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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제문賜祭祭文 지제교知製敎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채유후蔡裕後 제진製進
숭정(崇禎) 2년 세차(歲次) 기사(1629, 인조7) 1월 정사삭 22일 무인에 국왕은 신(臣) 예조 좌랑(禮曹佐郞) 이행건(李行健)을 보내어 졸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모(李某)의 영령에 제사를 드리노라.
생각건대 영령은 惟靈
산하의 신령한 기운을 받아 山河淑氣
빙옥처럼 맑은 의표를 지녔으니 氷玉淸準
속은 굳세고 겉은 온화하며 中剛外和
말은 겸손하고 행실은 준엄하였도다 言遜行峻
일찍이 문단에서 예에 노닐어 文壇游藝
묘령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妙齡決科
그 사이 더욱 공력을 쏟아 益肆其間
정화를 음미하고 터득하였도다 含英咀華
힘써 고인의 법도를 뒤쫓아 力追乎古
때를 벗기고 정광을 회복하니 刓垢回晶
정시의 풍격을 이어받았고 正始餘風
소호의 위대한 성음이었도다 韶頀希聲
향기가 있으면 반드시 올리는 법 有馨必薦
선조 임금께 지우를 받았으니 受知宣考
옥서에서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玉署論思
호당에서 시문을 연마하였도다 湖堂詞藻
임금의 칭찬이 거듭 더하고 睿獎荐加
크나큰 비익이 더욱 드러나더니 洪裨彌著
중도에 병든 시대를 만나 遭時中癉
재능을 숨긴 채 칩거하였는데 用晦以處
난세에도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고 橫流不撓
세한에 더욱 지조가 굳었도다 歲寒逾貞
도의 정수를 흠뻑 음미하고 酷味道腴
경전의 뜻을 드러내 밝히면서 發揮遺經
심오한 의리를 묵묵히 이해하여 默會冥賾
뜻이 완전하고 정신이 편안하였는데 志完神寧
마침 인륜을 펴는 이때를 만나 屬玆敍倫
첫 정사에 경을 기용하였다오 初政起卿
미원의 장을 역임한 뒤에 旣長薇垣
곧바로 오부를 차지하였는데 旋居烏府
뭇 칭찬이 모두 경에게 돌아가고 衆譽咸歸
내 마음도 매우 경에게 쏠렸다오 予意偏注
허연 수염에 창백한 얼굴로 皓鬚蒼顔
대조를 배종하여 신밀하였으며 陪朝抑抑
뜨거운 충정과 드높은 의론으로 丹誠素論
일을 만나서는 분명하였도다 遇事的的
동전의 영수로 말하면 東銓之首
적임자를 찾기 실로 어려운데 實難其人
널리 물어서 경에게 맡겼으니 廣訪僉諧
특별한 선발에 참으로 맞았도다 良副殊掄
재덕을 헤아려 전형하는 일을 量材秤德
오직 경이 밝게 수행하였는데 惟卿之明
그렇게 노쇠한 나이도 아니건만 匪年伊艾
어찌하여 질병에 걸렸단 말인가 胡疾之嬰
신이 도우실 것이라 생각하여 謂神所相
빨리 낫기만을 기대하였건만 遄愈是期
나라가 불행한 운을 만났는지 邦其不幸
끝내 원로를 남기지 않았도다 竟不憖遺
경 같은 신하가 다시 누구일꼬 如卿復誰
내가 그야말로 세신을 잃었도다 喪我世臣
지난날 경이 올린 차자는 往時封章
약석과도 같은 충언이었으니 藥石之陳
내 마음 이를 잊지 아니하고 予心不忘
언제나 스스로 힘쓸 것이로다 恒自勉旃
시국의 어려움이 이와 같은데 時艱如許
뛰어난 인물이 자취가 없으니 人物眇然
아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嗟其奈何
구원의 사람은 일으키기 어렵도다 九原難作
유장이 죽었을 때 柳莊之歿
위나라 헌공이 애도하였고 衛侯之惜
장손이 죽었을 때 臧孫之亡
노나라 임금이 그리워하였도다 魯君之思
이에 공경히 제사를 지내어 玆申禮奠
조금이나마 나의 슬픔을 펴노라 少抒余悲
[주1] 사제제문(賜祭祭文) : 《호주집(湖洲集)》 권5에 〈이조판서이 - 수광 - 사제제문(吏曹判書李 -睟光- 賜祭祭文)〉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 조선 후기의 문신, 채유후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05년에 간행한 시문집.
