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선생문집서문 沙溪先生文集序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께서 돌아가신 지 거의 60년이 되었는데도, 문집은 아직까지 간행되질 않았다. 대개 선생께서 평소 저술을 좋아하지 않으셨던 탓에, 문하의 제현들이 스스로 겸손해하던 선생의 뜻을 어기지 않고자 한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11년 되던 을축년(1685, 숙종11)에 경연에 임하여 하교하시기를 “내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의 시호(諡號))의 문집을 보고자 하니,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구해서 들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봉조하(奉朝賀) 우재(尤齋) 송공 시열(宋公時烈)이 선생의 문인이라서 선생의 유고를 편찬하여 기록하는 대로 올렸다. 그러자 성상이 보시고 탄복하여 드디어 교서관(校書館)에 명을 내려 판각(板刻)하여 간행하라고 하였다.
우재공(尤齋公)이 나 수항(壽恒)에게 서문을 쓰라고 맡겼는데, 나는 어리석기에 감당해 내지 못하리라 여겨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곧 내가 어렸을 적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의 시호)을 슬하에서 모시고 있었을 때의 일을 삼가 기억해 냈다. 당시 선생에 대해 언급하면서, 누군가 문장에 꾸밈이 적은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기를 “선생에 대해서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겉모습만 바라보아도 그분의 덕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나는 당시 나이가 어리고 몽매하여 비록 아는 것이 없었지만, 할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선생이 선생다운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듣건대,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성현(聖賢)의 학문으로 옛 성인의 뒤를 잇고 후대 선비들에게 길을 열어 줄 책임을 자임(自任)하자, 당시 문하로 달려온 선비들 중에서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중에 총명하고 영특한 자질을 갖추어 경술(經術)과 문학(文學)으로 이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순후하고 독실하여 스승의 말씀을 삼가 지키면서 그 적전(嫡傳)을 이어받기에 이른 사람은 오직 선생 한 분뿐이었다.
논하는 자들이, 선생은 자질이 노둔한데도 도를 전한 것이 증자(曾子)가 공자 문하에서의 일과 같다고들 하니, 이는 참으로 진실을 아는 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자질이 노둔한 사람은 이 세상에 참으로 많이 있으니, 선생이 도를 전한 것이 단지 이 때문이라고만 하면서 전하게 된 실제 이유를 따져 보지 않는다면, 이는 참으로 선생을 안다고 할 수가 없다.
무릇 성문(聖門)의 핵심적인 요지는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두 가지라고 하겠으니, 그중에 어느 하나라도 폐한다면 성학(聖學)이 아니다. 선생은 천부적인 자질이 혼후하고 순수하여 저절로 도(道)에 가까웠는데도, 학문을 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이 한 번 하면 자신은 백 번 하는 공력을 더하였다. 이에 분석이 정미(精微)하여 털끝만 한 것조차도 반드시 삼갔고, 사욕(私欲)을 잘 다스리면서 정성스럽고 간절하여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예학(禮學)에 더욱 정치하여 강의하고 토론하며 몸소 실행함으로써, 천서(天敍)와 천질(天秩)이 우리 동방에 크게 밝아지게 하였으니, 그 공은 더욱더 위대하다.
선생이 예(禮)로써 잘 요약한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나, 문(文)에 박학한 것에 대해서는 잘 아는 이가 드물다. 무릇 선생이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 신사명변(愼思明辨)하면서, 시를 짓거나 글을 쓰거나 평소 하신 말씀에 문채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화려한 문장을 짓고 필찰(筆札)을 교묘하게 놀린 다음에야 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문자(文字)로 드러낸 것은 비록 소박하고 간단하여 꾸민 곳이 없지만, 대부분 의리가 명백하고 체용(體用)이 구비되어, 어느 한 글자, 한 구절도 편벽되거나 과장된 데에서 나온 것이 없으니, 어질고도 의로운 사람의 말이라고 믿을 만하다. 선생이 이 도(道)를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러니 저 문장에 꾸밈이 적은 걸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어찌 선생을 아는 게 얕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세상은 쇠퇴해지고 도는 희미해져서, 학문하는 사람들이 비루한 데 빠져들지 않으면, 반드시 부박한 데로 달려가 호광(胡廣)의 중용(中庸)이나 앵무새처럼 말만 잘 따라 하는 것처럼 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우리 성상께서 돌아가신 선생에 대한 생각을 일으켜 선생이 남긴 책을 간행토록 해서 후학들에게 은혜를 끼쳐 주고자 하니, 그 뜻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참으로 이 유고집(遺稿集)을 읽는 자들이 정밀하게 생각하고 몸소 실천하여 빈말이 되지 않도록 힘써서, 선생께서 도를 전한 실제에 묵묵히 들어맞게 한다면, 낙민(洛閩)을 거슬러 올라 수사(洙泗)에 도달함을 이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으니, 우리 성상께서 드러내어 밝힌 성대한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으리라.
이 유고집을 간행할 적에 선생의 증손인 광성공(光城公) 형제가 교정하고 바로잡으면서 실로 편찬하는 일을 도왔다. 광성군의 이름은 김만기(金萬基)이니 일찌감치 문학(文學)으로 드러났고, 당저(當宁 숙종(肅宗)을 가리킴)의 국구(國舅)가 되어 왕실에 큰 공훈이 있다. 근세 명현(名賢)들의 자손들이 아름다움을 잘 이어받은 점과 문하의 제자들이 대부분 어질기로 따지면, 선생에게 미칠 만한 사람은 드물다. 그러므로 선생이 후세를 비춰 준 덕과 다른 사람을 가르친 교화 또한 여기에서 징험해 볼 수 있다.
