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오늘날 왜 성(性)정체성의 혼란이 이토록 심각한 것일까?/ 성정체성에 극심한 혼란을 주는 사상은 성경을 공격 목표로 삼고 있다.
<인권, 진보라는 이름으로>
나는 왜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내 정체성이 그렇게 명령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가 정체성이다. 정체성은 한 가지가 아니다. 누구나 여러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와 지난날 나는 아버지, 아들, 남편, 은행원, 교수, 벤쳐 기업인 대표이사 회장, 경영연구소 원장, 경영학박사, 그리고 그리스도인, 신학전문대학원 3년 수료 후 전도사 3년 과정을 거쳐 목사고시를 패스하였으나 목사안수 포기를 결단하였다.
그 후 성경 연구가(9년째 daum cafe 운영)로, 가정교회(나사로 가정교회)를 개척하여 운영한지 9년차가 되었다. 시대별 각각의 정체성은 다른 말과 행동을 하도록 작동한다. 남편으로서의 나는 교수로서의 나와는 다른 말과 행동을 한다. 남편으로서의 내가 아내에게 교수의 언어와 행동을 한다면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킨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모든 정체성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정체성은 신앙 정체성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들에 영향을 미친다. 이 시대는 그리스도인 신앙 정체성에 혼란이 가중되어 다른 정체성들에 큰 폐해를 주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대부분 성직자들의 정체성이 심하게 부패한 것이다.
세상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진보’라는 명분으로 신앙 정체성을 해체시키려 하고 있다. 인권과 진보라는 이름을 앞세우기 때문에 방어하기에 쉽지 않다.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왜곡된 인권과 거짓 진보는 하느님을 공격하고 성경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오늘날 이 기이하고도 충격적인 일이 진행되고 있다.
<성(性)정체성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많은 면에서 다르다. 다른 것을 다르다고 하면 차별한다고 공격을 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그것을 법으로 만들어 벌금을 부과하고 감옥을 보낼 수도 있는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려는 정치세력이 있다. 남자를 남자라고 하고 여자를 여자라고 하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나라에서는 성교육을 시킬 때 “성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가능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뉴욕에서는 성별이 남자와 여자 말고도 27가지가 더 있다고 가르친다. 어떤 미국인 가정에서는 5명의 가족이 성전환 수술을 했다고 한다.
성정체성에 극심한 혼란을 주는 사상은 성경을 공격 목표로 삼고 있다. 하느님을 적대시하고 있다. 하느님과 성경의 원칙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준동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이 자기 형상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26-27).
남자와 여자의 기원은 창조주 하느님께 닿아 있다. 남자와 여자의 인권의 뿌리는 하느님께 있다. 인간이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인간의 철학은 인간의 마음을 오도할 뿐만 아니라 각종 질병과 성적 타락으로 인간성을 파괴하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 성정체성의 혼란? 그것은 나락에서 나락으로의 떨어짐이다.
성적 취향이라는 인면수심의 자유와 인권으로 자행되는 수간(獸姦)이 아동성애자로 발전한다는 보고서도 있다. 당나귀와 결혼하거나 개와 약혼하거나 짐승과 성관계를 하는 것이 자유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것이 자유인가? 인권인가?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명기 27:21).
하느님은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을 종류대로 지으시고 구별하셔서 그 위치를 정해 놓으셨다. 그 위치를 지키고 구별할 때 사람과 생물은 행복할 수 있고 번성할 수 있다. 성경은 낡은 것이라고 치부한다고 해서 폐기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날마다 새롭다. 그것은 원칙이다. 인간 역사에서 셀 수도 없는 사악한 공격에 살아남은 불멸의 책이 성경이다.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면 삶의 원칙이 무너지고 불행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성정체성의 혼란 뒤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전 세계가 어떻게 성정체성의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을까? 그 뒤에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은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노동자들이 합심하여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14년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노동자들은 계급의식으로 연대하지 않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 싸웠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지만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지식인, 변호사, 전문적인 혁명가들이었다. 혁명은 서유럽으로 확산하지도 못했다. 1차대전 종전 무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오류를 분석하고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일어나려면 서구문명을 파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서구문명의 뿌리는 기독교이다.
루카치(György Lukács, 1885~1971)는 1919년에 서구문명을 파괴하는 전략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누가 우리를 서구문명으로부터 구원해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루카치는 헝가리 볼셰비키 정권에서 문화담당관이 되어 급진적인 성교육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사회의 도덕적 가치관을 파괴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는 아동들의 성적윤리관을 훼손시키면 가족제도와 교회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에게 기독교의 도덕윤리관과 일부일처제와 부모와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고 조롱하도록 부추겼다.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학교(Frankfurt School)가 1924년에 개교했지만 1923년부터 20여 명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여 마르크스주의를 경제용어에서 문화용어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대학 총장이 된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화적 상부구조에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다. “우리는 총으로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차츰차츰, 한 해 두 해,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진적으로 교육기관, 공공조직에 침투해 그들을 마르크스주의자로 만들어 보편적인 평등주의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1932년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는 일단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함께 비판이론을 제시했다. 비판이론은 서구 문명을 이루고 있는 모든 제도 즉 기독교, 가족제도, 가부장제, 자본주의 원리, 권위, 도덕, 애국심, 관습을 붕괴시키기 위한 동성애자, 젠더, 지역문화 등 모든 정체성 이론 분야의 바탕이 되었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미국으로 옮겨가 대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지식인 계층인 상부구조를 문화혁명으로 공략한 전략은 세대를 거치며 많은 제자를 양산하면서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기가 막힌 성정체성 혼란의 배경이다.
<시대는 묻고 있다. 하느님을 예배할 것인가?>
사람들이 종말이라고 하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하느님을 예배할 것인가?’이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세상을 진단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느님을 알되 하느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하나 우둔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로마1,21-25).
성정체성의 혼란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다. 기독교 파괴적인 계획적인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그 뒤에는 악한 영적 세력이 있다. 하느님을 대적하고 성경의 원칙을 무너뜨리며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악한 마르크스주의와 인본주의가 검은 발톱을 숨기고 있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