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한 이 승훈은 복음의 기운이 돋고 있었다. 그는 그 당시 한양 서소문 밖 반석방(盤石坊, 현 중림동) 살고 있었다. 시문(詩文) 뛰어난 그는 1780년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전해 지는 문집이 없어, 시문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으나 이현경은 승훈의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한 내용이 전해 온다. 그의 시는 정슬 청형함(靜瑟淸瀅)이 주나라의 옥찬과 같다 하였다. 시문에 귀재였던 승훈은 강학에 참석한 이후 서학 책을 숙독해 가며 한편으로는 이 벽과 자주 어울리며 이 벽과 함께 천주교 신봉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당시 이 벽은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갖고 있었다. 천주교 교리의 재래습속과 불일치와 천주교가 조선사회와의 모순 등이 걸림돌처럼 느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누군가 북경으로 가야 할 사람을 뽑아야 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27세의 청년 이 승훈이었다. 마침 그의 부친 이 동욱이 1783년 10월에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 謝恩使) 황 인점(黃仁點)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승훈은 출발 전 이 벽에게 교리를 배우고 이 벽으로부터 북경 천주당의 성직자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 지도와 주요한 서적들을 얻어 올 것을 당부받는다. 동지사 일행은 수백 명이었다. 승훈은 그 사이에 끼어 1783년 10월 14일 한양을 떠나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동지사 일행의 체류기간은 40여 일이었다. 이 승훈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관리하던 북천주당을 자주 방문하여 필담(筆談)으로 교리를 배우고 영신상의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되자 귀국에 앞서 양력 2월에 프랑스 신부 그라몽(Louis de Grammont)으로부터 조선교회 주춧돌인 베드로라는 교명을 받은 후 세례를 받는다. 이로서 참된 신자가 된 이 승훈은 1784년 3월 24일 한양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전개시킨다. 한편 지니고 들어온 서책 등은 이 벽에게 넘겨준다. 이벽은 즉시 고요한 것을 찾아 임대한 가옥에 머물며 읽고 연구하여 상당한 수준의 진리를 탐구하게 된다. 그리고 정 약용 형제들을 입회시키고 권 철신 형제들도 입회시키며 전교에 온 힘을 쏟는다. 이어서 중인들인 김 범우, 최 인길 등과 내포지방 이 존창을 입교시키고 전주의 양반 유 항검도 입회 시키며 수십 명의 영세 신자를 모으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이 승훈에게 세례자 요한이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은 후 명실상부한 교회 지도자가 되어 조선 천주교를 이끌어 나간다.
1784년 갑진년 겨울 어느 날, 한양 남부 명례방에 있던 역관 김 범우 토마스 집 대청마루에서 이 벽을 지도자로 주일 행사를 갖으므로서 조선천주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때 이 벽은 머리에 책건(幘巾)을 쓰고 등지고 앉아 설교하고 그 앞에는 이 승훈, 정 약전 형제, 권 일신 등이 모두 제자라 하며 시좌(侍座) 하였다. 그 모습이 유교의 사제례(師弟禮) 보다 엄격하였다. 이들은 날을 정하여 주일의식을 드리니 몇 달 사이 참석자가 수십 인으로 늘었다. 서양 선교사의 입국도 없이 전교도 없이 오로지 남인 학자들의 자발적인 교리 연구를 통해 천주교를 세운 일은 세계 전교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거룩한 신앙심이었다. 교회창설자들은 미신행위를 물리치고 올바른 종교를 세워 서로 교우라 호칭하며 엄격하였던 조선의 계급사회를 평등사회로 변모시켰으며 일부다처제의 악습을 타파시키고 한글로 기도문을 작성하여 한글전용운동에 앞장섰으며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고 문호개방을 이끌어 내 나라를 근대화로 가는 길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1784년 겨울부터 김 범우 토마스 명례방 집에서 주일행사를 거쳐 자발적으로 조선천주교를 세우는 기적을 이루더니 몇 달 가지 못해 정조 9년, 을사년 1785년) 3월에 관헌에게 발각되어 신자들은 전부 잡혀 끌려가고 서적을 비롯하여 성화와 성물들은 압수되어 형조에 넘겨진다. 이 교란은 1887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이루어지기 까지 103년 동안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게 되어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명례방 종교행사에서 형조로 잡혀왔을 당시 형조판서는 김 화진이었다. 체포된 사람들이 대부분 이름난 양반자제로서 천주교의 내용도 잘 모르고 입교하여 생긴 일로 알고 타일러 집으로 보냈으나 집을 교회로 삼았던 중인 신분인 김범우 토마스만 옥에 가두었다. 이에 권 일신이 그의 아들 권 상명과 이 총억, 정섭 등 5인을 데리고 형조로 달려 가 김 범우와 함께 다스려 달라며 압수된 예수성상과 성물, 서적 등을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형조판서는 유명한 양반 자제임을 알고 꾸짖고 성상 등을 돌려준다.
