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북정맥 금자산 줌인
▲벌목능선 따라 올라 좌측으로 꺾어가고.
▲소방무선통신국에서 바라본 분기점
▲무선시설이 있는 440봉에서 통신탑 옆 좌측으로 꺾어 내려선다.
▲인조바위공용기
지국
▲면암 최익현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이항로의 제자이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가범리(嘉范里)에서 대(岱)의 둘재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찬겸(贊謙)이며 호(號)는 면암(勉庵)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이라고 하였다. 면암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때 단양(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때에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 되어, 우국애민(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明經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화서 이항로 계열의 위정척사였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王道政治)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철종 재위 중인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근무했다. 그는 언관 벼슬에 주로 있으면서 일찌감치 조선조 사림의 최대 미덕인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여 관직을 빼앗기기도 했다. 어려서 아버지의 도움으로 즉위한 고종이 성인이 되면서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여기에는 부인인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척족 세력들이 가담했다. 대원군을 비판했던 최익현은 동부승지로 기용되어 반 흥선대원군파의 첨병에 서게된다.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는 등 그를 공격하여 결국 대원군을 실각시켰다. 그는 임금의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형벌을 받았으나 이는 실권을 잡은 민씨 세력의 형식적인 처벌이었다. 그러나 최익현은 곧 외국과의 통상을 논의하기 시작한 민씨 정권과도 곧 마찰을 빚었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극렬 반대하다가 이번에는 흑산도에 위리안치된 것이다. 이후로 통상 확대와 여러 외세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최익현은 이에 결사 저항하는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과 그해 친일 정권 성립과 함께 단행된 갑오개혁에 크게 반발했고, 이듬해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었다. 이 당시 그가 상소를 올리며 적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는 말은 강제적 단발령에 목숨을 걸고 반발했던 당시 유학자들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시작하였으나,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을 하였다. 하지만, 단식의 후유증으로 3개월 뒤의 발병으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2]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관음리에 있으며, 문집으로는 《면암집》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 동상앞에서 내려다 본 칠갑광장과 한티고개
▲한티고개를 지나 칠갑산까지는 도로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