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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문예바다 신인상 수상 작가들 |
여행 갈래요?
이성숙
#1
봄바람이 따사로웠다. 그녀는 이중으로 되어 있는 작업실 안쪽 문을 열었다. 바깥쪽 철제문은 햇살과 바람이 출입하도록 격자로 구멍이 나 있지만 낯선 사람의 방문을 차단하도록 안으로는 잠겨 있었다. 문이 열리자 차지 않은 바람이 밤새 갇혀 있던 작업실 안 공기를 밀어냈다.
커피 캡슐을 골라 머신에 넣고 뚜껑을 닫고 돌아서는데 작업실 안으로 길게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덕수였다. 작업실 위치를 알려 준 기억이 없는데 덕수가 거기 서 있었다.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영인은 어떻게 작업실을 알아냈는지 묻지도 않고 모자이크처럼 구멍 뚫린 흰 외문을 열었다. 마파람이 몰려와 영인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훑으며 지났다. 그 뒤로 휘파람소리처럼 덕수가 따라 들어왔다. 덕수의 등 뒤로 햇살이 부딪쳤다 바닥으로 흩어졌다.
뉴욕에서 순전히 우연으로 만나 식사하고 헤어진 후 덕수에게서 전화가 한 차례 걸려 왔지만 영인이 주목해야 할 만한 건 없었다. 느닷없는 방문에 당혹스러워하는 영인에게 그는 대뜸, 여행 갈래요? 했다. ‘여행 갈래요’는 영인에게 ‘사랑할래요’와 같은 뜻임을 덕수가 알 리 없었다. 뉴올리언스, 가고 싶어 하셨잖아요. 아직 안 갔을 거 같아서…….
덕수와는 마운틴 볼디에서 3개월을 같이 지냈다. 영인이 암 수술 후 찾아간 요양원에 그는 간호사였고 충직하게 영인을 돌봐 주었다. 영인이 볼디 마운틴의 가을을 떠올리고 있는데 덕수가 다 내려와 식어 가는 커피를 영인에게 갖다주었다. 이 남자는 영인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나 보다. 커피, 식혀 마시잖아요. 영인은 막 내린 커피보다 식은 커피를 선호했다. 영인은 특별히 열정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사물이나 음식이나, 또는 관계에 있어 온기는 미지근한 걸로 족하다고 여겼다. 덕수의 손바닥에 놓인 커피잔을 영인이 집어 들었다. 모든 남녀 사이에는 두 사람이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순식간에 어떤 법률 같은 질서가 성립한다. 영인을 대하는 덕수의 몸짓에는 복종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아뇨. 방금 영인이 건넨 단어와 그 단어보다 먼저 덕수에게 가닿은 시선 속에는 강한 질문이 담겼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의 반경 안에서 서성이는 이 남자에게 연민이 드는 영인이었다. 뉴올리언스요……? 생각해 볼게요. 마음에 없는 말이 혀끝에서 만들어졌다. 언제 가시게요? 아무 때라도요. 덕수가 영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떨군 채 몸을 돌려세웠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영인은 컴퓨터 모니터를 끄고 책상에 흩어진 인쇄용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등지고 선 덕수의 뒷모습이 보였다. 작고 단단한 어깨를 가진 그는 영인이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태세지만 그와 함께 뉴올리언스에 갈 맘은 일지 않는 영인이었다.
뉴올리언스는 태오와 함께 가기로 한 여행지였다. 시간이 뒤엉켜 버린 후 영원처럼 막연하게 기억 속에 저장되어 버린 도시지만 뉴올리언스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의 지평으로부터 기억되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태오와 영인은 서로 다른 시간 속에 놓인 사람들처럼 같은 공간을 언제나 조금씩 다른 시간에 다녀가곤 했다. 자신의 시간 위에 새겨지지 않는 태오, 영인은 그때마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곤 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덕수의 대답은 간결하나 그의 가슴속으로 한 줄기 통증이 지나갔다. 자신에게 머물 일 없는 영인임을 모르지 않는데도 통증은 잊지 않고 찾아왔다. 오발로 과녁을 맞힌 사수처럼 덕수는 갤러리에서 영인을 만난 후 우연이라는 운명에 감사했을 뿐이었다. 탈진한 영인을 업고 병동으로 뛰던 덕수였다. 요양원 바깥에서 그녀를 만날 상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덕수 혼자만의 상상이고 희망이었다. 멀리서, 그녀를 카메라 앵글로만 들여다보던 덕수를 영인이 알 리 없었다. 자신의 진실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투명한 꽃잎 같은 영인을 보면서 밤마다 앓아누웠던 덕수를. 영인의 작업실을 나서며 덕수가 뒤로 손을 흔들었다.
