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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함부림咸傅霖
공의 성(姓)은 정(鄭)이고, 휘(諱)는 몽주(夢周)이고, 자(字)는 달가(達可)이고, 호는 포은(圃隱)으로, 경주부(慶州府) 영일현(迎日縣) 사람이다. 먼 조상 습명(襲明)은 이름난 선비로서 고려 인종(仁宗) 때 벼슬하여 관직이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이르렀다. 증조부 인수(仁壽)는 증(贈)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윤 상호군(開城尹上護軍)이고, 조부 유(裕)는 증 봉익대부 밀직사 부사 상호군(密直司副使上護軍)이고, 부친 운관(云瓘)은 증 신덕수의성근익조 공신(愼德守義誠勤翊祚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 문하부시중 판병조사 상호군 영경령전사(守門下府侍中判兵曹事上護軍領景靈殿事)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이다. 모친은 영천 이씨(永川李氏) 증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이니, 선관서 승(膳官署丞) 이약(李約)의 따님이다.
모친이 임신했을 때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놀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공을 낳았으니, 바로 지원(至元) 정축년(1337, 충숙왕 복위6) 12월 무자일(戊子日)이고, 이로 인하여 공의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빼어나고 남달랐으며,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처럼 늘어선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아홉 살 때 모친이 낮에 검은 용이 정원 안의 배나무에 올라가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서 나가 보니, 바로 공이었다. 그래서 또 이름을 몽룡(夢龍)이라 하였다가 관례(冠禮)를 치른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지정(至正) 을미년(1355, 공민왕4) 겨울 11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侍墓)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정유년(1357, 공민왕6)에 감시(監試)에 셋째로 입격하였다.
경자년(1360, 공민왕9)에 정당문학 김득배(金得培)와 추밀원 학사 한방신(韓邦信)이 주관하는 과거 시험에 공이 연이어 삼장(三場)에 장원하고 드디어 제일인으로 뽑혀서 빛나는 명성이 크게 퍼졌다.
임인년(1362, 공민왕11)에 예문관 검열에 보임되었다.
갑진년(1364, 공민왕13)에 한방신이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가 되고 우리 태조가 병마사(兵馬使)가 되었는데, 공이 종사관으로 따라가 화주(和州)에서 여진의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를 쳐서 패주시켰다. 얼마 있다가 수찬에 올랐고 여러 번 옮겨서 전농시 승(典農寺丞)에 이르렀다.
을사년(1365, 공민왕14) 봄 1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당시에 상제(喪制)가 문란하고 해이해져서 사대부가 상을 당하면 모두 100일 만에 탈상하였으나 공은 홀로 두 어버이를 시묘하며 슬픔과 예법이 모두 극진하였으니, 국가에서 아름답게 여겨서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다. 상이 끝나고 통직랑(通直郞) 전공사 정랑(典工司正郞)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정미년(1367, 공민왕16)에 예조 정랑으로 성균관 박사를 겸하였다. 국가가 신축년(1361)에 홍건적의 병화(兵禍)를 입은 이래로 학교가 황폐해졌다. 이때에 이르러 공민왕이 부흥에 뜻을 다하여 새로 성균관을 세웠으나, 학관(學官)이 적기 때문에 영가(永嘉) 김구용(金九容), 반양(潘陽) 박상충(朴尙衷), 밀양(密陽) 박의중(朴宜中), 경산(京山) 이숭인(李崇仁) 및 공과 같은 큰 선비를 뽑아서 학관을 겸하게 하고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대사성을 겸하게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서는 오직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뿐이었다. 공은 강설이 탁월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뛰어넘었기 때문에 듣는 이들이 자못 의심하였으나 운봉 호씨(雲峯胡氏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을 얻어 보게 되어서는 공이 논한 것과 합치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선비들이 더욱 탄복하였다. 목은이 자주 일컫기를 “달가(達可)의 논리는 횡으로 말하든 종으로 말하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니,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중(推重)하노라.”라고 하였다.
무신년(1368, 공민왕17)에 봉선대부(奉善大夫) 성균관사예 지제교(成均館司藝知製敎)로 승진하였다. 이때부터 모든 제수에는 모두 삼자(三字 지제교(知製敎)) 및 관각(館閣)의 직함을 겸대(兼帶)하였다.
홍무(洪武) 신해년(1371, 공민왕20)에 중의대부(中議大夫) 태상시 소경(大常寺少卿)으로 바뀌었다가 얼마 뒤에 성균관 사성으로 옮겼고 품계는 중정대부(中正大夫)가 되었다.
임자년(1372, 공민왕21) 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남경에 가서 촉(蜀) 땅을 평정한 일을 축하하고 아울러 자제의 입학을 청하였다. 가을 8월 태창(太倉)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중(海中)의 허산(許山)에 이르러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표류하다 암도(岩島)에 닿았다. 홍사범은 익사하고 공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말다래를 베어 먹은 것이 13일이나 되었다. 이 일이 보고되자 황제가 배를 마련하여 데리고 돌아가 후하게 보살펴 주었다. 다음해 가을 7월에 돌아왔다.
