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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일시: 2024년 12월 25일 (수)
o 날씨: 맑음
o 경로: 경상감영공원 - 대구근대역사관 - 삼성상회 터 - 달성공원 - 서문시장 - 대구제일교회 - 청라언덕 - 계산대성당 - 계산예가 - 약령시 - 화교소학교 - 동성로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 삼덕마루 -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o 거리: 14.3km
o 소요시간: 4시간 반
o 걷기정보 및 여행포인트: 대구중구 문화관광
o 지역: 대구시 중구
o 트랙:
o 지도
[대구 근대화 골목 투어] 대구광역시 중구의 대표적인 관광 코스이다. 대구광역시 도심에 위치한 중구는 2006년 이상화·서상돈 고택을 중심으로 ‘근대문화공간디자인개선사업’에 선정되면서 국비를 지원받아 대구 지역의 근대사를 중심으로 스토리텔링 기법을 이용한 근대골목을 만들었다. 주제별로 5개 코스를 만들어 ‘대구골목투어’, ‘골목투어’ 상표를 등록하게 되었다. ‘대구근대골목’은 2012년 ‘한국관광의 별’, 한국관광100선에 선정되었고, 2013년에는 ‘지역문화브랜드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2014년에는 ‘대한민국 걷기 좋은 길’에 선정되었다. 2015년에는 누구나 쉽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는 무장애 여행지인 열린관광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열린관광지는 장애인(지체, 시각, 청각), 노인, 영유아 동반가족 등 모든 관광객이 이동의 어려움 없이 즐겁게 여행할 수 있는 장애물 없는 관광지이다. 2019년에도 한국관광100선에 선정되는 등 대구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대구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제1코스는 경상감영달성길이다. 북성로와 서성로를 중심으로 한 3.25㎞에 2시간 30분이 소요되는 탐방코스(경상감영공원-향촌문화관-북성로-경찰역사체험관-최제우 나무-달서문-이상화 생가-이병철 고택-삼성상회 옛터-달성공원)이다. 대구의 과거 달구벌을 떠올릴 수 있는 테마로 조선시대 대구의 모습과 근대 사회로 발전하는 대구의 변천사를 느낄 수 있다.
제2코스는 근대문화골목이다. 근대골목투어 중 가장 인기 있는 코스이다. 1.64㎞로 짧은 코스이지만 2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코스(동산청라언덕-3·1만세운동길-계산성당-이상화 고택-서상돈 고택-대구 구 교남 YMCA 회관-구 제일교회-약령시한의약박물관-마당 깊은 집-진골목-공감 게스트 하우스-대구화교협회)이다. 대구의 근대 문화의 발자취를 담은 곳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한 서상돈 등 대구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제3코스는 패션한방길이다. 동성로와 남성로를 중심으로 한 2.6㎞에 2시간 정도 소요되는 탐방코스(주얼리타운-교동귀금속가게-동성로-남성로(약령시)-서문시장)이다. 대구의 중심인 동성로와 과거 상업의 중심지였던 약령시를 테마로 한 3코스는 쥬얼리특화거리와 서문시장에서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관람 및 체험 코스이다.
제4코스 삼덕 봉산문화길은 골목투어 코스 중 가장 긴 코스이다. 총 4.95㎞로 3시간 정도의 탐방시간이 소요되는 코스(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삼덕동거리-김광석다시그리기길-봉산문화거리-대구향교-건들바위)이다. 대구의 젊음과 문화예술의 거리를 테마로 일본식 건축 사찰과 대구의 유명한 음악가 김광석, 담장허물기 운동으로 유명한 삼덕동거리 등을 만날 수 있다.
제5코스 남산100년 향수길은 남산과 인쇄골목을 만날 수 있는 코스이며, 2.12㎞에 1시간 40분의 탐방시간이 소요되는 코스(반월당-관덕정순교기념관-성유스티노신학교-성모당-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이다. 천주교 순교 사적지뿐만 아니라 동화사 말사인 보현사, 제일교회의 전신인 남산교회, 유학을 강학하는 장소였던 문우관(상덕사) 등 다양한 종교(천주교, 불교, 개신교, 유교 등)와 이국적인 건축물을 느낄 수 있는 테마로 구성되었다.