스치듯 덕수가 떠난 후 3개월이 지났다. 사람 사이에 정이 드는 건 만남의 횟수가 아니라 농도다. 덕수가 떠난 자리는 영인에게 새로운 허공을 만들었다.
차고 셔터가 고장 나서 작동을 멈춘 지 한 달이 넘었다. 영인의 집, 70년이 다 된 주택은 종종 예고 없이 사고를 냈다. 차고 셔터가 멈춰 버리자 자동차도 그 안에 멈추고 영인의 외출은 마비되었다. 어찌어찌하여 수동으로 셔터를 들어올리기는 하지만 차를 밖에 내놓은 후, 하이힐을 신고 무거운 셔터를 내려 닫고 다시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일은 영인을 지치게 했다. 외출이 전쟁이었다. 철물점에 들러 건전지를 갈아도 여전히 셔터는 꿈쩍 않고 있었다. 철물점 직원은 여러 차례 리모컨 모델이 바뀌었으니 셔터를 교체하는 게 좋겠다는 기막힌 말만 했다. 셔터는 방치되고 영인은 수동으로 차고 셔터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중이었다. 다시 셔터 전문 수리기사를 부르니 제작회사에 전화를 걸어 같은 리모컨을 주문해 주었다. 주문한 건전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스프링클러가 고장 났다. 정원을 흘러넘친 물이 집 앞 도로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시에서 경고가 오기 전에 스프링클러를 고쳐야 했다.
영인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덕수를 떠올렸다.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을 집어 들면서 영인은 시계로 눈길을 보냈다. 오후 5시. 덕수가 암실 작업을 마친다고 알려 준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여행 갈래요?
영인의 목소리를 확인한 덕수는 수화기를 들자마자,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건네는 인사말 따위를 건너뛰며, 여행 갈래요? 했다. 영인은 여행 갈래요, 하는 덕수의 목소리가 톤을 높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관계를 재정비하고 싶거나 자신의 감정이 변한 걸 알리고 싶을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음성을 높인다. 덕수의 음성은 들떠 있었다. 영인이 뉴올리언스 여행을 거절한다고 해도 상처받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말하던 중 30초쯤 말을 멈추고 먼 산을 봐야 했던, 911테러 희생자 추모 연설을 하던 오바마같이 영인은 잠시 얼어붙었다. 여행 가요, 같이. 대답이 없자 다시 한번 덕수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간호사처럼 조심스런 억양이나 이번에는 남자들의 집요함이 묻어 있는 말투였다. 생각해 보겠다 하셔서요. 영인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사랑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을까…….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자신의 반경 안에서 서성이는 덕수에게 문득 연민이 드는 영인이었다.
#2
아이들이 왁자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캠프, 태오와 영인은 같은 조였다. 태오는 큰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내성적인 성품이었지만 반장으로서 앞에 나설 때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다. 감정기복이 심한 영인과 달리 태오는 몹시 안정되어 보였다. 너 좀 귀엽다? 쉬는 시간 대열을 빠져나가며 태오가 싱긋 웃었다. 영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건 나한테 하는 말? 영인도 웃음이 났다.
40명의 아이들은 빨갛게 타오르는 장작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서로 손을 잡고 섰다. 원을 그리며 돌면서 사회자의 설명을 듣고 도시 이름을 맞추는 게임이었다. 원의 안쪽에는 선물꾸러미가 쌓여 있고, 답을 맞히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집어 왔다.
재즈의 고향은?
뉴올리언스!
