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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驪興閔氏 大宗會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민병권[閔丙權]
여흥민씨 법가의 표본
여흥민씨 좌의정 민정중 고조 민사용 가문은 법가의 표본이다. 나라에서 이 가문을 인정한 것이다. 이집 민유중의 딸을 숙종의 계비로 맞아 들인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이 집에는 인현왕후 탄생 배경이 있다.
이 가문의 파조 민사용은 군수를 지냈다. 민사용은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민제인의 아들이다. 민사용은 아들을 여러 명을 낳았는데 그 중에서 여임, 여검이 현달했다. 둘 다 문과하여 하나는 공조참판, 다른하나는 울산부사를 각각 지냈다. 그 중 특히 여검은 청백리로 명성을 날렸다. 이 두사람의 맏집 조카 기[생부는 여준, 양부는 여건]는 문과하여 경주부윤을 지냈다. 기의 아들 광훈은 문과에 장원하여 관찰사가 되었다.
민광훈은 1595년에 태어나 1659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는 중집이다. 1652년 승지를 거쳐 1653년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선정을 베풀어 관리로 이름이 있었다. 민광훈은 조야에 신망이 높았던 삼형제 민시중,정중,유중을 나았다. 민시중은 1625년에 태어나 1677년에 몰했다. 송시열의 문인이다. 1664년 문과에 장원하여 이조참판을 지냈다. 학행으로 명성이 있었으며 충성스럽고 덕성이 두터웠다. 민정중은 1628년에 태어나 1692년에 세상을 떠났다. 역시 송시열의 문인이다. 1649년 문과에 장원하여 좌의정에 올랐다. 학덕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세상 사람들이 "노봉 선생"이라 일컬었다, 민유중은 1630년에 태어나 1687년에 별세했다.1650년 문과하여 형조판서,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1681년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영돈녕부사가 되고 여양부원군에 봉해졌다.
민시중,정중, 유중 삼형제는 삼방파라고 부른다. 삼방파 삼형제는 서인 노론에 속했으며 문장과 덕망으로 모두 유명했다. 시중의 아들 진주는 문과하여 이조판서, 정중의 아들 진장은 문과 장원하여 우의정, 유중의 아들 진후는 문과하여 좌참찬, 유중의 또 다른 아들 진원은 문과하여 좌의정을 지냈다. 이 중에서 특히 민정중의 아들 진장이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할아버지[광훈],아버지[정중]와 함께 3세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가풍 속에서 민유중의 딸은 왕비로 뽑혔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학문과 덕성을 배웠으며 외할아버지 송준길의 사랑을 받으며 훌륭하게 자라 왕실에 들어 갔다. 예의가 바르고 법도가 있어 왕실의 상하 어른, 아랫 사람 부터 많은 궁녀 까지 아끼며 우러러 봤다.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다. 이것이 모두 법도 있는 이 집안의 교육의 덕이며 덕성스런 가풍의 여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흥민씨 2대 재앙
여흥민씨 민사용 가문은 약1540년 부터 민유중의 딸이 왕비가 되기 전인 1680년 까지 약140년 동안 황금기이었다. 왕비의 힘을 업었다는 혐의가 없는 이 시기야말로 민사용 가문의 참모습이다. 왕실의 힘이 작용하지 않은 제 힘으로 가문을 대성시킨 본보기로 조선조 유명 가문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인물들의 성공이 눈부시고 집안이 창성하여 뭇 사람의 우러름을 받았다. 왕실에서 이 집을 가만 두지 않았다. 마치 인기 절정에 있는 오늘날 TV의 앵커를 권력층이 가만 두지 않는 모양으로 권부의 얼굴 제1 마담으로 뽑아 데려가 버렸다. 이로써 TV 방송국이 권력에 오염되고 편파 방송을 하여 비난을 받듯이 민사용 가문도 왕궁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외척의 득세라는 비난의 물꼬를 텄다.
민유중의 딸이 숙종의 계비[인현왕후]로 책봉이 된 1681년 부터 왕비에서 폐해진 1689년 까지 왕후 재위 8년 동안의 영화가 장희빈 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호사다마" 라는 말이 맞다. 좋은 일에는 마가 자꾸 끼이는가 보다. 조선 천하 절색 장희빈의 눈에 고압의 전류가 흘러 숙종의 가슴이 찌릿 찌릿......해지고 오금이 후들 후들해져 버렸다. 우암 송시열도 감전사를 당하고 왕비의 친정 민유중 가문은 폐가로 변했다.
