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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槪觀)
8장 18절-9장 29절.
8장.
18절-22절: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왜 번제를 드렸을까? 홍수에서 하나님의 보호로 살았으니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생각이 안 나겠느냐? 죽음에서 살아났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게 자동적으로 나오는 거다.
노아가 짐승 중에 제일 정결하고 좋은 것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어떤 마음에서 이게 나왔을까? 감사한 마음이다. 죽음에서 살아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다. 그 많은 사람이 다 죽고 자기 식구들만 살아난 감사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드린 거다.
물에 떠내려가는 처녀를 총각이 살렸다면 말하자면 그 처녀는 자기를 살려준 총각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자동적이다. 이 총각이 오다가다 만난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것과, 자기가 살려준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행복하게 살겠느냐? 아무래도 여자는 자기를 살려준 총각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평생을 더 잘 해 줄 것 같다.
‘제일 정결하고 제일 좋은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들어있는 마음을 말한다. 이게 번제다. 왜 그러냐? 신약성경에 밝혀놨는데, 120년간 방주를 짓는 동안에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노아로 통해서 옥에 갇혀있는 영들에게 전도를 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때 당시에 노아는 선재적 그리스도를 몰랐지만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방주를 이렇게 지어라. 저렇게 지어라’ 라고 가르쳐 주신대로 말씀에 순종해서 방주를 지어서 홍수의 심판에서 살 수 있었다. 노아의 이 삶이 그 당시와 후대의 성도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전도를 한 것이 되는 거다.
이게 뭐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날 수 없다는 걸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방주의 치수를, 장광을 이렇게 지어라. 저렇게 지어라’ 라고 한 것은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날 수 있는 척도다. 즉 하나님의 이 명령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들어있는 거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들어있는 노아의 정신과 속 깊은 그 마음을, 즉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이 말이다. 이 마음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맡을 향기는 없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다시는 홍수로 사람을 멸하지 않겠다는 거다. 홍수가 나면 사람이 불을 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불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쪽으로 피할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한꺼번에 밀려오는 홍수는 다 씻어가 버리기 때문에 피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다시는 홍수의 심판을 하지 않는 이유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이건 어른이 되고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 악한 상태로만 있는 거다. 그러니 봐주고 안 봐주고 할 것 없이 언젠가 한꺼번에 심판을 해 버리겠다는 거다.
이런 비슷한 예가 하나님께서 가나아 땅에 있는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기식이 있는 것은 다 죽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어려서부터 악한 그것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방해하는 짓만 할 것이기 때문에 어리더라도 다 죽이라고 한 거다. 이걸 개인적 계시적으로 보면 내 속에 조그마한 악한 생각일지라도 그걸 놔두지 말아라. 이걸 그대로 두면 그것이 네 속에서 커져서 너를 집어 삼켜버린다. 너를 죽인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을 기르면서 ‘이 성질을 그대로 놔두면 좋지 않은 습성이 되고, 어른이 되어도 그대로 커지겠구나’ 하고 감지되는 게 있으면 어릴 때 바로 잡아줘야 한다. 그대로 두면 안 된다.
노아 때는 일괄적으로 한꺼번에 홍수로 심판을 했지만 앞으로의 심판은 불심판이다. 이 불심판은 개별적으로 들어가는 거다. 물심판은 볼 것 없이 한꺼번에 씻어버리는 것이지만 불심판은 개별적으로 들어가는 거다. 여기에는 각 사람마다 많이 지은 죄, 적게 지은 죄, 안 지은 죄의 구분이 필요한 거다. 계:에서 일곱 재앙이 있는데, 큰 재앙에서 회개하는 자가 있고, 두 번째 재앙을 받아서 회개하는 자가 있고, 끝까지 재앙을 받아도 회개를 못하는 자도 있기 때문에 심판이 일곱 가지로 많은 거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건 사시사철이면서 일상생활인데,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해서 보면 이는 곧 영적 생활 속에 여러 가지 시련이 들어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9장.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축복의 말씀인데, 번성의 축복을 준다는 거다. 영 주격으로 살 때 이런 복을 준다는 거다. 이 축복의 말씀에는 인간창조의 목적이 들어있다.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라고 하실 때 사람은 아담의 식구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 절에서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1차 심판 후에 노아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이때도 노아의 식구들밖에 없었다. 이 때 생육하고 번성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말씀에 분순종하면 저주요 인류의 멸망이 된다. 그러니까 이 명령은 축복으로 주어진 거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은 새로운 사람, 그리고 새 땅의 새 주인에게 내리는 축복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처녀총각이 결혼을 하면 이는 새로운 가정의 새 출발이므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 주어지는 거다. 영 주격을 따라 살 때 영적인 면에서도 이 축복이 주어지는 거다. 이 말씀을 따라 사는 부모 사이에서 출생하는 자녀에게도 같은 축복이 주어진 거다.