갑인년(1374, 공민왕23)에 나가서 경상도를 안찰하였다.
을묘년(1375, 우왕1)에 돌아와서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제수되었고, 얼마 있다가 다시 성균관으로 들어가서 대사성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명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공이 조정에 힘껏 청하여 맨 먼저 명나라에 귀부(歸附)하여 고황제(高皇帝)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김의(金義)가 사신을 죽이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다. 공이 먼저 대의를 진달하기를 “근래의 변고는 응당 일찍 상세히 아뢰어 상국(上國)으로 하여금 한 점의 의혹도 없게 해야 하거늘, 어찌 먼저 스스로 의심스럽게 하여 백성들에게 재앙을 당하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상(喪)을 고하고, 또 김의의 사건을 해명하였다.
을묘년에 북원(北元)이 사신을 보내왔다. 그 조서에 거만한 말이 있었으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다시 원나라를 섬기려고 사신을 맞아들이려는 논의를 하였다. 공이 문신 십수 인과 함께 글을 올려 논열하여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지윤과 이인임이 몹시 꺼려서 공을 언양(彦陽)으로 유배하였고 나머지 사람도 모두 먼 고을로 유배하였다가 한 해를 넘겨 해배(解配)하였다.
그 당시 왜구가 가득하여 바닷가 고을들이 쓸쓸히 텅 비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이를 걱정하였다. 일찍이 나흥유(羅興儒)를 패가대(覇家臺)에 사신으로 보내어 화친을 설득하게 하니, 그 섬의 주장(主將)이 나흥유를 잡아 가두어 거의 아사(餓死) 지경이 되었다가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돌아온 일이 있었다. 권신들이 전날의 일에 앙심을 품고 그 뒤를 이어 공을 사신으로 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패가대에 이르러서는 고금의 외교의 득실을 극진히 설명하니, 주장이 경복(敬服)하여 객관의 대접이 매우 후하였다. 시를 구하는 왜승(倭僧)이 있으면 공이 붓을 잡아 곧바로 지어 주니, 내용이 호준(豪俊)한 경책(警策)이었다. 이에 승도들이 모여들어 날마다 공의 가마를 메고 절경을 구경하기를 청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잡혀갔던 윤명(尹明)과 안우세(安遇世) 등 수백 인을 쇄환(刷還)하였고, 드디어 삼도(三島)로 하여금 모두 침략을 금지하게 하였다. 왜인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을 칭찬해 마지않는데, 처음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애석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재를 올려 명복을 비는 사람까지 있었으니, 공의 신의가 이처럼 완악한 자들까지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안우세는 돌아와서 태조를 섬겨 공로가 있어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그 뒤에 이자용(李子庸)이 사신 가서 또 나흥유처럼 갇히게 되자, 이에 국가가 공의 독자적인 외교 능력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몇 해가 지난 뒤에 공이 왜적이 우리 양가(良家)의 자제를 종으로 삼은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값을 지불하고 데려오려고 재상들에게 힘껏 권하여 각각 사재를 조금씩 내게 하고 또 글을 써서 윤명에게 주어서 보내니, 왜적의 우두머리가 글의 내용이 간절한 것을 보고 포로 100여 인을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윤명이 갈 때마다 반드시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다.
무오년(1378, 우왕4)에 정순대부(正順大夫)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었다.
기미년(1379, 우왕5)에 전공사 판서(典工司判書), 예의사 판서(禮儀司判書), 전법사 판서(典法司判書)를 역임하였고,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가 되었다.
경신년(1380, 우왕6)에 판도사 판서(版圖司判書)가 되었다. 가을에 태조를 따라 운봉(雲峯)에서 왜적을 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밀직사 제학 상의회의 도감사(密直司提學商議會議都監事)로 옮겼고, 이듬해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임술년(1382, 우왕8) 여름에 금은(金銀)을 진공(進貢)하였고, 겨울에 또 시호를 청하려고 다시 남경으로 갔다.
계해년(1383, 우왕9)에 동북면 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 다시 태조를 따라 정벌하러 갔다.
갑자년(1384, 우왕10)에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당시 국가에 문젯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고황제가 진노하여 장차 우리나라로 출병하려 하였고, 세공(歲貢)을 양마(良馬) 5000필, 금 500근, 은 5만 냥, 은량과 같은 필수의 세포(細布)를 늘려서 정하고는 5년 치의 세공이 약속한 숫자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입조(入朝)한 사신 홍상재(洪尙載), 김보생(金寶生), 이자용 등을 먼 고을로 장류(杖流)에 처하였다. 이해에 이르러 마땅히 성절(聖節)을 축하해야 하나 재상들이 모두 가기를 꺼려서 핑계를 대고 피하였다. 최후에 밀직사 부사 진평중(陳平仲)을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진평중이 노비 수십 구(口)를 권신 임견미(林堅味)에게 뇌물로 바치고 병을 핑계하니, 임견미가 곧 공을 천거하여 아뢰었다.
