴이 검은 대청마루와 같이 보였음은 대청마루에 반질거리는 햇빛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졸고 있었음인가. 소슬한 가을바람이 담장을 넘나들며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음, 자넨가. 여기 와서 앉게나. 볕이 좋아."
"선생님, 사진부터 찍고요."
"사진은 나중에 찍어도 괜찮아. 내일이면 어떤가. 자 앉아, 앉으라고."
일조시간으로 본다면 지금 촬영을 해야 좋은 작품이 나오겠는데 그렇다고 꼭 바쁜 것도 아니어서 선생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정말 가을볕이 좋았다. 길게 하품을 하던 선생이 응시하는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까치 한 마리가 그 하늘을 가르며 유유히 날아갔다.
"자네를 기다리다가 깜빡 졸았는가 보이. 그래, 그새 꿈을 꾸었는데 오래 동안 잊고 있었던 선친이 생시처럼 보이지 않았겠나. 이 해산서원을 복원하고 있는 선친을 말일세."
선생은 높다란 소슬 대문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에 관한 묵은 이야기를 천천히 남의 이야기하듯 꺼내었다.
“이 서원이 세워진 것은 지금부터 약 300년쯤의 일이었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원 된 후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복원을 하게 되었다네. 그 중심에는 내 부친인 창호(昌鎬)어른이 있었지. 어른은 지금 부안 앞바다에 있는 계화도로 들어가 간재선생에게 수학하던 중 간재선생이 돌아가시자 향리로 돌아와서는 몇 년을 더 학문에 정진하시다가 어느 날 서원을 복원해야 된다면서 문중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때부터 서원 복원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이야.
서원이 복원되자 어른은 서원 운영에 더 바쁜 날들을 보내게 되었지. 약간 물려받은 가산은 점점 줄어들었고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졌었지. 그럼에도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어머니는 신학은 절대로 안 된다는 어른을 설득하여 우리를 신학교에 보내는 한편 틈나는 대로 어른에게 한학을 배우게 하였다네.
내 나이 스물 하나였든가, 둘이였든가. 어른에 대한 환멸과 반항으로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갔지.”
늦가을답지 않은 따스한 기운이 소원문을 거슬러 올랐다. 늙은 고욤나무가 까만 열매를 툭 떨어뜨린다. 대청마루 깊숙이 박혔던 그늘이 일렁거렸다. 가을바다가 왔음인가. 숨바꼭질을 하던 바람이 누그러워졌다.
“일본생활은 채 몇 달을 버티지 못하였지. 젊은 오기 하나로 막연하게 떠났던 게 원인이었어. 어른은 초라하게 돌아온 나를 전과 다름없이 대하여 주었지만 그 후 몇 년 동안 신학도 구학도 포기한 채 빈둥대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지.
어른이 어렵사리 얻어준 초등학교 평교사로 시작하여 교장이 되던 그 해 초겨울이었지 아마. 어른은 운명(殞命)을 달리 하였다네. 장례를 전통 유교식으로 치르기로 하였지만 당시 정책적으로 펼친 가정의례준칙으로 아예 공직자들은 전통 유교식 장례는 엄두도 못 낼 처지였지. 그러나 나는 사표까지 제출해 놓고 굴건제복으로 보름 장(葬)을 치렀을 뿐 아니라 삼년상(三年喪)까지 마쳤지. 장례 후 사표는 반려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괜한 허세와 만용을 부린 것 같아. 낮 뜨거울 때가 더러 있다네. 허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저 같으면 감히 사표까지 내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 겁니다.”
“그게 아니야. 그건 말이야. 내 자존심이었고, 아버지의 커다란 그늘에 갇혀 살아온 날들에 대한 반항이었을지도 몰라. 비록 사람들이역시 범은 범 새끼를 낳는다.며 유학자 집안답게 체신과 위엄을 지켰다며 칭송이 대단하였지만.”
이야기를 마친 선생이 무척 지쳐 있었다. 그대로 두면 쓰러질 것 같았다.
"선생님, 쉬셔야겠어요. 사진은 내일 찍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세."
열한시가 넘자 문상객이 거의 다 빠져 나갔다.
“영우, 우리도 그만 일어나지. 어차피 밤샘은 틀린 거고.”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될까.”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함세.”
갑자기 한쪽 구석이 술렁거린다. 초저녁부터 카드를 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빠져 나가자 영안실은 한사리 썰물에 드러난 갯벌처럼 허수하다. 고개를 숙인 채 벽에 기댄 상주가 조는지 꼼짝하지 않는다.
