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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소공동체 20년]
인간적 유대 강화한 공동체가 미래교회 이끈다
한국교회는 1992년부터 ‘2000년대 복음화’라는 정기적 목표 아래 복음나누기 프로그램을 공식적으로 파급시켰다. ‘삼천년기 한국교회의 비전’, ‘교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지목되고 있는 소공동체가 한국교회에 도입된 지 20주년을 맞았다.
1992년 서울대교구의 ‘2000년대 복음화’ 선포로 본격화된 소공동체는 20년이 흐른 2012년 현재 주교회의 산하에 전담위원회를 두고 매년 전국 소공동체모임을 가질 만큼 질적?양적으로 주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또 여전히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사목 대안으로서의 중요 화두다. 그만큼 그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고 있다.
본지는 차제에 한국교회 ‘소공동체’ 운동의 현장을 중심으로 20년 역사 전반을 점검하는 신년기획 시리즈, ‘한국교회 소공동체 20년’을 마련한다. 특히 이번 기획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고 있는 시점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지향했던 현실 접목의 바람직한 방법으로 지칭되는 ‘소공동체’를 새로운 복음화의 큰 틀 안에서 조명해보는 기회가 될 예정이다. 이번 총론에서는 소공동체의 역사적 배경과 한국교회의 소공동체 여정을 다룬다.
소공동체의 씨앗
‘소공동체’라는 용어는 교황청에서 규정하는 ‘기초 교회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남미 주교회의에서 사용한 명칭을 교황청이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밝힌다.
교회 안에 ‘기초공동체’ 논의를 불러온 중남미 기초공동체의 출발은 195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구역 바라도 피라이에서 움튼 공동체적 복음화 운동과 평신도, 그리고 교리교사들의 노력이 시작이다.
당시 아그넬로 로씨 주교는 사목자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 평신도 교육자들을 통해 복음화 운동을 벌였는데 이때 시작된 기초공동체는 전국 곳곳으로 번져갔고 브라질 지역을 넘어 중남미교회 전체에 수십만 개의 조직으로 퍼졌다.
기초공동체가 발아한 후 10년이 지난 1968년, 이미 기초공동체의 중요성은 남미 주교총회에서 다뤄질 정도였다. 콜롬비아 메델린에서 열렸던 라틴아메리카 주교총회에서 주교들은 기초공동체를 ‘교회의 핵’으로 정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 기초공동체는 교황청의 공식적인 인정을 거쳐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한 교회 쇄신의 산물로서 현대교회 복음화의 유효한 수단으로 권장되는 모습을 갖게 됐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는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총회가 발표한 메델린문헌에서 기초공동체를 인정한 이래, 교황청에서 나온 최초의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알려진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선교’ 58항을 통해 “기초공동체는 교회적이고 인간적인 유대를 더 강화하고자 하는 데에서 발생한 새로운 교회 형태”라고 밝히면서 “복음 선교의 못자리가 되고, 보다 큰 공동체, 특히 지역교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회칙 ‘교회의 선교사명’ 51항에서 “기초공동체가 그리스도 교육과 선교 추진의 좋은 중심처로 인정되고 있다”고 가르쳤다.
한국 소공동체의 시작
1989년 세계성체대회 이후 서울대교구는 1991년부터 ‘복음화’라는 사목목표를 설정하고 ‘소공동체의 활성화’라는 방법을 제시했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9개년을 ‘2000년대 복음화’라는 장기적 목표 아래 두는 한편 소공동체 활성화 방안으로 아프리카 룸코(Lumko)에서 개발된 복음나누기 프로그램을 공식적으로 파급시켰다.
당시 한국교회 상황은 급속도로 성장한 외형적 교세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로 인한 본당 비대화와 교회의 내적 공동화를 초래하는 등 “복음 정신에 입각한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모습에서는 오히려 멀어지고 있다”는 자체적 진단이 나오던 상황이었다.
서울대교구는 1991년 사목교서를 통해 “신앙과 삶의 유리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도록 우리 자신이 참으로 복음화 되지 못하고 따라서 물질주의로 인하여 갈수록 비인간화되고 속화되어가는 이 사회를 복음화하는 능력도 미비함을 겸손되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히면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성찰하면 할수록 무사안일하게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고 천명했다.
이러한 성찰 안에서 새로운 복음화의 방안으로 소공동체를 선택한 서울대교구는 기존의 반모임과 구역모임에 복음나누기 프로그램을 접목시켜 의욕적으로 소공동체를 확산시켰고 이는 전국으로 파급돼 나갔다.
2001년 제1차 소공동체 전국모임이 개최되면서 소공동체 운동은 보다 한국 교회 안에 그 자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2000년 AsIPA 2차 총회에 참가한 서울 마산 사목국이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목자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준비 추진된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교구 대표자들은 “소공동체가 복음화 신앙쇄신 등 한국교회의 당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공감대를 이뤄냈고 전국 차원의 지속적 모임 결의와 함께 주교회의에 전담 위원회 설립을 요청한다.
이에 따라 주교회의는 그해 추계총회를 통해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산하에 ‘소공동체소위원회’ 설립을 결정하고 위원회는 11월 23일 공식 가동됐다. 소공동체운동이 전 교회적 차원의 공감대 구성을 명실공히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03년 2월 13일에는 사목국장 중심의 자발적인 전국 네트워크 ‘소공동체 사목전국협의회’가 결성됐고 협의회를 통해 2006년까지 소공동체 전국 모임이 개최됐다.
소공동체 전국모임은 2011년 모임 개최 10주년을 맞아 그간의 활동상에 대한 성찰과 함께 미래를 전망하는 자리를 가진 바 있다. 교구 벽을 넘어 교구나 본당의 소공동체 사목 실무자들이 함께 만나 사목을 나누고 교류하는 장이 됐던 이 전국 모임은 한국교회 소공동체 운동이 신자들 안에 뿌리 내리도록 하는 기반이 됐다.
