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영당의 기문〔淸道影堂記〕
노상직盧相稷
선생은 신라 헌안왕(憲安王) 1년(857) 정축에 태어났다. 12세에 상선(商船)을 따라 당(唐)나라에 들어갔다.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1년(874) 갑오에 제과(制科)에 등제(登第)하였다. 이때 나이 18세였다.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에 조용(調用)되었다. 그 뒤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으로 승진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기해년(879)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이 병마도통(兵馬都統)이 되어 토벌하면서 선생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고는 서기(書記)에 관한 일을 위임하였다. 이에 선생이 격문(檄文)을 지었는데,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선생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하였다.
나이 28세 때에 귀녕(歸寧)할 뜻을 품자, 황제가 조사(詔使)의 일행에 끼어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신라 헌강왕(憲康王)이 선생을 머물러 있게 하고는 시독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이때 신라의 정치는 날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에 선생이 조정에 서는 것이 즐겁지 않았으므로, 외방으로 나가기를 청해 태산(太山)과 부성(富城) 등 고을의 태수가 되었다.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 계축에 하정사(賀正使)의 명을 받고 당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길이 막히는 바람에 가지 못하였다. 또 외방으로 나가 천령(天嶺)과 의창(義昌) 등 고을의 태수가 되었다. 뒤이어 처자를 이끌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 이상은 사첩(史牒)에 실린 선생의 전말이다.
경주(慶州)에 상서장(上書莊)이 있고, 예안(禮安)에 독서암(讀書庵)이 있고, 함양(咸陽)에 학사루(學士樓)가 있고, 창원(昌原)에 월영대(月影臺)가 있고, 합천(陜川)에 홍류동(紅流洞)이 있다. 이상은 아직도 완연히 남아 있는 선생의 유적지이다.
공부자(孔夫子)의 사당에 종향(從享)되었고, 서악(西岳)과 무성(武城)의 서원에 사액을 받았으며, 함양과 영평(永平)의 선비들이 또 모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상은 선생이 계신 듯 정령(精靈)을 제사 드리는 곳들이다.
문학을 창도한 공이 있다고 무릉(武陵 주세붕(周世鵬))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에게 편지로 아뢰었고, 진편(塵篇)의 보결(寶訣)을 찾아야 한다고 노래하면서 퇴도(退陶 이황(李滉))는 유궁(儒宮)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으며, 만고토록 백일(白日)처럼 환해졌다고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사문(斯文)이 전해진 것을 칭송하였고, 계림(雞林)의 잎사귀들 모두가 바람 소리를 낸다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제생(諸生)에게 시를 지어 보여 주었다. 이상은 공론(公論)이 쇠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세상에서 선생을 흠모하는 자는 굳이 진영(眞影)이 없더라도 방불한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풍의(風儀)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려고 할 경우에는 진영이 있다면 그야말로 도움을 주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해인사(海印寺)에서 선생의 진영을 불도(佛徒)가 근실히 지켜 왔으므로 한 폭의 그림이 천년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깨끗이 보존되었다. 그리하여 오산(鼇山)의 기기(奇氣)가 사라지지 않고, 계원(桂苑)의 필화(筆花)가 서로 비치는 가운데 홍류(紅流)의 음향이 혹 울려도 귀에 시비(是非)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향불을 피우고 공경히 우러러보노라면 속진의 생각이 저절로 해소되곤 하였다.
그런데 병진년(1916) 가을에 후손인 감찰(監察) 최한룡(崔翰龍) 씨가 도주(道州)의 일곡(日谷)으로 진영을 옮겨와 봉안하였으며, 4년 뒤인 경신년(1920)에는 종인(宗人)들이 건물을 세우고 진영을 안치하였다.
감찰의 자제인 최상수(崔相秀)가 나를 찾아와서 이 일에 대한 기문을 요청하였다. 이에 내가 묻기를,
“선생은 대현(大賢)이요, 해인사는 거찰(巨刹)이다. 그대의 선인은 망국의 일개 고신(孤臣)일 뿐인데 저 승려들이 고신에게 무슨 두려움을 느꼈기에 사원의 첫째가는 보물인 진영을 양보하여 싣고서 돌아가게 했단 말인가?”
