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몽골군
1. 몽골군대의 특성
그들은 모든 苦難에 이겨 나갈 수 있다. 만약 必要하다면 말젖(아시아 遊牧民의 좋은 飮料인 쿠미스(kumiss))를 먹고 때때로 잡는 들짐승의 고기만을 먹는 정도로 普通 1個月쯤 살 수 있다.
그들은 말에게 풀만 먹이고 보리나 그 밖의 穀食은 필요치 않다. 男子들은 2日2夜 말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견딜 수 있도록 또한 말이 풀을 먹고 있는 동안에 그 말 안장위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訓練이 잘 되어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 勇氣를 잃지 않고 또한 日用品이 缺乏하더라도 屈하지 않고 잘 참는 점에서는 世界의 어느 누구도 그들보다 뛰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指揮官의 命令에 잘 복종하며, 軍隊維持費는 조금밖에 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좋은 兵士가 되기에 必要한 天品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世界 어느 곳이든지 마음대로 다니며 征服하기에 적당하며, 또 그들은 사실 世界의 大部分을 征服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먼 곳까지 出動할 경우에는 軍裝을 조금 밖에 하지 않는다. 主로 野營과 炊事에 필요한 도구만을 가지고 가는 것으로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말젖 만을 食糧으로 한다.
그들은 각자 18匹의 숫말과 암말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말이 지치면 곧 다른 말로 바꾸어 탄다. 비가 오면 그들에게는 털로 된 氈으로 만든 작은 텐트가 配給된다.
급한 任務를 수행하기 위해 必要하다면 그들은 10일쯤 불도 피우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은 채 强行軍을 할 수가 있다. 그 동안 그들은 자기가 타는 말의 피를 빨아 먹는다. 즉 말의 靜脈을 끊고 그 피를 마시는 것이다.
그들은 젖을 진하게 만들어 풀(糊․凝乳)과 같이 말린 젖을 軍糧으로 하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이 만든다. 우선 젖을 끓이면 크림이 위에 뜨므로 이것을 다른 그릇에다 떠내서 버터로 만든다.
이 크림이 있는 한 젖은 결코 굳어지지 않는다. 그 나머지를 마를 때까지 햇볕에 쪼인다. 그리하여 싸움에 나갈 때 各自가 10파운드씩 가지고 간다.
每日 아침 그것을 半파운드 가량 가죽주머니 속에 적당한 分量의 물과 함께 넣어 두면 말이 달리므로 자연히 몹시 흔들려서 묽은 죽과 같이 된다. 이것이 그들의 점심이다.
2. 편성과 운영
軍隊編成은 아주 간단하였다. 즉 그의 軍隊는 騎馬兵이었는데-실제로 半은 말이었고, 半은 사람으로 編成되어 있었지만- 그 騎兵은 强鐵같은 持久力과 訓練을 결합한 아주 機動性있는 軍隊였다.
그의 敵에 대한 공격은 敵의 개나 고양이까지, 몇가지 例를 들면, 그들의 말들이 먹을 雜草조차 남기지 않고 철저히 부수는 것이었다.
타르타르의 大將軍의 한 사람이 遠征할 때에는 十萬의 騎兵으로 된 軍隊를 거느리는데, 그 軍隊는 다음과 같이 編成한다.
즉 그는 10人․100人․1,000人․10,000人의 士兵을 지휘하는 士官을 먼저 임명하고 10人의 병사를 지휘하는 사관 10인은 100인을 지휘하는 사관에게 명령을 받으며, 다시 이 사관 10인은 1,000人을 指揮하는 士官의 命令을 받는 것과 같이 차례로 10人씩이 上官으로부터 命令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이 編成되어 있으므로 어느 士官이라도 10人의 兵士 또는 10個의 部隊만을 進退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 자기 上官에게 絶對服從한다. 100人으로 編成되는 部隊는 툭(Tuc)에게 支配되며 그것을 10個合한 것을 토만(Toman)이라고 한다.
行軍할 때는 200人으로 編成되는 1部隊를 前面의 2日間의 路程이 되는 距離에 前衛로 세워 警戒케 하고, 다시 本隊의 側面과 後面에 1隊를 두어 奇襲을 경계케 한다.
3. 몽골군의 戰術
몽골군들은 무기로서 활, 갈고리가 달린 철퇴,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槍을 사용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그 技術이 뛰어난 것은 활쏘기이다.
