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풀린 나의 망아지
망아지가 전달해 준 미래를 가꾸어나갈 '책임'
세상 모든 게 새롭고 들떴던 17살의 나는 다소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나에게 바라는 기대가 점점 몸집을 부풀려 가고 있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느꼈지만 애써 모른척하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미래에 대한 일말의 계획조차 없었던 17살의 김지안이 마음 가는 대로 살아왔던 지난날들에 대해 글을 써 보려 한다.
벌써 가고 싶은 학과를 선택해 생기부를 채워가는 친구들의 뜨거운 열정에 비해 나의 열정은 매우 미지근했다. 학과는커녕 문과인지 이과인지조차 정하지 못했을 정도로 목표랄 게 없는 나의 처지는 매우 초라하게 느껴졌다. 다른 친구들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 할 때 나 혼자 올챙이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올챙이는 열심히 헤엄쳐보지도 않은 채 개구리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계속 이런 고민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던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으니 일단 1년동안은 내키는 대로 살아보자고 마음먹는다. 2학년 때부터 열심히 하면 될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내 멋대로 정해버린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의 망아지는 고삐가 팅, 하고 풀려버리고 말았다.
남들이 생기부를 위해 학술적인 동아리를 선택하고 있을 때, 나는 그 답도 없다는 댄스동아리에 들어갔다. 고등학교의 낭만을 위해 동아리쯤은 포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춤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나는 긴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댄스학원을 등록했다. 오전에 피곤한 상태로 멀미를 참아가며 학원에 도착한 후 세 시간 동안 춤을 춘다. 집에 돌아오면 피곤하다고 뻗어버리고 만다. 이것이 나의 주말이었다. 남들이 도서관에 가고 학원에 갈 동안 나는 이런 주말을 보냈다. 그래도 나는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학원을 다니기 전에 한 다짐 때문이었다. 마음대로 사는 대신에 그 마음이 하루의 시간을 갉아먹으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자는 다짐과 정해진 것이 없으니 나중에 정해질 어떠한 목표에 방해되지 않게 공부는 해 놓아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다짐만 굳게 먹으면 뭐 하나! 마음이 들뜬 탓인지 이 다짐들은 실천되지 못했고, 학원을 다니기 위한 자기합리화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멀미가 가시지 않은 채로 춤을 춰서 그런 건지 학원에만 가면 두통이 생겼다. 하지만 그 두통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춤이 너무 좋았고 학원을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댄서의 꿈까지 갖게 되었다. 새로운 목표가 생기려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댄서라는 직업의 전망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도 않고 꿈을 접어버리고 만다. 한 반년 지나니까 이제 댄스학원을 다니는 것도 점점 지쳐갔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에 조금 더 전념해 보잔 생각으로 학원을 끊었다. 그런데 이 선택이 오히려 독이 될지 누가 알았으랴. 시간이 많아졌다고 오히려 더 나태해져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영화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내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돈도 많이 들고, 구례에서 하기 어렵고, 구례가 아니더라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란 걸 잘 알지만 단칼에 접어버린 댄서라는 꿈보다 어째서인지 더 커다란 느낌이었다. 댄서라는 꿈과 대체 다를 게 뭔가 싶었지만 이번엔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하게 작용했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영화감독이라는 꿈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결국 목표를 설정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모든 일을 가볍게만 대했던 1년 동안의 날들이 많이 후회된다. 그 1년은 나의 적성을 찾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번드르르하게 포장한 자기합리화의 집합체에 불과했다. 내 속에 고삐 풀린 망아지가 살았던 것만 같다. 망아지가 떠난 내 몸속엔 아직도 망아지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이 흔적들을 지워내기 위해 미래의 나는 고민할 것도, 해야 할 것도, 이뤄내야 할 것도 훨씬 많아졌다. 이 짐들을 다시 망아지 등에 올려두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이제는 안다. 망아지에만 의존하여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후회로 가득한 나날들은 나에게 '책임'을 일깨워 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자신의 미래를 가꾸어나갈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지기 위해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미 나를 지나쳐가버린 시간에 얽매이기보다는 앞으로의 시간에 더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오히려 더 열심히 살아갈 자극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실수들을 발판 삼아 나의 꿈을 향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 망아지가 어엿하게 빛나는 갈기를 가진 멋진 말로 성장했을 때 잠깐 얼굴 보며 차나 한잔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