소공동체 도입 20주년을 맞는 올해에는 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회 주최 ‘소공동체 세미나’ 등 한국 소공동체에 대한 점검과 발전 전망을 모색하는 자리가 활발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진정한 기초
지역 교회별 소공동체
■ 아프리카
아프리카 가톨릭교회의 소공동체 모습은 지역별로 형성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으며 비교적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발한 작업이 이뤄졌다. 첫 소공동체 모습은 1960년대 자이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어서 1966년에는 탄자니아에서, 또 1971년에는 잠비아에서 시도된 것으로 알려진다.
아래로부터 신자들에 의해 시작된 남미의 경우와 달리 아프리카에서의 소공동체 운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치와 기본 소명에 대한 의식이 형성되지 못한 신자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교육하기 위한 것이 일차적 목표였고, 그런 면에서 교도권에 의해 소공동체 육성이 추진됐다. 사목 지역은 넓고 성직자들은 부족했던 지역적 상황이 그 배경의 뿌리라 볼 수 있다.
초기 선교사들은 지역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농촌 본당에 많은 공소를 세워 소성당이나 선교지로서의 기능을 담당토록 했다. 그러나 신자들의 사목적 욕구를 채우기에는 무리가 따랐고 능력있는 평신도들이 있다 해도 신자 양성이나 지역교회 활동 참여를 이끌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도 가톨릭 신자들은 다른 종파나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계속해서 옮겨가는 상황이었다.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메리놀회 사제들은 이 같은 현상을 문화인류학자 마리 프랑스 페리제(Marie-France Perrin Jassy)에게 연구 의뢰했고, 페리제는 탄자니아 북 마라(North Mara) 지역을 조사, 1973년 그 결과를 발표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수동적인 역할만을 담당하며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의 본질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아프리카 독립교회들은 보통 규모가 작고 마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그 안에서는 소수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도력을 발휘하며 사도직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여기에서 독립교회는 선교 교회나 토착 교회 안에서 외국인의 지배를 벗어나 현대적이고 토착화된 방법으로 복음을 수행하려는 동기에서 발생한 교회 운동을 말한다.
외국인의 지배를 벗어나 현대적이고 토착화된 방법으로 복음을 수행하려는 동기에서 발생한 독립교회에 대한 연구결과에 주목한 아프리카 주교회의는 아프리카교회 발전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소공동체를 강조했다. 사진은 잠비아 무풀리라에 있는 테레사본당의 미사 입당 장면. 이들은 아프리카 전통춤을 추며 부족어인 벰바어로 성가를 부른다.
1973년 동아프리카 주교회의는 이 연구 결과에 주목, 이미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공동체를 위한 노력을 수용하고 소공동체를 양성키로 결정했다.
1974년 제3차 세계 주교대의원회의에서 ‘강생의 신학’을 전개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주교회의는 ‘소공동체가 가정 다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진정한 기초가 될 것’임을 강조하고 ‘이 소공동체들은 교회 공동체와 각 신자들의 생활 중심으로서 삶의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소공동체들이 교회의 지역적 육화로 간주된 것이다.
이같이 아프리카 주교단은 소공동체 설립에 사목적 우선성을 부여하는 입장을 천명했다. 또 소공동체 건설은 아프리카 민족의 생활 기초가 되는 진정한 인간적 가치들을 수호하는 최상의 길로 묘사됐다.
1976년 개최된 동아프리카 주교회의에서는 소공동체 건설에 사목적 우선 순위를 둘 것을 거듭 강조했고, 1979년 동아프리카 주교회의는 아프리카교회 발전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써 소공동체를 강조했다. 이 회의에서는 소공동체에 대한 많은 정보와 소공동체 확립을 위한 현실적인 지침이 제시됐다. 이때 남아프리카 룸코(Lumko)연구소는 실제적이고 상세한 체험과 정보를 제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소공동체 건설에 주력한 동아프리카 주교회의 영향을 받은 남아프리카 주교회의도 1976년 개최된 회의를 통해 소공동체 장려를 승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현대의 복음선교」를 인용, 지역 내 소공동체 사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는 등 소공동체의 가치를 인정했다.
이미 남아프리카 스와질란드 지역과 모잠비크 지역은 독립한 이래 계속해서 공동체들을 세워왔고 특히 짐바브웨 무타레교구에서는 공동체 조직에 상당한 노력이 기울여지던 터였다.
주교들은 또 이 자리에서 소공동체 형성과 성장에 있어 평신도들에게서 비롯될 수 있는 주도권 문제를 우려하면서 소공동체들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서는 평신도들의 지도력과 성직자들의 소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이후 남아프리카 주교회의는 1989년 총회에서 “우리의 계획은 교회가 참된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서로가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임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사목적 계획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본당에서 공동체를 건설하는 가장 강한 형태는 ‘작은 신앙 공동체 건설’”이라고 밝힘으로써 다시 한 번 소공동체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서아프리카의 경우 시에라리온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 건설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특히 케네마에 있는 사목센터는 공동체 건설을 촉진하는 일에 주력해 왔으며, 이 센터에서는 시에라리온을 비롯한 서아프리카 국가들은 물론 아프리카 전역과 기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수회를 열고 있다.
아프리카 민족 특유의 흥겨움은 공동체에 활기를 불러 일으키며 서로간의 친교를 다지도록 돕는다. 사진은 2009년 8월 잠비아 솔웨지(Solwezi)교구 주교좌 성다니엘성당에서 거행된 사제서품식에서 신자들과 한데 어우러져 전통춤을 추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
룸코연구소 - ‘말씀’ 중심의 소공동체 건설 주력
한국교회 소공동체 도입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지목되는 룸코연구소는 본래 남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다. 1952년 4월 남아프리카 주교 총회 결정을 통해 인류학 선교학 등을 연구하는 연구소로 설립됐으나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에서 연구소 승인을 취소함으로써 1962년 연구소 책임을 맡았던 퀸즈교구 로젠탈 주교가 교구 차원의 연구소 ‘룸코 선교연구소’(Lumko missiological Institute)로 새롭게 출범시켰다.
‘룸코’ 명칭은 한 가톨릭 신자 가족 이름에서 연유됐다. 룸코라는 사람이 로젠탈 주교에게 개인 소유 땅을 기증했고, 그곳에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룸코연구소라는 명칭이 붙었다.