태오가 영인과 맞잡은 손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태오는 뛰쳐나가서 빨간색 로고가 새겨진 나이키운동화를 집어 오더니 운동화를 영인에게 건네며 웃어 보였다. 내 발은 너무 커서 안 맞아. 멀뚱히 태오를 쳐다보는 영인에게 태오는 한 번 더 말했다. 여행 갈래? …뉴올리언스……. 공부만 할 줄 알았지 외설스런 구석이라곤 없던 태오에게서 그런 말을 듣다니, 영인은 뭐? 라고 반문하면서도 마음이 분홍빛으로 설레었다. 그날 이후 ‘여행 갈래?’는 영인의 가슴에 화석이 되었고, 이따금씩 태오 목소리에 실려 되살아나곤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여행 갈래?’ 하는 말을 들으면 영인은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었다.
사랑은 은유다. 한 남자가 신기루처럼 자율신경계를 점령하는 순간 사랑이 시작된다. 주말이면 태오와 영인은 명동에 있는 찻집 가무에서 만났다.
함박눈이 내렸다. 가무의 문을 밀고 들어서자 난로의 열기가 얼굴로 끼쳐 와 태오 안경에 뽀얗게 수증기를 만들었다. 태오가 장난기 있게 손을 허공에 저으며 자리를 찾았다. 볕이 드는 창가에 영인과 태오는 서로를 바라보며 하얗게 웃음을 만들었다. 모든 사랑이 비극임을 알 리 없던 때였다. 세상은 아름답고 끝없는 가능성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참을 웃고 난 후 안경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태오가 코트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얼굴에는 개구쟁이 같은 웃음이 떠 있었다. 털실로 머리칼을 만든, 얼굴이 하얀 마론 인형이었다.
너를 닮아서. 이 머리카락 좀 봐봐. 귀엽지 않아?
태오는 곱슬이 심한 영인의 머리칼을 좋아했다. 졸업을 앞둔 태오와 영인은 어른스럽게 커피를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주말의 명동은 언제나 붐볐다.
여행 갈래? 졸업하고 대학생 되면 기념으로 말야.
어디로?
뉴올리언스.
사람이 많은 틈을 헤쳐 가며 태오가 말없이 뒤로 손을 내밀었다. 영인이 그의 손을 잡았다.
영인이 마론 인형을 무릎에 올려 두고 그의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태오가 자신의 머리칼을 만질 때처럼 영인은 인형의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손가락에 감았다 풀기를 몇 번이나 했다. 영인은 기어이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열어 액정에 태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여러 번 간 후에 태오가 나타났다.
너니?
그의 목소리는 평이하고 덤덤했다. 태오는 영인아, 하는 대신 너니? 하고 물었다. 그것은 전화 왜 했어? 하는 물음이었다. 하지 말아야 할 곳에 전화했다는 핀잔 같기도 했다.
나 다음 주에 서울 가.
수화기 너머 태오는 전화를 끊은 것처럼 답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아메리칸 에어라인 승무원이 된 영인은 비행기가 인천에 들어오면 며칠씩 머물다 다시 떠나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태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으면 태오는 달려왔다. ‘태오 약국’은 자주 며칠씩 예고 없이 문을 닫았다. 서울에서, 강릉에서, 뉴욕에서, 불규칙하고 위태로운 밀회가 지속되었다.
태오는 약국 문을 닫고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서울 영인이 묵는 호텔까지 3시간을 운전한 태오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호텔 방에 들어서려던 태오가 멈칫했다. 영인이 속옷 차림으로 문을 열기 때문이었다.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태오를 영인이 잡아끌었다. 태오는 방 안 공기에 숨이 막혔다. 더 이상 영인을 안고 싶지 않은 태오였다. 방 안에 들어선 태오는 영인을 침대에 앉히고 자신은 출입문 앞에 와 섰다. 곧 돌아서 나갈 태세였다. 영인이 왜 이토록 변했는지 태오는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영인은 부적절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심한 곱슬머리를 주체치 못해 머리를 자주 쓸어 올리던 수줍음 곧잘 타는 소녀였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알게 된 태오였다.