활쏘기는 어려서부터 노는 데까지 쓰고 있으므로 매우 익숙하다. 몸을 保護하기 위해 입는 갑옷은 물소, 그 밖의 動物의 껍질을 불린 뒤에 말려서 만든 것으로 매우 튼튼하다.
그들 타타르人들은 싸움터에 나가면 매우 勇敢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빈다. 그들은 아무리 위험한 곳에라도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어 조금도 자기들의 生命을 아끼지 않으며, 그 성질이 매우 殘忍하다.
그들 몽골군들은 싸움이 벌어지면 절대로 敵 가운데 뛰어들어가서 混戰하는 일이 없다. 말을 타고 敵軍의 周圍를 배회하면서 우선 한쪽 側面에서, 다음으로는 다른 側面으로 빨리 位置를 바꾸며 활을 쏘는 것인데, 때로는 거짓으로 退却하기도 한다.
그리고 退却하면서 뒤로 활을 쏘아 사람과 말을 죽이는데 敵을 殺傷하는데는 正面으로 싸워 殺傷하는 것과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이렇게 그들이 退却하면 敵은 자기들이 이긴줄로 생각하지만 실은 지고 있는 것으로서 타타르軍은 敵에게 損失을 많이 주었다고 생각이 되면 급히 말머리를 돌리어 反擊하여 살아남은 敵을 눌러 아무리 敵이 힘껏 싸워도 끝에 가서는 捕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타타르軍은 말타기의 訓練이 썩 잘 되어 있으므로 運行이 몹시 빨라 信號만 있으면 그들의 騎兵團은 어떤 方向으로나 卽時 움직일 수 있다. 타타르軍은 이렇게 變化가 많은 빠른 行動으로 勝利하였다.
Ⅴ. 몽골군의 원정
젊은 靑年酋長 테무친(Temuchin' 鐵木眞)은 將兵들에게 바로 그런 훈련과 征服의 野慾을 충분히 鼓舞했던 것이다.
1206年 그가 44歲가 되었을 때 테무친은 地上의 君主라는 징기스칸(또는 칭기스칸 (Chinghiz Khan))이 되었다. 오직 그의 人生에 있어서의 목적은 征服 그것이었던 것이다.
1227年 그가 死亡時 그는 동쪽으로는 北平(Peiping)으로부터 西쪽으로는 조르지아(Georgia)에, 다시 南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 까지 아시아의 大版圖를 완전히 席捲하여 最强의 정복자로 君臨하였다.
그를 繼承하여 皇帝가 되었던 오고다이(Ogodai), 즉 太宋은 역시 아버지의 遺志를 이어 南쪽 中國大陸으로 版圖를 넓혔다.
동시에 오고다이의 異服동생인 주치(Juchi, 述赤)의 아들인 바투(Batu, 拔都)는 징기스칸 밑에서 將軍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했던 수보타이(Subotai)와 함께 無慈悲하게 西進하여 키에프(Kiev)를 공격한뒤 계속하여 다른 러시아 都市들을 공격하고 다시 폴란드에까지 進出하였고, 또 크라코(Kracow)에까지 손을 뻗쳤던 것이다.
1241년 봄 항가리에서 그들은 당시 東部유럽이 募集할 수 있었던 精銳의 貴族들․騎士들, 그리고 步兵隊로 編成된 十萬의 大軍을 敗走시켰으며, 繼續 進軍하여 다뉴브 江邊에 있는 페스트(Pest)까지도 유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해 겨울에는 一支隊가 南쪽 地方으로 내리달려 달마티아(Dalmatia)에 도착하였고, 12月頃에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 虎視耽耽 유럽大陸을 눈앞에 바라보며 다뉴브江과 아드리아海岸에 進駐하고 있었다.
이렇게 지극히 위험한 순간에 오고다이가 死亡하고 王家의 氏族幹部들은 蒙古에서 열리는 會議에 召集되었다.
아직 유럽 征服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 때 바투(Batu)와 수보타이(Subotai)가 서로 論爭을 한 끝에 수보타이는 蒙古로, 바투는 26名의 妻妾들을 거느리고 볼가江邊에 있는 그의 화려한 宮廷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만일 오고타이가 죽지 않았더라면 蒙古族들은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 時代의 蒙古는 너무도 그 版圖가 넓어 비록 東쪽 아시아 地域은 직접 蒙古皇帝에게 統治되고 있었지만 여러 작은 汗國들은 各自 獨自的으로 分立하여 自體의 支配勢力을 가지고 있어 한 氏族內의 勢力紛爭과 충돌은 빈번하였던 것이다.