1972년 남아프리카 주교회의로 소관된 연구소는 이후 주교회의 산하 사목연구소가 됐으며 이들이 계발한 30여 종 이상의 사목 모델과 프로그램들은 아프리카 지역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비롯 아시아 등 50여 개 나라에서 활용되고 있다.
연구소의 사목 비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실현하고 가톨릭 교회의 복음화 과업을 촉진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공의회의 ‘하느님 백성’에 의거 성직자·수도자·평신도의 본질적인 동등성을 회복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언직·사제직·왕직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함께 공의회에서 새롭게 발견한 ‘친교의 교회’를 실현하기 위해 하느님 말씀을 원천으로 하는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더불어 사회에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참된 지역 교회 건설도 지향점으로 삼고있다.
즉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평신도들이 교회의 사명 수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말씀’이 중심이 된 소공동체(small christian community) 건설이 주된 활동 목표라 할 수 있다.
미래 주역 아시아교회에서 소공동체 꽃 피우다
아시아의 소공동체
아시아 지역은 다른 대륙과 달리 지리적·민족적·문화적·종교적으로 다양한 50여 개 국가로 구성돼 있다. 필리핀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소수를 차지한다. 아시아 지역 전체에서 필리핀에만 6천만 명에 가까운 가톨릭 신자들이 집중돼 있고 그 외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한국 지역에 신자들이 분포돼 있다.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 아시아 국가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1% 미만의 소수 집단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아시아교회는 제삼천년기 보편교회 안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갈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현실과 기대만큼 소공동체의 시동과 전개 양상도 특별하고 그 귀추 역시 주목받고 있다.
아시아주교회의(FABC) 차원에서 소공동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1990년 제5차 인도네시아 반둥아시아주교회의였다. 이때 총회는 ‘아시아 안에서의 교회의 새로운 존재 양식(a new way of being Church in Asia)’을 ‘공동체들의 친교(communion of communities)’로 규정했다.
이 기간 동안 FABC는 ‘공동체들의 친교’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로 룸코연구소의 ‘소공동체’ 사목 모델과 프로그램들을 소개했고 아시아 주교들은 이 방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자리는 한국을 비롯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아시아 주교들에 의해 표명된 ‘공동체들의 친교’와 ‘참여하는 교회’ 비전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룸코연구소의 ‘소공동체’ 사목 모델을 원용하는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 2000년 타이 샴프란에서 열린 제7차 아시아 주교회의에서는 ‘아시아교회의 쇄신과 사랑과 봉사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아시아교회 쇄신의 전망과 의미를 제시하고 사랑과 봉사의 사명 수행에서 부딪치는 문제와 도전들에 대해 다루면서 소공동체 육성을 언급했다.
이때 아시아 주교회의는 “사랑과 봉사의 사명을 위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공동체들의 공동체가 되고자 하는 깊은 열망을 나타내야 하며 그러한 사명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교회 기초공동체에 바탕을 둔 소공동체 그리고 교회 단체들”이라고 밝히면서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거듭 천명했다.
아시아 소공동체 정착의 구심점이 된 아시파(AsIPA, As-ian I-ntegral P-astoral A-pproach : 아시아의 통합적인 사목 방법)는 아시아 주교회의에서 천명된 교회의 새로운 비전 실현 방안 모색을 위한 자구책의 부산물이다.
1990년 반둥회의 이후 1993년 10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말레이시아에서 평신도사무국과 인간발전사무국 주최로 자문협의회가 개최됐는데 이 회의에는 평신도사무국 의장과 두 사무국의 총무 그리고 각 나라의 주교·성직자·수도자·평신도들도 참가했다. 회의 동안 참가자들은 교회의 새로운 비전을 수행할 수 있는 아시아교회에 적합한 방안들을 모색했다.
아시아에서 교회의 새로운 존재 양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목적인 과정, 즉 아시파(AsIPA)는 이 자리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탄생된 아시파는 아시아교회 안에서 소공동체가 정착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현재 아시아의 통합적인 사목방법을 연구 보급하고 있는 아시파는 아시아 소공동체 담당자들의 네트워크를 조직, 아시아지역 소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아시파 총회에서 보고된 각국 소공동체 현황에 따르면 한국을 비롯해 필리핀,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국가에서 ‘공동체들의 친교’ 및 공동 책임의 ‘참여하는 교회’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소공동체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은 아시아 각국 교회 안에서 소공동체가 전개된 사례들이다.
- 아시파 제5차 총회(2009.10.20~28)에 참가한 강우일 주교를 비롯한 한국 참가단이 아시아 각국 신자들과 함께 그룹을 이뤄 복음나누기를 하고 있다.
필리핀
아시아에서 소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제일 먼저 대두된 곳은 필리핀이다. 필리핀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교회 공동체 영향을 받아 1960년대 중반부터 기초교회 공동체가 태동했다.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라틴아메리카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필리핀에서 주교들은 1970년대부터 기초교회 공동체에 사목적 우선권을 두었다.
1992년 개최된 필리핀 주교회의 제2차 총회는 ‘친교의 교회’와 ‘기초교회 공동체’의 경험과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여기에서 주교들은 “일치 참여 사명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예언자직 왕직 사제직을 수행하는 사람들로서의 교회와 가난한 교회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오늘날 기초교회 공동체 운동들 안에서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밝혔으며 “다른 여러 형태의 작은 신앙 공동체들이 있지만 기초교회 공동체야말로 교회 쇄신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표현들이다”고 천명했다. 이같이 주교회의가 중심축이 되어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필리핀 기초교회 공동체는 독특함을 가진다.
450여 년의 식민지 생활 그리고 7천여 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지역적 여건, 100여 개나 되는 언어, 다양한 부족 모습 등 상대적으로 여러 열악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기초교회 공동체가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필리핀 특유의 지연이나 혈연으로 묶여진 소규모 단위의 생활 모습이었다.