방 가운데 우뚝 서 있는 태오를 영인이 끌어당겼다. 옷 입어. 태오는 목에 모래가 걸린 듯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태오야 우리 여행 가자. 뉴올리언스 가자. 그녀는 취해 있었다. 영인은 태오를 만날 때마다 늘 어느 정도 취한 상태였다. 태오가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그날 이후 영인은 맨 정신으로 태오를 보기 두려운 것이었다. 오직 태오 앞에서만은 무방비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태오는 그런 영인을 용인하지 않았다. 영인은 그런 태오를, 태오답다고 생각했다.
나 결혼했어.
태오가 무슨 선언을 하듯 말했다. 태오의 결혼 소식은 영인도 들었다. 그 사실을 태오의 입을 통해 듣고 싶지는 않았는데……. 영인이 곱슬머리를 흔들며 다시 졸랐다.
뉴올리언스 재즈 바에서 와인 마시고 싶어. 너랑. 그리구, 재즈 바에서 우리 춤도 추자, 응? 너 뉴올리언스 좋아하잖아, 응?
태오는 영인을 떼어 놓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영인이 침대 옆에 놓인 보드카를 병째 집어삼켰다. 화끈한 열기가 영인의 목구멍과 식도를 타고 내렸다. 영인의 눈가에 투명한 액체가 우렁우렁 고였다 떨어졌다.
대학 졸업 후 태오는 결혼을 했고 아들도 두었다. 결혼 후 그가 먼저 전화를 걸어 오는 일은 없었다. 영인은 태오의 결혼생활을 의식하면서도 휴대폰을 열어 태오를 찾았다.
…….
태오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만 있었다.
태오야!
대학교 4학년 때, 너 뉴욕에 있을 때…… 편지를 보냈었어. 너와 뉴올리언스에 가고 싶었었지. 한 달이 지난 후에 편지가 돌아왔어. 주소불명이라고……. 내가 얼마나 네 소식을 기다렸는지 알아? 난 이제 네게 뭘 해 줄 수가 없어. 지금 와서 어쩌라는 거니…….
영인은 휴대폰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반대편 팔을 쓰다듬었다. 순식간에 온몸을 타고 오르는 냉기를 밀어낼 다른 방법이 없었다.
넌 내 첫사랑이었다, 영인아.
태오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툭. 휴대폰을 떨어뜨린 영인은 하얀 침대시트 위에 정물처럼 동그마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암만 커다란 돌을 던진대도 호수에 인 파문은 이내 가라앉아 제자리로 돌아간다. 영인이 태오를 향해 던지는 돌팔매는 호수의 파문보다 빠르게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영인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약국에 전화벨이 울렸다. 영인의 음성이 느릿하게 건너왔다.
태오야, 할 말이 있어.
……
나… 너의 첫사랑이었고, 너의 애인도 되어 봤고, 너의 정부도 되어 봤어. 나 이제 니 와이프…… 해 보고 싶어.
태오는 종잡을 수 없는 영인이라 생각하며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금속성 통화 종결음이 영인의 귀에 차가움을 안겼다.
태오가 약국을 접고 딘딘제약 뉴욕 지사장으로 있을 때였다. 한쪽에는 사진작가 김아타의 작품전이 열리는 갤러리가 있었고, 그 옆에서는 필름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태오는 독립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몰랐지만 그때 앞자리에 영인과, 그녀의 옆으로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둘은 꽤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인생에는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은 대부분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 있기 일쑤다. 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운명이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태오에게 영인은 자신의 체중만으로는 지탱하기 어려운 무거운 옷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주택가 골목길에서 문득 마주치는 예기치 못한 사람처럼 태오의 인생에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영인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의 샘물 같다가도, 갑자기 볼륨을 높이는, 비트가 강한 재즈의 한 소절처럼 당황스럽기도 했다.
가무에는 영인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김아타의 사진작품들을 떠올리며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고 있었다. 사물만 남은 도시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덕수도 태오도 결국 사라질 것이다. 빨리 움직이는 것일수록 빨리 사라진다고 했다. 빠르게 타오른 불꽃은 빨리 식는다.