우왕이 공을 불러서 대면하고 말하기를 “근래에 우리나라가 명나라에 책망을 받게 된 것은 모두 대신들의 잘못이오. 경(卿)은 고금에 널리 통할뿐더러 내 뜻도 잘 알 것이오. 지금 진평중이 병 때문에 갈 수가 없어 경으로 대신하려 하니, 경의 뜻은 어떠하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군부의 명은 물과 불도 오히려 피하지 않거늘, 하물며 천자를 뵙는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남경까지는 거리가 무릇 8000리이니, 발해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날을 제외하면 실제 90일의 노정입니다. 지금 성절까지 겨우 60일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가령 순풍을 기다리는 날이 열흘이라면 남는 날이 겨우 50일뿐이니, 이것이 신이 한스러운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우왕이 말하기를 “어느 날 길에 오르겠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머물러 묵겠습니까.”라고 하고, 드디어 출발하여 밤낮을 쉬지 않고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성절의 날짜에 맞추어 표문을 올렸다.
황제가 표문을 보고는 날짜를 헤아리고 말하기를 “그대 나라 신하들이 필시 서로 일을 핑계 대고 오려 하지 않다가 날짜가 닥쳐서 그대를 보냈을 것이다. 그대는 지난번에 촉 땅을 평정한 일을 축하하러 함께 사신 왔던 사람이 아니던가.”라고 하였다. 공이 그 당시에 배가 부서져서 머물렀던 일을 모두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응당 중국말을 알겠구나.” 하고는 목소리를 따뜻하게 하여 특별히 위무(慰撫)해 주며 예부(禮部)에 명하여 후하게 예우하여 보내게 하였고, 드디어 홍상재 등도 돌려보내 주었다.
을축년(1385, 우왕11)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선발하니, 세상에서 옳은 선비를 얻었다고 일컬었다.
병인년(1386, 우왕12)에 세공을 견감해 주기를 청하러 남경에 갔다. 주대(奏對)가 상세하고 명확하여 이전 5년 동안 미납한 공물과 늘려서 정한 세공의 상수(常數)를 영원히 면제받고 단지 종마(種馬) 50필로 공물을 정하였다. 공의 충의(忠義)와 지성(至誠)이 그때마다 황제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 노여움을 거두어들이게 함이 이와 같았다. 돌아왔을 때 우왕이 매우 기뻐하여 의대(衣帶)와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이어 문하부 평리(門下府評理)를 제수하였다. 이듬해 해직을 청하였다.
무진년(1388, 우왕14) 봄 삼사 좌사(三司左使)에 제수되었다. 그 당시 간사한 권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백성의 전답을 강탈하여 차지한 것이 몇 기(圻)에 이르렀으나 끝없이 탐욕을 부려 나라가 가난해지고 백성들이 파리해졌다. 공이 뼈에 사무치듯 아파하여 사전(私田)을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니,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살아날 수 있었다. 가을에 문하부 찬성사(門下府贊成事)에 제수되었다.
경오년(1390, 공양왕2) 가을에 순충논도좌명 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에 올랐고, 찬성사로서 동판도평의사사 판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영서운관사(同判都評議使司判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領書雲觀事)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이 되었다. 겨울에 공양왕이 즉위하여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난리를 다스려서 바른 세상을 회복하니 진실로 사직의 충신이고, 덕을 높이고 공로를 보답하니 실로 국가의 훌륭한 은전(恩典)이네. 순충논도좌명 공신 중대광 문하부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사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府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司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領書雲觀事) 정몽주는 천인(天人)을 다한 학문을 갖추고 왕자(王者)를 보좌할 재주를 지닌 사람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연달아 장원급제하였고, 3년 동안 시묘하여 효도의 뜻을 펼쳤네. 내면에 배양된 근본이 뽑을 수 없이 확고하기 때문에 외면에 드러난 영특함과 순수함이 환하게 문채가 있으니, 선왕이 임용하여 사륜(絲綸)을 맡게 하고, 후생들이 경모하여 태산북두처럼 우러른다네. 염락(濂洛)의 도를 창도하고 불로(佛老)의 말을 배척하며, 강론이 정밀하여 성현의 은미한 뜻을 깊이 터득하며,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아 인재의 발흥이 성대해지니, 덕망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높아지고 명성이 이 때문에 크게 떨쳐졌네.
명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에 국가가 맨 먼저 귀부(歸附)하였는데, 신료 중에 삼가 선발하여 공을 서장관에 임명하였네. 창해를 배로 건너 사신 갔다가 태풍을 만나 바다에 표류하더니,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되돌아갔을 때에 더욱 황제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네.