[주2] 채유후(蔡裕後) : 1599~1660.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湖洲),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어릴 때부터 문재에 뛰어났으며, 17세에 생원이 되고, 1623년(인조 원년) 개시 문과(改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거친 뒤 대사성, 대사간, 이조 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52년(효종3)에 이조 참판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대제학으로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가자(加資)되었으며, 이후 이조 참판, 대제학, 예조 판서, 우참찬, 이조 판서 등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이 때문에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가 뛰어나 중용되었다. 저서에 《호주집》이 있다.
[주3] 이행건(李行健) : 1588~1654.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사이(士以), 호는 수석(水石)이다. 1612년(광해군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류(士類)들이 제거되자, 그의 아버지와 함께 고향에 돌아가 고기잡이로 소일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가 되었으며, 1628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좌승지, 공조 참의, 영흥 부사 등을 역임하고 1654년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주4] 신령한 기운 : 원문의 ‘숙기(淑氣)’는 천지간의 신령한 기운을 가리킨다.
[주5] 빙옥(氷玉) : 얼음과 옥으로, 고상하고 깨끗한 인품을 비유한다.
[주6] 예(藝)에 노닐어 : 학예를 닦으며 끊임없이 수양하였다는 말이다. 공자가 학문하는 자세에 대해 논하면서 “도에 뜻을 두며, 덕을 굳게 지키며, 인에 의지하며, 예에 노닐어야 한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라고 하였다. 《論語 述而》
[주7] 정화(精華)를 음미하고 터득하였도다 : 원문의 ‘함영저화(含英咀華)’는 정영(精英)을 머금고 화채(華彩)를 씹는다는 뜻으로, 시문(詩文)의 정화를 음미하고 터득하는 것을 비유한다. 당나라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농욱한 글에 무젖으며 정영을 머금고 화채를 씹어서 문장을 지어 그 책이 집에 가득하다.[沈浸醲郁, 含英咀華, 作爲文章, 其書滿家.]”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주8] 정시(正始)의 풍격(風格)을 이어받았고 : 지봉의 시가 초당(初唐)의 영향을 받아 순정(純正)하다는 말이다. ‘정시’는 원래 시초를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순정한 음악을 가리키는데, ‘초당’을 일러 ‘정시’라고 한다. 참고로 《지봉집》 권21 〈사걸시찬(四傑詩贊)〉에 “건안체의 화려함과, 육조체의 기름짐, 그 정화를 습득하여 펼쳐놓았으니, 이를 일러 ‘정시’라 한다오.[建安之靡, 六朝之膩. 擷錦摛綺, 是曰正始.]”라고 하였다. ‘사걸’은 이른바 ‘초당사걸(初唐四傑)’로,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隣), 낙빈왕(駱賓王)을 가리킨다. 또 《지봉유설》 권7 〈경서부(經書部) 서적(書籍)〉에 “고병이 지은 《당시품휘》에, 무덕 이후를 ‘초당’이라 하고, 개원 이후를 ‘성당’이라 하고, 대력 이후를 ‘중당’이라 하고, 개성 이후를 ‘만당’이라 하였다. 또 초당을 ‘정시’라 하고, 성당을 ‘정종’ㆍ‘대가’ㆍ‘명가’ㆍ‘우익’이라 하고, 중당을 ‘접무’라 하고, 만당을 ‘정변’ㆍ‘여향’이라 하였다.[高棅撰唐詩品彙: 以武德以後爲初唐, 開元以後爲盛唐, 大曆以後爲中唐, 開成以後爲晩唐. 又以初唐爲正始, 盛唐爲正宗、大家、名家、羽翼, 中唐爲接武, 晩唐爲正變、餘響.]”라고 하였으며, 《지봉유설》 권9 〈문장부(文章部) 시(詩)〉에는 “나는 문은 오경 외에는 《장자》와 사마자장의 《사기》를 좋아하고, 시는 건안에서부터 초당ㆍ성당까지를 좋아하는데, 중당ㆍ만당 이하는 오직 그 경구만을 취할 뿐이다.[余於五經外, 好莊子、司馬子長, 詩好建安以至始唐、盛唐, 而中、晩以下, 則唯取其警句而已.]”라고 하였다.