오고다이의 아들 쿠유(Kuyu, 貴由)가 定宗으로 卽位하였으나 1248년 곧 死亡하였으므로 그 뒤 망구(Mangu, 憲宗)가 卽位하던 해인 1252년 까지의 空位時代에는 오고다이의 未亡人인 투라키나(Turakina)가 蒙古를 統治하는 동안 金帳汗國의 汗인 바투(拔都)는 西部(大體로 유럽․러시아 地方)에 君臨하고 있었으며, 또 다른 징기스칸의 孫子인 훌라쿠(Hulaku)는 東部 페르샤부터 地中海까지 미치는 伊兒汗國의 君主로 君臨하고 있었다.
1268年 바그다드 最後의 칼리프(Caliph)를 生捕하였고 그 화려했던 都市를 다시는 復舊치 못할 정도로 파괴하였던 長本人은 바로 이 훌라쿠였다.
그는 都市의 女王 다마스커스와 황금의 예루살렘을 掠奪했으며, 나아가서는 다시 이집트를 威脅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蒙古皇帝 망구가 死亡하여 이 결정적인 侵略도 중지되어 버리고 말았다.
또한 이때에는 바야흐로 레반트․모슬렘勢力, 그리고 十字軍 자체의 運命이 風前燈火였다. 그러나 훌라쿠 역시 바투와 마찬가지로 다시 歸路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蒙古에서는 새로운 英傑 망구의 동생이 되는 쿠빌라이가 出現하고 있었다.
몇몇 中國人 고문 격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던 쿠빌라이는 뒤에 蒙古의 領土를 中國本土까지 擴大하기 위해 싸움터에 出征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이 大課業을 成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中國人의 生活樣式을 보면 볼수록 그는 더욱 더 그들의 生活樣式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宋나라의 皇帝들은 3世紀 以上을 統治하여 왔으며 소위 그들의 崇文思想은 점점 精神的인 面과 審美的 方向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宋代 皇帝의 統治下에서 揚子江 以南의 城郭都市들은 일찍이 찾아 볼수 없었을 만큼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와 反比例해서 戰爭의 열의는 점점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망구가 死亡하였을 때 여러 汗 사이에 생긴 軋轢을 틈타서 쿠빌라이는 그 自身 大汗이라 稱하고 오래지 않아 廣東과 南海에 이르기까지 넓은 大陸을 征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征服方法이란 前例와는 달리 武力보다는 오히려 巧妙한 奸計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性向은 破壞보다는 오히려 그가 發見한 것을 同化시키는 데 있었다.
징기스칸이 하나의 戰士요 無慈悲했던 征服者이고 또한 軍統率에 能했던 戰略의 才士이었다면, 쿠빌라이는 교활했던 政治家요 行政家이며 文化를 育成했으며, 스포츠맨이었으며 優雅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帝位에 오른지 35年後 그가 거의 죽음이 가까운 老年에 이르렀을 무렵 쿠빌라이는 하나의 英雄的 存在에서 神的 存在로, 蒙古의 一個 汗으로부터 하늘의 아들 소위 龍王의 相續者로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앞에서는 수많은 宮廷의 高官들은 「俯㑀하여 敬拜하라」는 號令이 내리면 그저 엎드려 俯㑀하는 것이었다.
Ⅵ. 結論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 (Kublai Khan, 1215~94) 치하의 몽골 領土는 더욱 확장되었다.그러나 당시 蒙古帝國은 붕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14세기 후반에 또 한번 몽골은 뛰어난 征服者를 배출했다.
티무르 (Timur, 1336~1405)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히말라야 서쪽의 南아시아 영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이후 몽골 騎馬族은 또 다른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그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것처럼 어느 날 문득 歷史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강했다. 그 군대가 강했던 것은 宿命的으로 주어진 환경과 劣惡한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숙명의 연결고리 속에서 살아온 몽골족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天賦的인 蠻勇이 삶에 대한 애착을 갖은 裕福한 군대의 理性적인 용기를 제압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몽골군의 지칠 줄 모르는 迅速한 機動力과 捷報 획득 및 情報의 교환, 그리고 一絲不亂한 指揮, 命令체계가 儼存했기 때문에 몽골은 당시 世界最强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