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보루해설판에서 용마산 5보루 헬기장을 뒤돌아본다.
▲우측 용마산을 바라본다.
▲H-3지점갈림길: 이곳에서 중랑(수락)) 지맥은 이정표에서 좌측 아차산으로 가야 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용마산을 안보고 갈 수 없어 500m정도 떨어진 용마산으로 향한다. 아차산, 용마산은 난생 처음으로 와보는 곳이다.
▲우측 용마산으로 간다.
▲용마산제3헬기장 용마산등산안내도, 용마산4보루를 지나
▲용마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둔덕을 넘고 암반 구간을 내려간다.
▲용마산 정상 직진에 있는 체육시설이 나오고 데크계단으로 올라간다.
▲용마산(龍馬山:348m):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과 중곡동에 걸쳐 있는 산이며, 높이는 348m이고 장군봉 이라고도 한다. 아차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아차산과 함께 백두대 간에서 갈라나온 한북정맥의 끝을 이룬다. 예전에는 아차산을 포함해 남행산 이라고도 불렀 다. 예로부터 중랑천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해 만든 소규모 요새지인 보루 유적이 있다. 197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가 아차산과 용 마봉 일대에 아차산공원,·용마공원,·용마돌산공원 등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였다. 산에는 아기장수 전설이 전해지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가 태어나면 가족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였던 이곳에서 장사가 될 재목의 아 기가 태어났는데, 걱정하던 부모가 아기를 죽여 버렸으며 그 뒤 용마봉에서 용마가 나와 다 른 곳으로 날아간 데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조선시대 산 아래에 말 목장이 많아 용마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정상석 뒤 전국에189개가 있다는 1등 삼각점이 설치 되어 있다.
용마산 정상석 뒤편에 용마봉 (348.6m △성동11) 대삼각본점(1등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으며, 종전지도에는 ‘용마산’이라 표기 되었는데 2016년 onMap 지도에 ‘용마봉’으로 표기되어 정상석도 용마봉이라 적혀있다.
▲용마봉에서 318.5m봉 헬기장으로 되돌아간다.
▲헬기장갈림기로 오르지 않고 우측 우회길로 진행한다.
▲가야 할 285.5m봉(아차산 4보루) - 295.7m봉(아차산3보루)를 바라본다
▲긴고랑 갈림길: 긴고랑길은 용마봉에서 내려오는 골짜기가 길어서 긴골・진골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용마봉과 아차산 사이의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다.
▲우측은 테크계단은 긴고랑 하산길이고 좌측은 구리시 아치울로 내려가는 길이다.
▲수락지맥길은 아차산4보루 쪽으로 향한다.
▲직진하여 올라서니 41번송전탑이 나오고
▲다시 이어지는 데크계단으로 아차산 4보루로 올라간다.
▲좌측 나무계단으로 아차산 4보루로 올라간다.
▲아차산4보루표지판이 보인다. 다른 보루에서는 볼 수없는 성곽처럼 쌓아서 복원을 해 놓았다. 이곳이 아차산정상이란다.
▲아차산일대 보루군[阿且山 一帶 堡壘群]: 서울특별시 광진구·중랑구·노원구 및 경기도 구 리시 일대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유적지. 2004년 10월 27일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보루성이라고도 불리는 보루는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낮은 봉우리에 쌓은 소형 석축산성으 로, 산성에 비해 규모가 작은 군사시설을 말한다.
▲아차산285.5m. 4보루(해설판) 아차산 4보루가 새로 복원되었다. 아차산(阿嵯山:287m): 예전에는 남쪽을 향해 불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이라고도 하 였고, 마을사람들은 아끼산·아키산·에께산·엑끼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경기지(京畿誌)》 '양주조'에 보면 화양사(지금의 영화사)가 악계산(嶽溪山)에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 아차산의 한자 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혼용되는데, 옛 기록 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2가지가 나타나며, 조선시대에 쓰여 진 고려역사책인 《고려사》에는 '아차(峨嵯)'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지역과 용마봉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던 것으 로 추정된다. 특히 이성계의 휘(諱)가 '단(旦)'이기 때문에이 글자를 신성하게 여겨서 '旦'이 들어간 이름은 다른 글자로 고치면서 단(旦)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자로 고쳤는 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씨를 고쳐 썼다고 한다. 그밖에 산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조선 명종 때 점을 잘 치는 것으로 유명한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명종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사형을 명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서 "아차" 하고 사형 중지를 명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홍계관이 죽어버렸고, 이후 사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온달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오는데,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지름 3m짜리 공기돌 바위와 온달샘 등이 있고 아차산성(사적 234)에서 온달이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아차산은 예로부터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려 때는 광나루와 함께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으며, 은석사(銀石寺)·범굴사(梵窟寺)·영화사(永華寺) 등 여러 사찰이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 일대가 목장으로만 개발되어 인가가 드물고 수풀이 무성하였으며, 호랑이, 늑대 같은 많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어 임금의 사냥터로 이용되었다. 근대 이후 산기슭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고, 뛰어난 조망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 의 별장이 세워졌다. 197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가 일대에 아차산공원·용마공원·용마돌산공 원 등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였고, 산자락에 주택가와 쉐라톤워커힐호텔이 들어서 있다. 문화재는 삼국시대에 고구려·백제·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250여 년 동안 각축 을 벌였던 아차산성(사적 234), 아차산 봉수대지(서울기념물 15), 신라 문무왕 12년 의상대 사가 창건한 영화사(永華寺) 등이 있다. 그밖에 고구려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보루 유적이 있고, 대성암 뒤에는 의상대사가 수련을 했던 곳으로 알려진 천연 암굴 외에 석곽 분, 다비터, 강신샘 등 유적이 많다. 구리시 아치울에서는 해마다 온달장군 추모제가 열린 다.
▲아차산(286m) 정상 4보루 전경