왕후를 버리고 장희빈에게 빠졌던 과오를 후회하는 숙종은 그 뒤 민유중 가문에 두텁게 사후 보상을 하였다. 옛날의 명성을 회복하고 가문이 더욱 번성했다. 언제 비극이 있었냐는 듯 가문의 영화가 불꽃처럼 성대해졌다. 민유중의 5세 손인 민치록의 딸이 고종의 비가 되었다. 마라는 것은 좋은 일이 쌓이는 꼴을 보지 못하는 성깔이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이 집을 집적거렸다. 시집 어른과 남편[숙종]에게 순종하는 인현왕후 같은 며느리를 고른다는 것이 자기보다 고수인 정치 9단 여걸을 모르고 데려 왔다. 이로 말미암아 용호상박 진검 승부가 벌어져 대원군이 KO패를 당하고 왕궁은 민씨 친위 부대로 철옹성을 쌓았다.
여우 피해 가면 범을 만난다더니 대원군을 무너뜨리고 나니 대륙의 문간방에 머슴 같이 있던 일본이 마치 6.25 때 머슴이 죽창 들고 주인 찔러 죽이듯이 동서양 문물의 격변기를 타고 낭인을 시켜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도륙했다. 명성황후가가 죽은 것은 민유중 가문의 사형선고이면서 조선조의 멸망이다.
민사용 가문은 2대 재앙을 만나 쑥대밭이 되고 목불인견의 상태로 변했다. 명성황후의 죽음이라는 미증유의 민족 불행 속에서 특히 민유중 가문은 마치 핵폭탄을 맞은 듯하다. 다른 것은 재건이 가능하다. 단지 하나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있다. 그 놈의 머슴이 금지옥엽 같이 키워 놓은 딸 8명을 강간하여 몸을 더럽혀 놓고 데려가 금은보화로 치장시키고 백작, 남작, 자작 등의 수놓은 옷을 입혀 마리화나 연기 속에서 광란의 성관계를 계속하다가 죽였다. 그 뒤 핵폭격을 맞은 현장이 13대 경제 대국으로 바뀐 번화가가 되어 그 곳에서 월드컵 축구 4강을 알리는 꼴이 터졌다. 그 함성 속에서도 그 머슴이 쳐놓은 덫에 걸려 문간방으로 끌려가던 민씨 가문의 딸 8명에 대한 아픈 기억이 아직도 우리 국민 모두에게 생생하다.
여흥민씨와 한국 관상 !
여흥민씨 민유중 가문은 조선조와 운명을 같이 했다. 민유중 가문을 알려면 조선조의 운명을 알아보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다.
조선조의 사주팔자를 알려면 한국의 관상을 보면 된다. 관상은 양상과 음상이 있다. 천하의 만물은 한몸에 양성과 음성을 함께 갖고 있다. 관상은 양기와 음기의 조화를 다 살펴 봐야 한다.
한국관상은 양기의 상을 우선 보기로 하자. 한국은 만주라는 대륙을 두 팔로 번쩍 들어 올리고 있는 훤훤 장부 모습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중량급 역도 세계 참피온의 힘찬 모습이다. 만주 벌판과 시베리아 대륙을 함북 회령쪽으로 부터 평북 신의주 쪽으로 둘러엎을 듯한 형세이다. 그것도 반은 앉은 자세이다. 발이 안 보인다. 이 자세에서 일어서면 자연적으로 대륙을 팽개쳐 버리게 되어 있다. 생각해보니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만주 벌판을 둘러엎은 적이 있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블라디보스톡으로부터 시베리아,몽
골, 북경 까지 한꺼번에 팽개칠 수 있는 아시아의 강자 형상이다.
아시아의 강자 상을 하고 있으나 기력이 쇠할 때는 이 대륙이 큰 짐이 되어 한국을 내리 눌러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아무리 내리 눌러 고통이 심해도 망하지 않는 상이다. 한국이 디디고 있는 것이 땅이면 압사를 당하기 마련이다. 다행히 한국은 태평양 바다에 몸을 담고 있어 대륙이 누르면 바다에 쑥 들어갔다 다시 나온다. 대륙이 절대 죽일 수 없는 나라의 상을 갖고 있다.
