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외버스터미널처럼 시골 느낌이 나는 뮌헨 공항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한 잔 걸치고 술기운이 약간 오른 상태로 스키폴 공항에 도착한 것은 이슬비 내리는 저녁 6시 반 쯤이었다. 인천국제공항보다 커보이는 활주로를 한참 지나, 공항 건물을 죽 가로질러가서 캐리어 두 개를 찾고, 공항에 바로 붙어있는 스키폴 공항역에서 허버허버 치킨 카레 치아바타를 선채로 욱여넣고 암스테르담 중앙역으로 갔다. 짐이 어찌나 무거웠는지.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내렸을 때 내 최대의 관심사는 비행 내내 잠도 못잔 내 몸을 뉘일 숙소였다. 풍경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나마 인상적인 것은 시내 곳곳에 깔린 트램과, 따다다닥 소리를 내는 신호등, 그리고 듣던 대로 도처에 깔린 운하였다. 한국 시간 기준 18일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공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예상했다. 젠장, 그런데 루프트한자 측 프론트데스크 직원이 '무비자로 입국을 하는 상황이면 경유지인 독일 측에서 이걸 문제삼을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90일 내로 돌아오는 비행기 표를 끊어서 그 e-티켓을 보여주셔야만 비행기를 태워드릴 수 있다'고 답했을 때는, 이성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그 전날 안산에서는 신속항원검사를 하는 곳이 없다고 해서 아침에 선릉 인근까지 2호선을 타고 가서 검사지를 받아온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당황해서 그런지 휴대폰 e-티켓 예매를 제대로 진행할 수가 없어서 인천공항 플로어를 사방팔방 뛰어다니다가, 결국 막판에서야 아시아나항공 현장 데스크에서 100만원 정도를 그 자리에서 현금결제를 하여 e-티켓을 손에 넣는 데에 성공했다. 그 난리를 치고나니 몸이 완전히 각성해버려서, 네덜란드 현지 시간 오후 9시가 되어 숙소로 들어갈 때까지 잠이 오질 않았다. 무비자로 독일 경유하시는 분들은, 나의 경우를 반례삼으시길. 정작 경유지인 뮌헨 공항의 직원은 무비자 입국으로 인한 귀국용 e-ticket을 요구하기는 커녕 신분이 확실한 교환학생이니 별다른 서류를 제출할 필요도 없다고 30초도 안 되어 날 내보내줬지만. 이렇게 아기가 걸음마하는 것마냥 삐뚤빼뚤, 성인이 되어서 처음 나가는 해외 경험이 시작되었다.
Hotel cc라는 곳의 작은 방에서 짐을 풀고 몸을 씼는데, 굉장히 어질어질했다. 마치 물 위에서 멀미를 하는 느낌이랄까. 단순히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후에 이것은 다른 원인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방 안에 금고가 있는 점이 맘에 드네, 라고 생각하면서, 곧 잠에 들었다.
사실 나는 여행을 계획하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원체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라서 그저 어딜 가면 발길 닿는대로 돌아다니고, 늦으면 늦는대로, 뭘 못 보면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다. 아니, 사실 계획 자체를 잘 안하는 편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그걸 게으름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나 자신을 계획 속에 욱여넣는 것 자체에 대한 반감 때문이리라. 성실하게 사는 건 한국에서 사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그 다음날 일어나서는 그냥 휴대전화에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한 곳들을 몇 곳 쳐보고, 그냥 돌아다녀보려고 밖으로 나섰다. 아침에 여는 가게가 없어서 길거리 수제버거를 사먹었는데, 말도 안 되게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다음에 암스테르담에 간다면, 다시 가봐야지.
잠을 자고 일어나니, 공기 중에 약간 낯선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사이 내린 비로 희미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대마초다. 이래서 어제 도착했을 때 어질어질했나보구나. 공기 중에 남아있는 대마초의 향기는 형언하기가 약간 어려웠는데, 잘 말린 국화차랑 감초, 쑥, 그리고 낙엽 약간씩을 곁들인 뒤, 설탕을 뿌려 태우는 느낌이었다. 밤에 길거리에서 피우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했다.
제일 먼저 한 것은 보다폰 지고(Vodafone Ziggo)에 가서 휴대전화 유심을 교체한 것이었다. 기계치라서 그런지, 유심을 끼웠는데도 인식을 전혀 못해서, 국제전화로 휴대전화 가게를 하는 이모부를 불러 해결책을 알아봤던 기억이 난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를 유심 갈아끼우는 데에 들이고 나서는, 먼저 틸부르흐에 유학을 했었던 건국대학교 동기인 H가 추천해준 만네킨피스(Mannekenpis) 감자튀김 가게로 갔다. 인기가 좋은 모양인지, 줄이 계속 형성되었고, 나는 가장 기본적인 메뉴를 시켜서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코카콜라와 함께 먹었다. 손에 기름과 소스를 묻혀가며 3분의 2쯤 먹었을 때야 해당 가게 구석에 나무 스푼과 포크가 있다는 걸 안 것은 내 실수였다.