필리핀에서의 기초교회 공동체는 이같은 고유의 가정 공동체적인 조건과 결부되면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모임 특성에 따라 BEC(기초교회공동체), BHC(기초인류공동체), BCC(그리스도교 기초공동체) 등으로 불리는데 최근에는 훼손된 생태계의 회복을 위해 BCC(기초피조공동체, Basis Creature Community)가 형성되기도 하는 등 시의적절하게 토착화된 소공동체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2009년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파 제5차 총회 참가자들의 모습. 아시파는 아시아 주교회의에서 천명된 교회의 새로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탄생됐고, 아시아 소공동체 정착의 구심점이 됐다.
인도
주교회의가 중심이 되었던 필리핀과 달리 인도에서는 교구 중심의 소공동체 모습이 눈길을 끈다.
특히 망갈로르교구가 대표적인데, 이 교구에서는 1989년 교구 사제사목협의회를 통해 모든 본당은 적어도 3년 이내에 하나의 소공동체를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 교구의 경우 룸코식 복음나누기의 공동개발자인 오스왈드 히르마 주교가 지도하는 전국 단위 룸코식 복음나누기 훈련과정에 다섯 명의 교구 사제가 참가한 후 룸코식 복음나누기 교육을 전 교구 사제들에게 확산시켰고 이후 1989년에는 소공동체 전담 사제를 임명했다.
망갈로르교구는 인도교회 안에서도 비교적 소공동체가 성공한 사례로 꼽히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몇 가지 제도적인 요인과 사제들의 적극성이 주효한 뒷받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적으로 복음나누기 7단계 방법을 모든 소공동체 모임의 기본으로 만들었으며 이 밖에 사제들이 평신도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소공동체 모임에 항상 참석하는 여건을 만들었다. 또 8천여 명에 이르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본당 사목위원이나 단체 회원으로 활약하면서 본당 활동의 중심에 있었고 대다수 본당들은 사목협의회 산하에 소공동체 위원회를 설치, 소공동체를 본당의 주요 사목 안건으로 다루었다.
교구 차원에서도 소공동체 전담 사제 및 각 지구별 소공동체 대표 사제를 임명하고 동시에 지구 내 소공동체 운영 점검을 위한 본당 사목 방문을 실시하는 등 사제들의 관심과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도 망갈로르교구 안젤로본당의 소공동체 모임 모습. 1989년 교구 사제 사목협의회를 통해 모든 본당은 적어도 3년 이내에 하나의 소공동체를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한 망갈로르교구는 인도교회 안에서도 소공동체가 성공한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소공동체 가능성과 한계’ 지상토론
“한국사회에 사랑·평등 문화 토착화하는 소중한 장”
“한국형 소공동체, 평신도 중심의 상향식 발전 부족”
“삼천년기 한국교회의 비전”, “교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설명과 함께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론의 반영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위에서부터의 무리한 접목으로 오히려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는 비판도 제기되는 소공동체. 도입 20년을 맞고 있는 현 시점까지도 한국교회에서 소공동체는 아직도 그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신년기획으로 ‘한국교회 소공동체 20주년’을 연재하고 있는 본지는 이러한 교회 안의 찬성적?비판적 견해를 함께 들어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구체적인 사목 현장에서 경험한 소공동체의 결실은 무엇이고 당위성은 무엇인지, 또 직면하고 있는 가능성과 한계는 어떠한 것인지 정월기 신부(서울대교구 창5동본당 주임·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회 위원)와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가 각각 그 의견을 밝혔다.
① 소공동체와 함께 발전하는 평신도 지도력 · 한국사회
- 정월기 신부(서울 창5동본당 주임 · 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회 위원)
소공동체 모임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어서 질문으로 시작했다.
“소공동체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 대답을 했다.
“안 된다”, “어렵다.”
본당에서 소공동체 사목을 추진하다 보면 ‘잘 안 된다’나 ‘어렵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소공동체 모임에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고, 구역장·반장 등의 봉사자로 지원하려 하지 않고, 모임 장소를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공동체의 장점이나 결실은 무엇인가?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어서 좋다. 이웃 사촌의 소중함을 발견한다. 모임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성경에 비추어 삶을 바라보고 삶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평신도들이 소공동체를 꾸려가면서 평신도 사도직과 지도력이 성숙되고 있다. 마음과 생각과 지혜를 나누면서 배우는 것이 많다.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우정을 맺고 어려울 때에 도움을 준다. 형제자매처럼 만나니 눈치 볼 것 없이 편안하다. 작은 사람이나 약한 사람도 구역장·반장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도 주체의식을 갖고 교회에 봉사한다. 소공동체는 지역의 문제나 어려움에 참여하면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이 된다.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연대하고 지역 환경보호나 정의로운 활동에 참여한다. 가정 공동체든 소공동체든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체처럼 어떤 규칙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명만 해내면 되는 것도 아니다.
소공동체는 교회처럼 다양한 모임과 활동이 이루어진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을 내고 자신의 기호에 따라서 참여한다. 2~4명이 살아가는 가정 공동체도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가! 그러나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정 공동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보다 나은 가정 공동체를 위해서 어떤 노력이든지 시도하게 된다.
사회학적으로 인간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가족처럼 얼굴을 맞대고 관계를 맺고 친밀하게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인격성장과 공동선을 이룬다. 인간은 친밀감이 없이는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없다. 인간은 고유한 인격체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며 이런 친교 활동을 통해서 자신을 실현하고 공동체에 기여를 하며 의미와 보람을 체험한다. 소공동체는 가정처럼 이런 친교를 이루는 장이다.
교회는 친교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제도적인 모습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친교를 드러내는 공동체를 향한 노력을 초대교회에서부터 꾸준히 기울여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교회를 준비하셨다. 12사도 공동체에서 출발하여 초대교회 공동체(사도 2, 44~47 4, 32~35 참조)를 향한 노력이 이어졌다.