2절: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육해공의 모든 짐승이 노아식구들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 왜냐? 모든 동물을 채소처럼 주었기 때문에.
그러면 짐승들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먹을까봐 무서워한다는 의미냐? 짐승들도 노아의 덕으로 구원을 받은 게 아니냐? 그들의 생명이 의인 노아의 덕으로 산 거다. 그러니 사람을 무서워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거다. 마찬가지로 한 가정에 하나님을 잘 믿는 한 명이 있으면 이 사람으로 인해서 그 가정이 존재하는 거다. 좀 더 크게 보면 바로 믿는 사람으로 인해서 그 나라가 존재하는 거다. 이치가 그렇다. 그럼에도 바로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다면 죽이는 그 자는 자기 스스로 재앙이다.
그리고 짐승들을 채소처럼 준다는 말의 또 다른 뜻은 인간들이 짐승을 함부로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먹고 마시는 것에 어려움이 없게 해 주신다는 거다.
4절-6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라고 했는데, 짐승의 목을 따서 그 피를 받아먹는다는 것은 혐오스런 일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상이 쓰여진다.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이 영적 계시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을 노예를 부려서 먹고 사는 것을 금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사람의 행동 속에는 그 사람 존재가 한꺼번에 들어있는 것인데 교회 안에 보면 이룰구원 없는 충성봉사로 내모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게 사람을 통째로 먹는 거다. 피 채 먹는 거다. 거짓 종들은 교인들을 피 채 통째로 먹는다. 이건 뱀의 사상과 같다. 뱀의 혓바닥이 왜 둘로 나눠졌을까? 한 입을 가지고 두 말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다. 교회에서 천국도 말하고, 세상도 말하는 게 뱀의 혀다.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짐승과 사람이 같은 존재냐? 아니다. 생명은 다 하나님께서 만들었으니 다 하나님의 거다. 인간 게 아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생명 속에는 우리의 온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은 자기의 생명이 그렇게 귀하듯이 다른 사람의 생명도 구원이 들어있는 생명이니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미움으로 시기질투로 얼마나 많이 죽였느냐?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나의 죄를 찾는 죄가 된다.
또한 사람의 생명을 사람에게서 찾겠다고 하는 말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찾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8절-1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 언약은 노아에게만이 아니라 노아의 아들들에게도 들어있다. 그리고 새와 육축과 모든 생물들에게도 들어있다. 아까도 말했지만 생물들도 노아의 덕으로 생명을 구했으니 노아에게 주어진 언약이 생물들에게도 주어진 거다.
12절-1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세상을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다. 이 무지개를 두고 언약을 하셨다. 계:에 보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무지개가 둘려있는데, 이것을 보면 구약의 노아에게 약속하신 심판을 피하는 무지개 언약이 생각난다.
14절-16절: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구름이 땅을 덮을 때 무지개가 나타나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라고 한다. 계시적으로 영원한 언약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한다. 즉 구름이 온 땅을 덮을 때 무지개나 나타나면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얻는 것을 생각하라는 거다.
17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세상 모든 사람도 그렇지만 모든 생물들도 홍수로 쓸어버리지 않겠다는 언약이다.
18절-19절: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이 나오는데, 셈과 함과 야벳이다. 그런데 함의 아들이 가나안이라는 것을 밝혀 놓은 것을 볼 때 이 때 가나안이 태어나서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셈 함 야벳 중에 함이 제일 먼저 장가를 가서 가나안이라는 아들이 있었던 것 같다.
19절에 노아의 세 아들로 인해 백성이 온 땅에 퍼졌다고 했는데, 왜 그 앞에 ‘함의 아들 가나안, 가나안의 아비 함’이라고 한 것일까? 물론 아들을 낳았으니까 한 말이겠지만 또 한 편으로 보면 장가를 가서 아직 가나안을 낳지 않았는데도 이 말씀을 하신 것이라면 ‘함이 이후에 아비의 하체를 보는 죄를 범했으니 이 점을 미리 가르쳐준 게 아닌가?’ 하는 면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룟유다가 사도가 안 됐지만 제자에서 사도로 들어간 것처럼, 그리고 예수를 팔기 전에 ‘처음부터 마귀니라. 처음부터 나를 팔 자니라’ 라고 하신 것처럼. 또는 나는 제 3의 사람을 잘 알지만 상대가 제 3의 사람을 모를 때 내가 상대에게 ‘저 사람 조심하라’ 라고 미리 가르쳐 주는 일이 있는 것처럼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아비의 죄성이 있단다’ 하고 미리 말해주는 것 같다.
노아의 세 아들로 인해서 백성이 온 땅에 퍼지게 됐는데, 어떻게 퍼지는 게 바로 되는 거냐? 축복으로 퍼지는 거냐, 저주로 퍼지는 거냐? 축복이다. 그러면 함의 아들이 자기로 인해서 축복으로 자손이 퍼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감을 잡았을까? 우리 역시도 ‘나로 인해 저주로 퍼져나가느냐, 축복으로 퍼져나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쳐다볼 줄 알아야 한다. 혹시 우리로 인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게 퍼진다고 하면 축복이 될 리가 만무한 거다.