한국관상에 있어서 음기의 상을 보기로 하자. 경기도 위쪽으로 불룩 나온 황해도는 여자의 유방을 닮았다. 그것도 젖꼭지가 뾰족이 나온 천도복숭아 형상이다. 조선 북쪽에 미인이 많다고 한 것은 이 곳과 관련이 깊다고 본다. 한양의 내노라하는 호걸들이 늘 침을 질질 흘린 천하절색 황진이가 이곳 출신이 아닌가? 경상도 쪽은 부자 집 맏며느리의 둥그스럼한 엉덩이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안에는 자식을 낳는 튼튼한 궁궐[자궁]이 있다. 그 쪽에서는 힘만 한 번 주면 인물이 쑥쑥 나온다. 그래서 자고로 영남에 인물이 많다 하였다. 경기도는 여인의 따뜻한 품이고 호남은 여인의 푸짐한 창고이다. 영남에서 인물이 나면 경기도의 따스한 여인의 품에서 자라고 호남의 푸짐한 창고에서 식량을 얻는다.
한국의 음기의 상은 부자 태가 줄줄 흐르는 아름다운 얼굴에 평생을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여인상이다. 삼면이 바다라 손만 내밀면 해초에 고기 등 먹거리가 풍성하다. 그런 반면에 유혹을 받는 상이다. 대륙쪽에서는 이 유방을 집적거리고 태평양 쪽에서는 저 엉덩이를 건드린다. 유방은 통째로 뺐겨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엉덩이 부분은 통째로 먹히면 죽어 버린다. 한국에 인접해 있는 일본 열도는 한국의 엉덩이를 노린다. 태평양 바다를 넘나드는 미국의 눈길도 수상쩍다.
민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의 칼날에 죽었으며 조선조도 망했다. 조선조의 운명과 가장 인연이 깊은 가문이 명성황후 친정집이다. 그 황후가 죽고 그 친정은 일본 제국주의 정부가 주는 작위를 받은 이가 수두룩하게 나왔다. 조선조의 멸망과 명성황후 친정 집안의 불행은 한국의 관상에서 이미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흥민씨 충정공[민영환 의사]에게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
충정공 민영환은 민겸호의 아들이다. 민영환은 민태호에게 입양했다. 민태호의 동생 승호는 민유중의 6대 종손으로 들어가 민비의 오빠가 되었다. 승호는 누이동생을 도와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위세가 좋았으나 어느 수령이 보낸 폭약에 어머니와 함께 참사를 당했다. 민겸호는 생가로 승호의 동생이 된다. 겸호는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도봉소 사건"의 주동자 김춘영을 처형하려다가 궁중에 난입한 군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런 비극 속에 이웃 나라들은 화학탄 네이팜보다 더 독한 마음을 갖고 초콜릿 보다 더 달콤한 유혹으로 조정을 농락하며 국권을 짓밟았으며 일본제국주의 정부는 우리나라의 명줄을 끊었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때 일경들은 한 여고생을 붙들었다. 그 여고생을 나체로 나무 십자가에 묶었다. 그들은 숯불 화로를 갖다 놓고 철사를 새빨갛게 달궈서 그 여학생의 유방을 마구 지졌다. 그 뒤 칼로 마치 무우 쪽처럼 사지를 베었다. 붉은 피가 빗줄기처럼 흘러 내렸다. 이것은 박은식의 "조선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내용의 극히 적은 부분이다.
이와 같이 죄 없는 이들이 콸콸 흘린 피가 대지를 적시기 전인 1905년 여흥민씨 민유중가의, 시종무관으로 있던 민영환이 일어섰다. 나라 안 온 백성들의 슬픔을 대신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궁궐 앞에 나가 조약을 파기하고 다섯명의 매국노를 처형하라는 글을 올리고 울부짖었다. 이에 일본 헌병들에게 구금되고 백관도 해산 당했다. 풀려난 뒤도 거듭 궁궐 앞에서 목숨 걸고 항의했다. 이로써 일제는 임금까지 협박하여 왕명 거역죄로 구속하였다. 그 뒤 평리원에서 풀려나 이미 국운을 돌이킬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국민들이 각성하여 구국의 대열에 적극 동참할 것을 요청하며 각국 외교 사절에게 만행을 알리는 편지를 남기고 단도로 자결했다. 이에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듯 슬퍼 하였다. 국권 회복운동의 용사들이 화산의 용암처럼 거리에 흘러 넘쳤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아저씨와 조카가 어찌 이토록 다르단 말인가 ? 숙부는 세도로 비난의 대상이요, 조카는 충의로 존경의 대상이니 이를 어찌 한단 말인가 ? 숙부를 보고 조카를 나무랄 수 없고, 그렇다고 조카를 보고 아저씨를 나무라지 않을 수는 없다. 누가 있어 충정공[민영환 의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
여흥민씨만 왜 단죄의 대상인가 ?