중구청에서는 골목투어뿐만 아니라 근대로의 여행에서 야경투어, 스탬프투어, 맛투어, 독립운동 흔적 찾기 투어, 전문가와 함께하는 테마투어, 뚜벅뚜벅 중구 골목 테마투어, 도심순환형 청라버스투어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상 네이버 지식백과)
대구 중앙로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은 조선 선조 때 경상감영이 있던 곳으로 그 터를 보전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1910년부터 1965년까지 이곳에 경상북도 청사가 있었고 도청이 옮겨간 후 1070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경상감영은 조선시대 경상도의 행정과 군사, 재판 등을 관할하던 행정조직이었다. 옛 경상감영 내에 선화당, 응향당, 제승당, 응수당, 징청각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 경상감영공원 내에는 경상도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1972년 12월 26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과 살림채 건물인 징청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만이 남아 있다. 선화당은 현재 관아 건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경상감영의 누각 관풍루(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는 1906년 달성토성으로 옮겨졌으며, 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는 총 29기의 선정비가 이곳 경상감영공원에 남아 있다. 경상감영공원은 선화당과 징청각이 푸른 숲과 어우러진 도심 속 공원으로 옛 건물의 멋을 살린 정문, 분수, 돌담, 산책로와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의 종) 등이 조성되어 있다. 대구 도심 중앙에 위치하여 중앙공원으로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구근대역사관]은 근대기 대구의 흔적과 역사, 전통,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요람이 되는 곳이다. 근대문화유산인 역사관 건물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어, 1954년부터는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이용된 근대문화유산이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역사관 건물은 원형이 잘 보존돼 2003년 대구시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대구도시공사가 이 건물을 사들여 대구시에 기증했으며 이후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돼 2011년 1월 문을 열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박물관에는 근대기 대구의 모습과 그 당시의 삶을 살아간 선조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상설전시를 통해 근대 대구의 역사를 시대별, 주제별로 전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시내버스인 부영버스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색다른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전시공간 외에도 체험실, 문화강좌실을 갖추고 있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1997년 발족한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 모임’의 활동을 기반으로 2009년 평화와 여성 인권을 위한 ‘일본군위안부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2010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순악이 “내가 죽어도 나를 잊지 말아 달라”라는 유언과 함께 5,000여 만 원을 기탁하였고, 다른 피해자들도 뜻을 함께하여 역사관 건립을 위한 씨앗 기금이 마련되었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 모임은 역사관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하여 다양한 방식의 범국민 모금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고, 지역의 예술가와 여러 전문가의 재능 기부가 이루어졌다. 2012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하여 굿즈(goods) 등을 개발하는 사업을 펼치기 위해 브랜드 ‘희움’은 론칭하였는데, 희움은 ‘희망을 모아 꽃 피움’이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역사관 건립에 동참하고 청소년들이 희움 제품을 공동구매하는 등 시민들의 노력과 성원을 바탕으로 2015년 12월 5일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을 개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구종로초등학교] 1900년 11월 11일 미국 선교사 아담스(Adams, J. E.)가 당시 제일교회 입구 대문채를 교사로 정하여, 남학교인 대남소학교(大南小學校)를 세웠다. 아담스는 1895년 제일교회와 1898년제중의원(濟衆醫院: 현재의 동산병원)을 설립하여 선교활동을 하던 중, 신교육을 통한 선교를 목적으로 소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다. 또한, 아담스와 같이 선교활동을 하던 브루엔(Bruen, H. M., 傅馬太)은 같은 교회 안에 여학교인 신명소학교(信明小學校)를 설립하였다. 1926년 4월 두 학교가 합병되면서 희도보통학교(喜道普通學校)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1938년 희도심상소학교로, 1941년 4월에 희도국민학교로 다시 변경되었다.