카페 가무의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영인은 사라지고 말 것들에게 연민을 느끼며 천천히 거리를 내려다봤다. 열정도 걷잡을 수 없는 환희도 결국 하얗게 사멸할 것이었다. 태오도 덕수도 Q도….
#3
덕수를 다시 만난 건 뉴욕의 현대미술작가전에서였다. 한인 사진작가 김아타의 작품을 보기 위해 찾아간 뉴욕의 작은 갤러리에서 영인은 5년 만에 처음 덕수와 마주쳤다. 영인은 하마터면 그를 못 알아볼 뻔했다.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말을 걸어 온 건 덕수였다. 그는 운동화 차림에 헐렁한 배낭을 메고 긴 머리를 말총처럼 묶고 있었다. 반듯한 가리마에 앞머리를 살짝 세워 멋을 낸, 소년처럼 앳되어 보이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머리칼엔 흰 머리도 보기 좋게 섞여 있었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괭이나 삽 같은 걸 들고 있거나, 셔츠 주머니에 칼슘을 넣고 영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덕수가 아니어서 영인은 깜짝 놀랐다. 영인을 알아본 덕수가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영인은 그의 선한 웃음에서 5년 전의 그를 떠올렸다. 그는 잘 훈련된 복사처럼 늘 영인의 곁을 지켜 주었었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다 괜찮으신 거죠?
그는 벌써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덕수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뭇 달라진 덕수를 바라보며 영인도 밝게 웃었다.
걱정 많이 했어요. 그때.
영인이 요양원을 떠난 후 덕수도 간호사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는 집 근처의 칼리지에 다녔고 사진작가로 변신했다며 자신의 근황을 늘어놓았다.
영인은 덕수와 함께 김아타의 작품 앞에 서 있었다. 갤러리에는 키스와 섹스 두 작품만 나란히 걸려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빠르게 소멸한다는 김아타의 작품은 관념을 시각화해서 보여 주고 있었다. 덕수는 작품 사이에 서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결국 혼자 남겠죠? …그러다 사라지는 것이겠죠.
덕수는 영인을 향한 자신의 욕망도 결국 무로 돌아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해탈한 눈빛이 되었다. 벽을 따라 걷던 영인이 앞서 갤러리를 나섰다. 갤러리 옆으로는 필름페스티벌이 마지막 날 행사를 하고 있었다. 한낮의 햇살 아래 놓인 초록 잔디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영인은 좋은 예감을 선물하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관객들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독립영화 한 편이 곧 상영될 거라는 안내원의 말을 듣고 영인과 덕수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병든 엄마가 죽음을 무서워할까 봐 마중 나온 아이의 영혼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덕수가 떠들썩하니 잘 만든 영화라고 칭찬을 하자 영인이 가볍게 맞장구를 쳤다. 밖으로 나온 덕수가 김 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관장은 갤러리 겸 액자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덕수의 친구였다. 요양원에 있을 때 영인도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김 관장이 오버하는 목소리로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덕수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갤러리에서 영인을 만났다고, 김 관장에게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덕수가 말하다 말고 자신의 휴대폰을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세 사람은 전화기를 테이블에 놓고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즉석에서 식사 약속이 잡혔다.
뉴저지 코리아타운 안에 있는 김 관장의 갤러리까지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전통 한국식 조각기법으로 목공예 조각을 하는 김 관장의 가게에는 손님이 연이어 들어왔다. 사람이 좋고 투박한 까닭이리라. 당채와 석채를 섞어 색을 입힌 일월산수도가 입구에 펼쳐져 있었다. 요즘 보기 어려운 대작이고 수작이었다.
백인 아주머니가 고등학생 아이의 작품을 들고 와서 액자를 주문했다. 갤러리 뒤편의 목공소는 흩어진 공구들만큼이나 분주해 보였다. 돈 계산이 밝은 김 관장 부인이 이리저리 손님을 안내하며 액자 가격을 설명하느라 공을 들이고 있었다.
