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이야기
도망치던 아이
나의 꿈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답한다. ’너의 꿈은 무엇이니?’ ‘커서 무엇을 하고 싶니?’라는 어른들에 질문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 답할 수 없다. 어른들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기에…. 어른들은 구체적인 꿈을 원한다. 의사, 간호사, 판사, 검사와 같은직업 말이다.
내가 가진 첫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 본 피아니스트의 모습은 꽤 놀라웠다. 바삐 움직이며건반을 누르던 손가락, 아름다운 선율, 심취한 듯 보였던 연주자와 관객들의 박수소리는 8살짜리 아이의 눈을 반짝이게 했다. 당시에 나는 피아노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나에게는 고작 초등학교 방과후 시간이 전부였다. 방과후로 배우던 피아노는 꿈을 키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함께 수업을 들었던 친구는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며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제자리걸음일 뿐이었다. 막 10대에 접어들었던 아이는 부모님께 자신의 꿈을 자신있게 말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나 신경썼던 아이였기에 두려운 것이 많았다. 타인이 비웃을까 무서웠다. 나이에 맞지 않은 걱정이 많았던 나는 도망쳤다. 내가 가졌던 근사한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얼마 안 돼 나는 ‘가수’의 꿈을 키웠다. 이 꿈의 시작은 가족이었다. 매일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아빠를 따라 노래부르기를 좋아했다. ‘빅뱅’을 좋아하던 엄마를 닮아 아이돌을 좋아했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아이돌을 동경했다.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고, 무대를 보며 춤을 따라 추는 것이 소소한 행복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도 그 무대에서 빛이 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하지만 이 꿈을 누군가에게 쉽사리 말할수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 난 남들의 시선이 무서웠고 재능이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꿈을 말할 수 없던 이유다. 다시 내가 선택한 길은 도피. 결국 밝히지 못한 나의 꿈을 가슴 속에 묻어둔 채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많은 것이 달랐다. 처음 보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수많은 진로 활동을 했다. 학교는 나에게 진로를 물어댔다.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꿈을 적어내기엔 나는 예민한 사춘기였다. 진로희망칸은 항상 공백이었다. 그 공백은 자꾸만 나를 괴롭혔다. 끝없는 고통의 끝은 ‘작사가’였다. ‘Music is my life’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하루도 빠짐없이 들었던 음악은 내게 꿈을 심어주었다. 노래는 사람을 위로하는 힘이 있다. 바뀐 환경과 진로의 공백은 나를 괴롭게만 했다. 노래는 혼자 숨죽여 울던 나를 달래주었다. 어느 순간 나를 위로했던 노래처럼 상처받은영혼들을 달래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꿈을 꾸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 글을 쓰려 노력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거대했다. 음악 없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려웠을 뿐더러 나는 글을 쓰는 데 소질이 전혀 없었다. 내게는 소질이 없는 일을 해낼 힘이 없다고 멋대로 판단했고 나는 현실에 굴복했다.
다시 찾아온 공백은 고등학교에서도 이어졌다. 하지만 더이상 여백으로 남겨둘 수 없던 칸은 ‘번역가’로 채웠다. 영어 성적이 좋았던 나는 영어를 잘한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영어와 관련된 직업이 하고 싶었고 영상번역가의 꿈을 꾸었다. 영어를 꽤나 잘한다고 생각했기에 이 꿈은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우물 안 개구리였다. 더군다나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인공지능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며 번역가는 사라질 위기 처하고 말았다. 꿈은 다시 추락했다. 나는 절망했고, 또 절망했다.
열아홉살 소녀의 인생은 도망이었다. 수많은 도망과 두려움은 후회로 남았지만 모든 것은 나의 기나긴 이야기의 일부분일 뿐이다. 남은 나의 이야기에서 나는 되고 싶은 것을 찾고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쉽게 꿈을 포기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더이상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며 비망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