그러나 형조에서는 김 범우토마스를 문초하고 옥에 가두었다가 그해 가을 밀양 단장으로 귀양 보냈다. 김 범우는 2년 후 귀양지 (현재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만어로 652)에 묻힌다. . 형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관대하게 처한 이유는 정조가 탕평책을 써서 인재를 등용하고 남인 출신의 채제공을 예조판서, 병조판서로 삼아 남인들을 각별히 대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채제공은 정조 17년 1793에는 영의정까지 오르게 된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에는 박해가 크게 일어나지 않었다. 조선천주교는 비록 형조의 금리의 적발로 잠시 해산되고 성균관 유생 이 용서 등이 통문을 유림전체에 돌려 철저한 제거를 주장했지만 곧 되살아 난다. 이 승훈도 동생 이 치훈의 반대로 흔들렸으나 1786년부터 다시 교회를 세우는 운동을 이어간다. 이들은 북경교회를 본떠 권 일신이 주교가 되고 이 승훈, 정 약전, 최 창현, 내포 이 존창, 전주 유 항검 등 10명이 신부가 되는 가성직제도( 假聖職制度)를 만들고 설교를 돌아가면서 하고 세례를 주면서 고 죄(告罪)를 듣고 견진성사(堅振聖事)를 하면서 미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전주 유항검이 1788년에 이르러 서적을 통해 가성직제도가 잘못된 것을 알고 지도부에 알려와 이를 중지하고 그해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이 성원일행으로 윤 유일이 밀서를 가지고 북경으로 가 북경 주교 구베아 신부에게 전달하고 조선교회 사정을 알렸다. 주교는 이 사실을 알고 감탄하며 가성직제도 불가와 함께 세례 이외의 성사도 집행해서는 안된다는 답신을 주었다. 윤 유일 바오로는 이 서신을 갖고 귀국 이 승훈과 권 일신에게 넘겨준다. 이를 받아 본 권 일신 등 교회지도자는 성무를 중단하고 그해 5월 떠나는 황 인점 일행을 따라 윤 유일이 다시 북경으로 가도록 한다. 북경에 도착한 윤 유일은 외국 선교사 파견 요청과 함께 조상 제사문제에 관하여 답을 얻어 온다. 주교는 머지않아 신부를 보내줄 것이니 모든 준비를 하고 있고 제사같은 미신행위는 금지한다는 답서를 내려 주어 이를 들고 윤 유일은 1790년 10월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에 따라 신해년 1791 겨울에 전라도 진산에서 정 약용 외종인 윤 지충과 권 상연이 순교하는 교난을 겪게 된다. 윤 지충의 부친은 의학에 정통한 윤 경이다. 윤 지충은 진산에서 태 어나 1783년 봄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이듬해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를 치르기 위해 학문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 김 범우 집에서 천주실의, 칠극을 보고 내 종형인 정 약전의 가르침에 따라 1787년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북경 주교의 엄명에 따라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재를 집뜰에 묻고 1791년 5월에 권 씨 어머니가 별세하자 외종 권 상연과 함께 모든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으나 신주를 만들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장례에 참석했던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본후 불효자식이라 비난하고 관에 고발하였다.
이러한 소문에 한양에 살던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 홍 낙안(洪樂安)이 체제공 좌의정에게 그해 10월에 장문의 고발장을 올려 윤 지충을 처벌하여 줄 것을 요구하고 진산군수 신 사원에게는 그 집을 수색하여 윤 지충과 권 상연을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홍 낙 안은 원래 1787년부터 천주교를 반대하는 글을 정조에게 올려 천주교 근절 운동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윤 지충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항이 도래하자 경기도 광주 고모댁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자기 대신 숙부께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시 귀향하여 권 상연과 함께 10월 26일 진산군수에게 자수한다. 진산에서 문초를 받은 후 30일에는 전라감사 정 민시가 있는 전주로 이첩되어 다시 심문을 받는다. 그러다 동년 음력,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남문밖 형장에서 참수된다. 이러한 사실이 전국에 알려지자 유생(儒生)들이 들고일어나 11월부터 무려 30여 통의 상소를 정조에게 올려 천주교를 엄히 다스릴 것을 요구한다. 이 결과로 양근 권 일신과 평택 현감으로 재직하던 이 승훈이 벼슬을 몰 수 당한 후 해임되고 권 일신은 16일 충청도 예산으로 귀양 가는 길에 심문 때 입었던 장독의 영향으로 객사를 하게 된다. 이 승훈은 이후 주 문모 신부의 입국 사건의 발각된 1795년 7월에 예산으로 유배된다. 또한 진산사건의 영향으로 11월에 충청 내포지방 사도라 불리던 이 존창도 체포된다. 그는 심문 중 천주교는 요술이라 말하며 배교하여 석방된다. 충청 홍주 출신으로 친인척 30여 명을 입교시켰던 원 시장(元始長)도 체포되어 심문과 함께 악형을 받아 1792년 12윌 옥사를 하게 된다. 이렇듯 신해교난은 위정자들이 양반 신자들까지 박해를 할 수 있는 구실이 성립된 것이다. 4대조까지 신주를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거부한 천주교는 1백 년 동안 박해의 표본적인 이유는 바로 조상에 대한 제사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