그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까지 앞에서 이야기 한 안동김씨 김생해 가문과 반남박씨 박소 가문에도 그 책임이 있다. 김생해 가문은 박소 가문과 함께 한국 최강의 명문으로 쌍벽을 이룬다고 앞에서 강조했다. 이 쌍벽이란 과환과 벌력에서 양 가문의 힘을 비교하였을 뿐이다. 세도정치와 반역행위를 놓고 볼 때는 김생해 가문이 박소 가문보다 민유중 가문과 쌍벽관계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세도정치에 있어서는 김생해 가문이 민유중 가문보다 뿌리가 깊다. 반역행위에 있어서는 박소 가문이 민유중 가문보다는 강도가 약한 면이 있지만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안동김씨 김생해 가문은 조선 세도정치의 대명사로 치부되고 있어 그 폐해를 여기서 새삼스럼게 떠벌릴 필요가 없다. 김생해 가문의 반역행위는 세도정치의 악명에 묻혀버렸다. 자칫하면 김생해 가문은 5000년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5000년 역사가 5000번이 바뀌어도 씻을 수 없는 고강도의 오명을 기록하는 가문이 될 뻔했다. 이것을 흥선 대원군이 구출했다. 이어서 명성황후가 김생해 가문이 할 배역을 맡아 주었다. 이로써 김생해 가문과 박소 가문은 멀리 사라지고 눈물을 흘리며 손수건을 흔드는 대원군을 뒤로 한 채 민중전 친정 가문만이 막차를 타게 되었다.
일제는 독립을 부르짖는 우리 동포들을 감옥에 가두고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발에 쇠사슬을 채우고 단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매는, 콧구멍에 물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을 가하였다." [이것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문의 일부이다.] 이런 가운데 안동김씨 김생해 가문도 일제의 귀족이 되어 조국을 배반한 자가 4명이 나왔다. 그 중에서 김성근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김성근은 1835년 판의금부사 온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원 김상용의 후손으로 김방행의 증손이다.1835년에 태어나 1919년에 졸했다. 1862년 문과하여 1902년 탁지부 대신을 지냈으며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의 자작이 되었다. 김성근이 자작이 된 후 한달 만에 죽고 김호규가 자작을 이어 받아 감격한 나머지 "매일신보"에 글을 올리기를 "....... 반도 2천만 민중이 열망하여 오던 바이니 아등은 감격과 흥분을 금할 수 없다."고 외치며 일제의 호국의 신이 되라고 조선 청년에게 호소했다.
김종한은 이조참판 김경진의 아들이다. 역시 선원 김상용의 후손이다. 김종한은 1844년에 태어나 1932년에 졸했다. 이조참판을 궁내부 대신서리 등을 지냈다. 이완용을 필두로 움직이는 정우회의 총재직을 맡아 친일 여론 조성에 앞장섰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의 남작이 되었다. 3.1 운동이 일자 "독립"이나 "공화" 등의 단어조차 모르던 미개국이 청국의 속국이 되는 일보 전에 일본이 청국과 싸워 이겨 주니 공도 모르고 소란을 일으킨다고 제 민족을 저주했다.
그 외에도 김병익과 김학진이 있다. 김병익은 우찬성 대근의 아들이고,공조판서 한순의 손자이며,이조판서 이양의 증손이다. 1860년 문과하여 공조,형조 등의 판서를 지내고 한일합방 때 남작이 되었다. 김학진은 이조판서 김병교의 손자이며, 청음 김상헌의 후손이다. 김학진은 여러 조의 판서를 지내고 남작이 되었다.
안동김씨 김생해 가문 뿐만 아니다. 반남박씨 박소 가문도 조선조에 대한 반역 행위자가 4명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큰 도적이 나왔다. 조선조에는 대동강 물을 팔아 먹은 봉이 김선달, 서슬이 시퍼런 권문세가와 속이 시커먼 부호들의 재물을 턴 임꺽정 등 별의 별 도적이 다 있었으나 500여 년만에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은 처음 나왔다. 을사년[1905년]에 그 도적이 한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 한조가 되어 나왔다. 우리 후손이 아무리 관용을 베푼다 해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도적들이다. 바로 을사오적이다.
을사오적에는 안동김씨도 없고 여흥민씨도 없다. 그런 곳에 반남박씨가 끼여 들었다. 조선조 최강의 가문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세도정치의 덫에 걸리지 않은 반남박씨가 을사년에 생긴 도적의 패거리에 가담을 하고 말았다. 반남박씨로서는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 어찌 그것이 반남박씨에 그칠 일인가 ?