광복 후 1946년 3월에 사립에서 공립으로 바뀌었으며, 1954년 10월 교사를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1955년 3월 대구종로국민학교로 교명이 개칭되었다. 1987년 8월에 36 교실 개축이 완성되었다.1995년 3월 병설유치원 1학급이 개원되었으며, 1996년 대구종로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게 되었다. 이후 2008년, 2009년 대구광역시교육청 방과 후 시범학교를 운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구 오토바이 골목]은 1950년부터 조성되어 70여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대구 특화 골목이다. 대구 중구 인교동과 시장북로에 위치한 오토바이 골목은 본래 하천이었으며, 양쪽이 대부분 주택지였다. 1953년 복개천이 된 인교동에 1961년 서울오토바이상회를 시작으로 점차 확산되면서 오토바이 상가가 밀집하기 시작하면서 인교동 오토바이골목이 형성되었다. 오토바이 골목은 과거에 말을 사고파는 마장이 열린 곳이라는 뜻으로 ‘말전거리’라고 불렸다. 그 당시의 말과 지금의 오토바이가 같은 주요 교통수단이라는 점에서 서로 연관성이 있는 곳이다. 오토바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가게 앞에 전시되어 있는 오토바이의 모습들이 마치 전시장을 연상케 한다. 구매, 전문적인 수리, 시트 전문점, 장애인용 오토바이를 제작 등 오토바이와 관련한 업체가 모여 있어 모든 것들을 한 곳에서 해결이 가능하다. 또, 부속품 진열과 전시, 판매, 스티커 등도 판매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암 이병철 고택(湖巖李秉喆古宅)]은 삼성그룹의 설립자 및 초대 회장인 이병철(李秉喆)[1910~1987]이 결혼 후 대구로 분가하여 가족과 함께 거주하던 집이다. 이병철의 삼남인 이건희(李健煕)[1942~2020] 전 삼성그룹 회장도 호암 이병철 고택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병철 고택’, ‘이건희 출생지’라고도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구 골목]이 자리한 북성로는 대구읍성의 북쪽 성벽길로 1905년 대구 교통의 시작인 대구역이 칠성동에 자리잡았고, 대구역의 남쪽에 위치한 북성로를 중심으로 하여 최초의 번화가로 성장하며 대구에서 처음으로 상권이 형성되었다. 북성로 공구골목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 부대의 군수물자와 폐공구를 수집하던 10여 명의 주민이 영업을 시작한 것이 시초가 되어 공구 상점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1970~1980년대는 600여 점포가 있을 만큼 호황을 누리며, 대구를 대표하는 공구골목이 형성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철물, 기계부품, 공구류 등 1,000여 개 점포가 영업을 하기도 하였다. (네이비 지식백과)
삼성(三星)그룹의 모체는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1910~1987]이 1938년 11월 1일 대구광역시 중구 수동(현 인교동)에 설립한 [삼성상회]이다. 자본금 3만 원으로 설립한 삼성상회는 소규모로 제분·제면 시설을 가동하는 한편 청과류와 건어물류를 국내 각지에서 수집하여 중국 만주 등지로 수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달성공원(達城公園)]은 삼한시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대구 달성이 토성으로 축성된 곳에 위치한 근린공원이다. 달성공원의 토성인 대구 달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한국에서 원형 보존이 가장 잘된 토성이다. 달성공원은 풍수 명당으로 꼽히는 연꽃 모양으로 일제강점기 신사로 조성되었고, 광복 이후 신사가 철거되었다. 1969년 ‘달성공원’으로 개원하였다.달성공원은 삼국시대 달구벌 토성으로 축조되었고, 6세기 달구벌이 신라에 합병된 뒤 군사 요지가 되었다. 1905년 일제강점기에 달성은 공원이 되어 1914년에는 신사가 조성되었다. 1906년 대구 읍성 철거 시 달성공원으로 이전한 관풍루가 있다. 광복 이후 신사 철거로 1969년 ‘달성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70년 대구 유일의 동물원이 준공 및 개원하였고, 2020년 11월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 삼덕동 대구대공원으로 이전 계획 중이다. 1601년 대구의 경상감영공원에 건립되었던 관풍루가 1906년 달성공원으로 이전되었다. 관풍루는 목조와즙 2층[정면 4칸, 측면 2칸] 건물로 1975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관풍루] 1982년 대구문화재자료(현, 대구광역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경상감영의 정문으로 1601년(선조 34)에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이다.1601년(선조 34)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宣和堂)의 남서쪽에 포정문(布政門)을 세우고 그 위에 문루(門樓)를 만들어 관풍루라고 불렀다. 현재 달성공원 북쪽에 옮겨 세워져 있는데 1906년 당시 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이 대구읍성 철거할 때 건물만 옮긴 것이다. 1917년 달성공원 입구로 이전하였다. 이후 1970년 해체되어 1973년에 복원되었다. 1980년에 단청공사가 진행되었으며, 2001년에 단청 및 기와공사 등이 진행되었다. 관풍루의 원래 명칭은 폐문루(閉文樓)로 새벽 5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는 것을 알리면서 풍악을 울렸다고 한다. 지금의 관풍루란 이름은 ‘감사가 누상(樓上)에서 세속을 살핀다(觀風世俗)’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달성공원의 출입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최제우동상이 있는데, 그 뒤편에 설치된 돌계단 34단을 오른 높은 언덕 정상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서문시장] 조선 중기부터 형성된 시장으로, 서문시장의 옛 이름은 대구장이다. 