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집 서문〔晦齋集序〕
[노수신(盧守愼)]
맹자(孟子)가 “학문을 하는 길은 다름이 아니라 풀어진 마음을 되찾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우리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선생으로 말하자면 참으로 이른바 학문을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내면에 마음을 써서 성의(誠意)에 기반을 두고 치지(致知)에서 발명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은 모두 진실함이 있었고 밝음은 비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것을 가지고 어버이를 봉양하는 데는 효를 다하였고, 형제간에는 우애를 다하였으며,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을 다하였고, 선비를 대하는 데는 사랑을 다하였다.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때나 환란에 처하였을 때까지도 한결같이 마음에 보존한 것을 근본해서 응대하기를 지극히 마땅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심학(心學)에 힘쓴 분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인지(仁知)의 덕을 이루고 계왕개래(繼往開來)의 업적을 수립한 분이 우리 삼한(三韓)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일찍이 신축년(1541, 중종36)에 서찰을 올려 사생(師生)의 예를 갖추었는데, 선생은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하고 가까이 나아가면 온화함이 느껴지는 분이셨다. 선생을 대면하여 말씀을 직접 들음으로써 그 내면의 학문을 엿보고, 마침내 정민정(程敏政)의 《심경부주(心經附註)》 중에서 의문 나는 부분을 계속해서 여쭈었다.
이어서 마음을 보존하는 요지에 대해 물었더니, 한참 뒤에 선생이 당신의 손바닥을 가리키며 말씀하기를 “여기에 물(物)이 있는데, 쥐면 부서지고 쥐지 않으면 달아난다.”라고 하셨다. 물러 나와 내 마음을 반성해 보고서야 그것이 망조(忘助)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대충이나마 깨닫고, 그 가르침이 친절하고 의미가 깊은 것을 더욱 기뻐하였다.
얼마 있다가 작고하신 스승 탄수(灘叟) 선생이 선생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미발(未發)에 대해서 논하시고는 나에게 그 상세한 내용을 말씀해 주셨다. 이에 내가 또 내심 스스로 감탄하며 “이것은 자공(子貢)이 얻어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그러나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내가 섬으로 들어가고 선생이 국경 지역으로 가신 지 겨우 7년 만에 국경 지역의 부고가 섬에 이르렀으므로, 지난날을 회상하며 애통한 심정으로 밤마다 눈물을 흘리고, 어리석고 모진 내가 홀로 이 세상에 오래 살아 있는 것을 지극히 한스러워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성상께서 처음 즉위하여 맑고 밝은 정치를 행하시는 때에 외람되게 가장 먼저 사면의 은택을 입고 경악(經幄)에 입시하게 되었다. 이에 지난날과 현재를 돌아보며 감격하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면대한 자리에서 성상께서 직접 내리신 명을 받고 선생의 문집을 교정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더욱 감개하여 문집을 읽고는 “참으로 베와 명주, 콩과 조와 같은 글이로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그 시는 온화하면서도 평이하고 정직하고, 그 문(文)은 명백하고 치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절실하게 바로잡고 시비를 밝힌 서찰과 깊이 권면하고 경계한 소차(疏箚), 그리고 형세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의 언론과 풍지(風旨)가 모두 정성에서 나오고 명철함으로써 이루지 않은 것이 없어, 예전에 보고 들었던 것과 모두 부합하였다. 그러고 나서야 선생의 마음이 하루도 풀어진 적이 없다는 것을 더욱더 징험할 수 있었다. 대개 이 마음이 이미 수습되어 전일(專一)하고 허정(虛靜)해지면 도리(道理)가 밝게 드러나서 자연히 유출되는 것이 이와 같아지는 것이니, 이를 어떻게 속이겠는가.
이어서 생각해 보건대, 맹자가 이에 대한 요령을 이미 명백하게 지적한 바가 있다. 그런데도 나 같은 자는 돌이켜 구할 줄을 모르고서, “이러한 것은 속학(俗學)이고, 이러한 것은 이학(異學)이며, 이러한 것은 유자(儒者)의 학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실로 선생에게 죄를 지은 것이니, 또한 슬퍼할 만한 일이다.
선생의 손자 이준(李浚)이 문집의 판본(板本) 4질(帙)을 가지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경상도 관찰사 노공 진(盧公禛)과 경주 부윤(慶州府尹) 이공 제민(李公齊閔)이 협의하여 판각(板刻)하고는 대인(大人)에게 서문을 부탁드리고자 하므로 천리를 멀다 않고 와서 청을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문집을 다 읽고서 거듭 감개하여 말하기를,
“훌륭하구나, 두 공의 마음이여! 내가 어찌 감히 거기에 대해서 다른 말을 하겠는가. 게다가 또 서문을 사양할 수 없는 점도 있다. 그렇지만 선생의 문집을 조만간에 찍어 배포하려 하는데 《봉선잡의(奉先雜儀)》, 《구경연의(九經衍義)》, 《구인록(求仁錄)》 같은 중요한 법과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같은 탁견이 또 모두 이 속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어찌 꼭 이 서문을 써야 하겠는가.”
하였다. 그랬더니 이준이 말하기를,
“교서관(校書館)에서는 주자(鑄字)를 사용하므로 한 번 인쇄하는 것으로 그만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 판본이 우리 고을에 보관되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는 것과 같겠습니까. 장차 이어서 간행할 것이니, 혐의스러워할 바가 없습니다.”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느낀 바를 써서 돌려보내어 삼한의 심학에 오직 선생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바이다.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7) 1월 16일에 지령(芝嶺) 후학(後學) 노수신(盧守愼)은 삼가 서문을 쓴다.
