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의 <바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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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의 <바보 선언>은 억압적 시대를 향한 어설프지만 용기있는 도전이다.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한 주인공들의 끊임없는 도전은 물질적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상징하며, 하층 계급의 욕망은 언제나 계급적 장벽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을 비판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 자체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던 때, 이장호는 1980년 <바람 불어 좋은 날>을 통해 검열의 압박 속에서도 우리 시대의 아픈 모습을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정치적 표현은 더욱 억압되고, 성적 표현에서는 관대해진 검열의 이중성 속에서 만들어진 <바보 선언>은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징적, 유머적인 코드를 도입한다. 그것은 권력의 엄혹한 감시 속에서 진행되어야 할 영화적 표현의 최대치였는지 모른다. 사회와 정치적 구조에 대한 비난을 바보들의 헛소리로 치부하게 만드는 비겁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바보 선언>의 풍자적 코드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 영화적 기법을 도입한다. 대사 없이 음악배경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주인공들의 행동은 사건의 현실성을 약화시키면서도 현실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진지하면서도 사실적인 톤으로 전달할 수 없는 진실을 표현하는 또 다른 우회로인 것이다. 사회적 비판 목소리의 전달자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로의 설정도 비판의 강도를 완화시키는 효과를 갖지만 문제의 핵심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시각이든 썩어빠진 세상의 모습은 동일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여자의 치마 속이나 훔쳐보며 무위도식하는 남자 주인공은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 그녀를 통한 현실적 계급상승을 꿈꾼다. 하지만 부잣집 딸이라고 생각하고 납치한 여인은 알고 보니 창녀였으며 납치에 동원한 차는 도둑맞고 주인공과 운전기사는 빈털터리로 전락한다. 욕심으로 가득 찬 인물들은 서로의 실체를 확인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계급적 동맹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현실의 적응은 더욱 어려워지고 결국 여인은 부유한 자들의 파티에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채 조롱하는 사람들의 의해 죽음을 맞는다. 슬픔으로 좌절한 두 남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다만 웃통을 벗고 희미하게 보이는 국회의사당 앞거리에서 춤을 출 수밖에 없다. 그 춤은 해탈과 도전의 춤이 아닌 참혹한 차별에 의해 죽어야 했던 여인에 대한 비극적 위로였다. 우리 사회를 가로지르고 있는 거대한 장벽과 모멸적 세계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그것은 목소리가 없는 바보와 같은 몸짓에 지나지 않기도 하다.
<바보 선언>은 모든 시도가 좌절된 시대의 패배자가 마지막으로 내지른 비명일까? 층층으로 막혀있는 권력과 계급의 장벽 앞에서 보통의 사람들은 그들 앞에 굴종하고 그들이 던져주는 먹을 것에 의존해야 하는가? 그들의 현재가 힘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조롱받고 놀림의 대상으로 전락해야 하는가? 권력체제에 편입되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사라지고 소멸되어야 하는 존재인가? 개인의 시도가 무의미해진 그 때, 정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보선언>은 무력해진 개인의 모습을 통해 무력한 현실을 고발할 뿐 아니라 변화를 위한 도전을 요구하는가? 영화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은 모두 개인의 몫일 것이다. 질문은 철저하게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전달되는 방식으로 던져지고 있다. 누군가는 영화를 통하여 분노를, 또 다른 자는 순응을 학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각자의 몫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수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가능성을 던진다. 비록 그것을 읽는 자는 소수에 불과할지라도.
첫댓글 바보가 되고 싶은....... 바보가 되고 싶지 않은.................. 교차점인가???????
바보처럼 살아온 것은 틀림없는데!!! 바보처럼 살고 싶지는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