대구장은 조선시대에 평양장, 강경장과 함께 전국 3대 장터 중 한 곳이었다. 원래 대구읍성 북문 밖에 자리 잡은 소규모 장이었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물자 조달의 필요성이 증대하자 장이 크게 발달하였다.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어 대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고, 1669년(현종 10) 낙동강을 경계로 좌·우도로 분리되어 있던 경상도가 통합되어 하나의 행정권을 형성함으로써 대구의 경제적 위치도 크게 부상되었다. 이 때 대구장의 거래량도 급격하게 늘어 북문 밖에서 현재의 동산파출소 자리로 장을 옮겼다. 당시 2일·7일이 장날이었던 도매업 중심의 대구장과 4일·9일에 개장된 대구신장(동문시장)은 도내 각지의 5일장을 연결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770년 대구에는 9개의 5일장이 있었으며, 인근 20리에 있었던 칠곡읍내장과 함께 대구읍내장(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완전한 시장망이 형성되었다. 1920년대에 대구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서남쪽에 있던 천황당지를 매립하여 다시 장을 옮긴 것이 오늘날의 서문시장 위치이며, 1922년 공설시장 개설 허가를 받았고, 대구읍성 서쪽에 자리하여 서문시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구제일교회]는 1893년에 설립된 교회로 경상북도, 대구시 최초의 교회이며, 약령시 약전골목 한복판 약령시 한방박물관, 대구교남YMCA회관과 같이 있다. 대구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계산주교좌성당과는 서성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예전에는 성안에 있다 해서 성내교회 혹은 남문안에 위치하여 남문안예배당, 남문내교회로도 불리었다. 건물은 전형적인 고딕 양식으로 서유럽의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건물의 층수는 2층이며, 종탑은 5층이고 높이는 33m이다. 위치의 특성상 약령시 한방문화페스티벌이나 대구시 주요 축제 때 주 관광지가 되며 대구 시내 투어나 대구 근대 골목길 코스에도 포함되어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곳이다. 최초의 예배당은 기존의 한옥집을 1896년에 매입해 사용하여 남성정 교회로 이름하다가, 1908년에 두 번째 예배당을 지었다. 두 번째 예배당은 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전통 목수들이 함께 지은, 단층의 건물로 교회의 정면 한가운데 출입구를 겸한 종탑을 세우고 그 양쪽에 세로로 긴 창문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좌우가 대칭을 이루었다. 이 건물의 양철지붕, 창문, 종탑 등은 당시 대구 부민들에게는 매우 이색적이고 경이로운 것으로 오랫동안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31년 철거했고 새로 1933년 세 번째 예배당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2층으로 건물을 준공하였고 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6년에 고딕 양식의 종탑을 추가적으로 세워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종탑부는 1층에서 5층까지 창문이 제각기 다르게 설계됐고 윗부분에는 팔각형의 뾰족탑을 세웠다. 이 같은 특성과 역사성에 기인하여 1992년 본당과 종탑이 대구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의 전체적인 양상은 평면이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이고, 앞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오른쪽에는 종탑을 세운 간결한 고딕 건물이다. 대구 제일교회는 대구의 수많은 교회 건물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고, 기독교가 근대화에 기여한 상징물로서 근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94년 동산동으로 본당을 건축하여 갔으며 이곳은 100여년간 대구제일교회로 사용된 곳이다. 이후 약령시한의학박물관 옆에서 기독교 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독교역사관에는 개화기 시절 사용했던 성경, 찬송가, 헌금함 등 다양한 물품과 당시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대구제일교회의 연혁, 역사, 선교사들의 활동 이야기가 기록, 전시되어 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교회로서 독립선언문의 탁본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라언덕(靑蘿-)]은 푸른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는 언덕이며, 20세기 초 개신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1899년 아담스와 존슨 선교사가 달성서씨 문중으로부터 매입한 작은 산이다. 20세기 초 챔니스, 스윗즈, 블레어 등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집이 푸른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어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서 ‘푸른 담쟁이덩굴’이란 뜻의 ‘청라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달성토성이 대구의 중심이었을 때 동쪽에 있다 하여 ‘동산(東山)’으로도 불린다. 