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1000년 인물열전] <30> 장흥- 실학자 존재(存齋) 위백규 상
독보적인 실학의 꽃 피운 ‘호남 3천재’ 존재 위백규
2018년 09월 12일(수) 00:00
조선 후기 실학자인 존재 위백규 선생 종손인 위재현씨가 사랑채(서실) 앞에서 존재공과 존재고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존재가 1770년에 완성한 ‘환영지’. 조선팔도와 중국, 세계지리, 별자리를 망라하는 역저이다. |
1875년에 종손자 다암 위영복이 엮은 문집 ‘존재집’(24권 12책)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에 성리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개혁과 학문을 모색하는 학풍이 형성된다. ‘실사구시’(實事求是)에 학문의 바탕을 둔 실학이다. ‘호남 4대 실학자’ 또는 ‘호남 3천재’중 하나로 손꼽히는 존재(存齋) 위백규(1727~1798) 선생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장흥 땅에서 ‘거문고 줄을 갈듯’ 국가를 개혁하자고 주장하고, 조선 지리와 세계지리, 천문 관련 책을 저술하는 등 독보적인 실학의 꽃을 피웠다.
“이름과 자리 각각 정해졌지만(各定名與位)/ 기운으로 형체 없이 걸려서(須氣掛無形)/ 삼광(해·달·별)의 하나가 되어(參爲三光一)/ 밤빛을 밝게 만드누나(能使夜色明).”
존재가 7살(1733년)때 지은 시 ‘별을 읊다’(詠星)이다. 이처럼 범상치 않은 유·소년기 존재의 모습은 1875년에 존재의 글들을 모아 종손자 다암 위영복이 펴낸 ‘존재집’에 실린 서하 임헌회의 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공은 2세에 육십갑자를 외웠으며, 6세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고, 8세에 역학(易學)에 몰두하였다. 10세 이후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읽어 천문·지리·복서(卜筮)·율력·선불(仙佛)·병도(병법)·의약·상명(관상)·주거(舟車)·공장(工匠)·기교 등 학문에 널리 통달해서 손금 보듯 꿰뚫었으니, 참으로 하늘이 주신 인재라 하겠다….”(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번역총서 ‘존재집Ⅰ’중)
존재는 12살(1738년)때 “다른 사람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에게 들어라”라는 문구를 좌우명으로 삼을 정도로 수신(修身)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한 문중 재실인 장천정사(장천재)에서 경전을 탐독하면서 사람들을 모아 강독했다. 25살(1751년)때에는 충청도 덕산에 거주하는 유학자 병계 윤봉구(1683~1767)를 찾아가 속수례((束脩禮=스승에게 배움을 청하는 예법)를 드리고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존재 역시 당대의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14살부터 관리등용문인 과거시험에 응시하며 한양을 오갔다. 그러나 40살에 과거를 통한 출사의 뜻을 접는다. 번번이 낙방한 까닭은 과거시험 부정행위가 너무 심하고, 과거시험에 쓰이는 문체(科體)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존재집’에 과거제도와 문장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이 23차례나 나온다고 한다.
존재는 말년에 참봉 유맹환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를 ‘삼벽’(三壁)이라고 칭하며 “사는 지역이 궁벽하고, 성씨가 궁벽하고, 사람이 궁벽하다”고 묘사하면서 “대책(對策)에 7번이나 합격하고도 끝내 복시(覆試)에서 낙방하여 대과(大科)에 대한 희망은 운명처럼 끝났으니 천한 사내 마음에 어찌 담담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심정을 내비쳤다.
하지만 존재가 오늘날 ‘호남 4대 실학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70살(1796년)에 천거로 벼슬길에 나가기까지 역설적으로 향촌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교육을 하는 한편 ‘환영지’와 ‘지제지’(支提誌), ‘정현신보’(政鉉新譜), ‘격물설’(格物說) 등 저술에 전념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환영’은 우주라는 뜻입니다. 조선과 중국, 세계지리가 실려 있어요.”
존재공의 종 6대손인 위황량(92·전 장흥문화원 이사)씨가 ‘환영지’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책을 들춰보니 목판으로 찍은 전라도와 울릉도·독도 등 조선 팔도, 중국 13개성(省), 그리고 서양제국도(西洋諸國道), 성도(星圖)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18세기에 시골에서 지구 반대편 유럽 지리까지 어떻게 파악할 수 있었을까? 32살(1758년)때 우연하게 서양 ‘구구주도’(九九州圖)와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1602년 제작)를 본 것을 계기로 12년에 걸쳐 최종 마무리했다고 한다.