하니, 최상수가 대답하기를,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선인이 경술년(1910) 이래로 누차 총독부에 글을 보내고 누차 감옥에 구금되었으므로, 승려들이 혹 이를 의롭게 여긴 나머지 추원(追遠)하는 정성을 모두 펼 수 있게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기에, 내가 또 물어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생은 산수를 좋아해서 생사 간에 명승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원손(遠孫)의 보호를 받으려고 가야(伽倻)의 형승(形勝)을 떠나게 되었으니, 진영(眞影)에 혹 좋아하지 않는 기색은 있지 않던가? 만약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취적봉(吹篴峯)이나 음풍뢰(吟風瀨)나 유선대(遊仙臺) 등은 모두 선생이 좋아하던 곳으로 해인사의 동구(洞口)에 있으니, 모쪼록 이를 모사해서 제각(祭閣)의 벽에 걸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과 《경학대장(經學隊仗)》 및 문집 30권을 제각 안에 보관해서 자손이나 후진 가운데 여기에 와서 참배하는 자들로 하여금 선생이 학문을 한 방도를 알게끔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야 선생이 좋아한 것이 오로지 산수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주1] 헌안왕(憲安王) 1년 정축 : 정축년(857)은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으로 하면 헌안왕 1년이 되고 훙년칭원법(薨年稱元法)으로 하면 헌안왕 2년이 된다.
[주2] 천령(天嶺)과 의창(義昌) : 천령은 함양(咸陽)의 고호이고, 의창은 창원(昌原)의 고호이다.
[주3] 도주(道州)의 일곡(日谷) : 도주는 청도(淸道)의 고호이고, 일곡은 청도군 각남면에 있는 지명으로, 이곳에 고운의 영정을 모신 계동사(啓東祠)가 있다. 이곳에 있는 영정은 본디 해인사에 있던 것인데, 구한말에 왜적의 약탈이 두려워 최씨 문중에서 해인사 주지와 교섭하여 이곳으로 이봉(移奉)한 것이라고 한다.
淸道影堂記[盧相稷]
淸道影堂。盧相稷記。先生以新羅憲安王二年丁丑生。十二歲。隨商舶入唐。唐僖宗乾符元年甲午。登制科。時年十八。調宣州漂水縣尉。遷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己亥。黃巢作亂。淮南節度使高騈爲兵馬都統以討之。辟先生爲從事。委以書記之任。先生作檄文。巢讀至人思顯戮。鬼議陰誅之句。不覺墜牀下。由是名震天下。年二十八。有歸寧之志。帝命充詔使東還。新羅憲康王。留拜侍讀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時羅政日衰。先生不樂登朝。乞外爲太山富城等郡太守。眞聖主七年癸丑。命以賀正使如唐。道梗不得行。又出守天嶺,義昌等郡。尋挈妻子入伽倻山以終。此則先生顚末之載史牒者也。慶州有上書庄。禮安有讀書庵。咸陽有學士樓。昌原有月影臺。陜川有紅流洞。此則遺躅之所宛然也。從享夫子廟。賜額西岳,武城之院。咸陽永平之士亦皆尸祝。此則精靈之所如在也。倡文學之功。武陵書告于晦齋。尋寶訣之詠。退陶增思于儒宮。萬古白日。龜巖誦斯文相傳。葉葉風聲。鶴峯示諸生有作。此則公論之所不衰也。世之慕先生者。有不待眞像而覿其彷彿。然苟欲仰其風儀之美。則眞固不爲無助也。海印有先生眞像。緇徒守之謹。一幅生綃。閱千載而淨完。鰲山之奇氣不沫。桂苑之筆花相暎。紅流若有響而耳不到是非。焚香竦瞻。塵慮自消。丙辰秋。後孫監察翰龍氏。移奉于道州之日谷。粤四年庚申。諸宗人閣而妥之。監察之子相秀。要余記其事。余問之曰。先生大賢也。海印巨刹也。子之先人。亡國之一孤臣也。彼諸僧何所畏於孤臣。讓寺中第一眞幀而使之輿歸乎。相秀曰。唯唯否否。先人自庚戌以來。屢有書于督府。屢拘幽于酋獄。僧或義之。而俾有以盡其追遠之誠者歟。余又問曰。先生嗜山水。生死不離名區。一朝就遠
孫之養。而捨伽倻形勝。眞或無不悅色耶。若然。有一道焉。峯曰吹篴。瀨曰吟風。臺曰遊仙。皆先生所愛而在海印洞口。須摹揭閣壁。且須收聚四六集,桂苑筆耕,經學隊仗及文集三十卷。藏于閣中。使諸子孫及後進之來拜者。知先生爲學之方。然後方能知先生所嗜不專在於山水也。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