청라언덕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인 「동무생각」 노래비, 과거 선교사들이 생활하였던 주택 등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 대구광역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된 대구 최초의 사과나무가 있다.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존슨 선교사가 미국에서 직접 가져와 한국의 능금과 접목하여 대구 명물인 사과가 되었다. 현재는 3세목이 역사성과 상징성을 안고 자라고 있다. 대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선교사스윗즈주택,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선교사챔니스주택,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6호 선교사블레어주택이 있으며, 선교사와 선교사 가족들의 묘지인 은혜정원이 있다. 드라마 촬영지로도 이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산성당]은 중구 계산오거리에 위치하며 범어대성당과 함께 천주교 대구 대교구의 공동 주교좌성당이다. 본당의 주보성인은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이다. 1898년에 본당을 세웠는데 명동성당을 건축하고 전주 전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맡았으며 특히 스테인드 글라스는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하였다. 도심 가까이 위치하고 야간 조명이 설치되어 아름다운 야경도 감상할 수 있으며 성당 주위로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도심에서 휴식을 위해 방문하는 이들도 많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대구 최초의 가톨릭 성당인 계산성당과 역시 대구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인 대구제일교회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본다는 것이다. 교파를 초월하여 계산동, 동산동 일대는 대구 그리스도교 역사의 출발지점인 것이다. 건립 당시 현 위치와 서편 청라언덕 사이에 고민하다가 노인 신자들의 요청으로 현 위치에 성당을 건립하기로 정해졌다고 한다. 원래는 성공회 강화성당과 비슷한 한옥식 건물이었지만, 화재로 1901년에 전소되자 새로 고딕식 성당을 지었으며 경상도에서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으로 문화재청의 관리를 받고 있다. 계산동성당은 남구 대명동의 가르멜여자수도원,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더불어 도심지역에서 실제 종을 타종하는 몇 안 되는 곳들 중 하나다. 때문에 삼종시간의 종소리를 들으면 마치 유럽에 여행을 온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사충과 뽕나무골목] 두사충(杜思忠)은 원래 중국 명나라 두릉(杜陵) 사람인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원군으로 왔다가 정유재란이 끝나고 조선에 귀화하여 계산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자리를 자신의 집터로 잡고, ‘이 터는 하루에 천 냥이 나오는 자리’라고 했다. 이곳은 400년 전 경상도를 관할하는 관창인 경상감영의 터가 되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도청이 들어서면서 지역 최고의 상권이 형성되었다. 그의 말대로 ‘하루에 천 냥’을 버는 명당으로 자리매김한 것을 보면 풍수가로서 뛰어났던 안목을 엿볼 수 있다. 두사충이 계산동 주변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이후 그 일대를 ‘뽕나무골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뽕나무골목에는 두사충을 그린 벽화나 조각상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뽕나무 골목은 두사충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데 뽕나무와 연관된 두사충의 사랑 이야기가 소재로 쓰이고 있다. 두사충의 사랑 이야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두사충이 뽕나무에 올라 뽕잎을 따다가 이웃집에서 절구를 찧던 미모의 아낙네에게 첫눈에 반하였고, 그날로 두사충은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되어 버렸다. 늘그막에 상사병이 들다시피 하여 날마다 뽕나무에 올라 애태우는 두사충을 지켜보던 두사충의 아들은 결심을 하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아낙네를 만나 보았다. 이웃집의 아낙네 또한 두사충을 몰래 흠모하고 있던 터라 쉽게 중매가 되어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화 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화(1901~1943) 시인이 거주하던 고택이다. 이 집에서 춘향전 등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주로 하였으며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을 시작으로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지난 2005년 10월 27일 대구시에 기부하였다. 대구시는 그동안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설치를 했다. 이상화 고택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린 대문으로 들어서면 고즈넉이 자리 잡은 고택이 보인다. 단층 목조주택 2동으로 안채와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맞배지붕으로 3칸은 방이며 1칸은 출입문이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팔작지붕이다. 