초야에 묻혀있던 존재가 세상에 나간 때는 1796년, 그의 나이 고희(70살)였다. 1794년 태풍의 내습으로 호남 바닷가 마을이 큰 피해를 입자 어명에 따라 파견된 위유사(慰諭使) 서영보의 천거였다. 정조는 1795년 음력 11월, 전라도 감사에게 선생이 지은 ‘환영지’를 궤짝에 담아 자물쇠를 채워 올려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그 책을 읽은 정조는 이듬해 2월에 존재를 급히 상경하도록 했다.
“(정조가) 실정을 보고오라고 서영보 어사를 내려 보냈어요. 존재를 소문으로 알고 있었던 서영보가 과객행세를 하고 존재 댁에서 하루밤을 묵어요. 그날 밤이 제삿날인데 국법으로 밀주(密酒)를 단속할 때에요. 안식구가 제주(祭酒)를 내오자 존재공이 ”이 술은 안 된다. 백성들이 법을 안지키면 누가 지키냐“면서 제주를 부어버리고 청수(淸水)를 길어오라고 해요. 그런 내용(덕행과 저술)을 정조에게 보고한거죠. 장흥에서 한양까지 (걸어서) 17일 걸렸다고 합니다.”(위황량)
존재는 정조의 부름을 거듭 받자 3월 상경해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작성해 제출한다. 관리의 발탁과 폐단 개혁, 학문증진 등 6개 조목을 비판하는 상소문이었다. 일찍이 정치를 악기로 보고 새줄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 ‘정현신보’(政絃新譜)(30살)를 썼고, 장흥부사 황간의 요청으로 29개 적폐를 지적한 ‘봉사’(封事)(52살)를 쓴 바 있었다. 이이-김장생-송시열-권상하-윤봉구로 이어지는 노론계이지만 향촌생활을 통해 현실 비판적인 인식을 형성했다.
‘만언봉사’는 성균관 유생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정조는 “보필할 사람을 고르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라는 대목은 내가 가상히 여긴다. 인재등용을 통해 임금을 섬기는 것은 대신의 책임이니 덮인 풀을 베어내듯 가려졌던 인재를 등용하는 일은 오늘의 암랑(巖廊·의정부)에 바라는 바이다”면서 옥과 현감을 제수했다. 존재는 옥과에서 자신이 품어온 목민(牧民)의 뜻을 펼쳤다. 그러나 노환으로 72살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 관산 죽천사와 옥과 영귀사, 합천 옥계사에 배향돼 있다.
장흥군 관산읍 방촌마을에는 존재 고택(중요민속자료 161호)이 자리하고 있다. 웅천현감을 지낸 12대 웅천공 위정렬이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 존재 생가는 명품 고택 민박집으로 지정돼 있다. 고택 오른쪽에는 옥련정이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섬 중앙에는 오죽(烏竹)이, 주변에는 배롱나무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존재가 젊은 시절, 연못의 개구리들이 하도 울어대자 부적을 써서 연못에 넣었더니 그 후로는 개구리들이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문간채를 지나 고택에 들어서면 정면에 본채와 사랑채(서실), 왼쪽에 초가로 된 헛간채가 놓여있다. 사랑채에는 존재의 스승 병계 윤봉구가 써준 ‘존재’(存齋)와 ‘영이재’(詠而齋) 현판이 걸려있다. 영이재는 존재의 부친 위문덕의 호이다. 방촌유물전시관에는 존재의 ‘만언봉사’에 정조가 답한 ‘만언봉사 비답(批答)’을 비롯해 생원합격 증명서인 백패(白牌), 24권12책으로 간행된 ‘존재집’, ‘환영지’ 등이 전시돼 있다.
종손 위재현(63) 씨는 정년 퇴직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99살 어머니를 모시며 종가를 지키고 있다. 위재현 씨는 “지금도 사회개혁 등 배울점 들이 많다. 존재공에 대해서 학자들이 많이 연구해서 다산 정약용 선생처럼 학문과 사상이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존재 기념사업회(이사장 윤수옥)가 만들어져 5월 15일을 ‘존재의 날’로 정하고 올해까지 2년째 ‘존재학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글·사진=송기동 기자 song@
/장흥=김용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