[주9] 소호(韶頀)의 위대한 성음(聲音)이었도다 : 지봉의 시가 ‘소호’처럼 매우 아정(雅正)하다는 말이다. ‘소호’는 순(舜) 임금의 음악과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음악으로, 아정한 고악(古樂)을 가리킨다. 원문의 ‘희성(希聲)’은 소리가 없다는 뜻으로, 들어도 들리지 않는 위대한 성음을 형용하는 말이다. 《노자(老子)》 41장에 “큰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형상은 형체가 없다.[大音希聲, 大象無形.]”라고 하였다.
[주10] 향기가 …… 법 : 향기로운 서직(黍稷)이 있으면 제수(祭需)로 올리듯이 지봉이 덕이 있어 임금에게 천거되었다는 말이다. 참고로 《서경》 〈군진(君陳)〉에 “지극한 다스림은 향기로워 신명을 감동시키나니, 서직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이 오직 향기로운 것이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라고 하였다.
[주11] 옥서(玉署)에서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 ‘옥서’는 옥당(玉堂)과 같은 말로, 문학하는 선비들이 거처하는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원문의 ‘논사(論思)’는 의논하고 사고하는 것으로,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말한다. 지봉은 1601년(선조34)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고문주역(古文周易)》을 교정하여 구마(廏馬)를 하사받고, 1602년에는 제유(諸儒)들과 함께 《주역언해(周易諺解)》를 교정하여 구마를 하사받고, 1603년에는 《사기찬(史記纂)》을 교정하여 구마를 하사받는 등 누차 홍문관에서 벼슬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東州集 卷6 先考……行錄》
[주12] 호당(湖堂) : 독서당(讀書堂)의 별칭으로, 연소한 문관 중에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휴가를 주어 오로지 학업만 닦게 하던 서재 이름이다.
[주13] 중도에 …… 칩거하였는데 : 1613년(광해군5) 계축화옥(癸丑禍獄)이 일어난 뒤부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날 때까지 지봉은 조정에서 물러나 수원(水原)의 전사(田舍)에 칩거하면서 일체 중앙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원문의 ‘용회(用晦)’는 어둠을 쓴다는 뜻으로, 재능을 갈무리하여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명이(明夷) 상전(象傳)〉에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감이 명이이니, 군자는 보고서 무리를 대할 때 어둠을 써서 밝게 한다.[明入地中, 明夷. 君子以, 莅衆, 用晦而明.]”라고 하였다. 《東州集 卷6 先考……行錄》
[주-D014] 세한(歲寒) : 엄동설한의 추운 겨울로, 곤궁한 처지나 난세(亂世)를 비유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하였다.
[주15] 마침 …… 기용하였다오 : 1623년 3월 인조가 왕위에 올라 구신(舊臣)들을 모두 불러들이면서 지봉을 도승지(都承旨)로 소환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東州集 卷6 先考……行錄》
[주16] 미원(薇垣)의 …… 뒤에 : 지봉이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역임하였다는 말이다. ‘미원’은 사간원(司諫院)의 별칭이다.
[주17] 곧바로 오부(烏府)를 차지하였으니 : 지봉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역임하였다는 말이다. ‘오부’는 사헌부의 별칭이다.
[주18] 허연 …… 분명하였도다 : 1627년(인조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을 당시, 지봉은 늙고 병이 들었으므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소조(小朝)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도 되는 상황이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인조의 대조(大朝)를 따라 강화(江華)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해 3월 강화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을 당시에는 오랑캐가 막 물러간 뒤라 온갖 변고가 많이 발생하여 매우 어지러운 상황이었으나, 언제나 너그러운 자세를 견지하며 공평하게 다스렸으므로 인심이 안정을 되찾았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원문의 ‘억억(抑抑)’은 군자의 신중하고 치밀한 위의(威儀)를 형용하는 말이다. 《시경》 〈대아(大雅) 가락(假樂)〉에 “위의가 치밀하고 덕음이 떳떳하다.[威儀抑抑, 德音秩秩.]”라고 하였다. 《東州集 卷6 先考……行錄》
[주19] 동전(東銓)의 영수 : 문관(文官)의 전형(銓衡)을 맡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가리킨다. 지봉은 1628년(인조6) 7월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주-D020] 경에게 맡겼으니 : 원문의 ‘첨해(僉諧)’는 《서경》 〈순전(舜典)〉에 보이는 ‘첨왈(僉曰)’과 ‘여해(汝諧)’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말로, 매우 신중하게 중신(重臣)을 임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 〈순전〉을 상고해 보면, 순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어본 뒤 직책을 맡긴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들어보면 “제순이 말씀하기를 ‘누가 나의 백공의 일을 순히 다스리겠는가?’ 하자, 여럿이 말하기를 ‘수입니다.’ 하였다. 제순이 말씀하기를 ‘아! 너의 말이 옳다. 수야! 네가 공공이 될지어다.’ 하니, 수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수와 장 및 백여에게 사양하였는데, 제순이 말씀하기를 ‘아! 너의 말이 옳다. 가서 네 직책을 화하게 수행하라.’ 하였다.[帝曰: 疇若予工? 僉曰: 垂哉. 帝曰: 兪. 咨垂, 汝共工. 垂拜稽首, 讓于殳、斨曁伯與. 帝曰: 兪. 往哉汝諧.]”라고 하였다.