공민왕이 승하한 뒤와 김의(金義)가 북원으로 달아났을 때에 권신들이 여우처럼 의심하는 마음을 갖고서 신료들이 공무에 헌신하기를 꺼린다고 하며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려 하지 않아 장차 백성들에게 화를 빚어내려고 하였네. 경이 정도전 등과 함께 힘껏 말하기를 “근래에 변고가 서로 이어지거늘, 어찌 사정을 갖추어 아뢰지 않습니까. 진실로 천자에게 죄를 얻는다면 국가의 복을 이어 가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사신의 행차가 있게 되어 신하의 분수를 밝혔던 것이니, 돌아보건대, 동방이 편안할 수 있었던 것은 경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네.
그 뒤 북원의 사신이 왔을 때 조서의 말이 불순한데도 당시에 맞아들이자는 의론을 대소 신료들이 모두 옳게 여겼네.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 등을 거느리고 옳지 않음을 극력 말했으나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의 무리를 거슬러서 용납되지 못하였고, 그래서 영남으로 유배된 것이 두어 해이고 일본으로 갔다가 돌아온 것이 한 해를 넘겼네.
작은 나라가 조빙을 늦춘 까닭으로 중국 조정의 엄한 견책을 초래하여 국운이 위태하고 인심이 두려워할 때에 멀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가 천자의 얼굴을 직접 우러러 뵈었네. 비로소 왕이 조근(朝覲)하는 길을 열고 끝내 세공의 액수를 견감받으니, 예전부터 대국을 섬기는 예를 어기지 않아 지금까지 백성을 보전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되었네.
갑인년(1374, 우왕 즉위년)부터 기사년(1389, 공양왕 즉위년)까지 불행히도 우(禑)와 창(昌)이 왕위를 훔치는 재앙이 있자 항상 적인걸(狄仁傑)과 장간지(張柬之)처럼 흥복(興復)할 충심을 품었으니, 하늘이 실로 그대 마음을 굽어보아 일이 마침내 뜻한 대로 이루어졌네. 홍무 22년(1389) 10월 사이에 문하부 평리 윤승순(尹承順)이 남경에서 돌아올 때에 공경히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고려가 임금의 자리가 끊어져서 비록 왕씨를 가탁하여 다른 성으로 세웠으나 또한 삼한이 대대로 지켜 오던 좋은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였네. 이해 11월 15일 경들이 계책을 정하여 천자의 명을 펴고 대비의 말을 여쭈어 과인을 추대하여 정통(正統)을 잇게 하니, 위로는 조종(祖宗)의 끊어진 제사를 받들게 되고 아래로는 자손의 무궁한 아름다움을 이어 가게 되었네. 이에 기강을 정돈하고 예악을 닦아서 밝히며, 전법(田法)을 바로잡아 쟁송을 그치게 하며, 용관(宂官)을 없애어 현량(賢良)을 등용하였네. 조정에서 시행하는 것은 진실로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들려는 뜻이고, 경연에서 아뢴 것은 모두 〈이훈(伊訓)〉과 〈열명(說命)〉의 말이었네. 세상에 드문 재주는 참으로 고굉(股肱)과 합치하고, 성대한 공렬은 대려(帶礪)에도 잊기가 어려우니, 만약 표창하여 높이는 특별한 은전이 없다면 어떻게 장래를 권장하고 면려하겠는가. 이 때문에 공신각(功臣閣)을 세워서 형상을 그리며, 비석에 새겨서 공적을 기록하며, 삼대(三代)의 조고(祖考)를 추증하고 영세토록 자손의 죄를 용서받게 하며, 토지를 내리고 노비를 나누어 주며, 이어서 백금 50냥과 어구마(御廏馬) 1필을 내리노라.
아아, 내가 어렵고 큰 왕업을 이어받아 허물을 면하기를 생각하노니, 경은 훌륭한 보필이 되려는 마음을 더욱 견지하여 명예가 길이 이어지도록 하라.
얼마 있다가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 문하부시중 판도평의사사 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守門下府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書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올랐다.
당시 국가에 일이 많아 긴요한 업무가 수없이 쌓였으나, 공이 재상이 되어 목소리와 낯빛을 바꾸지 않고서도 큰일을 처리하고 큰 의혹을 결단하며 좌우로 응답하는 것이 모두 꼭 들어맞았기 때문에 재상들 중에 감히 다른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당시의 풍속은 무릇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오로지 불가의 법을 숭상하여 기일(忌日)에 승려를 불러 재를 올리고 시제(時祭)에는 비록 명가(名家)일지라도 단지 지전(紙牋)만 진설했다가 제사가 끝나면 불사르거나 혹 이마저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자못 많았다. 공이 사서인(士庶人)으로 하여금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본떠서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청하니, 예법과 풍속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수령은 참외(參外)와 이서(吏胥)를 섞어 임용하였기 때문에 품계가 낮고 인물이 용렬하여 침탈하는 일이 갖가지로 생겨나서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에 청망(淸望)이 있는 참상관(參上官)으로 대신하게 하고 인하여 감사나 수령관(首領官)을 보내어 그 출척(黜陟)을 엄격히 하도록 청하니, 피폐하였던 것이 다시 되살아났다.