20절-23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멈췄으니까 이곳이 아라랏산이었을 거다. 이 아라랏산 근방에는 비탈지역이 있어서 포도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지금도 포도농사를 많이 한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로부터 세 아들의 종족이 동서로 퍼질 수 있는 지리적 여건도 좋다고 한다.
노아가 포도농사를 짓고 그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마시고 취했다. 최상의 포도를 따서 포도주를 만들었을 것이니 최상급의 포도주를 마신 거다. 그런데 장막에서 술을 먹고 더워서 그랬는지 하체를 벗었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 아비가 하체를 벗은 것을 보고 밖으로 나가서 형제들에게 덕이 안 되는 말을 한 것 같다. 사람이 미우면 흉도 아닌 것을 흉처럼 잡아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고약한 짓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덕이 안 되는 말을 하면 안 된다.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함부로 말을 하면 자기의 인격이 깎이고 사람이 우습게 되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말하자면 남의 상체나 하체를 봤을 때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인물을 깎아서 흉을 잡아 말을 한다거나 장애인들의 흉내를 내면 자기에게 본이 되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렇게 깎아내릴 수도 있다.
두 형제 셈과 야벳은 함의 말을 듣고 아비의 방에 들어가서 뒷걸음질을 해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다. 왜 뒷걸음을 친 것 같으냐? 눈을 감고 뒷걸음질을 치는 게 쉽겠느냐, 눈을 뜨고 뒷걸음질을 치는 게 쉽겠느냐? 뒷걸음질을 한 뜻이 뭘까? 아비의 흉과 허물을 감싸주기 위해서? 함의 실수를 감싸주기 위해서? 자신들은 함과 같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함은 아비가 벗은 것을 흉으로 보지만 자신들은 그걸 흉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로 뒤로 걸어간 것 같다. 사실 자기 방에서 옷을 벗은 것은 흉이 아니다. 죄를 지은 게 아니다. 그럼에도 함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비의 사지백체를 보고 흉을 잡아서 덕이 되지 않는 말을 하며 헐뜯은 거다.
24절-27절: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서 함이 자기의 하체를 보고 흉을 잡아 떠벌린 것을 알았다. 아마도 술이 깨서 보니 자기 옷이 아닌 게 자기를 덮고 있으니까 자식들에게 ‘누가 이렇게 했느냐?’ 라고 해서 이 일을 알게 된 것 같다.
함이 한 일을 알고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했는데, 축복과 저주는 아버지의 말에 있는 게 아니고, 또한 하나님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우리 하기에 따라 되는 거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형제가 누구냐? 셈과 야벳이다. 그러니까 함의 아들 가나안이 셈과 야벳의 종이 된다는 거다. 그러면 함이 셈과 야벳의 종이 된다고 하지 않고 왜 가나안이 셈과 야벳의 종이 된다고 했을까? 가나안이 자기 아비로부터 노아가 옷을 벗고 잤다는 말을 듣고 노아보다도 더 흉허물을 떠벌리고 다녔나? 아비의 죄로 인해 자기 자식이 저주를 받는다면 아비의 마음이 자기가 저주를 받는 것보다 더 아픈 거다. 그만큼 함의 죄가 크다는 거다.
부모의 죄로 인해 어린 자식이 죽는 일도 있다. 부모가 지혜롭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자식이 죽는 경우도 있다. 자기로 인해 자식이 죽고 난 뒤에 부모가 백 날 울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죽는 자식은 ‘내가 부모의 죄로 인해 죽는구나’ 라고 알지는 못하지만 상황적으로 이런 일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알지 못하면 자기는 상을 탄다고 하며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지만 자타에게 죄를 짓게 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인간 편에서 몰라서, 깨닫지 못해서 이런 일이 참 많다. 이 때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잘못을 시인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게 문제다.
셈은 ‘이름 있는, 유명한’이라는 뜻이고, 야벳은 ‘확장’이라는 뜻으로, 창대케 한다는 의미다. 야벳은 그의 이름대로 아마 무역, 상업 쪽으로 번창한 것 같다. 그리고 함은 ‘검다. 뜨겁다’ 라는 뜻인데, 그래서 이름대로 뜨거운 아프리카에 사는 건가?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가나안은 야벳의 종도 되고 셈의 종도 된다. 이게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이건 영적으로 죄의 종을 말하는 건데, 사람이 종으로 사니 배우기를 하겠느냐? 그러니 아무 것도 모른 채 살게 되듯이 예수 믿는 우리가 죄의 종이 되면 겉으로는 자유롭게 살지라도 영적으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죄의 노예로 사는 거다.
28절-29절: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 노아가 600세 때 홍수가 났고, 홍수 후에 노아가 350년을 지냈고, 950세에 죽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