선생의 자부가 왔다.
“안주라도 좀 갖다 드릴까요?”
“아니, 아닙니다. 지금 막 일어나려는 참입니다.”
****
그냥 헤어지기가 뭣하여 휴게소 벤치에 앉았다. 달이 기우는지 산바람이 뚜벅뚜벅 걸어 내려온다. 조락한 이파리들이 낡은 비명을 지르며 구른다. 가로등 불빛이 검은 밤을 창백하게 품고 있다.
“그런데 말일세. 지난번 선생님께서 출판사에 온 적이 있었는데. 허리가 안 좋다면서 지팡이를 짚고 오셨더라구. 많이 초췌해 보였어. 점심을 드시는데 좋아하시던 반주도 마다하시고 식사도 전과 달리 절반도 못 드셨어.”
“그래서?”
“왜 그러시냐구 했더니, 근자에 들어 모든 게 힘에 부친다고 하면서 넌지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
영우의 눈이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다가왔다.
“‘내가 그동안 너무 허송세월을 보낸 것 같아. 젊은 시절 내 천박한 객기로 어른의 학문을 잇지 못하고 당대에 끊어지게 하고보니 그 때는 몰랐지만 이 나이에 이르니 왜 진작 어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는지 후회막급일세. 한심스럽고 죄스런 마음이라네.’라면서 눈물을 글썽이더라구. 어찌나 보기에 민망한지.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엄두도 나지 않고. 허리 때문인지 불편해 하시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그랬었구나. 선생님께서 자네 출판사에 갔다가 오는 길이라면서 우리 집에 들렀던 날이. 자네 말대로 그날따라 안색이 안 좋아 보였어. 거실로 들어가시자고 했더니 그럴 것까지 없다면서 자네를 보았으니 됐다면서 선걸음으로 돌아가시기에 그런가 보다 했었지.”
추연선생이 다녀간 얼마 후 편찮다는 연락을 받고 자택을 방문하였다. 비스듬히 저녁햇살이 비치는 의자에 어색하게 앉아 TV를 보고 있던 선생이 뜻밖의 방문에 놀란 듯이 쳐다보았다.
“한 사장인가. 그래 어찌 알고 왔는가?”
“영우가 선생님 안부를 주었습니다.”
“허허, 그 사람이……. 와 줘서 고맙기는 하네만 영우가 쓸데없는 짓을 하였구먼. 그래, 자네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네, 선생님 덕분에요. 근데 전번에 오실 때만 해도 좋아 보이시는데…….”
“아니야. 자네 출판사에 들릴 그때도 허리 상태가 안 좋았다네. 이십년 가까이 앓아온 당뇨병까지 갑자기 악화되어 애를 먹고 있던 참이었지. 그 나들이가 무리되었는지 허리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서 가까운 병원에 다였지만 별 차도가 없어 허리를 잘 본다는 부산 모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지. 그랬더니 적잖이 좋아지기에 그래 병원에 계속 있기도 갑갑하고, 통원치료를 해도 된다는 담당의사 말에 이렇게 집에 와 있다네.”
비스듬히 비치던 저녁햇살이 빛의 기운을 망각하고 있었다. 재방송하던 사극이 끝나고 상큼하게 생긴 여자 아나운서가 저녁뉴스를 진행하자 선생은 ‘맨 날 들어도 그게 그 소리야.’라며 TV를 껐다.
“그런데 말이야. 그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네.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과 무슨 이야기 끝에 그 사람 하는 말이, 내가 이십년 넘게 당뇨병을 앓고 있었는데 우연히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 오줌요법으로 석 달 동안 꾸준히 오줌을 마셨더니 아, 글쎄 당뇨병이 거짓말같이 나았다면서 자랑을 하는 게 아니겠나.”
어눌하던 선생의 말에 생기가 돌았다.
“처음에는 거저 지나가는 소리거니 하였지. 그런데 몇 번이나 되풀이를 하면서 얼마나 진지하게 말을 하는지 귀가 솔깃해 지더라구. 그래, 병원에서는 차마 그럴 수 없어 집에 오자마자 오줌을 받아 마시려고 하였더니 오줌이 잘 나오지를 않아. 오줌 한 컵을 받으려면 애를 먹어.”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겨우 참았다. 아무리 그러하기로서니 그걸 마시려고 하였다니. 그 더럽고 불결한 것을.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오줌이 더럽다고 생각하지 말게. 옛날 선비들도 자신의 오줌이나 어린 손자의 오줌을 받아 마셨다고 하지 않든가. 참, 퇴계선생도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오줌을 받아 마셨기에 평생을 건강하게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하기야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오줌에 관한 많은 민간요법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오줌에는 자신에 관한 DNA를 많이 저장하고 있어 이를 장기 복용하면 당뇨병 등 각종 질병은 물론 심지어 암까지 치료가 된다는 것이다.