도평의사사가 국정을 홀로 총괄하여 금곡(金穀)의 출납을 오직 육방(六房)의 녹사(錄事)가 백첩(白牒)으로 시행하기 때문에 외람된 일이 많았는데, 경력(經歷)과 도사(都事)를 두어 갖가지 일을 종합하여 다스리고 그 출납을 기록하게 하니, 폐단이 없어지고 일이 잘 다스려졌다.
공이 또 학교가 광범위하지 못함을 걱정하여 안으로는 오부 학당(五部學堂)을 건립하고 밖으로는 작은 고을까지도 향교를 설치하니, 문풍(文風)이 다시 진작되었다.
기강을 바로잡아 국체(國體)를 세우며, 용관(宂官)을 없애어 준량(俊良)을 등용하며, 호복(胡服)을 혁파하여 중국의 복제를 따르며, 의창(義倉)을 세워서 궁핍한 사람을 구휼하며,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한 것도 모두 공이 계획한 것이었다. 이 밖에 시행하거나 폐지하여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한 것은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 성조(盛朝)가 천명을 받으려 할 때에 공이 절의를 위하여 세상을 떠났으니, 바로 임신년(1392, 공양왕4) 4월 4일이고, 수명이 56세이다.
처음에 해풍군(海豐郡)에 장사하였다가 영락(永樂) 병술년(1406, 태종6) 3월에 용인현(龍仁縣) 치소 북쪽 쇄포촌(曬布村)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을유년(1405)에 선정(先正)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글을 올려 봉증(封贈)을 더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여 후인을 면려하기를 청하니, 전하가 아름답게 여기고 받아들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 수문전 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을 증직하고 문충(文忠)이라 시호하였다.
공은 천품이 지극히 높고 호매(豪邁)함이 절륜하였다.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었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뭇 서적을 널리 보고 날마다 《대학》과 《중용》을 외우며, 이치를 궁구하여 그 지식을 극진히 하고 자신의 몸에 돌이켜서 그 실제를 실행하였다. 참된 이치가 쌓이고 힘써 행함이 오래되어서는 전해지지 않던 염락(濂洛)의 비결을 홀로 터득하였기 때문에 사업에 시행되고 의론에 드러난 것이 열에 두셋도 되지 않았지만 광명하고 정대함은 진실로 이미 청사(靑史)에 빛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명세(命世)의 재주라 할 만하다.
아아, 만약 공이 태조의 창업을 도와서 자신이 배운 바를 다 펼칠 수 있었다면, 온갖 법도를 찬란히 만들고 한 시대를 교화하여 성대한 경륜이 응당 천고에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말세의 액운을 만나 천명이 이미 떠나가고 인심이 이미 이반되었는데도 홀로 절개를 시종 지키다가 목숨을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애통하도다. 그러나 그 크나큰 충절은 바로 일월과 더불어 우주에서 빛을 다투니, 애초에 공의 불행이 아닌 것이다.
공이 저술한 시와 문이 매우 많았지만 공의 아들 형제가 젊었을 때에 상란(喪亂)을 만나서 거의 다 산실되었고, 장년이 되어서 유고를 모아 겨우 시 약간 수를 얻었으니, 그 글이 일실(逸失)된 것이 애석하도다. 후세 사람이 호방(豪放)하고 준결(峻潔)한 시를 본다면, 공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영락(永樂) 경인년(1410, 태종10) 3월 일에 문인 추충익대개국 공신(推忠翊戴開國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원군(東原君)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 함부림(咸傅霖)이 짓다.
[주1] 을미년 …… 마쳤다 : 〈연보고이〉 을미년(1355, 공민왕4) 조에는 “1월 부친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였다.”라고 하였다.
[주2] 을사년 …… 당하였다 : 〈연보고이〉 을사년(1365, 공민왕14) 조에는 “1월 모친 변한국부인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였다.”라고 하였다.
[주3] 허산(許山) : 지금의 항주만(杭州灣) 북쪽 봉현(奉賢) 앞바다인 탄허산(灘許山)을 가리킨다.
[주4] 김의(金義) : 본래 호인(胡人)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공민왕 말년에 밀직사 부사, 동지밀직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374년(공민왕23) 명나라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蔡斌) 등이 말을 구해 남경으로 돌아갈 때 말 300필을 요동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임밀과 채빈은 이르는 곳마다 지체하였고 채빈이 술주정이 심하여 매번 김의를 죽이려 하니, 개주참(開州站)에 이르러 김의가 채빈을 죽이고 임밀을 납치하여 갑사(甲士) 300명과 말 200필을 갖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났다. 《高麗史節要 卷29 恭愍王4 甲寅23年》
[주5] 겨울 : 공양왕은 1389년 11월에 즉위하였다.