안채는 주로 이상화 시인의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항일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이상화의 드높은 우국 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근대문화체험관 [계산예가(近代文化體驗館桂山藝家)]는 2012년 3월 15일 준공하여 2012년 4월 18일 개관하였다.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 있다.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을 선도하였던 인물들의 정보를 알리기 위하여 개관하였다. 전시관, 체험실, 영상관이 있으며, 영상관에서는 영상을 통하여 계산예가가 있는 계산동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은 다섯 개의 패널을 통하여 대한제국시대, 일제강점기, 광복과 6·25전쟁, 산업화 시기 이후에 대한 시대사를 영상과 연표로 제공하고 있다. 한옥전시실에서는 대구 근대의 모습을 사진과 엽서로 보여 주고, 근대문화골목의 주요 건축물들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축소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대구 근대 예술인들 그래픽 패널과 전자방명록도 설치되어 있으며 사진 촬영을 한 후 전자메일로 보내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상돈 고택] 서상돈(徐相敦, 1851~1913)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였고 민족 독립운동가였다. 대구에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인물로, 정부의 검세관이 되어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1907년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대구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와 함께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대구시는 계산동 이상화 고택 옆에 있었던 서상돈의 생가를 복원하였고 국채보상공원을 조성하고 동상을 세우는 등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구 구 교남 YMCA 회관(大邱舊嶠南YMCA會館)]은 1914년 미국 북장로교 대구선교지회의 선교사 블레어(H. E. Blair)가 건립한 건물이다. 1915년 YMCA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교남기독교청년회가 조직되어 기독교민족운동의 거점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3·1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의 화합의 공간이었다. 1938년 매각 후 없어질 위기에 처하였으나 2011년 대구시민모금운동을 펼쳐 대구중구청과 대구기독교청년회[YMCA]가 매입하였다. 그 후 고증 작업과 보수·복원 공사를 거쳐 대구 지역 3·1운동기념관 및 대구YMCA역사관으로 조성되었다. 2013년 10월 2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570호로 지정되었으나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대구 구 교남 YMCA 회관은 복원작업을 거쳐 1층은 대구 3·1운동기념관으로 조성하였고, 2층은 2014년 건축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여 100년이 넘은 목조 트러스를 볼 수 있도록 개방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일교회 대구기독교 역사관] 1933년 대구제일교회에서 세 번째 예배당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2층으로 건물을 준공하였다. 1936년에 고딕양식의 종탑을 추가적으로 세워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994년 대구제일교회에서 네 번째 예배당을 건립하며, 세 번째 예배당은 2015년 12월부터 대구제일교회 기독교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구 약령시] 대구는 임진왜란 이후에 대구감영이 설치되면서 낙동강과 같은 교통의 편의성에 힘입어 남도의 물산이 모여드는 집산지로 발돋움했다. 이에 따라 경상도를 대표하는 서문시장을 비롯한 많은 시장들이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경북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던 한약재를 사고파는 약령시였다. 대구약령시가 개설된 것은 조선시대 효종 때의 일이었다. 개설의 이유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한약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통시장의 필요에 의해 탄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구약령시는 한약재가 많이 생산되는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각각 한 달씩 장이 섰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대구약령시는 일제의 억압으로 시장 개설이 1년에 한 차례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부흥운동을 통해 해외로까지 약재를 판매하며 성과를 높였고 1970년대에 이른바 약전골목이라고 부르는 상설 점포가 즐비한 거리를 만들어 침체되었던 약령시의 위세를 끌어올렸다. 