교회는 수도 공동체를 통해서 제도적이고 위계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고 친교적이고 수평적인 모습의 교회를 이루어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랑하고 친교를 맺는 교회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 교회론은 ‘친교’라는 것을 1985년 특별 주교 대의원회의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소공동체는 친교의 공동체가 되는 데 좋은 대안으로 인식되어 여러 대륙에서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다. 특히 소공동체는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과 신앙과 삶에 필수적인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제는 본당 사목도 구역과 반소공동체 없이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소공동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 교도권에서 지속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교회 교도권과 소공동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친교 교회론을 토착화하고자하는 노력은 먼저 라틴아메리카 기초 교회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다. 50~60년대에 기초 교회 공동체를 경험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1968년 콜롬비아 메델린에서 총회를 열고 메델린 문헌을 선포하였다. 이 문헌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가 정식으로 교회 교도권 문헌에 등장하게 된다.
메델린 문헌 15장 ‘연대사목’ 제10항을 보면 그리스도교 바닥 공동체가 나온다. 여기서 주교들은 바닥 공동체를 “친교를 체험하고 발견하는 곳이며 본당 중심의 교회에서 한걸음 나아가 삶의 현장에 있는 교회 기초 조직”으로 이해하고 있다.
197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 선교’ 58항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는 교회적이고 인간적인 유대를 더 강화하고자 하는 데에서 발생한 새로운 교회 형태”라고 지적하면서 소공동체가 교도권과 일치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1976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동아프리카 주교위원회는 기초 교회 공동체를 교회가 가장 “지역적으로 육화”한 형태로 보고 기초 교회 공동체를 사목의 우선에 두고 있다.
1979년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열렸던 제3차 라틴아메리카 주교 총회에서 주교들은 기초 교회 공동체가 교회 구조의 중추가 되어 공동체로 엮어진 본당 공동체가 되길 희망했다. 여기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의 교회론은, 교회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하느님의 가족, 하나의 백성으로 강조한다(239, 240, 261항). 이 문헌은 기초 교회 공동체를 가장 심도있게 다루고 있으며, 기초 교회 공동체는 “중대한 교회적 실재이며 특히 우리들의 것이며 교회의 희망이다(629항)”고 선언한다.
아시아 주교들은 1990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된 제5차 총회에서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공동체들의 친교(communion of communities)”를 아시아 안에서의 “교회의 새로운 존재 양식(a new way of being Church in Asia)”으로 선언하였다. 아시아 주교들과 연대하여, 90년대 초에 한국교회도 서울교구를 시작으로 소공동체 사목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199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인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소공동체를 “그리스도교 교육과 선교 추진의 좋은 중심터”로 인정하면서 소공동체를 교회 활력의 표지이며 신자 양성과 복음화의 도구이며 ‘사랑의 문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고 모든 지체의 능동적인 참여로 복음적인 공동체를 건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10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후속 문헌인 주님의 말씀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73항에서 성서 사목 활동이 작은 공동체들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이 공동체들을 다른 교회 운동들과 연결 지으면서 양성과 기도와 성서 지식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2011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아프리카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인 “아프리카의 헌신(Africa’s Commitment)” 121항에서 “소공동체는 … 평신도들의 세례 열정을 촉발시키는 기초 조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133항에서 “그리스도 제자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나누는 공동체이며, 이것을 본당과 가정과 소공동체에서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회 교도권은 한결같이 소공동체가 교회 사목 구조 안에서 중요한 장임을 인정하고, 지역 주교와 일치하고 다른 단체들과 함께 발전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한국의 소공동체와 그 운영
한국교회는 90년대부터 소공동체를 추진하고 있다. 구역과 반소공동체가 지난 20년간 본당 사목과 복음화에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소공동체가 사목과 복음화에 필요한 장이라면 활성화를 해야 한다. 소공동체를 활성화하려면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소공동체는 누구 한 사람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팀을 구성해서 팀을 활성화하고 그 팀이 공동체의 필요에 적절히 응답하도록 하며, 이 팀이 자발성과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자치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현재 몇몇 본당에서 구역 단위 자치회를 두고 자치회가 스스로 운영되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소공동체 운영팀은 본당팀과 구역팀으로 정할 수 있다. 본당팀은 주임신부와 소공동체 담당 수녀와 사목회장과 총구역장단이 되겠다.
팀을 구성했으면 그 팀을 운영하는 협력 사목이 소공동체 영성을 드러내야 하겠다. 사목의 현장에서 ‘협력’한다는 것은 사목의 모든 사항을 공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의사소통을 하고, 함께하는 것이다. 협력은 선교사명을 위하여 모든 은사들을 드러내고 통합하는 것이다. 협력은 각자 안에 있는 은사를 잘 조화하고 통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있다.
소공동체와 협력 지도력
소공동체 사목을 하려면 변화시켜야 할 것이 많다. 먼저 본당 사목 구조도 소공동체 사목을 지원하는 형태로 바꾸어가야 하고 지도력도 소공동체 팀 지도력이라야 한다. 본당의 구역·반 소공동체가 활성화되는 데 가장 절실한 것은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 봉사자들의 지도력이다. 이들이 팀으로 활동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공동체를 체험하게 된다. 소공동체가 자발성과 생명력이 자라나 활성화 되도록 하기 위해서 본당신부의 영성과 의지와 태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본당신부의 영성과 지도력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소공동체를 추진하면서 배우고 익히게 되는 것이다. 백성과 우정을 맺고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배우면서 각 공동체에 적절한 지도력을 익혀가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팀 지도력이 발전하고 공동체가 발전하게 된다.
본당신부가 명령하고 지시하기보다는 섬기고 함께하는 모습을 드러내면 그런 지도력이 그대로 수도자나 신자들에게 전달된다.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서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함께하는 모습을 드러내면(교회헌장 30항 참조) 일선의 구역?반 소공동체 봉사자들도 그런 지도력을 드러낸다.
