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000번지.
아~ 성북동!
서울에 강남이 생기기 전 대표적인 부촌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동네였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지는 게 자연의 순리이듯 성북동엔 부촌만 있는 게 아니라 달동네도 있다. 그런데 그 달동네 이름이 무척 예쁘다. 북정마을!
이 북정마을은 해방 이후 또는 6.25 이후 생겨난 서울의 여느 달동네와는 다르게 그 역사가 조선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영조대왕 시절. 당시 이 일대에는 베와 무명을 하얗게 탈색하는 포백과 메주를 쑤는 훈조(燻造) 계(契)가 있었고 이곳에서 쑨 메주는 궁궐에 납품했기 때문에 늘 많은 사람이 북적북적 붐볐다고 한다. 이런 연유에서 ‘북적동'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편하게 발음할 수 있는 ‘북정동'으로 바뀌었다는 썰 또한 재미있다.
지금은 높디높은 산동네에 좁디좁은 골목길 양옆으로 다닥다닥 수십 년 된 낡은 집들이 지붕을 맞대고 이어져 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살던 집은 당연히 부촌 마을은 아니고 그렇다고 북정마을도 아닌 북정마을 아랫 동네였다.^^
사진 저 뒤 쪽에 한양 도성 성곽이 보인다.
KBS TV 프로그램 '예썰의전당' (일요일 밤 10:30 방영)에서는 서울 문화유산 특집 4부작을 기획하면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를 큐레이터로 모셨다.
유홍준! 그가 누구인가? 지금부터 딱 30년 전 1993년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써서 대한민국에 답사 선풍을 일으킨 장본인 아닌가? 답사 선풍뿐만 아니라 그 책 서문에 나오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명문장 또한 지금까지도 여기저기서 많이 인용되며 뭇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가?
특히 나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996년 8월 여름 휴가 때 친구와 둘이서 이 책을 들고 3박4일을 책에 나온 여정을 그대로 따라가며 답사했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책이다.
그런데 엊그제 일요일(2023. 3. 19)에 그 3부 순서로 "성북동 연가"를 방영했다. 나의 고향 성북동을 나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유홍준 교수(그는 서울 서촌 출신이다)의 안내로 성북동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한 멋진 시간이었다.
지금부터 내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내 고향 성북동의 진면목을 자랑해보려 한다. 기대하시라!^^
성북동을 한 번도 안 가본 사람도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는 다들 알 것이다.
그런데 성북동은 김광섭 시인뿐 아니라 193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솔직히 나는 저렇게 수많은 예술인들이 그 동네 살았다는 걸 거기 사는 동안은 전혀 몰랐다. 그나마 맨 처음 알게 된 분이 간송 전형필이었다.
왜냐하면 그 때 우리집 마루에 앉으면 저 보화각 건물이 정면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보화각은 간송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이었다. 그가 별세하자 그 후손이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1970년대부터 매년 봄·가을에 전시회를 열었다. 1990년대부터는 그 전시회의 인기가 엄청나서 예술 애호가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적도 있었다.
이제 위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성북동의 사랑방이라 할 수 있는 수연산방(壽硯山房)을 만나게 된다.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속의 집' 상허(尙虛) 이태준이 살던 집이다. 이름에서 벌써 서향(書香)이 물씬 풍기지 않는가? 사실 이 집 앞에는 예전부터 '이태준 家'라는 팻말이 있었지만 나는 항상 속으로 질문했다. 이태준이 누구지?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네이버도 없어서 어디 물어볼 데도 없기에 그냥 궁금한 채로 지나갔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1930년대 구한말에는 "운문은 정지용이요 산문은 상허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문장가였다. 이런 대단한 문장가를 나는 왜 몰랐을까? 그런데 가만 보니까 나만 몰랐던 게 아니었다. 그럼 왜 다들 모르지? 그건 그가 월북 작가라서 학교에서 그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여기 사랑방 수연산방에...
옛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름하여 호고일당(好古一黨)이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자. 화가 김용준과 김환기, 서예가 손재형, 치과의사 함석태 그리고 출판인 배정국.
이 사랑방 멤버들이 이룬 빛나는 업적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월간 문예지 <문장>을 발간했다는 것이다.
이 <문장>지를 통해 우리가 잘 아는 청록파 시인들이 등단하게 된다.
그러다가 조선통독부에서 일본어와 조선어를 반반씩 실으라고 압박해 오자 그들은 거기에 순응하지 않고 3년만에 과감하게 폐간을 결정한다.
다음으로 가볼 곳은 화가 김용준이 살던 집터이다. 이 집이 '노시산방'(老枾山房) 이라 불린 걸로 보면 그집 울안에는 필시 늙은 감나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옛집이 사라지고 새로 들어선 지금의 대저택 담 안에는 아니나다를까 그 늙은 감나무가 아직도 건재하고 있으니 이 어찌 아니 반갑다 하리오.
김용준은 김환기보다 아홉 살이 많은 선배였는데 나중에 이 집을 김환기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한참 후에 다시 이 집을 찾은 김용준은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김환기를 보고 마치 가부좌를 틀고 앉은 부처 같은 인상을 받고 수화(김환기) 가부좌상을 그려 준다. 참 낭만적인 우정의 교류로다.^^
김용준은 김환기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이지만 그는 일본 최고의 명문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수재였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국화로 전향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화풍은 동양화와 서양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김환기는 후에 미국으로 진출하는데 그때 절친 김광섭의 부고를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린 그림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이 그림은 1970년 한국일보사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 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수만 개의 점을 찍었을 점묘화의 대가 김환기는 그 제목을 친구의 시에서 따다가 붙였다. 그런데 그 부고는 잘못된 부고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는 나중에 가수 유심초가 노래로 불러 히트시킨다.
다음으로 찾아갈 곳은 운우미술관.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 부부의 미술관이다.
운보가 너무나 유명한 반면에 그의 아내 우향 박래현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의 그림을 보니까 상당히 앞서가는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홍준 교수도 우향의 그림이 저평가되고 있는 건 한국 미술계의 큰 손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박래현은 청각 장애를 가진 화가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에다가 본인 자신이 또한 화가였기에 작품 활동을 주로 밤에 할 수밖에 없어서 자신을 부엉이에 투영해서 그리곤 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부부 사이가 항상 화기애애하기만 했겠는가? 운보 김기창은 아내의 화난 모습을 이렇게 그려 냈다.
KBS는 운보의 이 그림을 앙리 마티스가 그린 아내 그림과 비교하는 센스를 보이며 시청자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날 예썰의 전당은 거기까지였다.
(To be continued...)
2023. 3. 21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어요. 좋은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
신부 님, 감사합니다!
이어지는 글도 재밌어요.^^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지네요~
감사합니다.
바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