을사오적 박제순 이외 박기양, 박제빈, 박영효 등이 조국을 배반하고 일제의 작위를 받았다. 이 반역자들 중에 박영효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철종의 사랑스런 사위로 갑신정변의 주역이 아닌가 ?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과 조국 근대화의 사명을 띈 선각 정객 제1호가 아니던가? 2천만 동포의 기대가 그 한 몸에 있지 않았던가? 어찌 그 훌륭한 식견으로 일제의 그 유혹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리 쉽게 빠져 버렸는가?
정신을 가다듬고 위를 조용히 살펴보자. 여흥민씨 민유중 가문에게만 그 책임을 돌릴 수 있겠는가 ?
여흥민씨 민유중 가문이 시끄러운 이유
앞에서는 조용했다. 안동김씨 김생해 가문이나 반남박씨 박소 가문에서는 조용하더니 여기와서는 왜 갑자기 시끄러운가?
지금까지는 부드럽고 점잖은 듯한 표현을 하다가 여기서는 왜 표독하고 못된 논조로 바뀌는가? 듣기 민망할 만큼 덕담으로 일관하더니 왜 비난과 성토 일색인가?
여흥민씨 민유중 가문은 명성왕후 민중전의 친정집이기 때문이다. 듣고 본 것이 얕고 짧은 탓에 확실히 모르지만 서양인가 어디 황제가 "짐은 국가다."라고 큰소리 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명성왕후는 황실의 안주인이다. 국모가 왜적에게 시해를 당하면 나라와 가문이 따라서 망하는 것은 밝은 이치다. 명성왕후가 죽고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왕후의 친정집인 여흥민씨 민유중 가문이 성하겠는가? 왕후가 죽고 나라가 시끄러운데 어찌 왕후의 친가가 조용할 수 있겠는가?
나라[국가]는 생물이다. 나라도 다른 생물 모양 생겼다 없어지기는 마찬가지다. 그 수명이 다를 뿐이다. 생겼다가 몇 일만에 죽는 것, 몇 달, 몇 년 만에 죽는 것도 있지만 동서양으로 시야를 넓혀 보면 일, 이백년 짜리도 적지 않다. 나라의 수명이 수 백년을 가는 것도 복이다.
조선왕조의 수명이 모두 잘 알다시피 500년이다. 장수를 한 셈이다. 천수를 누렸으며 복상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그 유덕을 칭송해야 될 상주인 우리 후손들이 3년상 33번을 치루고도 남는 긴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아이고, 아이고"하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유덕을 못 잊어 그 주검을 애도하는 효자, 효손의 지극 정성이던가?
아니다. 상주라는 현대의 우리는 임종 후부터 눈물 한 방울 흘린 적 없고 오직 죽은 아비를 염도 하지 않고 고쟁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냄새나는 치부를 드러 내놓고 침을 뱉으며 욕을 바가지 바가지로 퍼부었다.
아비 죽음에 조상 묘소에 가서 할애비, 할애비의 할애비 관까지 끌어다 내놓고 할애비 유골 중에서도 치부만 골라 저주를 고강도 프라스틱 바가지로 퍼부었다. 세상에 이런 못된 상주가 있을 수 있는가?
동쪽에서 찬란한 해가 솟아오르고 둘만 모여도 노래하며 춤추고 아이에서부터 늙은이에게 이르기까지 여자나 남자나 서로 아끼며 예절 하나만은 잘 지켰던 한겨레이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고얀 놈이 있을 리가 없다.
알고 보니 저주를 퍼붓는 상주들은 일본이나 미국으로 양자를 간 사람들이었다. 가서 호로 자식이 다 되어 버렸다. 예의를 알리도 없고 장사 지내는 법도 모르는 이들이 배워 온 것이 제 아비, 할아비가 남겨 놓은 것은 모두 원수 대하듯 부시고 쪼개고 가르고 짜르고 뭉개기 때문에 역사가 난도질 당하고 나라가 시끄러워 졌다. 그들한테 모르게 물든 나도 덩달아 여흥민씨 민유중 가문에 와서 시끄러워 졌다.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여흥민씨 민유중 가문이 시끄러운 이유 2
도대체 안동김씨 가문과 반남박씨 가문의 흉을 왜 민씨 집에 와서 하는가 ? 그것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다른 장에서 보학에 대한 소견을 밝히면서 잠시 그 이유를 들었으나 그것으로 부족한 듯하여 덧붙이고자 한다.
보학이란 나나 남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행적을 정성스럽게 살펴보고 그 좋은 점을 본 받고자 하는 것이 그 취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분들의 흉은 말하고 듣는 것 조차 피하는 것을 불문률로 하고 있다. 요즈음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폭력 영상물을 금하는 원리와 같다.