본당신부가 지배하는 지도력이 아니라 섬기고 함께하는 지도력을 드러내면 신자들은 그 안에서 예수님의 지도력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15:15)”고 하시면서 제자들과 우정을 맺으며 ‘벗 지도력’을 드러냈다. 하느님 안에서 지배적인 상하 관계가 아니고 수평관계의 우정의 지도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본당 주임신부는 일차로는 소공동체 담당 수도자와 함께하고 다음으로는 본당 소공동체 담당 지도자들과 함께하면서 지도력을 익혀간다. 팀 지도력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지배적인 사목 형태를 변화시켜갈 수 있다. 소공동체는 지배적인 지도력에서 함께하는 지도력으로의 변화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 뿌리 깊이 스며있는 위계적인 상하 인간관계를 역전시켜 평등하고 친교가 살아있는 사랑의 문화를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당신부와 수도자와의 협력
소공동체를 운영하는 반장과 구역장이 지배하는 모습이 아니라 섬기고 협력하는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데 모델을 어디서 찾을까? 아무래도 본당에서 소공동체를 촉진하는 주임신부가 함께하는 사람들과 어떤 지도력을 드러내는가를 보고 배울 것이다. 주임신부와 소공동체 담당 수녀가 함께 드러내는 지도력은 모델이 되기도 한다.
한국교회의 소공동체는 대부분 여성 구역장 반장들이 중심역할을 하게 되고, 이 여성 봉사자들은 자신들의 지도력 형태를 수도자에게서 배우게 된다. 수도자가 명령하거나 지배적이지 않고 섬기고 함께하면 평신도들도 그런 지도력을 드러낼 것이다.
나와 함께하는 수도자는 소공동체를 추진하면서 행복할까?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라 상하 위계질서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문화에서 성장하고 가톨릭의 위계적인 제도 안에서 성직계에 속한 나로서는 사목 현장의 수도자와 수평관계를 맺으며 함께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함께하는 상대방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는 함께한다고 하지만 수도자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할까? 본당 사목을 하면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수도자들은 주임신부로부터 존중 받기를 원하고 일방적인 관계보다는 상호 협력관계를 맺으며 사목의 동반자가 되길 원한다. 본당신부로서 나는 수도자와 함께한다고 하는데 수도자는 나와 함께하는 것에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나는 수평관계로 다가간다고 하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일방적인 함께함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공동체 담당 수도자에게 물었다. 나는 함께한다고 하는데 수녀님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보람이 있는지? 소공동체나 본당 사목의 중요한 사안을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고 추진한다고 하는데 수녀님도 그렇다고 인정하는지? 한마디로 말하면 소공동체 사목을 함께하면서 행복한지?
나의 이런 질문에 수녀님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지난날 여러 본당에서 본당 주임신부와의 수평관계와 수직관계 경험을 이야기하며, 나와는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 존중하고 격려하며 편안하게 소통하면서 행복한 사도직을 하고 있다고 답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도 행복해짐을 느꼈고, 소공동체는 억지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행복해지는 것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임을 발견했다.
협력사목은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탈렌트)을 피워내며 공유된 사목 비전과 방향을 향해서 서로 함께가는 여정이다. 수도자가 소공동체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받은 선물을 잘 드러내고 활용하면서 주임신부와 편안하게 협력하고 있다면 소공동체 지도력의 중요한 초석이 놓인 것이다. 상하 위계적인 한국사회에서 주임신부와 수도자가 수평관계로 발전해가면서 협력하고, 이런 수평관계가 점점 소공동체 안에서 자리잡아 하느님 안에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형성하는데 소공동체는 소중한 장이 되어주고 있다.
한국사람은 둘만 모이면 나이를 따진다. 상하 인간관계가 깊이 침투되어 있다. 이런 상하 지배적인 인간관계를 평등하고 우정을 맺는 복음적인 인간관계로 바꾸고자하는 것이 소공동체이다.
상하 지배관계에서는 사람들은 다른 지배자들이 설명하는 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진다. 한편, 함께하고 우정을 맺는 관계는 상생(相生)과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평등의 방법으로 작용한다. 소공동체는 상하 위계적이고 지배적인 문화를 복음의 사랑과 평등 사상으로 역전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 공동체로 대표되는 사랑의 문화를 한국문화에 토착화시키고 있다. 소공동체는 “사랑의 문화에 뿌리를 둔 새로운 사회의 출발점이다(교회선교사명 51항).”
② 소공동체 역기능과 한계, 발전 제언
-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
본디 필자는 소공동체를 미래교회의 비전으로 보는 입장이다. 한데 가톨릭신문사로부터 소공동체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개진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고사했지만 관철시키지 못했다.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애정 때문이었다. 기왕에 맡은 역할, 혹독한 정신으로 임할 요량이다. 우선 소공동체에 대한 부정적 관점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이다. 신학적 비판이든 실천적 비판이든, 겸허히 경청하면서 수용해야 할 제언들을 수렴하는 것이 기초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한국 소공동체의 역사를 필자의 관점에서 간략히 일별하는 가운데, 가능성과 한계를 확인해 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한 원론적인 담론은 피할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앞의 두 단계 성찰을 토대로 발전적 제언을 꾀할 것이다.
소공동체 역기능
필자는 소공동체에 대한 회의적 내지 부정적 견해를 다양한 일선 사목자들로부터 직접·간접적으로 접해왔다. 그 가운데 가장 강도 높은 것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이제민 신부가 2007년 10월 21일 자신의 홈페이지 자료실과 10월 29일 ‘지금여기’ 독자투고란에 올린 글이다. 그는 첫머리부터 이렇게 한방에 단언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소공동체에 달려있다고 보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한국형 소공동체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국형 소공동체는 그 주도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율적이지 않고, 공의회의 정신을 외치는데도 불구하고 공의회 이전의 성직자 중심 교회로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간단하다. 바로 “한국형 소공동체에서는 소공동체 운동을 무리하게 반·구역에 접목시키다보니 소공동체가 본래 지향한 정신이 빛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연한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은 본당이 소공동체 중심 체제로 변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소공동체를 종전의 반모임과 차별화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소공동체 중심으로 운영되는 본당은 거의 없다. 그들이 성공 사례로 내세우는 본당의 소공동체 모임도 종전의 반모임과 거의 다르지 않고, 소공동체장의 역할도 종전 반장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신부는 한국천주교회 소공동체 운동이 역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소치라고 지적한다. 이 신부는 사목현장의 현실을 비판의 근거로 제시한다.
“내가 사목하는 반송본당의 경우 모든 활동을 소공동체 중심으로 하다 보니 여성 연합회의 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있다. 성서반은 운영할 수 없다. 소공동체가 이들 작은 공동체들이 할 일까지 다 맡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본당이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한국형 소공동체에 몸을 싣게 된다.”