왕궁이 있는 담 광장에는 비둘기 떼가 기세 좋게 몰려다니고 있었다. 바로 옆의 마담 투소 박물관은 공사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어서, 나는 그저 담 광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름한 옷의 어떤 아저씨가 쌀 낟알을 비둘기들에게 모이로 주고 있었다. 아저씨는 나에게 쌀을 한 줌 가득 건네주며, 비둘기들이 먹도록 공중에 뿌려보라고 했다. 하, 비둘기들 발톱이 어찌나 매섭던지. 아저씨는 학을 떼며 도망치는 내 모습을 보고 킬킬 웃으셨다.
비젠코프라는 백화점 건물로 들어가서 주변 분들 기념품이 될만한 물건을 살펴보고, 한국에는 없는 책들을 파는 서점이 있나 싶어서 워터스톤이라는 서점을 백화점 직원에게 추천받아 들렀다. 나이든 점원 아저씨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자 제법 유창한 한국어로 '암스테르담은 어때요?'라고 말문을 떼며 질문을 해오셨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외국어에 관심이 많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동아시아 소국인 한국어를 하는 사람도 있었구나. 워터스톤에서는 국내 미발간 작인 루이스 글뤽의 시집 두 권을 샀다. 마음 같아서는 트란스트뢰메르나 셰이머스 히니 시집, 동생 줄 제3세계 요리책, 어학 서적도 사고 싶었지만, 그때의 나는 돈도 시간도 부족했다. 서점 문을 닫는 시간이라 쫓기듯 튀어나와 발렌시아식 빠에야를 사들고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암스테르담에 머물던 1/18~1/21 경은 코로나로 인해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이 폐업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2월 말 현재까지 암스테르담을 재방문해야 할 빌미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 다음날, 1월 20일도 시내 산책이 이어졌다. 역 뒤편의 강물을 따라 콘서트홀까지 산책을 하고, 그 유명한 카사로소를 찾았지만, 공사중이라 사람을 받지 않고 있었다.
뭘 할 수가 없어서 헤링이나 사먹었다. 헤링은 훈제연어살 70%에 과메기 20%, 그리고 꽁치 통조림 맛 10%라고 보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지만, 나중에 기숙사에서 다시 한 번 헤링을 먹었을 때 다른 친구들은 그 냄새에 기겁을 했다.
어떤 골목을 지나쳤는데, 여러 집들의 위쪽 창틀에 붉은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붉은 불빛 아래에 대부분 커튼이 쳐져있었다. 처음에 나는 이게 뭐하는 곳인가 싶었다. 그러나 커튼이 쳐져있지 않은 몇몇 창문들을 보자 바로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람을 사고 파는 곳이었다. 루쉰의 광인일기 내용이 갑자기 생각났다. 창문 뒤편의 여자들은 눈이라도 마주치는 남자들이 있으면 창문을 노크하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있었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너무 관찰하진 않으려고 했다. 보통의 경우 노크가 밖에 있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 보내는 신호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흥미로운 수신호였다. 그녀들은 인간 시장이 아닌 어떤 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었을까. 한편으로는, 내가 뭐라고 감히 그녀들을 재단하고, 그들의 사연을 물을 수 있겠는가. 난 지금 일개 여행객인데. 이곳은 한국이 아니고, 동아시아인들 특유의 유도리 없이 깐깐하고 폐쇄적인 윤리관을 적용시킬 필요도 없는 곳이다. 예수가 '너희 중 죄가 없는 사람 이 여인을 돌로 쳐라'라고 말한 시대와는 반대로, 요즘은 죄인들이 죄가 없는 사람을 돌로 쳐죽이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옳다는 정의감으로 무장한 사람들일수록 그릇될 경우가 많다는 역설을 기억하기로 하면서, 속이 동해서 샌드위치라도 사먹으려 골목을 지나쳤다. 대체로 무채색 후드를 입고 수염을 좀 기른 이민자들이 골목에서 많이 보였던 것 같다. 아마 감정 노동에는 도가 튼 그녀들이 이민자들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녀들의 감정은 누가 받아줄까.
그 뒤에는 친구인 H가 추천해준 쿠키 가게인 판 슈타펠레(Van Stapele)에서 초코쿠키를 사먹고(이 가게는 꼭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갓 구운 초코쿠키가 약간의 화이트 초콜릿 입자와 부스러지며 촉촉히 혀 위에서 스며드는 맛이 일품이다), 근방 서점에 재미있는 책이 있나 둘러본 뒤, 야외 꽃 시장을 구경했다. 네덜란드가 확실히 화훼 강국이라고 느낀 것이, 길거리 꽃 노점에서 파는 꽃들의 종류와 수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 크로커스는 물론, 캔에 담아 언제든 개봉해 싹을 틔울 수 있게끔 한 씨앗들, 튤립과 아마릴리스, 분재 키트, 등등...
그리고 나서는 식물원으로 향했지만, 영업을 하지 않고 있어서 천천히 숙소로 돌아와 잤다. 그 다음날 아침 틸부르흐행 기차를 일찍 타기 위하여.
써놓고 보니 참 별 게 없다. 그래도 뭐, 그 때 즐거웠던 감정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니까. 늘 그랬듯, 다음을 기약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