오늘의 폭력 영상물을 뿌리 뽑을 수 없듯이 인간 세상의 흉도 없앨 수 없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흉을 허공에 대고 퍼붓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임금의 흉도 없는 데서는 한다고 했다. 자식들도 부모가 계시지 않는 자리에서는 흉을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부모가 오시면 큰 죄라도 지은 듯 하나 같이 입을 딱 닫아 버린다. 요즈음 서양의 본을 보고 부모에게 눈을 황소 같이 부릅뜨고 표범 같이 덤벼드는 자식이란 거의 없었다. 흉을 해도 예의라는 차단기가 있어 광포해지지 않았다. 부모 흉을 꼭 해야 될 일이라면 부모 계신 방을 정중하게 닫고 나와 부모가 들릴락 말락한 위치에서 투덜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안동김씨나 반남박씨 집에서는 차마 그 흉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이 민씨 집에 들어와서 이 집 흉을 더욱 볼 수 없었다. 그들의 흉을 빌려서 빗대어 하는 수밖에 없었다. 덕담을 하는 가운데 흉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흉을 보는 가운데도 미덕의 묘미를 잃지 않는 것이 보학의 장기이다.
옛날에 집집마다 사랑방이 다 있었다. 이 곳이야 말로 보학의 성전이다. 사랑방에서는 남의 집 덕담은 물론이고 흉도 멋대로 하는 곳이다. 이 곳 민씨 댁 사랑방에 잠시 들러 잡담을 한 것을 시끄럽다 하면 이집 근처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질 지도 모른다.
여흥민씨 핵폭격을 맞아도 멀쩡한 곳이 더 많아
일제의 폭격기들이 대편대를 지어 게릴라식 폭우를 퍼붓듯한 핵폭격을 여흥민씨 민사용 가문에 가했다. 민씨가문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비 지옥에서 받는 참혹한 고통보다 더한 비극의 현장이었다. 불탄 가옥과 재만 남은 듯한 이 가문에도 여기 저기서 푸르디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보통 집은 대재앙을 만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다. 명문은 썩어도 들판에 죽어 버려진 짐승 모양 통째로 썩지 않는다. 이것이 명문의 저력이다.
임진왜란 때도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을 비롯한 진성이씨 가문 같은 곳은 대재앙을 면한 성지가 되었다. 일제 침략으로부터 받은 오욕으로 뒤범벅이 된 민사용 가문에도 그런 오욕을 피한 곳이 남아 있었다.
첫번째로 민유중의 맏집조카 민진주 집이다. 이 집은 둘째 집 유중의 집 같이 영광과 오욕의 양극을 오가지 않고 옛날 선조들의 가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또한 선조들보다 뛰어나지도 못했지만 선조를 크게 욕되게 하지도 않았다.
이제까지의 격렬했던 감정을 진정시키고 이 집의 과환과 벌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민진주는 이조참판 민시중의 아들이다. 1684년 문과하여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정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이 1725년 문과하여 우의정을 지냈다. 손자 백행, 백창 둘 다 문과하여 하나는 대사간 또 다른 하나는 동부승지를 지냈다. 백행 후손에 세호가 공조판서,덕호가 공조참판 영국이 문과하여 형조참판을 각각 지냈다. 백창의 아들 명혁이 문과하여 예조판서에 숙헌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백창의 손자 치문이 문과하여 호조참판, 치문의 아들 달용이 문과하여 교리, 달용의 아들 영직이 공조참판, 영직의 동생 영일이 문과하여 교리, 영직의 아들 정식이 문과하여 이조참판 , 달용의 동생 술용의 손자 회식이 문과하여 승지를 각각 지냈다.
두번째로 민정중 집이다. 민정중은 문과에 장원하여 우의정을 지내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아들이 역시 문과 장원하여 우의정을 지냈다. 양대 문과 장원, 양대 상신의 영광을 안은 집이다. 민병한이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된 뒤 중추원 찬의를 지내고, 민규식이 상공 은행장 등의 호화로운 자리에 있기는 하였으나 민유중 집 같은 반역행위자는 나오지 않았다. 큰 벼슬은 없었으나 민창식, 민창혁이 둘 다 문과하여 호조참판을, 민병성이 문과하여 부제학을 각각 지냈다. 민정중,민재수, 민창혁, 민치요, 민영도[문집 14권] 등이 문집이나 유고가 있었다. 오늘날 활약한 후손으로 해군 병기감으로 인천경비사령관을 지낸 민흥기가 있다. 민흥기는 호조참판 민창혁의 후손이며 선비 민영도의 증손이다.