글 말미에서 이 신부는 사제 연수회 그룹토의에서 나온 의견들을 액면 그대로 밝혔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부정적 측면들이 있다.
▲ 한국형 소공동체는 초기 교회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근거한 공동체라 보기 어렵다. ▲ 명칭 때문에 신자들이 혼란스럽다. ▲ 한국형 소공동체는 본당신부에게 피곤하다. ▲ 교우들도 힘들어 한다. ▲ 자발적이지 않다. ▲ 20평 아파트에 사는 신자와 60평 아파트에 사는 신자들의 공감대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 관심사와 생활 양상이 다른 이들이 매주 또는 매월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복음 나누기 등 생활 나누기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 복음 나누기도 7 단계 말고 다른 방식이 요구된다. ▲ 사제의 관심사에 따라 소공동체 모임이 잘 되기도 하고 잘 안되기도 한다. ▲ 다른 신심단체도 나름대로의 조직이다. 본당은 그들의 발전을 도와야 한다.
이렇듯 이제민 신부 주장의 요지는 한국형 소공동체의 전면적 재고 내지 폐지다.
한국 소공동체 역사 일별
흔히 한국 소공동체의 본격적인 출범을 1992년으로 여긴다. 필자는 한국 소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이 관점을 폐기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소공동체는 어느 한 시기에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적 사목현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잉태하고 탄생시킨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 박사학위 논문 전반부에 한국 소공동체 역사를 기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수집한 1차 자료들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관계자들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종합한 결과, 한국 소공동체 역사가 크게 3단계로 발전해 왔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제1기는 1960년대 말부터 1984년까지로, 본당내 ‘구역’ 설정기다. 60년대 말부터 주로 도시에서, 부분적으로는 시골에서 교통 사정이 점차 개선되면서 기존의 공소가 폐쇄되고 본당으로 흡수되어 본당 관할 구역이 확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더불어 본당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이제 본당은 종래 수용 능력을 초과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구역’을 설정하여 본당 관할구역을 분할 관리하는 본당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생긴 구역 조직은 40~60세대를 한 구역단위로 하여 편성되었다. 처음에는 구역만 조직하였으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의 변화에 따라 ‘반’으로 세분하는 본당도 생겼다.
이후 1970년대 말부터 한국교회는 남미 기초 공동체와 개신교 구역반 조직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활성화 방안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부 앞선 본당신부들의 주도 하에 적극적인 구역반 모임이 추진되었고, 1기의 말기인 80년대 초에는 구역반 모임의 중요성을 인식한 서울교구(1980), 부산교구(1981), 대구교구(1982) 등이 매달 각 본당에 구역반 모임지를 교구 차원에서 발간?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구역 조직이 공동체 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2기는 1984년부터 1990년대 전후까지로 보는데, 이 시기는 다양한 쇄신 운동이 전개되는 등 전환기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천주교회는 1984년 창립 200주년을 기해 한국교회의 현실 진단과 미래의 사목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사목회의’를 개최 추진하였다. 그 결과로 첫째, 평신도 사도직 강화, 둘째, 지역 공동체 활성화, 셋째, 토착화 등의 과제가 한국교회가 해결할 당면 사안으로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15개 교구 중 9개 교구가 구역반 모임을 교구 사안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제3기는 1992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로서, 소공동체 사목의 적극적 추진 단계다. 한국에서 소공동체를 본격적인 사목비전으로 삼는데 기폭제가 된 것은 반둥에서 ‘공동체들의 친교’를 ‘아시아교회의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규정한 1990년 제5차 아시아주교회의(FABC)였다. 이후 서울대교구는 1992년 주교 사목교서에서 ‘2000년대 복음화 계획’의 일환으로 소공동체 운동을 제시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3년 주교 사목 교서에서 1992년 발표된 내용을 거듭 촉구하면서, 소공동체 운동 추진에 모두가 적극 동참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또 소공동체 운동의 필요성은 교구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한 예로 1992년 3월 21일 본당 사목 회장단 모임에서 복음화의 문제점과 그 원인 분석을 하였는데 그때 소공동체 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이후 소공동체가 전국 교구 사안으로 확산된 과정은 적어도 소공동체 관심자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으니, 해마다 있는 소공동체 전국모임, ASIPA 모임, 주교회의 산하 소공동체위원회 활동 등을 통하여 소공동체 대세론이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언급해 두면서, 상세한 기술은 생략하기로 한다.
한계와 가능성
필자는 일부러 소공동체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비판의 소리에 귀 기울여 소공동체의 한계와 가능성을 가늠해 보기 위함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이제민 신부가 여러 신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제시한 비판 가운데 다음의 세 가지를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성직자 중심의 하향식 소공동체가 아닌 평신도 중심의 상향식 소공동체 운동이 되어야 한다. 소공동체가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사제들 및 신자들과 아무런 공유 비전의 형성도 없이 주교들의 주도하에 교구 사안으로 책정되고 공문에 의해 하향식으로 추진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기획 및 실행 방식은 그대로 본당 사목자에게 전이되어 똑같은 현상이 본당 소공동체 결성 과정에서 빈번히 발생하였다. 결정은 사목자들이 하고, ‘자율적 참여’는 신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모순을 범했던 것이다. 이는 소공동체 사목에서 치명적인 과실이다. 반드시 시인하고 개선할 일이다.
둘째, 기존의 신심단체들을 소공동체로 인정해야 한다. 소공동체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본당의 운영이 소공동체 일변도로 경직되고 획일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레지오 마리애를 대표로하여 도태당한 신심단체들이 속출하였다. 그리고 소공동체를 부각시키려고 소공동체와 단체를 굳이 구분하려는 무리한 개념정의 시도들도 다반사로 있었다. 필자의 견해로 신심단체들을 굳이 소공동체와 차별화하려는 신학적 접근은 ‘오버’한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되 그렇게 본질적인 다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성령에 원천을 둔 다양한 은사 발휘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점도 보다 넓은 지평에서 재고해야 할 것이다.