[주6] 사륜(絲綸) : 임금의 조서(詔書)를 뜻한다.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임금의 말이 실과 같지만 밖으로 나가면 명주실처럼 커지고, 임금의 말이 명주실 같지만 밖으로 나가면 밧줄처럼 굵어진다.[王言如絲, 其出如綸; 王言如綸, 其出如綍.]”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다.
[주7] 염락(濂洛) : 염락관민(濂洛關閩)으로, 송대(宋代)의 성리학자 또는 성리학을 뜻한다. 염락관민은 중국의 염계(濂溪), 낙양(洛陽), 관중(關中), 민중(閩中)으로, 송대 성리학의 대표적인 네 학자가 살았던 곳이다. 염계 주돈이(周敦頤)는 염계에 살았고,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형제는 낙양에 살았고, 횡거(橫渠) 장재(張載)는 관중에 살았고, 회암(晦庵) 주희(朱熹)는 민중에 살았다.
[주8] 적인걸(狄仁傑)과 …… 충심 :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중종(中宗)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적인걸이 무후의 조정에 벼슬하며 장간지(張柬之) 등을 요직에 천거하여 무후의 폐위와 중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다. 적인걸이 죽은 뒤에 장간지 등에 의하여 무후가 폐위되고 중종이 복위되었다.
[주9] 이훈(伊訓)과 열명(說命) : 모두 《서경》의 편명(篇名)이다. 〈이훈〉은 상(商)나라 정승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이 즉위했을 때 훈도한 말을 기록한 것이다. 〈열명〉은 상나라 고종(高宗)이 정승 부열(傅說)에게 명한 말을 기록한 것으로, 상편은 고종이 부열을 얻어 정승을 임명할 때 한 말이고, 중편은 부열이 정승이 되어 고종에게 경계를 올린 말이고, 하편은 부열이 학문을 논한 말이다.
[주10] 고굉(股肱) : 다리와 팔로, 임금이 팔다리처럼 의지하는 중신(重臣)을 뜻한다. 《서경》 〈익직(益稷)〉에 순(舜)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는 짐의 다리와 팔과 귀와 눈이 되어야 한다.[臣作朕股肱耳目.]”라고 하였다.
[주11] 대려(帶礪) : 띠와 숫돌로 ‘오랜 세월이 지난 뒤’를 뜻한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 공신을 봉작(封爵)하면서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도 나라가 길이 보전되어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리라.[使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寧, 爰及苗裔.]”라고 맹세하였다. 《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주12] 을유년 : 〈연보고이〉에는 신사년(1401, 태종1)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주13] 명세(命世) : 명세(名世)와 같은 말로, 고요(皐陶), 이윤(伊尹), 태공망(太公望)처럼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세상에 이름난 인물을 말한다. 맹자가 말하기를 “500년에 반드시 성왕(聖王)이 나오니,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이가 있다.[五百年必有王者興, 其間必有名世者.]”라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下》
[주14] 함부림(咸傅霖) : 1360~1410. 자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 본관은 강릉(江陵),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형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조에서는 개성부 소윤,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行狀[咸傅霖]