세번째로 민여검의 집이다. 민여검은 문과하여 부사를 지냈다. 이 집은 영욕을 초월하여 글을 사랑했다. 학행이 있는 선비로 민환, 민진강, 민시현, 민상현, 민영은 등이 있다. 모두 문집이나 유고가 있다. 민득중, 민진굉은 경술로 조정에 천거 되었다. 이 집은 효도 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세상에서는 3세7효의 집이라 부르고 있으나 실은 그보다 효행이 더 많았다. 효행으로 정려가 내린 이로 민평, 민환, 민진강 등 3명이 있고, 효행으로 나라에 천거되어 벼슬이 내리거나 포상을 받은 이로 민광민, 민진연, 민백윤, 민종호 등 4명이 있다. 그 외 효행으로 소문난 이가 민광신, 민중경, 민진운, 민원중 등 4명이 있다. 이 중에서 민진강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학행 또한 높아 1718년 천거되어 감역을 거쳐 부사를 지냈으며 자헌대부에 추증되고 효간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민평은 어려서부터 효아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효성스로웠다. 송시열이 독행지사라고 칭찬했다. 관찰사가 조정에 알려 벼슬이 내렸다. 민환은 1614년 문과하여 도사가 되었다. 모후를 폐하려는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벼슬을 버리고 부모의 병환에 기력을 회복시키고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헌혈을 했다. 부모가 죽은 후 부모의 사랑을 잊지 못하여 부모의 무덤 옆에 천막을 치고 살았을 때와 같이 먹고 자며 부모를 그리워 했다. 오늘날 저명인사로는 충남대 총장 민태식이 있다. 효간공 민진강의 아들 민조수의 후손이다.
여흥민씨 두 명의 용감한 장군 !
" 일제의 병사들은 두 서너살 되는 어린아이를 잡아 창끝에 꿰어들고 아픔을 못이겨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고 웃고 주먹을 치며 통쾌하게 여겼다. 소녀를 학살할 때는 반듯이 강간하였다. 사람을 죽일 때도 총살하는 것보다 더 오래 고통을 느끼며 견디지 못하여 소리를 지르다 지쳐 죽을 때까지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었다"고 [독립신문]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했다.
"의병이 잡히면 학살한 다음에 장바닥에 효시하였으며 학살한 시체를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가마솥에 끓여 그 뼈와 살점 덩어리를 보여주며 구경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잡아온 자를 나무에 묶어 놓고 베를 가르고 살갗을 베껴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장면을 보고 손뼉을 치게 하고 웃도록 강요했다. 또 어떤 사람은 강제로 물을 먹게 하고 8삭 산모보다 배가 더 커지면 그 위에 널판지를 놓고 일본군 여러 명이 올라가 물을 뿜어대는 모양을 구경시켰다. 어떨 때는 의병을 잡지 못하자 무고한 주민들을 잡아 땅에 묻어 몸의 반
만 나오게 해놓고 마치 풀베듯 목을 쳤다."고 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 한탄하였다.
의병은 갖은 악형을 받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 의병의 대장은 말해 무엇하랴? 여흥민씨 민사용 가문에, 용맹을 떨쳐 일본 군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장군이 둘 탄생하였다. 바로 의병대장 민종식과 민긍호이다.
먼저 민종식을 알아보기로 하자. 민유중의 7대손이며, 문간공 민우수의 5대손이다. 이조판서 문헌공 민영상의 아들이다. 1861년에 태어났으며 1882년 문과하여 이조참판을 지냈다. 충남 정산에서 은거했는데,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때 "각처의 의병에 의하여 조직된 연합 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6년 의병들을 홍산에 집결시켰고, 여기서부터 서천, 비인, 판교, 남포, 보령, 청양 등 충남 서부 일대를 점령한 뒤 서부 중심지 홍주를 공략하여 점거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왜병과 싸워 크게 이김으로써 을사의병 중 경북의 신돌석 진영과 정용기, 정환직 진영과 함께 3대 전투의병으로 손꼽힌다."고 [정신문화연구원] 발간 한국인물 대사전에 서 밝히고 있다.
그 다음으로 민긍호를 알아보기로 하자. 민긍호는 민여길의 손자로 1651년 문과하여 장령을 지낸 민광소의 후손이다. 이 집은 무인의 기질이 강한 집안이다.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 7명이 나왔으며 병마절도사, 방어사, 한성판윤 등을 지낸 이가 그 중에서 나왔다. 민긍호는 상무정신이 있는 집에 태어나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원주 진위대의 특무정교가 되었다. 1907년 고종이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되자 분격,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약 3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원주 우편 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 3시간 동안 격전하였다. .....제천, 죽산, 장호원, 여주, 홍천,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강원도, 충청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으며,......1907년8월 12일 약 200명으로 편성된 부대로 여주를 기습,....이 때 많은 지방민이 의병부대로 지원해와 그 수가 수천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여주, 이천, 양근 일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민긍호가 거느린 의병부대는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의병부대로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로 전전하면서 모두 10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고 [정신문화연구원] 발간 한국인물 대사전에서 밝히고 있다.