오늘날 대구약령시는 한방축제를 개최하는 한편 한의약박물관, 한약재도매시장 등을 통해 이 땅에서 난 한약재를 알리며 사고파는 전통시장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약령이라는 말은 해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약재를 사고팔던 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약령에 명령을 뜻하는 ‘령(令)’이 들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약령시의 기원과 맞물려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먼저 조선 효종 때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에서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도내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사들여 조정에 바치기 위해 각각의 중심 도시인 대구와 전주, 원주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오늘날에는 그 근거가 희박하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골목]은 대구광역시 중구 남일동에 있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골목으로 ‘긴골목’의 경상도 말씨로 ‘길다’를 의미하는 ‘질다’에서 기원한다. 대구읍성의 남문이 있었던 구(舊) 대남한의원 사거리를 통과하여 종로로 50m 정도 들어서면 나타나는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 들어가는 골목이다. 종로는 종루에서 과거 영남제일관까지 포정문에 이르는 거리이다. 진골목은 경상감영 시대부터 해방 전까지 대구 토착 세력이었던 달성서씨(達城徐氏)의 집성촌이었다. 진골목을 통하면 당시 군사, 행정로였던 종로를 통하지 않고도 감영, 중영까지 갈 수 있었다. 진골목은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으로는 경정[종로] → 남정[남일동] → 전정/상정[포정동]으로 변천되었었다. 19세기 말부터 화교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대구 최초로 가구점들이 들어선 곳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대구화교초등학교(韓國大邱華僑初等學校)]는 1943년 대구화교소학교로 개교하였다. 1920년대 대구 지역에서 성공한 화교 출신 건축가 모문금(慕文錦)은 1940년대 화교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모금운동을 벌이는 한편 기부금을 받아 1943년 현 종로호텔 주차장 자리에 있던 화상공회(華商公會) 건물에 대구화교소학교를 개교하였다. 당시 교실은 3칸이었는데 1칸은 교무실로 사용하였고, 2칸만 교실로 사용하였다. 한 교실마다 3개 반을 운영할 정도로 학생 수가 증가하자 1948년 당시 교장이었던 모문금은 모금운동을 벌여 현 한국대구화교초등학교 부지와 건물을 매입하고 이전하였다. 현재 대구화교소학교의 명칭은 한국대구화교초등학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구 동성로]는 말 그대로 대구읍성의 동쪽 성벽을 허물고 낸 0.92km의 길을 말한다. 동성로 28 아트스퀘어-CGV 대구한일-대구역 구간까지로 대구의 대표적인 상권 중심가다. 동성로는 남쪽으로 반월당역과 달구벌대로, 서쪽으로 중앙대로 혹은 종로 주변(북쪽으로 대구역 동쪽으로 공평로)까지를 포함한다. 대구의 명물이자 젊음과 낭만이 넘쳐나는 곳으로 유명한 동성로는 최신 유행을 엿볼 수 있는 수많은 패션 브랜드 매장을 비롯한 전시, 공연, 먹을거리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동성로는 처음 방문한 사람도 길을 잃지 않고 쉽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구역이 잘 정돈되어 있고 다양한 의류 브랜드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어, 젊은이들은 백화점보다 이곳에서의 쇼핑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매장들이 대형화돼 있어 쇼핑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점도 한몫했다. 또한, 그 근처 야시장골목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동성로에서는 매년 5월 지역 문화와 지역 산업이 함께 호흡하는 동성로 축제도 개최하고 있다. 1990년 첫 막을 올린 이 축제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중심 상권이자 대구·경북 젊음의 거리 동성로에 방문한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한국문화의 전통성과 우수성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2·28학생민주의거를 기념하여 만든 공원]으로 2003년 12월 조성되었으며, 면적은 1만 4,279㎡이다. 1960년 일어난 2·28학생민주의거는 부패한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항거하여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 민주화운동으로 3·15마산의거,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을 물러나게 만든 기폭제가 되었다. 공원 부지는 예전에 대구중앙초등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2·28의거의 자취가 어려 있는 곳이다. 대구중앙초등학교가 만촌동으로 이전하면서 시민단체들이 <중앙초등학교의 공원화 및 공유지 녹색공간화 시민협의회>를 구성하여 도심근린공원을 조성케 하였는데 공원의 명칭은 2·28대구민주운동기념사업회와 대구중앙초등학교총동창회 사이의 논란 끝에 2·28기념중앙공원으로 결정되었다 한다. 근처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과 옛 중앙공원이었던 경상감영공원 등 역사성을 지닌 공원들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덕성당]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에 속하여 있으며, 수호성인(주보성인)은 ‘성녀 소화 데레사’이다. 일제강점기에 삼립정성당이란 이름으로 일본인들을 위한 본당의 역할을 하였다. 