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기(稼亭記)
이군 중보(李君中甫)는 대대로 삼한(三韓)의 산양(山陽)에서 살아왔다. 거주하는 곳에 뽕과 삼과 벼 곡식 등이 넉넉해서 손님 접대와 혼인과 잔치와 제사 등의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정자를 가(稼)라고 이름 짓고는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삼한은 경사(京師)에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있다. 강과 산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는 가운데, 바다 모퉁이 외진 변두리에 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기름진 들판에서 도롱이를 걸친 채 밭을 갈고 김을 매면서, 아침과 저녁을 살펴 일하고 그치며, 추위와 더위를 살펴 가꾸고 수확하는데, 때에 알맞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논밭에서는 갑절이나 더 곡식이 생산된다. 이처럼 경보(警報)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는 일 없이 집에서 편안하게 즐기고 있으니, 그렇다면 이런 낙을 누리게 된 그 이유를 알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더군다나 쟁기를 손에서 놓고서 수레를 타고 관을 쓴 벼슬아치라면 더더욱 그 이유를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성조(聖朝)는 해내와 해외 어느 곳이든 신첩(臣妾)으로 삼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는 은덕으로 모두 포용하여 보살펴 주고 은택으로 적셔 길러 주면서, 그 풍성과 교화가 세계 끝까지 번져 가고 입혀지게 하였다. 자기 밭을 갈아서 밥을 먹고 자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 자들이야 원래 초목, 곤충과 똑같이 태화(太和)의 기운 속에서 유영하면서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선비로서 수레를 타고 관을 쓴 벼슬아치가 된 자라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대저 왕사(王事)는 오직 농사를 제대로 짓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는 바이다. 왜냐하면 제사에 올리는 자성(粢盛)이 여기에서 나오고, 생활하게 하는 물자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 이렇게 함으로써 협동하고 화목하는 기풍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요, 아, 이렇게 함으로써 돈후하고 순일한 풍속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천조(天朝)에 대한 의리를 사모할 줄 아는 자라면 바로 여기에 입각해서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 번방(藩邦)에서 광주리에 담고 전대에 싸서 배를 띄우고 부교(浮橋)를 건너 조공하는 직분을 수행하는 것은 단지 위를 섬기는 일상적인 의전(儀典)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따라서 반드시 쇠로는 낫이나 호미 등 농기구를 만들게 하고 무기는 만들지 말게 해야 할 것이요, 백성들은 밭에서 일하는 것을 숭상하고 그 이외의 말기(末技)는 수치로 여기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비의 경우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을 때에는 농사를 경건하게 여기며 힘쓰고, 일단 벼슬한 뒤에는 반드시 백성의 힘을 아끼고 백성의 농사철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곡록(穀祿)이 돌아올 때에는 김매고 거두어들인 농부의 수고를 생각해야 할 것이요, 사람들에게 정령(政令)을 행할 때에는 논밭의 이해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엄한 법도로 자신을 단속하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해 주려는 정신으로 일을 행한다면 거의 옳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보(中甫)는 당초에 향리에서 녹명(鹿鳴)을 부르며 올라왔다. 그리하여 춘관(春官 예부(禮部) )에서 기예를 겨루고 천자의 뜰에서 책문에 응한 결과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사랑(承事郞)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을 제수받았다. 그리고 조금 뒤에 장고 휘정원(掌故徽政院)으로 옮겨졌으며, 얼마 있다가 정동행승상부 원외랑(征東行丞相府員外郞)에 발탁되었다. 아름다운 시대를 만나 그동안 배운 실력을 발휘하면서 시종으로 들어왔다가 번방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만하다. 그리고 그가 정자를 이름 지은 것을 보건대, 장차 밭두둑 위에서 김매는 농부나 꼴 베는 늙은이와 서로 어울려 지낼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니, 그렇다면 농사짓는 어려움 같은 것이야 어찌 잊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하면 보답할 바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지원(至元) 3년(1337, 충숙왕 복위6) 9월 보름에 승직랑(承直郞) 국자감 박사(國子監博士) 왕기(王沂)는 신주(神州)의 관사(官舍)에서 쓰다.
[주1] 그 풍성과……하였다 : 중국의 문명이 고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우공(禹貢)〉 맨 마지막의 “동쪽으로는 바다에까지 번져 갔고, 서쪽으로는 유사 지역에까지 입혀졌으며, 북쪽과 남쪽의 끝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의 풍성(風聲)과 교화가 사해에 다 미치자, 우가 검은 규를 폐백으로 올리면서 순(舜) 임금에게 그의 일이 완성되었다고 아뢰었다.〔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朔南曁 聲敎訖于四海 禹錫玄圭 告厥成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2] 자기……자들 : 태평 시대를 누리는 일반 서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 임금 때에 어느 노인이 지었다는 〈격양가(擊壤歌)〉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면서, 내 샘을 파서 물 마시고 내 밭을 갈아서 밥 먹을 뿐이니, 임금님의 힘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상관이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라고 하였다.
[주3] 중보(中甫)는……올라왔다 : 가정이 정동행성의 향시에 합격하고서 제과에 응시하기 위해 연경에 왔다는 말이다. 〈녹명(鹿鳴)〉은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본래는 임금이 신하를 위해 연회를 베풀며 연주하던 악가(樂歌)인데, 후대에는 군현의 장리(長吏)가 향시(鄕試)에 급제한 거인들을 초치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주며 그들의 전도(前途)를 축복하는 뜻으로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참고로 한유(韓愈)의 〈송양소윤서(送楊少尹序)〉에 “양후(楊侯)가 향리에서 과거에 급제한 뒤에 녹명을 부르면서 올라왔다.〔擧於其鄕 歌鹿鳴而來〕”라는 대목이 나온다.
稼亭記[王沂]
李君中甫世家三韓山陽。居有桑麻秔稌之饒。賓婚燕祭之用取具。題其亭曰稼。請余記。三韓去京師數千里。重江複關之阻。海隅障徼之聚。襏襫鉏耒於衍沃之野。視晨昕以作止。候寒暑以發斂者。風雨時若。田出以倍。抱鼓之警不聞。室家之樂怡如也。可不知其所自耶。而况釋耒耟而軒冕者。又可不知其所自耶。聖朝薄海內外。罔不臣妾。德之所幷容徧覆。恩之所涵煦生養。聲敎之所漸被。田畊井飮者。固與草木昆蟲游泳太和。莫知其然。士而軒冕者。可不知所以報耶。夫王事惟農是務。粢盛於是乎出。供給於是乎在。於以興和協輯睦。於以成敦厖純固。夫知慕義於天朝。可不出於此歟。彼籯齎槖負。航浮手筰。以修貢職。特事上之常典耳。必也鐵以鎛釤鉏斸而不以兵。民尙田作而恥末技。士之未仕。其恪恭于農。旣仕。必嗇民力。必重民時。糓祿受於己。其思耨穫之勤勞。政令加諸人。毋忽田壄之利病。以繩墨自馭。以愛利爲行。庶乎其可也。中甫始由其鄕歌鹿鳴而來。戰藝春官。策于天子之庭。中乙科。授承事郞翰林國史院檢閱官。已而遷掌故徽政院。未幾。擢征東行丞相府員外郞。逢辰休嘉。方施其所學。入從出藩。亦可謂榮矣。視其名亭。若將與耘夫蕘叟相從於隴畒之上。庸詎不忘民事之囏。其知所以報者夫。至元三年秋九月望。承直郞國子博士王沂。書于神州之官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