셋째,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온전히 구현하는 소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바르게 말해서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공의회 정신을 충분히 연구하지도 이해하지도 실행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 공부하고 교육해야 하며, 그에 머물지 말고 언젠가 있을 3차 공의회 현안, 예를 들면 포스트모던 세대의 신앙생활 양식 등에 대해 미리 고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민 신부의 모든 비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가 대변한 사제들의 견해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제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다. 매년 개최되는 전국소공동체 모임에 자발적으로 참석하는 사제들과 평신도들만 해도 그렇다. 또한 월간 「사목정보」지를 통해서 매월 집중 취재·보도된 사례들(「사목정보」1,2,3,4,7,20,42호 참조)만 보아도 소공동체를 온통 문제 덩어리로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잘 되는 소공동체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지난 소공동체 역사에서 대표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가능성을 본다.
첫째, 기존의 구역반은 소공동체를 위한 ‘한국적’ 가능성이다.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은 지혜다. 새로 만든다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다. 이미 있는 단체를 소공동체로 인정하는 관점이 필요하듯이 이미 있었던 구역반조직을 소공동체 퀄리티로 끌어올리는 것도 지혜인 것이다.
둘째, 소공동체에 대한 사목자의 사목적 관심도 한국적 가능성이다. 사목자의 사목적 행위를 무조건 신자들의 자율권 침해로 보는 시각도 지양되어야 한다. 물론,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사목 직무 수행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사제의 사목적 행위를 모두 성직자중심주의로 싸잡아 말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사제가 보조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신자들을 돌보는 한에서, 사제의 사목적 개입은 권장사항이지 금기사항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사목자가 소공동체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목적 자산이며 가능성 아니겠는가.
셋째, 평신도들의 자발적 사명감도 한국적 가능성이다. 천주교를 한국에 도입시킨 주역들인 평신도들은 초기 교회 창립 과정에서부터 주체적 사명감을 잃지 않았다. 얼핏 유럽교회와 미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하여 평신도 주체성을 많이 고양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은 2000년 교회사에서 사목의 대상으로 길들여진 타성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애초부터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생활을 해 왔다. 핏속을 흐르는 주인의식은 빼앗으려고 해도 빼앗기지 않는다.
제언
일반적인 소공동체 담론을 피하였다. 그것은 이 글의 전제다. 이제 비판적 관점과 가능성의 관점을 종합하며, 결론을 대신하여 총론적 제언을 해본다.
1) 세 가지 우선적 선택
앞의 고찰을 전제로 하여 한국 소공동체의 발전적 미래를 위한 제언으로 필자는 다음의 세 가지 우선적 선택을 권하고 싶다. 첫째, 보조성의 원리를 살리는 소공동체 운용이 되어야 한다. 기존의 소공동체 운용이 성직자 중심주의니 위로부터의 운동이니 의무적 색채가 농후하니 하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보조성의 원리’가 전혀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교회법에 명시된 교회 운용 원리는 교계 원리, 협의체 원리, 그리고 보조성의 원리다. 소공동체에 대한 비판의 요지는 소공동체가 ‘교계 원리’ 일색으로 운영될 뿐 ‘협의체 원리’는 전혀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소공동체 운동이 잘 된다고 하는 본당들을 보면 이 보조성의 원리가 이상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본다.
둘째, 다양성을 살리는 소공동체 추진이 되어야 한다. 거듭 언급하지만 한때 ‘단체’와 ‘소공동체’의 차이를 굳이 강조해서 구별했던 적이 있다. 필자는 이것이 소공동체의 확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고 본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신심단체가 소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은 경직된 접근법이라고 본다. 한 걸음 양보해서 만일 어떤 특정 단체가 ‘소공동체’의 필요 요건을 결여하고 있다면 필요한 것만 보충하면 되는 것이다. 요지는 이미 있는 교회 자산을 백분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를 넘어 융합의 시대에 살고 있다. 기존의 구역반, 기존의 신심단체, 액션단체 등의 역사적 기원을 존중하면서 그들을 소공동체 사목의 터로 활용할 줄 아는 융통성과 포용성이 필요하다. 나아가 사목의 사각지대와 소외층까지 커버하는 다양한 소공동체를 발생시키는 것도 생략할 수 없는 과제다. 본당 내에서도 가능하다.
셋째, 신자 은사 계발 및 발휘를 촉진하는 소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복음나누기 7단계나 통합성이 결여된 프로그램만 반복적으로 돌리는 것은 신자들을 우민화하거나 은사 발휘를 저해할 소지가 높다. 참여자들이 참여해서 얻는 인센티브가 보장되지 않으면 금세 싫증을 내거나 불참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단계적 성장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은사계발 및 발휘를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천교구의 경우 9단계 단계적 성장 교육을 도입하고, 매월 구반장 교육에 각 지구의 사제들이 강사로 봉사한 결과, 양적·질적 성과를 올리고 있다.
2) 주님이 세우신다
교회의 역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경륜이 작동하고 있다. 역사를 통하여 성령의 감도가 흐르고 있다. 교회와 교회 비전은 사람이 ‘임의로’ 건설할 수도 폐기할 수도 없는 것이다. 본회퍼(D. Bonhoffer)는 ‘베드로’ 곧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마태오 복음 16장 13~18절의 말씀을 이렇게 묵상했다.
“어떤 사람도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혼자서 세웁니다. 누구든지 교회를 세우고자 한다면, 확신컨데 그는 이미 파괴를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도 원하지 않고 자신도 알지 못한 가운데 우상의 신전을 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그분이 세우는 것이라고./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 그분이 세우신다고./ 사람의 눈에는 허물어지는 시대로 보이겠지만/ 그분의 눈에는 건설의 위대한 시대인 경우가 때때로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위대한 교회의 시대로 보여도/ 그분의 눈에는 파괴의 시대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에 선사하는 커다란 위로입니다.”
이는 소공동체 예찬론자에게도 비판자에게도 똑같은 경종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도록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당신의 교회를 손수 세우고 계신다. 박해와 실패, 침체와 쇠퇴 속에서도 여전히 당신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