公姓鄭。諱夢周。字達可。號圃隱。慶州府迎日縣人。遠祖襲明。以名儒仕高麗仁宗朝。官至樞密院知奏事。曾祖仁壽。贈奉翊大夫,開城尹,上護軍。祖裕。贈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考云瓘。贈愼德守義誠勤翊祚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兵曹事,上護軍,領景靈殿事,日城府院君。妣永川李氏。贈卞韓國大夫人。膳官署丞約之女也。妣有娠。夢抱蘭盆忽驚墮。寤而生公。乃至元丁丑十二月戊子也。因名公夢蘭。公生而秀異。肩上有黑子七。列如北斗形。至九歲。妣晝夢黑龍升園中梨樹。驚覺出視。乃公也。又名夢龍。旣冠。乃改今名。至正乙未冬十一月。丁內艱。廬墓終制。丁酉。中監試第三名。庚子。政堂文學金得培,樞密院學士韓邦信掌禮圍。公連魁三場。遂擢第一。華聞大播。壬寅。選補藝文撿閱。甲辰。韓邦信爲東北面都指揮使。我 太祖爲兵馬使。公以從事官從擊女眞三善三介于和州走之。尋陞修撰。累遷至典農寺丞。乙巳春正月。丁外艱。于時喪制紊弛。士大夫遭喪。皆百日卽吉。公獨廬二親墓。哀禮俱盡。國家嘉之。爲㫌其閭。服闋。除通直郞,典工正郞。辭不就。丁未。以禮曹正郞兼成均博士。國家自辛丑被兵以來。學校荒廢。至是恭愍王銳意復興。新創成均館。以學官小。選碩儒若永嘉金九容,潘陽朴尙衷,密陽朴宜中,京山李崇仁及公兼學官。以牧隱李文靖公兼大司成。時經書至東方者唯朱子集註。而公講說發越。超出人意。聞者頗疑。及得雲峯胡氏四書通。與公所論。靡不脗合。諸儒尤加歎服。牧隱亟稱之曰。達可論理。橫說竪說。無非當理。推爲東方理學之祖。戊申。進奉善大夫,成均司藝,知製敎。自是凡除授。皆帶三字及館閣。洪武辛亥。轉中議大夫大常少卿。俄遷成均司成。階中正。壬子春。以書狀官從知密直司事洪師範赴京。賀平蜀。兼請子弟入學。秋八月。還道大倉。至海中許山遭颶風。船敗漂抵巖島。師範溺死。公萬死乃生。割韂而食者十三日。事聞。帝具舟楫取還。厚加賙恤。翌年秋七月。乃還。甲寅。出按慶尙道。乙卯。還拜右司議大夫藝文館直提學。尋復入成均爲大司成。初。 皇明之肇興也。公力請于朝。首先歸 明。大爲 高皇帝所嘉。至是玄陵被弑。金義殺使。國人恟懼。不敢通使 朝廷。公首陳大義。以謂邇來變故。當早詳奏。使 上國釋然無惑。豈可先自疑貳。構禍生靈。於是始遣使告哀。且辨析金義事。乙卯。北元遣使來。其詔有慢語。權臣李仁任,池奫欲復事元。議迎其使。公與文臣十數人抗章論列。請却不納。詞甚剴切。池,李深忌。貶公彦陽。餘悉流遠州。踰年賜環。時倭冦充斥。瀕海州郡。蕭然 一空。國家患之。嘗遣羅興儒使覇家臺說和親。其島主將拘囚興儒。幾致餓死。僅保性命還。權臣嗛前事。繼使公。人皆危之。公略無難色。及至。極陳古今交鄰利害。主將敬服。館待甚厚。倭僧有求詩者。公援筆立就。豪俊警策。於是緇徒坌集。日擔公之肩輿請觀奇勝。及歸。刷還俘尹明,安遇世等數百人。遂使三島悉禁侵略。倭人到于今稱之不已。初聞公之卒。莫不嗟惋。至有齋僧薦福者。公之信義能服頑梗者如此。遇世歸事 太祖有勞。官至二品。厥後李子庸奉使。又被拘 囚如興儒。於是國家益重公之專對也。越數年。公憫念倭賊奴我良家子弟。迺謀贖歸。力勸諸相各出私貲若干。且爲書授尹明以遣。賊魁見書詞懇惻。還俘百餘人。自是每明之往。必得俘歸。戊午。拜正順右散騎常侍。己未。歷典工禮儀典法三判書。階奉翊。庚申。判書版圖。秋從 太祖擊倭雲峯。大捷還。遷密直提學,商議會議都監事。明年。僉書密直司事。壬戌夏。進貢金銀。冬又以請謚再赴 京。癸亥。以東北面助戰元帥。復從 太祖赴征。甲子。陞匡靖大夫政堂文學。時國家多釁。 高皇帝震怒。將兵于我。增定歲貢良馬五千匹。金五百斤。銀五萬兩。細布匹數如銀兩。乃以五歲貢不如約。杖流入朝使臣洪尙載,金寶生,李子庸等于遠州。至是年當賀 聖節。諸宰相皆憚行䂓避。㝡後乃擬遣密直副使陳平仲。平仲以臧獲數十口賂權臣林堅味。遂辭疾。堅味卽擧公聞。王召公面諭曰。邇來我國見責 朝廷。皆大臣過也。卿博通古今。且悉予意。今平仲疾不能行。乃代以卿。卿意何如。對曰。君父之命。水火尙不避。况朝 天乎。然我國去南京凡八千里。除候風渤海。實九十日程。今去 聖節纔六旬。脫候風旬浹。則餘日僅五十。此臣恨也。王曰。何日就道。對曰。安敢留宿。遂行。晨夜陪道。及 節日進表。 帝覽表畫日曰。爾國陪臣等。必相托故不肯來。日迫乃遣爾也。爾得非往者以賀平蜀同差來者乎。公悉陳其時船敗留滯。 帝曰。然則應解華語。溫其 玉音。特賜慰撫。勑禮部優禮以送。遂放還洪尙載等。乙丑。同知貢擧。取禹洪命等三十三人。世稱得士。丙寅。以請减歲貢赴 京。奏對詳明。得永除前五年未納者及增定歲貢常數。只定貢種馬五十匹。公之忠義至誠。動能感悟 淵衷。