[주21] 끝내 …… 않았도다 : 하늘이 국가를 위해 억지로라도 원로를 남겨 두지 않고 빼앗아 가버린 것을 한탄하여 한 말이다. 원문의 ‘불은유(不憖遺)’는 억지로라도 남겨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대신(大臣)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시경》 〈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에 “억지로라도 원로 한 분을 남겨 두어, 우리 임금을 지키게 하지 않는구나.[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주22] 세신(世臣) :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며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 하는 신하를 가리킨다. 《맹자집주》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이른바 고국이란 교목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신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所謂故國者, 非謂有喬木之謂也, 有世臣之謂也.]”라고 하였다.
[주23] 지난날 …… 차자(箚子)는 : 1625년(인조3)에 인조가 재이(災異)로 인해 구언(求言)을 하자, 이때 마침 대사헌이 된 지봉이 만언(萬言)이나 되는 차자(箚子)를 올려 12가지 일을 조목조목 진달하였는데, 요지는 ‘실제를 힘쓰는 것[懋實]’이었다. 그 말이 명쾌하고 통절하며 확실하게 핵심을 찔렀으므로, 그 당시 식자들이 이 차자를 ‘중흥제일봉사(中興第一封事)’라고 일컬었는데, 이를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지봉집》 권22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에 보인다. 《東州集 卷6 先考……行錄》
[주24] 약석(藥石) : 병을 치료하는 데 쓰이는 약과 침으로, 충성스러운 말을 비유한다.
[주25] 구원(九原)의 …… 어렵도다 : 지하에 묻힌 사람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말이다. ‘구원’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경대부(卿大夫)의 묘지가 있던 곳으로, 일반적으로 무덤을 뜻한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조문자가 숙예와 더불어 구원을 구경하였는데, 문자가 말하기를 ‘죽은 이들을 만약 일으킬 수 있다면 나는 누구를 따라 돌아갈까.’ 하였다.[趙文子與叔譽觀乎九原, 文子曰: 死者如可作也, 吾誰與歸?]”라고 하였다.
[주26] 유장(柳莊)이 …… 애도하였고 : ‘유장’은 춘추 시대 위 헌공(衛獻公)의 신하이다. 헌공이 제사를 지내던 중에 태사(太史) 유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동(尸童)에게 청하기를 “신하 유장이란 자는 과인의 신하가 아니라 사직의 신하입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가보겠습니다.[有臣柳莊也者, 非寡人之臣, 社稷之臣也. 聞之死, 請往.]”라고 하고는, 제복(祭服)을 입은 채 달려가서 마침내 그 제복으로 유장의 수의(襚衣)를 삼게 하였으며, 또 두 고을을 채읍(采邑)으로 주고 문서를 써서 관에 넣기를 “대대로 만대 자손까지 변치 말라.[世世萬子孫毋變也.]”라고 한 고사가 전하는데, 이를 가리킨다. 《禮記 檀弓下》
[주27] 장손(臧孫)이 …… 그리워하였도다 : ‘장손’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 대부 장손신(臧孫辰)으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훌륭한 사람이라고 추존하였다. 장손신이 죽자 노나라 임금이 그리워하였다는 것은 전거를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0년’ 조 경(經)에 “10년 봄 주왕 3월 신묘일에 장손신이 졸하였다.[十年春王三月辛卯, 臧孫辰卒.]”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두예(杜預)의 주에 “전(傳)이 없다. 공이 소렴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날짜를 기록한 것이다.[無傳. 公與小斂, 故書日.]”라고 하였다. 《春秋左傳注疏 文公 10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