보쌈집에 김 관장과 부인 캘리, 덕수, 그리고 영인이 둘러앉았다. 영인은 고장 난 스프링클러 때문에 머리가 좀 복잡했지만 갑작스레 만들어진 모임이 싫지 않았다. 그녀는 모처럼 느끼는 따사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영인은 덕수의 시선을 느끼면서 맥주를 홀짝거렸다. 덕수가 파전을 영인의 접시에 놓아 주고 영인의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덕수의 손등은 햇볕에 그을려 갈색을 띠고 있었다. 식탁 밑으로 덕수의 구둣발이 영인에게 부딪혀 왔다. 영인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덕수의 눈길에 부딪혀 1초쯤 숨이 멎는 듯했다.
늘 도사리던 외로움, 영인은 덕수를 만나면서 자신의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문득 덕수 앞에 자신을 방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4
싱가포르 콩코드호텔 중식당은 저녁식사를 즐기는 손님들로 붐볐다. 입구를 조금 비껴난 곳 테이블에 태오 가족이 둘러앉아 있었다. 잦은 출장과 영인의 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태오가 아내에게 제안하여 여행을 떠나왔다. 음식이 나오고 식사가 시작될 때였다. 태오의 시선이 한곳에 정지되었다. 태오가 앉은 곳에서는 콩코드호텔 중앙홀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가 정면으로 보였다. 사람이 많지 않은 에스컬레이터에 영인과 나란히 젊은 남자가 타고 있었다. 얼굴을 가까이 두고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은 더없이 다정해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미끄러져 바닥에 닿을 때까지 태오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남녀가 결합하기 위해서는 연분緣份이 닿아야 한다. 연분이 이어짐과 자기 몫이란 뜻의 글자가 합쳐진 말이고 보면, 태오와 영인 사이에는 이어짐이 있을 뿐 서로 상대방을 차지할 만한 ‘몫’이란 게 처음부터 없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은 문득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마주치기는 하나 그때마다 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바람이 심하던 날, 새로 나온 007 시리즈를 보기 위해 종로의 단성사 앞에 줄을 섰을 때도 태오는 영인이 누군가와 함께 극장에 들어서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5
덕수가 뉴올리언스에서 사진을 보내왔다. 다시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쉬지 않고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덕수는 자신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카뮈는 그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언제나 다시 굴러떨어질 자신의 운명을 향해 다시 돌아서는 시시포스를 반항하는 인간의 당당한 자세라 했다. 중심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컴퍼스처럼 영인으로부터 덕수는 딱 그만한 거리에 있었다.
#6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대만 유학길에 올랐다. 영인이 속한 어학관은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었다. 산에는 오목한 분지가 있었는데, 오전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뽑아 들고 곧잘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영인 혼자 산길을 걷고 있었다. 산에는 진달래가 분홍빛 향을 발산하고 있었고 졸음에 겨운 봄 햇살은 희미한 그림자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을 영인이 알 리 없었다. 그녀가 분지로 들어서려는 순간 진달래 더미에서 검은 물체가 뛰쳐나오더니 영인의 몸을 덮쳤다. 아귀가 거친 손이 영인의 몸에 걸쳐진 얇은 시폰 원피스를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조각난 꽃무늬 원피스는 햇살 아래서 힘없이 펄럭였고 그녀는 파헤쳐졌다. 한 명, 두 명, 세 명, 검은 띠로 영인의 입을 틀어막은 그들은 돌아가며 그녀의 몸을 짓이기더니 햇살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곳은 진달래 동산을 비낀, 낙엽이 수북한 덤불 위였다. 맨몸으로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방 안으로 숨었다.
영인은 한낮의 햇살을 혐오했다. 그가 제 몫을 다하기만 했어도 한낮에 육신을 갈취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햇살이 목격자 진술에 동행만 했어도 영인 자신이 그리 무참히 짓밟히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태오에게서 편지가 왔다. 검정 볼펜으로 써 내린 편지는 그의 모습만큼이나 단정하고 반듯했다. 세 번째 태오의 편지에는 연락도 없이 사라진 영인에 대한 서운함이 들어찼다. 태오의 네 번째 편지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여행 갈래?’ 하던 태오의 목소리가 아직 생생한 때에 그의 결혼소식이 들려왔다. 고즈넉한 공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영인의 텅 빈 동공에 물기가 차올랐다.
