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빼고는 고행의 연속이었던 해파랑길 43~44
1. 일자: 2024. 3. 28 (토)
2. 장소: 해파랑길 43~44 코스(하조대~해맞이공원)
3. 행로와 시간
[하조대 버스정거장(11:05) ~ 하조대해수욕장(11:15) ~ SURFY BEACH(11:29) ~ LAGUNA(11:35) ~ (길 잃음 / 세기연수원 / 묘지 / 도로) ~ 동호해변(12:59) ~ 수산항(13:32) ~ (도로) ~ 소노리조트(13:53~14:13) ~ (택시) ~ 낙산해수욕장(14:25~50) ~ 낙산사(14:59~15:35) ~ (후진항) ~ 정암해수욕장3(16:08) ~ 물치항(16:45) ~ 속초해맞이공원(16:56) / 28.14km]
< 해파랑길 43~44 구간 걷기를 준비하며 >
28일은 회사노조창립기념일이다. 모처럼 찾아온 평일 휴무를 뜻깊게 보내고 싶어 꽃구경을 계획한다. 평소 마음에 두었던 여수 영취산 진달래에 마음이 동해 신청을 했는데 비가 온단다. 아쉽게 취소하고 대신 해파랑길 나들이를 계획한다. 다행히 동해안은 비 예보가 없다. 43~44구간, 하조대에서 속초해맞이공원을 잇는 길이다. 지난 41 구간에서 눈여겨 본 곳이다.
버스편을 찾아나선다. 당초 안양~속초, 속초~하조대 버스를 나누어 타는 것으로 구상했는데, 동서울~하조대 직행버스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잠시 결정을 미루고 되돌아 보고 대안을 찾은 결과다. 덕분에 한 시간의 여유가 덤으로
생겼다. 잘 되었다.
< 하조대 가는 길에 >
봄비가 내린다. 동서울터미날에서 버스에 오른다. 버스엔 단 4명. 이어폰에서 싸이의 노래 '낙원'이 흘러나온다. 강변을 따라 목련과 매화인지 벚꽃인지 분홍빛 꽃이 만발하고, 버드나무 가지에도 푸른 잎이 돋아 있다. 기분이 들뜬다. 그래, 난 바다걷기의 낙원으로 간다.
여행이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가슴 설레이는 일이다. 시외버스는 산악회 버스보다 조용하고 안락하다. 길에 비가 내린다. 봄비가 주는 창
밖 서정이 그만이다. 동쪽으로 갈수록 비는 잦아든다. 대신 안개가 짙어진다. 눈을 감는다.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 길게 이어지는 황태덕장 뒤 대관령엔 눈이 보인다. 그리곤 이내 강릉으로 내려선다. 지난번 걸었던 해파랑길 41 구간을 차로 지난다. 가지 않은 42 구간은 눈으로만 감상했다. 강릉과 주문진 터미널을 지나 화조대에 도착한다. 새로운 경험이 시작되었다.
< 해파랑길 43 >
예상보다 늦은 11:05, 하조대 버스정거장에 선다. 잔득 흐린 하늘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린다. 조용한 하조대 바닷가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모래 해변 뒤편으로 예사롭지 않은 바위들이 시선을 끈다. 해변을 따라 걷는데 사설 클럽이 해변을 따라 연이어 나타난다. 바다는 공유지인데 이런 건물들이 허가되어 운영되는 것이 신기했다. 손님은 많지 않지만 시설은 오픈되어 있었다. SURFY BEACH, LAGUNA 라는 이국적 이름의 건물을 따라 걷다 보니 정규 등로를 벗어난 것 같다. 이곳에서 돌아왔어야 하는데 지도상으론 진행 방향으로도 길이 있는 것 같아 전진한다. 샛길이 보여 동네분께 물으니 길은 있는데 사나운 개가 있단다. 등산에서 최고의 적은 동네 개들임을 알기에 포기하고 해변을 따라 무작정 걷는다. 웬 군부대 같은 시설물이 나오고, 주변에 무덤이 산재해 있다. 조심스레 희미한 길의 흔적을 찾아 어렵게 해파랑길과 만난다. 그래봐야 1km 남짓을 더 걸은 것인데 긴장을 해서 인지 기운이 빠진다. 이어지는 길은 도로다. 공사 때문인지 어수선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또 등로가 끊긴다. 이번에는 농로를 따라 꽤 오래 걸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1시간 20분 넘게 기대했던 해파랑길과는 이름과는 다른 곳을 걸었다. 같이 헤매는 동지가 있어 잠시 함께 걸었다. 자고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 법인데, 얇팍한 꼼수와 근거 없는 고집에 몸이 지쳐갔다.
비가 내린다. 엎친데 덮친 격이다. 1시 무렵 동호해변을 지난다. 방파제와 해변을 보니 비로소 이제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구나 하는 안도가 된다. 우산을 펴들고 길을 나선다. 긴 도로 오르막이 이어진다. 대부분의 구간이 도로인 해파랑길 43구간은 올 곳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긴 언덕을 내려서자 수산항이 보인다. 일행은 멀어지고 혼자 걷는다. 포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의 행렬을 보자 반가움과 함께 홀로 걷는 나그네의 설움이 찾아든다. 구름다리를 건너며 모처럼 풍경을 감상한다. 식사할 곳을 찾는데 횟집뿐 마땅한 곳이 없어, 무작정 걷는다. 또 도로가 길게 이어진다. 젠장, 길 사정을 좀 더 세밀히 살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이 의미 없는 도로는 건너 띄었을 텐데 말이다.