開霽 天威者如此。及還。王喜甚。賜衣帶鞍馬。仍拜門下評理。明年。請解職。戊辰春。拜三司左使。時權奸專柄。豪奪民田。占至數圻。貪饕無厭。國窶民瘠。公痛之次骨。請革私田。民賴以生。秋。拜門下贊成事。庚午秋。賜純忠論道佐命功臣之號。階加重大匡。以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判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領書雲觀事,益陽郡忠義君。冬。恭讓王卽位。敎曰。撥亂反正。誠社稷之忠臣。崇德報功。實國家之令典。純忠論道佐命功臣,重大匡,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司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觀事鄭夢周。天人之學。王佐之才。射策而聯捷魁科。廬墓而克 伸孝志。惟根本培植於內者確乎不拔。故英粹發越於外者煥乎有文。先王任用而俾掌絲綸。後生景慕而如仰山斗。唱鳴濂洛之道。排斥佛老之言。講論惟精。深得聖賢之奧。敎誨不倦。欝有人材之興。德望由是而益崇。聲名以之而大振。聖明勃興之伊始。國家歸附之㝡先。愼簡臣僚。擧充書狀。航滄海而乃往。因颶風之所飄。僅脫萬死以旋歸。尤荷九重之眷顧。迨玄陵賓天之後。當金義奔胡之初。有權臣執狐疑之心。謂庶官憚駿奔之役。莫肯遣使於 上國。將欲嫁禍於生靈。卿與鄭道傳等力言。以謂邇來變故之相仍。盍具事情而申達。苟獲罪於 天子。難延祚於邦家。故有使介之行。以明臣子之分。顧東方之寧謐。繇卿輩之謀猷。厥後胡使之來。書詞不順。當時郊迓之議。小大皆然。率李詹,伯英之徒極陳不可。忤仁任,池奫之輩未得見容。竄逐嶺南者數年。往還日本者經歲。由小邦覲聘之緩。致 天朝譴責之嚴。國步危疑。人心恐懼。跋涉山川之遠。親瞻 天日之容。始通 王覲之途。終减歲貢之額。惟自昔罔愆事 大之禮。肆至今克有保民之休。粤自甲寅。以至己巳。不幸有禑,昌僭竊之禍。居常懷狄,張興復之忠。天實臨於爾心。事竟成於有志。洪武二十二年十月間。門下評理尹承順回自京師。欽奉 聖旨。高麗君位絶嗣。雖假王氏以異姓爲之。亦非三韓世守之良謀。是年十一月十五日。卿等定策。宣 天子命。禀大妃言。推戴寡躬。俾承正統。上以奉祖
宗旣絶之祀。下以延子孫無疆之休。於是整頓紀綱。脩明禮樂。正田法而息爭訟。汰冗官而擧賢良。廊廟施爲。實堯君舜民之志。經筵啓沃。皆伊訓說命之言。奇材允叶於股肱。盛烈難忘於帶礪。苟無褒崇之異數。何以勸勵於將來。是用立閣圖形。勒碑記績。追贈三代祖考。宥及永世子孫。錫之土田。副以臧獲。仍賜白金五十兩。廐馬一匹。嗚呼。予惟襲艱大之業。思免厥愆。卿益堅弼亮之心。以永終譽。尋進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書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時國家多故。機務浩繁。公爲相。不動聲色。而處大事决大疑。左酬右答。咸適其當。諸相無敢有異同者。時俗凡喪祭。專尙桑門法。忌日齋僧。時祭雖名家。只設紙牋。祭竟焚之。或廢者頗多。公請令士庶倣朱子家禮。立廟作主。以奉先祀。禮俗復興。先是。守令雜用參外吏胥。秩卑人劣。侵漁百出。民不堪命。請代以參上有淸望者。仍遣監司首領官嚴其黜陟。疲瘵復蘇。都評議使司專揔國政。而金穀出納。唯六房錄事白牒施行。事多猥濫。置經歷 都事。綜理庶務。籍其出納。弊祛事理。公又患庠序之未廣也。內建五部學堂。外於十室之邑。亦置鄕校。文風復振。至於整紀綱而立國體。汰冗散而登俊良。革胡服而襲華制。立義倉以賑窮乏。設水站以便漕運。皆公畫也。其他施罷利國澤民者。不可勝紀。及我 盛朝將受命。公伏節以終。乃壬申四月初四日也。壽五十六。初葬于海豐郡。永樂丙戌三月。遷葬于龍仁縣治之北曬布村之原。歲在乙酉。先正文忠公權近上書請加封贈。錄其子孫以勵後人。殿下嘉納。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謚文忠。公天分至高。豪邁絶倫。少有大志。好學不倦。博覽羣書。日誦中庸大學。窮理以致其知。反躬以踐其實。眞積力久。獨得濂洛不傳之秘。故其措諸事業發於議論者。十不能二三。而光明正大。固已炳燿靑史。眞可謂命世之才矣。嗚呼。使公而佐興王之業。盡展其所學。則丹靑百度。陶甄一世。經綸之盛。當無愧於千古矣。不幸阨會衰叔。天命已去。人心已離。而獨終始一操。遂至捐生。痛哉。然其 大忠大節。直與日月爭光宇宙。初非公之不幸也。公所著詩若文甚多。而公之嗣伯仲氏少遭喪亂。散失殆盡。及其壯。裒集遺藁。僅得詩若干首。惜乎其文之逸也。後之人觀詩之豪放峻㓗。則可以想公之爲人矣。 永樂庚寅三月日。門人推忠翊戴開國功臣,資憲大夫,東原君,寶文閣提學咸傅霖。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