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시 고북면 연암산 천장사(天藏寺)
주 소: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산 1번지
소 속: 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 말사
전화번호: (041)858-6002
위치및 창건:
천장사는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연암산에 자리하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 말사이다.
절이 위치한 곳은 고북농공단지에서 연암산으로 약 5km가량 올라간 곳에 있다.
천장사는 633년(백제 무왕34)담화가 그의 제자와 함께 수도하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 뒤의 연혁을 거의 전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 후기에는 우리 나라 선종을 중흥시킨
경허 성우(鏡虛 惺牛,1849-1912)스님이 천장사에 머물면서 수도하는 한편 후학을 지도했다.
만공 월면 (滿空 月面,1871-1946)스님은 경허스님의 제자로 이 절에서 출가했다.
천장암 인법당 전경
온 나라가 개국의 여파로 뒤숭숭하던 1880년 6월 어느날
충남 서산군 고북면 연암산 마루의 천장암에 30대 중반의 한 승려가 나타났다.
경허(1846~1912)라는 법명의 이 스님은 당시 불교계에서 경전에 밝은 학승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경허가 아니었다.
한 해 전 삼남 지방을 덮친 콜레라의 참상 속에서
교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는 선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당시 머물던 동학사 강원으로 돌아간 경허는 제자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방문을 걸어 잠근 후 참선에 몰두했다.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칼을 갈아 턱에 들이대면서 화두에 몰두하던 그는 3개월 만에 의문을 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번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그냥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깨달음 이후
그것을 굳게 다지는 수행을
‘보림’이라 부르며 몹시 중시했다.
경허는 바로 보림을 위해 천장암을 찾았던 것이다.
백제 무왕 34년(633년) 만들어졌다는 천장암은 산 위에
달랑 법당 한 채가 자리잡은 작은 암자였다.
당시 천장암에는 그의 친형 태허 선사가 모친 박씨를 모시고 수행 중이었다.
천장암 인법당 전경
앞에서 보면
일자 형이지만 ㄷ字 건물입니다.
정면이 법당이고 오른쪽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과 경허선사가 묵던방과 제자, 수월,만공,혜월선사가 묻던 방이 보인다.
천장암 인법당과 경허스님 열반100주년 기념비
천장암 편액
천장암 인법당 관세음보살 불단
천장암 인법당 관세음보살 불단
천장암 인법당 관세음보살 불단
관세음 보살상
인법당 내에 모셔진 관세음 보살상, 좌측에 만공스님 진영이 있고, 우측으로 경허스님 진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천장암 인법당 신중단
천장암 인법당 주련
경허스님 방문 위에 원성문이라는 편액이 있다
지금도 천장암으로 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콘크리트로 부분 포장된 산길을 자동차로 오르다보면 갑자기 급경사가 나타난다.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다시 10분쯤 걸어 올라가자 저쪽에 암자가 보였다.
새 건물을 두 채 짓기는 했지만 법당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잠시 숨을 돌린 후 경허 스님이 사용했던 법당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을 찾았다.
한평 남짓한 이 골방에서 경허는 1년 넘게 장좌불와를 했다.
그는 한벌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지냈으며 모기와 빈대,
이로 몸이 헐어도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구렁이가 방에 들어와 어깨를 타고 올라가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구렁이가 스스로 기어나갔다.
뼈를 깎는듯한 수행을 거듭한 끝에 깨달음을 확신하게 된 경허는 천장암에서 첫 설법을 하게 된다.
법당에는 바로 그 설법 때 읊은 게송이
그의 절 집안 증손자인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의 글씨로 붙어 있다.
경허선사 오도송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닫고 보니 삼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들 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岩山下路)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
만공스님 방
옆에 방이 또
하나 붙어 있는데, 경허스님 방의 두 배쯤 된다.
역시 세 명이
같이 자기엔 비좁다.
보따리 풀어놓을 여분도 없다.
이제보니
수월스님이 경허스님보다 겨우 6살 적다
(경허
1849년생 / 수월 1855년생 / 혜월 1861년생 / 만공 1871년생)
경허 선사와 제자들
조선시대 말기에 선종을 중흥한 경허선사(鏡虛禪師)가 수도하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기셨고 후학들을 지도하시던 곳.
경허스님의 수법제자로는 수월, 혜월, 만공, 한암스님등이 손꼽히고 있으며
그 중 수월스님은 천수경(千手呪)를 통하여 견성을 하시어 세가지를 얻으셨다고 한다.
그 첫째가 불망념지(不忘念智),
둘째가 잠이 없어져 버렸으며,
셋째가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수월스님은 밤낮으로 항상 천수경을 외웠는데
스승 경허로부터 짚신 삼기를 배워 짚신을 삼거나 땔감을 하면서도
한시도 천수경을 외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수월스님이 이곳 천장암에 오신지 1년이 되던 어느 날
14살의 어린 동자가 수행자가 되겠다며 천장암을 찾아왔는데,
이 동자가 바로 계룡산 동학사에서 경허를 만난 인연으로
훗날 큰 선지식이 된 만공(滿空)스님이었다.
만공은 그해 사미계를 받고 밥짓는 공양주가 되어
여러 해를 이곳에서 지냈으며
또한 훗날 ‘천진도인(天眞道人)’으로 이름난 혜월(慧月)스님도
그 무렵 천장암을 찾아와 밭일을 하면서
수심결(修心訣)을 공부했다고 한다.
당대의 고승 만공선사(滿空禪師)가 처음 출가하여
경허선사의 제자가 된 사찰도 이곳이었으며
경허선사와 만공선사의 수도처라는 점에서 많은 수도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천장암 벽화에 글이 새겨져 있다
[경허대선사와 제자 만공]
1904년 7월15일 월면은 청장암에서
경허선사로부터 전법게와 萬空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천장암 벽화에 글이 새겨져 있다
[경허대선사와 제자 수월]
"난 그런사람 모르오.
사람을 잘못 찾은 듯 싶소.
그러니 가던 길이나 가시오"
"모르오" 라는 그 한마디로 제자가 가야 할 길을 바로 일러준
스승과 짚신 한 켤레로 스승의 열반 길을 밝게 비춰준 제자
천장암 벽화
천장암 벽화
천장암 벽화
천장암 벽화
천장암 전경
천장암 7층석탑
천장암 7층석탑
인법당 앞에 위치한 높이 3M의 칠층석탑으로서
고려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충남 문화재자료 제2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장암 7층석탑
인법당 앞에 위치한 높이 3M의 칠층석탑으로서
고려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충남 문화재자료 제2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장사 전경
천장사 오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에서 빠진다.
외곽도로를 타고 29번 대산방향으로 간다.
굴다리 밑에서 고북방면으로 좌회전해서 달리면 대산농공단지가 나오고,
여기서 왼쪽길을 타고 접어들면 장요리다.
장요1리로 들어가면 된다.
가는 길이 헷갈려서 현지 주민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천장사 (041)858-6002
네비게이션으로 천장사 주차장 찍으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