정유재란 시 울산성 전투에서 조선군과 명나라 연합군에 포위된 왜군들이 식수가 떨어지자 자신들의 오줌을 여러 차례 받아 마시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였다는 역사적 이야기가 있는걸 보면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을 것 같기는 하였다.
“참 자네도 당뇨병이 있다고 했든가. 그래, 자네도 어디 오줌을 한번 마셔 보게나. 처음에는 역겹겠지만 마시다 보면 차츰 괜찮아질 걸세.”
“아무리 그래도 저는 싫습니다. 요즘 시중에 나가보면 당뇨병에 좋은 약이나 보조식품들이 얼마나 많은 데요. 그 더러운 오줌을 마시라니요. 선생님”
"허허, 낸들 왜 그걸 모르겠나. 사람이 늙으면 오만 생각을 다하는 법이거든. 오죽하면 이렇게 해서라도 몸을 추스르고 싶어 그러겠는가. 그 사람 말처럼 정말로 오줌으로 당뇨병이 완치된다면 이 세상에 당뇨병으로 죽을 사람이 누가 있겠나. 하다가하다가 안 되니 죽을 궁리를 하는 거지."
반짝, 선생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빛을 망각하던 저녁햇살이 맺힌 이슬에 안간힘을 다하여 매달리고 있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서경(書經)에 보면 오복 중 하나로 고종명(考終命)이란 게 있지. 고종명이 뭔가. 제 명(命)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을 이르는 말인데, 죽을 때가 다 되니 비로소 그 뜻을 알겠네. 자식 된 도리로 선친의 유지를 받들지도 못했고, 여태껏 살아오면서 내 포부를 내 뜻대로 펼쳐 보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고, 더구나 마누라와 자식까지 앞세우고, 이제 육신마저 늙어 이렇다 보니……. 오래 산다는 것이 복이 아니라 오히려 욕됨이요, 얼마나 고약하고 몹쓸 일인가를.”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되겠느냐는 간절한 눈빛을 차마 외면을 못하다가 집에 돌아오니 꽤 늦은 시간이었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멀뚱거리는 눈알이 쓰렸다. 뒤척거리다가 겨우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나 보았다. 일어나니 여덟시가 넘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다가 어디 한 번 마셔 봐.하다가 씩 웃고 말았다.
추연선생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온지 얼마 안 되어 허리통증과 당뇨병이 더 심하여 다시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기는 하였으나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차일피일 하 다가 문병을 간 게 지난 주 일이었다.
"영우, 지난 주 선생님 문병 갔을 때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왜 갑자기 돌아가셨을까?"
"나도 잘 모르겠어. 부음을 듣고 선생님 자부에게 물었더니 밤중에 침대에서 떨어져서 뇌진탕으로 돌아 가셨다고 하더군."
"그럼 밤에는 간병인을 안 두었다고 하든가?"
"응, 그랬는가 봐. 밤이 되면 허리통증이 더 심하였지만 그런대로 견딜만하다고 하셔서 간병인을 두지 않았다고 하였네. 같은 병실에 있었던 사람 이야기로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그날따라 한밤중이 되자 한참을 우시더니 갑자기 침대에서 떨어지더라는 것이야."
추연선생의 선산은 해산서원 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해가 뜨면 종일 해바라기가 좋은 땅이었다.
선산 중턱쯤에 추연선생의 어른 내외 묘소가 있다, 그 아래 선생 부인의 묘소 옆에 서너 평 빈터가 선생의 유택이었다. 기골이 장대하여 무장 같았던 선생의 아들은 선생의 유택 아래서 끝없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우리가 추연선생을 그 유택에 모셔 드리고 한참을 내려오다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활활 봄을 유혹하는 복사꽃 같은 화려한 오후의 가을햇살이 토닥토닥 추연선생의 굽은 등을 다독거리고 있었다. 끝.
* 작가소개 및 시인상 수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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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작품보다 사람을 먼저 보게 될 줄 알고 기다렸었는데, 결국 작품을 먼저 보게 되었네요. 뭐, 우리 글쟁이들 살아가는 모습이 다 그렇지요. 어찌 되었든 조만간 뵙게 되기를 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