광복이 되면서 삼덕성당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지역민들을 위한 성당으로 전환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관음사]는 1916년경 일본인 승려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대구광역시 중구청이 관음사 경내에 세운 동판에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경 이 지역의 관청과 관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당시 사찰 이름은 선림사(禪林寺)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복 이후 적산으로 분류된 절집은 여성 신도 6명에게 불하되고 몇 사람의 경영주를 거쳤고, 1968년 신자들의 요청으로 동화사(桐華寺) 원명이 주지로 오면서 ‘관음사’가 되었다. 그 뒤 요사채를 증축하였으며, 무설전 내부의 공간 구조는 그대로 두고 바닥의 다다미는 장판으로 교체하고, 창호는 구조를 변경하였다. 또 현재 종무소가 있는 건물도 일부 구조를 변경하였다. 1968년에 조계종 종단에 소속되었으며, 근대 일본식 건축 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일본식 사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國債報償運動記念公園)]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에 조성된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공원이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 국민이 일제의 국채를 갚기 위하여 힘을 합친 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일본 상인들이 큰 폭리를 취하였던 대표적인 상품 담배를 3개월 동안 끊자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고,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국민의 염원을 담은 상징적인 운동이었다. 당시 대구는 조선 후기 상업 중심지였으며, 1903년 경부선 철도 부설로 인하여 신흥 상업 도시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략이 강화되었고, 대구 상인과 일본 상인은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대구 지역 상인들 위주로 경제수호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상인뿐만 아니라 부녀자, 군인, 학생, 기생, 승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운동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4만여 명이 보상금 의연에 참여하였다. 의로운 보부상으로 알려진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 서상돈(徐相敦)은 큰 부를 축적한 후에도 자선, 구제, 교육 등 다방면에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국권수호운동에 열을 다하였다. 또 다른 주역인 김광제(金光濟)는 민족의 계몽운동과 국권회복을 위하여 독립운동부터 국채보상운동까지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대구 남일패물폐지부인회(南一佩物廢止婦人會)는 담배를 끊자는 남성 중심의 구제적 방안 제시에도 불구하고 부인도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의연금을 모았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대구에서 시작된 자발적인 시민 기부 운동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된 공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덕마루] 대구 삼덕초등학교 구 관사로서 1939년 대구덕산공립심상소학교 교장 관사로 건축된 목조건축물이며 2000년까지 학교의 관사로 이용되었다. 이후 2000년 4월부터 대구YMCA가 대구광역시 교육청으로부터 대구 삼덕초등학교 구 관사를 무상 임대 받아 YMCA빗살미술관으로 이용하였다가 2017년 7월 14일부터 삼덕마루 작은도서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은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수성교에서 송죽미용실까지 구간에 조성된 길이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란 이름은 가수 김광석이 1993년과 1995년에 발표한 앨범 『다시부르기』에 착안하여 지어졌다. ‘그리기’는 김광석을 그리워하면서[想念, miss] 그린다[畵, draw]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구 대봉동에 있는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은 2010년 ‘방천시장 문전성시(門前成市) 프로젝트’에 의하여 탄생된 곳이다. 방천시장 문전성시 프로젝트는 쇠락하여 가는 재래 시장인 방천시장을 되살리기 위한 프로젝트로, 슬럼화된 공간을 밝게 꾸미기 위한 문화 콘텐츠로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을 기획, 조성하였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 전국적인 관광 명소가 되면서 방천시장도 활기를 되찾았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은 2010년 11월 20일 90m 구간을 기획하여 공개하였고, 이후 수성교~송죽미용실 350m 구간으로 확장되면서 2014년에 전면 재단장하였다.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은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주말 평균 5,000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포토존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김광석 동상과 김광석의 일생을 그린 벽화 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버스킹 공연 등 다양한 공연을 관람할 수 있고, 복고풍 가게, 카페 등 다양한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인근 방천시장에는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