안내지도에 있던 말 “사람의 발길이 닳지 않아 평화롭고 여유를 느끼기에 안성맞춤이다. 숨은 양양의 절경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란 말은 허언이었다.
< 해파랑길 44 >
이어지는 도로 우측으로 소노리조트 건물이 보인다. 발길이 그리로 향한다. 분명 건물 뒤로 해안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을 것이고, 그곳은 풍경이 좋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건물 계단을 내려서니 멋진 해안 풍경이 드러난다. 기분이 확 풀린다. 모처럼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생겼다. 내려갔다 오기로 한다. 역시 좋았다. 순간, 리조트 입구에서 본 택시 생각이 나서 콜을 했다. 금방 왔다. 낙산사로 가자 한다. 트랭글이 요란하게 부저를 울려댄다. 예기치 않은 속도에 이상을 감지 했나 보다. 차는 송전해변과 낙산대교를 빠른 속도로 지난다. 한참을 달려 가는데 꽤 번화한 해수욕장이 보인다.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곳에서 내린다. 낙산해수욕장이다.
이제까지 와는 전혀 다른 화려한 해변이 등장한다. 모래사장에는 야자수로 만든 파라솔도 보인다. 카메라를 세우고는 그 모습을 담는다. 저 멀리 낙산항 방파제와 붉은 등대가 보인다. 걷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번잡한 낙산항을 지나 낙산사로 향한다. 고교 인지 대학 때인지, 수학여행 왔다 잠시 들린 이후 근 40년 만에 찾은 낙산사는 그간 화마로 전소되었다는 선입관 때문인지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은 풍모로 선방을 날린다. 의상대를 지나 절 집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택시로 이동한 3km의 여유시간이 큰 힘을 발휘한다. 모든 게 기대이상이다. 특히 해수관음상은 그 자체도 멋졋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눈 덮인 설악산의 풍광과 아득한 바다의 모습은 왜 이곳이 최고의 기도처이며 조망터 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간의 불편과 불만이 순간 사라질 만큼 자리앉음새가 압권이었다. 그 감동은 칠층석탑이 있는 원통보전에서도 이어졌다. 왜 낙산사가 명찰임을 확인했다. 절은 그 단아한 건물과 허허한 빈 공간의 아름다음으로도 마음의 안식을 주었다.
사찰 뒤편으로 난 길을 통해 해파랑길과 접속했다. 다시 긴 도로 옆 데크를 따라 걷는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간다. 쉴 곳과 먹을 곳을 찾는데 여의치 않다. 설악해수욕장과 후진항을 지난다. 선뜻 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 없다. 카페는 많아도 식당은 드물다. 정암해수욕장으로 내려선다. 몽돌해변이 인상적이다. 몽돌에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가 시원하다. 귀 기울이면 더 크게 다가온다. 새로운 발견이다.
걷는 것에 관성이 붙었는지 그저 걷기만 한다. 몽돌소리길 데크는 꽤 길고 근사했다. 저 멀리 설악항이 눈에 들어온다. 물치항 인근에서 '곰치국, 생선구이'란 간판에 이끌려 도로를 건넌다. 늦었지만 식욕이 돋았는데 아쉽게도 음식점들은 하나 같이 문을 닫았다. 게다가 쌍천교란 다리를 건너는데 인도가 없어 위험한 상황에도 처했다. 젠장, 오늘은 운수 더러운 날이다. ㅋㅋ
설악항에 도착하고 이내 해맞이공원 앞에 선다. 트랭글과 워치 걷기를 끈다. 이젠 어쩌나 하는 순간, 버스정거장이 나타났고 이내 속초시외버스정거장으로 향하는 버스가 왔다. 돌아볼 새도 없이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속초 시내 이곳저곳을 지난다. 익숙한 장소는 옛 추억을 소환한다.
사진을 볼 마음도 들지 않을 만큼 심신이 지쳤다.
< 에필로그 >
시외버스터미널 근처 식당에 앉는다. 고등이구이가 주 요리인 소박한 밥상을 앞에 두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사진을 정리하며 기록을 살핀다. 트랭글과 워치의 기록이 조금 차이는 있으나, 총거리는 28km쯤 된다. 소노리조트에서 낙산해수욕장까지 차로 이동한 3km를 제외하고도 25km 정도를 걸었다. 대략 6시간, 이중 휴식시간은 채 10분이 되지 않는다. 미쳤었나 보다. 여유가 있었는데도 왜 그리 줄창 걷기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걷는 행위에는 관성이 매우 큰가 보다.
안양행 버스는 어두운 도로를 질주한다. 눈을 붙였다 깨어 사진을 다리 정리한다. 반 이상은 지울 것을 무엇하러 그래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도 순간을 영원으로 간직하려는 욕심은 줄어들지 않는다.
속초에서 시외버스 탄지 3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집에 도착했다. 무척 빠른 이동에 그나마 기분이 조금 풀린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낭만이 아닌 생고생한 해파랑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