텔레비전을 켰다. 저녁 뉴스를 예고하는 화면에 진달래가 만발해 있었다. 영인은 실성한 사람처럼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바깥 날씨는 28℃. 가볍게 입어도 좋을 날씨지만 영인은 바지를 두툼하게 껴입고 윗도리에도 내복과 셔츠를 겹겹이 걸쳤다. 그녀는 담배와 성냥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학교는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였다. 그녀는 진달래 분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날처럼, 진달래는 태연하게 몸을 흔들며 향기를 뿜고 있었고 햇살은 그림자를 길게 늘인 채 하품만 하고 있었다. 영인은 라이터 불을 켠 후 진달래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그것은 복수였다. 진달래 덤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검은 연기는 햇살을 향해 꼬리를 세웠다. 햇살이 불꽃에 일그러졌다. 영인의 깊은 곳에서 굉음 같은 웃음이 산산이 터졌다. 오랫동안 영인을 괴롭히던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Q는 엄마의 소개로 만난 남자였다. 그는 광폭하지 않았지만 영인에게 무심했다.
그는 새벽 6시가 되면 마라톤 복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마라톤은 그의 오전 일과였다. 일요일에는 등산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가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야 돌아왔다. 그는 한동안은 수영에, 다시 한동안은 테니스에 빠졌다. Q는 한 가지를 시작하면 적당히 취미 삼아 하는 게 아니고 선수 버금가는 실력을 갖출 때까지 빠져들었다.
휴일 오전을 운동으로 채운 Q는 동호회원들과 점심을 한 후 집에 들어왔다. 집에 돌아온 그는 샤워를 한 후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일본어 공부에 열중했다. S기업의 컴퓨터 엔지니어인 그는 일본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은 상태였다. Q의 삶에 영인은 없었다. 그의 인생이 진화를 거듭할수록 영인은 방치되었다. 날이 갈수록 영인의 외로움은 커 갔다. Q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오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녀의 의지는 반영되지 않은 채 엄마의 희망으로 성사된 결혼이었다. Q는 영인에게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무미한 결혼생활 탈출구로 영인은 아메리칸 에어라인 승무원이 되었고, 매주 한 차례씩 인천과 뉴욕을 오갔다. 비행기가 뉴욕을 향할 때마다 ‘여행 갈래?’ 하던 태오의 목소리가 끈질기게 그녀를 따라왔다.
날이 밝으면 영인은 뉴욕으로 떠난다. 비행을 시작한 후 Q는 그녀를 잊은 듯 연락이 없었다. 지루함을 안기는 덕수, 사랑을 꼬리연처럼 매달고 자기 안으로 사라진 태오. 모름지기 그들의 행태도 정당했다. 영인은 그들을 떠나기로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살던 집을 Q가 처리할 수 있도록 동의서에 서명하여 그의 책상에 올려 두었다.
연극이 장면전환을 위해 암전을 사용하듯 영인은 자신의 부조리한 삶이 암전되길 바랐다. 명민하게 살아 있기 위해서는 장면전환이 절실했다. 태오 덕수 Q, 그들은 더 이상 영인의 삶에 감동을 선물하지 않을 것이므로.
큰 별의 마지막 사멸과정에서 중력으로 인해 붕괴하며 탄생하는 것이 항성블랙홀이다.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이지만 예리하게 빠져나가는 섬광 한 줄기를 막지는 못한다. 섬광은 어느 곳에 떨어져 또다시 우주생명의 기원이 된다. 세상에 이보다 선명한 희망이 어디 있으랴.
영인이 탄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붉게 핀 진달래 꽃잎이 대지에 흩날렸다.
이성숙 | 2019년 『한국산문』으로 수필, 2022년 『문예바다』 신인상 소설 당선. 저서 수필집 『고인 물도 일렁인다』 『보라와 탱고를』, 아포리즘 『인식의 깊이, 삶의 너비』, 공저 『길 위에 길을 내다』(위인 평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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