위의 두 의병 대장은 여흥민씨 민사용 가문을 빛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용사의 기백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장한 그 이름 영원하리 !
여흥민씨의 빛은 꺽여도 물속을 비춘다.
다른 장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험이 있는 다이아도 막돌이라 할 수 없고 보석은 보석이다." 험이 있는 다이아도 빛이 찬란하다. 햇빛은 어둠이 몰려오면 밤새 도망갔다가 아침에 나타난다. 그 빛이 밤새 죽었더라도 아침에 나타나면 새롭게 영롱하다. 명문은 험이 있어도 빛이 있다. 빛은 물을 만나면 꺽인다. 빛이 꺽여도 물속을 비춘다.
여흥민씨 민사용 가문의 빛은 찬란했다. 빛이 물을 만나 꺽이듯 민씨 가문은 세도정치로 비난을 받고 일제의 침략으로 꺽이었다. 그러나 사물을 비추는 빛의 특성인 명문의 기질을 잃지 않았다.
애국지사 충정공 민영환은 민씨 척족 중심 세력의 일원인 민겸호의 친아들이고, 민씨 세도정치의 네 기둥의 하나인 민태호의 양아들로서 민영환과 두 아버지는 빛과 어둠의 표상이었음을 앞에서 이미 말했다.
삼방파의 좌장인 민시중, 정중, 유중으로 찬란했던 빛이 민태호, 겸호로 꺽이었으나 민영환에 의해 다시 빛난 역사를 감회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명문은 빛이 잠시 꺽이어도 다시 사물을 비추는 기질을 회복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민병길을 보라. 역시 민씨 세도정치의 네 기둥의 하나인 할아버지 민영목의 손자가 아니던가? 달리는 경인선 기차도 한마디로 세울 수 있는 세도가의 위엄을 뿌리치고 하이에나 만 마리와 독사 십만 마리가 우글거리는 일제의 광장으로 끌려가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조국 독립 투쟁 전선으로 용감히 나갔다. 영광 군수를 버리고 1923년 중국에 망명, 1929년 남경에서 신익희 등과 한국 혁명단 철혈단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벌였다. 1929년 잡지 [우리길]을 발행하여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임시정부 재정국민부장을 거쳐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 상임의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및 의정원장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경에서 순사했다.
그 다음은 민형식이다. 민영집의 아들로 민영휘에게 양자로 들어 갔다. 양아버지 민영휘는 민씨 집안의 제일 걸물이다. 30대에 이미 평안 감사로 나가 평안도 땅을 얼마나 많이 긁어 먹었는지 민감사 위장에 십만평 장원이 들앉았다고 하였다. 민영휘에게 땅을 뺏긴 평안도 어느 가문에 또 다른 걸물이 있었다. 일본에 유학하여 육사를 나와 청년 장교가 된 이갑은 민영휘 앞에 권총을 떡 차고 나타났다. "대감이 평안도 관찰사를 할 때 뺏아간 우리 아버지 땅을 도루 주시요!" 라고 하자 겁을 먹은 민영휘는 청량리 일등 전답을 준다고 달랬다. 이갑은 펄쩍 뛰며 낙원동 소재 땅을 억지로 받아 그 자리에 2층 건물인 학교를 지었다. 그 바로 앞에 민영휘의 소실 집이 있었다. 민영휘가 퇴청하여 소실 집에 나타나면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 대청마루며 안방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 소실 집을 향해 갖은 야유를 퍼부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었다.
이 아버지의 양아들인 민형식은 아버지의 잘못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고 개과천선의 길을 걸었다. 1891년 문과하여 규장각 대교를 거쳐 학부협판으로 1907년 나기영, 오기호가 주도하는 5적 암살 계획에 자금 1만 4천냥을 제공하였다가 발각되어 황해도 철도로 유배형을 갔다. 석방된 후 신민회 회원으로 민족운동을 도왔다.
생과 사, 환희와 고통, 영광과 오욕, 빛과 어두움이 극적으로 교차한 민씨 민사용 가문의 역사는 우리 조선조 후기의 명암을 웅변하듯 설명해 주면서 "빛은 냇물을 지날 때 잠시 꺽이어도 물속의 바위, 고기, 수초, 골뱅이 등등을 환히 비춘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