숭정 기원후 정묘년(1687, 숙종13) 맹추(孟秋)에 후학(後學) 안동(安東) 김수항(金壽恒)은 삼가 서(序)하다.
[주1] 천서(天敍)와 천질(天秩) : 천서는 하늘이 사람의 상성(常性 타고난 성품)을 차서(次叙)하여 각각 분의(分義) 즉, 각자에 주어진 본분을 둔 것으로 5가지 법이 있으니, 부의(父義)ㆍ모자(母慈)ㆍ형우(兄友)ㆍ제공(弟恭)ㆍ자효(子孝)를 말한다. 그리고 천질은 하늘이 차서를 두되 예가 있게 한 것인데, 즉 존비귀천(尊卑貴賤)의 차서이며,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의 등위를 말한다. (書經 臯陶謨)
[주2] 호광(胡廣)의 중용(中庸) : 호광은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30여 년 동안 공대(公臺)에 있으면서 여섯 황제를 차례로 섬겼는데, 강직한 기풍 없이 일을 좋게만 처리하며 어물쩍 넘겨 버렸으므로 당시에 “처리 못할 일이 있으면 백시(伯始)에게 물어보라. 천하의 중용(中庸) 호공(胡公)이 있지 않나.”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호광의 중용은 시비를 가리지 않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가리킨다. 백시는 호광의 자(字)를 말한다. 《後漢書 卷44 胡廣列傳》
[주3] 앵무새처럼 …… 경우 : 상채(上蔡) 사양좌(謝良佐)가 “명리(名利)의 관문을 뚫고 지나가야 비로소 조금 쉴 수가 있다. 오늘날의 학자는 말해 무엇하리오. 한갓 말만 잘하는 것이 앵무새와 같다.”라고 하였다. 《心經 卷4》
[주4] 낙민(洛閩)을 …… 도달함 : 낙민은 낙양(洛陽)과 민중(閩中)을 가리킨다.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낙양에, 회암(晦庵) 주희(朱熹)는 민중에 살았다. 수사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 노(魯)나라에 있던 두 갈래 강물 이름인데, 공자가 이곳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여기서는 성리학을 깊이 공부해서 그 연원까지 두루 섭렵한다는 말이다.
[주5] 광성공(光城公) 형제 :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와 아우 김만중(金萬重)을 가리킨다.
沙溪先生文集序
沙溪金先生卒幾六十年。文集猶未行。蓋先生平日不喜著述。門下諸賢不欲違其自謙之意云。我聖上十一年乙丑。臨筵下敎曰。予欲觀文元公文集。其令玉堂取入。於是奉朝賀尤齋宋公時烈以先生門人。編次其遺稿隨箚投進。上覽之稱嘆。遂命芸館剞劂而行之。尤齋公屬壽恒爲序。壽恒自惟蒙陋不敢當。屢辭不獲。則仍竊記壽恒幼侍先王父文正公膝下。有語及先生。或歉其少文者。王父曰。先生何可易言。望其外。亦可以知其德矣。壽恒當時雖稚昧無所識知。而因王父之敎。得以知先生之爲先生也。抑又聞之。栗谷先生以聖賢之學。任繼開之責。一時及門之士。彬彬輩出。其間聰明英儁。以經術文學名於世者。未可一二數也。至於淳實懇篤。謹守師說。以能受其嫡傳。則唯先生一人而已。論者以其質魯而傳道。猶曾氏之於孔門。斯誠知言哉。然質魯之人。世固多有。則謂先生傳道。只在於此。而不求其所以傳之之實。非知先生者也。夫聖門旨訣。不過曰博文約禮二者。廢其一則非學也。先生天賦渾粹。自然近道。而至其問學。則加以人一己百之功。剖析精微。毫釐必謹。克治誠切。老而不懈。又專精禮學。講討而服行之。使天敍天秩大明於吾東。其功益偉矣。世皆知先生之能約以禮。而若其博學於文則鮮克知之矣。凡先生之格致思辨。詩書雅言。無非文者。何必摛華藻工筆札而後。謂之文哉。故其發爲文字者。雖樸茂簡質。無所修飾。而率皆義理明白。體用具備。無一字一句或涉於偏駁浮誇。信乎其爲仁義之人之言也。先生所以得斯道之傳者。其在斯歟。彼以少文爲歉者。豈非淺之爲知先生哉。方今世衰道微。爲學者不淪於卑陋。則必趨於浮靡。其不爲胡廣之中庸鸚鵡之能言者幾希。我聖上興思九原。命刊遺書。欲以嘉惠後學者。其意豈偶然哉。誠使讀是集者。精思實踐。不務空言。有以默契乎先生傳道之實。則泝洛閩達洙泗。由此可致。而庶不負聖上表章之盛意矣。是集之行也。先生曾孫光城公兄弟考校訂正。實相編摩之役。光城名萬基。早以文學顯。用爲當宁國舅。有大勳於王室。近世名賢子姓之襲休。門弟之多賢。鮮有及先生者。先生燾後之德。誨人之化。此亦可徵云。崇禎紀元後丁卯孟秋。後學安東金壽恒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