[주1] 맹자(孟子)가 …… 하였는데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2] 인지(仁知)의 덕 :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선생님은 성인이십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내가 성인은 되지 못하겠지만, 나는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자공이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은 지(智)이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인(仁)인데, 지와 인을 겸비하셨으니 선생님은 이미 성인이십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주3] 계왕개래(繼往開來) : 전 시대 현인들의 학통을 잇고 후학(後學)들을 계도(啓導)해 주는 것을 말한다.
[주4] 망조(忘助)의 다른 이름 : 망조는 《맹자》 〈공손추 상〉에 나오는 물망물조장(勿忘勿助長)의 줄임말로,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늘 여기에 힘을 쓰되 그 효과를 기대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도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평소 항상 존심(存心)을 염두에 두되 인위적으로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내면에서 우러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이언적이 설명한 말의 뜻을 노수신(盧守愼)이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주5] 탄수(灘叟) 선생 : 이연경(李延慶, 1484~1548)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이다. 탄수는 그의 호이며, 또 다른 호는 용탄자(龍灘子)이다. 1519년(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나, 기묘사화 이후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노수신(盧守愼)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주6] 자공(子貢)이 …… 것 : 공자(孔子)의 제자 자공이 “선생님의 문장에 대해서는 들을 수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다.〔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論語 公冶長》
[주7] 내가 섬으로 들어가고 : 노수신(盧守愼)은 을사사화 때 이조 좌랑의 직책에서 파직되고, 1547년(명종2) 순천(順天)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9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 진도(珍島)로 이배(移配)되어 그곳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주8] 선생이 …… 이르렀으므로 : 이언적이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江界)에 안치(安置)되었다가 1553년(명종8) 적소에서 사망한 것을 말한다.
[주9] 우리 …… 되었다 : 노수신은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 홍문관 교리로 기용되었다.
[주10] 성상께서 …… 되었다 : 1570년(선조3)에 선조는 이언적의 저서와 사실ㆍ행장 등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올리도록 하고, 이를 간행하여 반포하라고 명을 내렸다. 《宣祖實錄 3年 5月 16日》 이때 노수신은 경연관으로서 문집 및 관련 자료들을 교정하는 일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11] 이에 대한 요령 : 학문을 하는 요령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학문을 하는 길은 다름이 아니라 풀어진 마음을 되찾는 것일 뿐이다.”를 가리킨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12] 이준이 …… 하였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조실록》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노수신이 이 서문을 쓴 얼마 뒤에 이준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을 찾아가서 《구경연의(九經衍義)》를 등서(謄書)하여 주자(鑄字)로 인출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대해 유희춘은 선조에게 “주자로 간행하는 것은 판본(板本)만 못하니 경상도에서 판본으로 간행하게 하고, 초고(草稿)는 이준에게 주어 가져가도록 하십시오.”라고 청하였으며, 또 홍문관에서 《구경연의》를 교정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宣祖實錄 7年 9月 27日, 11月 4日》 당시 이언적의 저서를 홍문관에서 교정하였기 때문에 문집 이외의 별저(別著)를 주자로 간행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이에 대해 경상도에서 판본으로 간행하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에 이준이 노사신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晦齋先生集序[盧守愼]
孟子曰學問之道無他。求其放心而已矣。若吾文元公晦齋先生其眞所謂學問者哉。先生之學。專用心於內。基於誠意而發於致知。故事皆有實而明無不燭。以之爲親盡其孝。與弟盡其友。事君盡其忠。遇士盡其愛。至於御下莅民。處患臨亂。莫不一本其所存而曲當其所應。非務於心學。其孰能與此。成仁知之德。立繼開之業。吾三韓有人焉爾。予嘗在辛丑年間。以書爲贄而禮焉。望儼卽溫。親承謦咳。竊窺其有方寸之學。遂將程氏附註書。叩疑不已。仍請存心之要。久之。先生指其掌曰。有物於此。握則破。不握則亡。退而省乎心。粗覺其爲忘助之異名。而尤喜其親切而有味也。旣而。先師灘叟先生與先生。論喜怒哀樂未發。爲予道其詳。予又竊自歎曰。此子貢所以不可得而聞也。嗚呼已矣。自予入海。先生出塞。歲才七周而塞訃至海。追懷悼惜。每中夜潸然。至恨冥頑獨久於世也。曁聖上始初淸明。誤首蒙恩。復侍經幄。感念今昔之不暇。而面受聖旨。讎正先生集。爲之慨然而讀曰。眞布帛菽粟矣乎。其詩和平易直。其文明白縝密。書札訂辨之切。疏箚規箴之深。與夫當消長危疑之際。言論風旨。無非出於誠而濟以明者。比昔所見聞。鮮有不合。然後益驗先生之心未嘗一日而放也。蓋此心旣收。專一虛靜則道理昭著。自然流出有若是者。焉可誣哉。仍念孟子指出此竅爲已明矣。若予者。不知反求而曰。如此爲俗學。如此爲異學。而如此爲儒者之學。實先生罪人也。亦可哀已。先生之孫浚。袖板本四帙。踵門而告曰。按使盧公禛府尹李公齊閔。協議壽梓。屬大人爲序。是用不遠千里。奉以爲請。予旣卒業。重自慨然曰。盛矣哉。二公之心也。卽予何敢有言於其間。而亦有不得而辭者。顧先生 集朝夕印頒。而奉先雜儀,九經衍義,求仁錄之要法。大學章句補遺之卓見。又皆不見於此帙。則奚必此序爲。浚曰。官字用鑄。一印便已。豈若此本在吾州。可以永傳無墜者。且將繼而刊焉。其無所爲嫌。遂書所感以歸之。以見三韓心學惟先生有之云。萬曆甲戌孟陽旣望。芝嶺後學盧守愼。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